
처음에는 좀 당황했습니다. 일본 작가가 쓴 글인데 배경이 대만이에요. 게다가 미스터리 소설이라고 집어들었는데 딱히 미스터리가 나오는 것 같지도 않은 겁니다. 살인사건이 나오긴 한데, 그 범인이 누구이고 그 사건의 여파가 무엇인지 쫓아가지도 않거든요. 그보다는 개인과 가족의 삶에 집중했을 뿐인데 격동의 근현대사를 쫘르르 훑게 되는 역사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이었어요. 하지만 미스터리의 작법에도 꽤나 충실합니다. 분명하게 던져진 힌트들이 있어서 '어? 이 부분?' 싶은 떡밥들이 나중에 차곡차곡 수거돼요.
확실히 한국뿐만 아니라 대만이나 중국 역시 격동과 격변의 근현대사를 보냈다는 걸 읽는 내내 느꼈습니다. 사실 70~80년대의 대만이라고 다 그렇지는 않겠고, 주인공인 예치우성의 집안이나 환경이 좀 더 거칠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완전 사회 하층민 쪽이라기보다는 서민 쪽에 가까운 느낌이고, 시대가 시대인만큼 모두가 폭력과 야만에 익숙한 시대라는 것을 감안하긴 해야겠지만요. 전쟁에 휘말린 말단 병사의 손자가 주인공이니 뭐 대단히 혜택받은 환경이 아닌 건 확실하죠.
대만(국민당)-중국(공산당)이 서로 죽고 죽이는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아무래도 한국전쟁 생각이 안 날 수가 없더라고요. 오늘은 국민당이 쳐들어와서 마을 모두를 죽이고, 그 다음 날은 공산당이 와서 그 복수를 한답시고 민간인들까지 싹 다 쓸어버리고, 딱히 대단한 이념이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적당히 나에게 '먹을 걸 주는' 쪽에 붙어서 그게 그대로 국적과 소속이 되고... 한국에서도 흔하게 벌어진 일이잖아요. 복수가 복수를 낳고, 폭력이 폭력을 부르는 것도 너무 익숙한 얘기라 씁쓸하더라고요.
이 소설 속 문장들이 너무 생생하게 번들거리는 땀방울과, 비릿한 피냄새와, 초조하게 빙글빙글 돌며 기싸움 하는 깡패들과, 시끄러운 시장 골목의 소음을 묘사하고 있어서 감탄했습니다. 어쩜 이렇게 글에서 냄새와 소음이 배어나올 것 같은지! 개인적으로 뒷골목의 거친 마초들의 인생사 같은 건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인데도 굉장히 몰입이 잘 됐어요. 다만 문화 차이? 같은 것 때문에 신기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꽤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의형제'라는 개념은 사실 한국에서는 거의 없잖아요. 의형제의 의형제도 내 형제다! 내 의형제가 부탁했으니 내가 모르는 사람이지만 난 목숨을 걸겠다! 하는 부분은 피부로 와닿고 그런 느낌은 아니었습니다. 뭐랄까, 삼국지에서 도원결의 보듯 좀 신기하게 보게 돼요ㅋㅋㅋ
'나는 사람을 죽일 수 있다' 혹은 '나는 이미 사람을 죽였다'의 시대를 건너온 사람의 이야기를, '너 사람 죽일 수 있어? 그렇게 살거야?'의 시대의 사람이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현재에서 과거를 회상하는 방식의 서술이기 때문에 이미 결말을 아는 거나 다름없는데도, 어떤 부분에서는 일이 잘못될까봐 조마조마하면서 봤어요. 크고 작은 미스터리가 중첩되어 있어서 생각지도 않았던 부분에서 뒤통수 맞게 되는 부분도 여럿 있고, 여러 장르를 다양하게 오가면서 시침 떼는 솜씨도 일품입니다. 나오키상-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일본 서점 대상 한꺼번에 받았다고 하는데 확실히 그럴 만한 작품이에요. 초반에 익숙하지 않은 중국 이름과 관계도를 견딜 수만 있다면, 정말 재미있습니다! 추천이요!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