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커버
아마릴리스 폭스 지음, 최지원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20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서부터 허구인지가 헷갈렸어요. 분명히 장르가 '소설'로 되어 있는데, 소설인 것도 같은데, 읽다보면 소설 속 주인공과 작가 약력에 그려진 인생이 100% 일치해서 소설이 아니라 '회고록'에 가까운 느낌이었거든요. 자서전 같기도 하고..? 하지만 소설이라는 장르를 선택하고 글을 썼으니 아무래도 완전히 현실은 아니겠죠. 상당 부분 각색을 거쳤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니면 CIA에서 출간을 막았을 것 같아요. 예민한 정보 같은 건 있으면 안 되잖아요~


 전체적으로 '나'의 인생을 술회하고 있는데, 그러다보니 CIA에 들어가기 전의 기간도 길어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시작하거든요. 그래서 훨씬 더 자서전이나 회고록에 가까운 느낌이에요. 그런데 대학에 가기 전, 본격적으로 첩보 생활에 뛰어들기 전의 이야기는.. 솔직히 좀 재미가 없었습니다. 작가가 정말 대단히 선하고 용감하고 똑똑하고 남다른 사람인 건 알겠는데, 그걸 자기 입으로 묘사하려는 걸 듣고 있자니 약간 민망하기도 하고요. 뭐, 아주아주 겸손하게 실제보다 축소시켜서 말한 거일지도 모르지만요ㅋㅋㅋ


 처음에 CIA 들어갔을 때, 9.11이 터지면서 단숨에 극우화된 CIA 내부 분위기가 좀 소름이 끼쳤어요. 미국 국민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타국 국민은 죽든지 말든지 알 게 뭐야 하는 태도? 예를 들어 우리나라로 치면 거의 '김 사장님' 정도 되는 흔한 호칭을 근거로 이집트 사람 하나를 납치해 끌고가 고문한 다음, 4개월이 지난 뒤에 '어 테러리스트가 아니었네 야 우리가 풀어줄건데 우리가 했다고 말하지 마라' 하면서 길에 떨궈놓고 가버립니다;;; 그 사람은 평생 고문후유증에 시달리면서 영구적인 장애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데, 제대로 된 사과도 보상도 없어요. 자국민도 아닌 외국인에게 이런 만행을 막 저지른다니까요;;; 주인공이 거기에 대해서 항의를 하니까 이런 대답이 돌아옵니다.


"우리는 무고한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납치하고…."

 팀장이 내 말을 가로막았다. "의회에서 추궁당하고 싶어? 나는 또 다시 9.11이 일어난 다음에 망할 놈의 테러범 한 명을 풀어줬다고 고백하느니, 차라리 무고한 개새끼들을 백 명씩 체포하겠어."

 "거꾸로 된 것 같은데요." 내가 중얼거렸다.

 "뭐라고?" 

 "벤저민 프랭클린의 명언을 인용하신 거잖아요. '무고한 사람 한 명을 고통받게 하느니 죄인 백 명을 놓아주는 게 낫다.'"

 팀장은 나를 무섭게 노려보며 말했다. "그건 미국 시민에 한해서지." - p.148


 정말 소름끼칠 정도로 미국 중심적인 가치관 아닙니까? 미국인이 아니면 인권을 보장받지 못한다는 말처럼 들리잖아요;;; 주인공=화자=작가의 이상주의&인도주의적인 면을 드러내려고 일부러 더 극우적인 면을 부각시킨 것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묘사된 부분만 보면 굉장히 뜨악스럽죠;;; 이것 외에도 회색지대에 있는 사람들, 즉 우리 편도 상대 편도 아닌 사람들에 대해서도 '한 번 쓰레기는 영원한 쓰레기'라는 식으로 대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우리 작전으로 인해서 그 사람들이 죽어도 상관없다 이런? 주인공은 회색지대 인간들을 우리 쪽으로 편입하는 게 장기적으로 훨씬 이득이라고 주장하지만 그 덕에 약간 비웃음 당하기도 하고, 갈등을 빚기도 해요.


 이 책은 CIA의 교육 과정이나 요원 모집 과정 같은 걸 그리기는 하는데, 아주 예민한 부분까지 까발렸다는 느낌은 들지 않습니다. 다만, 자신의 활약(?)을 묘사하는 과정에서 CIA 쪽으로 돌아선 무기상이나 극단적인 종교 테러를 막은 이슬람 쪽 조직의 이야기를 하는데 이게 좀 신경쓰였어요. 만약 책 속에 쓰인 내용이 전부 사실이라면, 이 정보원이나 협상 파트너들은 이 책으로 인해 위험해지는 거 아닌가 싶어서요. 앞서 말했다시피 CIA는 미국 국민이 아닌 사람의 안위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쓰지 않는 느낌이라, 이 책으로 인해 무기상이나 이슬람 조직원이 위험해진다고 해도 별 상관 안 할 것 같거든요. 뭐, 주인공은 그렇지 않은 걸로 묘사되니까 그걸 믿는다면 아마 책을 읽는다 해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정보원 각색을 많이 했겠죠? 제발 그랬으면 좋겠어요.

 

 소설 중에서 가장 인상깊은 부분은, 감옥에 투옥되거나 자신을 숨기고 외국에서 첩보활동을 하거나 테러를 막는 대목이 아닙니다. 오히려 CIA에서 일하게 되면서 주변 그 누구에게도 그 사실을 말하지 못하기 때문에 타인과 일상이 단절되는 삶이라든지, 말할 수 있는 게 적기 때문에 서로에게 어느 정도까지만 허용하게 되는 CIA 내 인간관계라든지, 평생 자기가 아닌 타인으로 꾸미고 살아야 하는 거짓된 삶 속에서 자기를 잃어버리게 되는 정체성 문제라든지 하는 부분이었어요. 오히려 그런 자잘한 고민이 훨씬 더 생생하게 다가오더라고요. 특히 주인공이 CIA를 떠나게 되는 계기 완전 납득 가능! 아이를 데리고 다니면서 작전을 해야 하는데, 작전을 망칠까봐 이런 게 아니라 아이한테 평생 다른 이름에 반응하는 법을 가르치고 거짓에 익숙해지는 법을 가르치고 이런 게 참 못할 짓이다 생각해서 그만두는 그 과정이 구구절절 이해됐어요.


 소설로 보려고 해도 자꾸 회고록처럼 느껴지는 이야기인데 홍보도 약간 그쪽 방향으로 잡은 것 같아서.. 독자로서 좀 혼란스럽네요. 이런 부분까지도 마켓팅인 건지 모르겠지만요ㅋㅋㅋ 작가 이력이 가려진 상태였으면 첩보 소설이라기엔 좀 장르성이 부족하지 않나 했을 텐데, 아예 작가가 CIA 최연소 여성요원 출신이라고 다 깐 상태라서 리얼리티가 보장된, 에세이나 자서전에 가까운 소설이 나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머리싸움이나 심리전 같은 본격 첩보 서사는 아니지만, 첩보원의 소소한 일상이나 고민을 엿보기에는 좋은 소설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