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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살인자에게 무죄를 선고했을까? -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12가지 충격 실화
페르디난트 폰 쉬라크 지음, 이지윤 옮김 / 갤리온 / 2019년 10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사법 시스템에 대해 관심이 굉장히 높은 편인데, 그래서 이 책의 제목에 끌렸습니다. <왜 살인자에게 무죄를 선고했을까?> 언뜻 말도 안 되어 보이는 판결들도 막상 속을 까 뒤집어 보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마련이잖아요. 물론 법조인들이 부패해서 말도 안되는 판결을 내린 케이스는 제외하고요! 여기 쓰여있는 12가지 실화들 역시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그럴 만한 사건들이어서 흥미로웠습니다. 다만 12가지 사건이 전부 살인죄인 건 아니고, 경중이 다른 죄가 몇 가지 섞여있어요.
우리를 보호하는 그 시스템이 가끔 우리를 배신한다
제목에 가장 잘 어울리는 에피소드는 아마 <변호인>일 겁니다. 이 사건은 일단 1) 피고가 법정에 섰습니다. 2) 피고가 실제로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3) 피고는 다른 누구도 아닌 피해자를 살해했습니다 4) 피고의 변호인조차 피고의 유죄를 확신합니다 5) 그럼에도 피고는 무죄를 선고받았습니다. 이 다섯 가지를 모두 만족시키고 있는 유일한 에피소드거든요. 다른 에피소드들은 의외로 한두 요건이 빠져있어요. 살인을 저질렀는데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아 법정에 서지 않았다거나, 저지르지 않은 죄로 법정에 섰다거나 하는 식으로요. <변호인>의 경우 정말 빼도박도 못하는 유죄 피고인, 이 세상에서 사라져야 할 인신매매 강간범 조직 우두머리인데도 결국 무죄를 선고받은 케이스라 보는 내내 탄식이 나왔어요ㅠ 그것도 재판의 절차상 문제 한 부분 때문에요!!!
인신매매 조직을 잡기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확실한 증거도 많지 않고, 증인들은 대개 범인들을 무서워해서 증언을 하지 않아요. 그런 와중에 용기내어 한 여성이 자기 인생을 걸고 증언을 했고, 9회에 걸친 지리멸렬한 공판 끝에 드디어 잡아넣을 기회가 왔는데.. 그런데.. 갑자기 판사가 작은 실수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이 모든 노력이 허사로 돌아가는 겁니다. 그리고 혹시나 다시 증언을 해줄 수 있을까 해서 증인을 찾아봤더니, 증인은 이미 실종된 후고 뒷골목에는 온통 '그녀는 증언하고 나오는 길에 살해당했다'는 소문만 무성한 거죠. 이게 무슨 일입니까.
물론 절차상 문제를 무시하는 게 아닙니다. 사법 절차가 그렇게 정해진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고, 그 때문에 일반 시민들은 대체로 보호받고 있어요. 우리 권리를 행사할 수 있도록 시스템이 그렇게 만들어진 거니까요. 하지만 가끔은 우리를 보호하는 바로 그 시스템이 우리를 배신하기도 합니다. 변호사까지도 유죄라고 확신하고 재판을 맡기 싫어했던 죄인을, 세상 만천하에 다시 풀어주기도 하는 거예요. 그렇게 자유의 몸이 된 악당은 더 똑똑하고 교묘하게 나쁜 짓을 하면서 세상에 해악을 끼칩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법 절차가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 절차가 없으면, 악당들뿐만 아니라 선량한 시민들도 모두 피해를 입게 되는데요? 여기서 우리는 오랜 사법의 고민을 마주합니다. 99명의 악당을 잡아넣기 위해 1명의 무고한 사람을 희생시켜야 하나요?
우리가 언제나 사람을 공정하게 판단할 수 있을까?
1명의 무고한 사람이 정말 1명이기만 하겠냐고,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억울해질 거라고,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알 수 없다고 반박하는 게 <화창한 날>이죠. 여자는 자기 자식를 살해한 죄로 이미 유죄를 선고받고 죄값을 치른 케이스입니다. 하지만 알고보면.. 그녀의 남편이 그녀에게 뒤집어 씌운 거예요. "나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어. 아이가 죽어 있었어! 근데 자기야 알잖아. 나는 전과가 있어. 나는 종신형을 선고받을 거야. 자기는 아마 잠깐만 들어갔다 나오면 될거야. 여자 교도소 나쁘지 않대~" 무슨 이런 호랑말코같은 놈이 있나, 이런 말에 정말로 넘어가는 여자가 있나 싶겠지만, 세상은 요지경이니까요. 아무튼 그녀는 대신 법정에 서게 되고 대신 유죄를 선고받게 됩니다. 하지만 재판 과정에서 그녀는 아이가 잔혹하게 학대되었음을 알게 되고, 결국 출소 후에 다시 남편을 살해하게 되기에 이릅니다.
아이러니한 건, 그녀가 정작 저지르지 않은 죄 때문에 유죄를 판결받았으면서 저지른 죄에 대해서는 무죄를 판결받았다는 겁니다. 이건 법의학자-형사-검사-판사가 무능해서일까요? 글쎄요. 소설 형식으로 씌여져 범인이 그녀라고 독자들이 미리 알 수 있게 그려지지 않았다면, 이 케이스에서 여자의 사연과 정확히 일어난 일을 짚어낼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우리는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고, 증거를 고려해 최대한 일어났음직한 일을 짐작해볼 수 있을 뿐이에요. 거기엔 당연히 오차가 발생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실제와는 다른 판결이 내려질 수 있고, 그걸 막기 위해서 여러가지 절차와 권리가 필요해요.
변호를 받을 권리 같은 경우만 해도 그렇죠. 악당에게 변호인 따위를 붙여주다니, 악당을 변호해야 하다니, 하고 화를 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증거> 같은 케이스를 생각해봐요. 변호인조차도 유죄라고 생각하고 돌파구를 찾지 못했던 사건에서, 뒷골목 폭력배가 지적한 요소 하나 덕분에 억울하게 살인범이 될 뻔한 여자가 결국 무죄로 풀려났잖아요. 실제로 무죄였구요. 시스템은 우리 모두에게 공평하게 적용됩니다. 때론 보호하고, 때론 배신하면서요. 그건 우리가 우리 자체적인 판단으로 무죄인 누군가를 유죄로, 유죄인 누군가를 무죄로 단정지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 때문일 거예요. 그런 편견과 단정으로부터 피고인들을 보호하는 거죠.
소설은 아닌데 소설 형식처럼 씌여 있어서 엄청나게 술술 잘 읽히는 것과 별개로, 하나하나의 케이스에 생각이 많아져요. 어떤 케이스는 다 읽고 나니 책을 덮고 쉬지 않으면 도저히 못 견디겠더라구요. 화가 나기도 하고, 억울한 기분도 들고, 답답하고.. 그렇지만 딱히 답은 보이지 않는 그런 기분이었어요. 우리나라 사법 시스템 역시 독일과 별다르지 않을 텐데, 그 한계와 모순을 극단적인 케이스들도 맛보고 싶은 분들께 추천합니다! 법이란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억울한 사람을 만들지 않을 수 있는지, 죄와 벌이란 게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어주는 멋진 책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