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피해야 하는 일 중의 하나는 상대를 함부로 대상화하는 것이다. 나도 잘 안다. 그러나 문자 그대로 가루가 되어 버린 가자 지구 사진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아니 들 수 없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나? 그럴 군사적, 정치적, 실용적 어떤 이유가 있었나? 이에 대한 적당한 답을 찾지 못한다면 우리는 이윽고 심리학적인 문제로 넘어가게 된다. 이스라엘은 병리적인 상태가 아닐까?


삶은 하나의 여정이다. 처음에 우리는 완전히 무능한 상태로 세계에 던져진다. 그리고 점차 세계와 친밀해지는 과정을 거친다. 모두가 알다시피 이 과정은 변증법적이다. 요약해 말한다면 세계와 친밀해지는 과정은 자신을 알고 자신에 친밀해지는 과정과 동등하다. 동일한 논리로 말하면 세계에 대해 강한 적개심을 갖는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존재에 심각한 불만족을 느낀다는 것이다. 나는 어떤 대상에 대해서든 나 자신의 존재에 대한 불만족 이상의 불만족을 느낄 수 없다.


이 분노의 극한은 무엇일까? 예컨대 살인일까? 아니다. 단순히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것을 넘어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을 지우는 것이다. 그 사람과 관련된 모든 흔적을 지우는 것이다. 그 사람이 살았던 흔적 자체를 지우는 것이다. 이를 다시 변증법적으로 돌아보자. 그래서 결국 무엇을 지우는 것일까? 그것은 곧 나의 존재, 내가 한 행위에 대한 기억을 지우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이스라엘 사회가 스스로의 원죄를 사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이스라엘 건국의 불법성과 폭력성을 사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원죄를 사는 방법에 대한 이스라엘의 선택은 스스로를 파쇼화하는 것이었다. 이 선택이 필연적이지는 않았겠지만 그렇게 될 가능성은 매우 높았을 것이다. 가자 지구의 황폐함 앞에서 나는 이스라엘의 존재의 황폐함, 그 병리적 황폐함을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서방 진영에서라면 이런 프로그램을 방영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서방 언론은 유대인을 가해자로 묘사할 수 없다. 설령 그것이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더라도 말이다. 유대인들에 의해 목숨을 잃은 이란 사람들의 절규와 분노를 그대로 방영할 수도 없다. 그것이 반-유대주의의 '핑계'가 될 수 있고, 그런 사태가 예견되는 데도 그런 장면들을 방영한다면 그 역시 반-유대주의로 몰리게 된다. 예를 들면 BBC는 생방송 뉴스에서 가자 지구 현장 특파원이 이스라엘군의 백린탄 사용을 언급하는 순간 방송을 끊어버렸다. 유대인, 이스라엘, 시온주의 등에 대한 언급은 그냥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그것은 서방 사회에서 하나의 굳건한 터부가 되었다. 


유대인들은 어떤 특정한 행동이 토라에 맞는지 안맞는지를 결정할 허다한 논리들을 개발해내었고 그런 판례들을 엄청나게 쌓아놓고 있다. 조선 시대에 간혹 문제가 되었던, 왕이 상복을 몇 년 입어야 하는가 등의 문제는 그저 애교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런 쓸데없이 정교한 이론화와 문제화가 유대인이 존재하는 곳에는 항상 따라 다닌다. 대표적으로, 이스라엘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는 것이 반-유대주의에 속하는가?


현대의 사상가들은 대상화, 소외, 정체성 등에 관한 어머어마하게 복잡한 이론들을 개발해내었다. 아마 하이데거같은 사람이라면 학문의 유대화라 불렀음직한 현상이다. 이런 복잡한 이론들을 전적으로 쓸모없는 것이라고 매도할 수는 없다. 분명 그렇다. 그것은 어머어마하게 복잡한 현대 사회를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체성과 관련된 복잡한 이론들이 비싼 비용을 들여 개발되고 있는 동안, 한쪽에서는 너무도 명백한 소외의 현상들이 외면되고 있다. "가자 지구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긴급 음식 구조를 제공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이스라엘의 젊은 여성은 이렇게 대답한다. "아니요. 그들은 그런 가치가 없는 사람들이니까요." 그들은 사람으로 헤아릴 필요가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즉, sub-human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반박하는데 무슨 정교한 철학이 필요한가? 조심하라. 서구에서는 그러한 반박이 가능한지를 조사하기 위한 정교한 철학이 필요하다. 그것이 유대인과 관련되는 한에서 말이다. 이쯤에서 서구 철학에 조종을 쳐주는 것이 적당할 것이다. 


서구 문명에 있어 이 유대인 문제는 참으로 답이 없다. 온갖 것들이 긴 역사를 두고 온갖 것들과 엮여 있어 문제를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알 수 없다. 게다가 그것은 커다란 파급력을 갖는다. 예컨대, 이번 미국-이스라엘의 이란 침공의 경우가 그렇다. 그것은 유가를 올리고 주가를 떨어뜨린다. 제국주의 시절 영국의 이권 문제, 미국의 패권 문제 등이 하부 구조를 형성하고 있어서 인류는 지질학적 연대를 살듯 이 시대를 살 수 밖에 없다. 


이 유대인 문제는 서구 문명에 있어 커다란 위기를 구성한다. 나는 몇 년 전 로저 워터스의 공연을 보러 미국 뉴욕에 간 적이 있었다. 택시를 탔더니 운전사가, 우리가 관광객인 것을 알아보고는, "여기는 자유의 나라요. 누구도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아요. 일하고 싶으면 차를 몰고 나오고 일하고 싶지 않으면 일을 하지 않고 그래요..." 좋게 맞장구를 해주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렇게 과도하게 이념적인 데에는 필시 뭔가가 있기 마련이다. (자유라? 일하고 싶으면 차를 몰고 나온다고? 집세를 내야하고 생활비를 벌어야 하니까 차를 몰고 나오는 것은 아니고?) 로저 워터스의 공연장 앞에서는 열 명쯤 되어 보이는 유대인들이 로저 워터스가 반-유대주의자라며 피켓을 들고 데모를 하고 있었다. 자유라 했나? 자 이제 서구 문명에 있어 자유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서구에서 유대 이미지에 부정적 영향을 끼친다고 판단되는 사람은 학교에서 퇴학당할 수도, 입사를 거부당할 수도, 회사에서 해고될 수도, 출판 계약이 취소될 수도, 교직 임용이 영원히 좌절될 수도, 영화 출연 계약이 취소될 수도, 공연장 계약이 취소될 수도, 입주 계역이 취소될 수도 있고, 하버드 대학같은 기관은 정부 지원금을 토해내야 할 수도 있다. 다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거나 벌어졌던 일들이다. 그리고 유대주의 기관에서는 반유대주의자로 낙인 찍힌 사람들을 끝까지 추적하여 인생을 망가뜨려버리겠다고 지속적으로 공언하고 있다. 자 다시 서구 사회에서의 자유와 관용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서구 문명은 스스로 극복할 수 없는 터부를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나치의 홀로코스트라 했나? 그렇다면 가자는 또 무엇인가? 이스라엘의 가자 학살에 눈감으면서 자신들을 어떻게 문명이라 부를 수 있는가? 한 마디로 말해서 서구 문명은 끝났다. 도덕적 역량이 아예 없기 때문이다. 회복불능이다. 이런 문명이 어떻게 지구의 지도 문명이 될 수 있는가? 트럼프같은 사람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트럼프를 배출할 만한 문명에서 트럼프를 배출한 것 뿐이다. 그런 문명이 다음 세대를 책임지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한다.


다행히도 많은 사람들이 서구 문명의 단일 패권은 저물고 있다고 진단하고 있다. 그 다음에 무엇이 올지 알 수는 없지만 지금의 미국 패권보다 나쁠 것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그 다음의 다중심 세계에 있어 한국도 분명 기여분이 클 것이기 때문에 한국도 그것을 준비해야 한다. 열심히 준비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요컨대 한국이 제국주의라는 시궁창 경력 없이 지도국 중 하나가 된다는 바로 그런 의미에서, 나는 다음의 다중심 세계가 지금보다 확실히 나은 세계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어제 아내가 BBC로 페르시아 문명에 대한 다큐먼터리를 보길래 BBC 따위는 보지 말라고 야단을 했다. 나는 이스라엘산 무화과에 대해서만 소심한 불매 운동을 했었는데 이번 사태로 품목이 좀 늘었다. 첫째, 스타벅스, 둘째, 미국산 히어로물(예컨대 이제 더 이상 스파이더맨은 안보는 걸로...)... 우리의 기대는 이렇다. 지구상의 패권이 바뀌고, 더 이상 전쟁이 정책 수단 중 하나가 아니게 될 때, 앞으로 5년 후, 10년 후, 그때 꼭 이란에 가보자는 것이다. 철학도로서 가슴 아픈 것은 내가 읽는 책에 나오는 지명들이 죄다 미국의 폭격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이스파한. 바라건대 참으로! 인류가 승리하기를...  


(누군가 하이데거에게 물었다. 현대의 문제에 대한 해결은 어디서 올까? 많은 사람들이 그 해결이 동양에서 온다고 말한다. 당신도 그에 동의하는가? 하이데거가 말했다. 동의하지 않는다. 문제가 처음 시작된 곳에서 해결도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이 나는 하이데거에 동의하지 않는다. 서구 문명은 해결될 수 없는 문제를 산출했다. 그리고 문명 자체가 이미 매너리즘의 문명이 되었다. 해결이 어디서 오든 서구에서는 아닐 것이다. 우리도 그것을 준비해야 한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weekly 2026-03-24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음... 하루 자고 나니 너무 억지스러운 부분이 눈에 많이 보여 지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면 유태인들의 어떤 특성을 현대 철학들의 좀스러움, 무능력함과 연결시키고 하이데거까지 끼워넣은 부분 등등. 당장은 그냥 놔두기로 한다. 본문은 미국-이스라엘의 이란 침공 사태를 목도하면서 내가 많이 화가 나 있는 상태라는 것 이상을 의미하지 않는다.
 

지난 주에 영화 "왕과 사는 남자"를 보았다. 아내가 상의도 없이 예매를 해버렸는데 나는 영화를 볼 마음의 여유가 전혀 없었다. "아니 21세기에 무슨 단종애사야?" 궁시렁거리며 영화를 보러 갔는데 영화는 나름 볼 만 했다. 천만 관객이 그냥 든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철학도다. 그리하여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아내에게 이리 말했다. 이 영화와 비슷한 이야기를 고대 그리스의 비극 "안티고네"가 하고 있어. "안티고네"는 철학적으로 다루어 볼 만한 이러 저러한 논쟁점들을 제공하고 있고 많은 사상가들이 그 주제를 집어들곤 했지. 나는 "왕과 사는 남자"에 그러한 논쟁점들이 있을까 하고 생각해보았어. 없는 거 같아. "왕과 사는 남자"에서 감독이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전락한 왕과 서민성, 혹은 민중성이라 해야 할 것의 교점이었던 것 같아. 이론성, 사유성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영화는 재미있는 영화가 아니야. 흔히 명작이라 불리는 작품들은 그런 논쟁점들을 풍부하게 제공하지. 철학에서는 사유를 이러한 논쟁점과의 관계에서 정의해. 즉, 습관적, 관성적 상태에서 깨어나게 하는 계기가 논쟁점이고, 그러한 깨어남 자체가 곧 사유라는 것이지. 예컨대, 현대의 미술품 앞에서 우리는 사유를 당하지. 작품이란 우리의 관성적 존재를 흔들어 깨우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야. - 이런 것들이 서양의 철학적 관점이다...


철학도로서 나는 이러한 관점을 동양적 세계에 적용해보려 하지만 매번 거기서 유의미한 어떤 것을 찾아내는 데 실패해왔다. 혹자는 이것을, 동양에는 철학이 없다는 말로 표현한다. 유튭에서 달라이 라마와 레이디 가가의 대담을 찾아보라. 레이디 가가는 달라이 라마에게서 철학적인, 추상적인, 이론적인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듣고자 한다. 그런데 달라이 라마는 일상적 수준에서 답을 주려 한다. 문제는 달라이 라마가 레이디 가가의 질문 자체를 초월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둘은 다른 세계에 속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그 둘 사이의 간극을 고통스럽게 바라본다... - 솔직히 나는 동양에서 온 사상가들에게서 무능함을 보고 있다고 느낀다. 자 봐봐, 데이비드 봄과 달라이 라마는 비슷한 얘기를 하고 있어. 그러나 달라이 라마에게는 어떤 무능력함, 어떤 관념성이 있어. 현실에의 적실성을 잡고 있지 않다는 의미에서. 교황의 말들이 관념적이라는 의미에서... 동양의 사유들은 아직 이 관념성 안에 갇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등등.


철학을 인도-유러피언 전통의 서사 쟝르로 결론짓는 것도 썩 나쁜 일은 아니리라. 철학이 아직 유효한 것은 이 서구 전통이 지구의 주도적 전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마도 이 전통은 사라지거나 약화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현재는 서구 전통의 근대의 확장에 속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마도 이 확장 너머에서 살게 될 일은 없을 것이다. 


이 서구 전통이 지구의 주도적 문명임을 인정하더라도, 이 주도적 문명에 불만을 품게 되는 것은 전혀 모순된 일이 아니다. 어떤 불만을 느끼는가? 예컨대 나는 이 서구 문명이 너무도 야만적이라는 데 불만을 느낀다. 예컨대 서구 문명은 바그다드나 테헤란에 융단 폭격을 가하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로마나 아테네에 그런 짓을 한다고 생각해보라. 한국의 경주에 그런 짓을 한다고 생각해보라. 교황을 폭탄으로 폭살한다고 생각해보라. 서구 문명은 타 문명에 대한 존중이 전혀 없다. 이런 것들을 뉴스로 지켜보는 것이 이제는 지긋지긋하다. 나는 이스라엘의 가자 침공 이후 서양 뉴스를 보지 않는다. 그 적나라한 위선을 바라보는 것이 너무도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란 미국이 지구의 에너지 패권 장악을 위해 중동에 설치해놓은 대리 국가에 불과하다. 현상적으로는 미국이 이스라엘에 끌려다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스라엘이란 미국의 욕망, 그 극단적인 욕망의 발현기관이기 때문에, 둘을 나누어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 수 있다. 그린란드가 중동에 있었으면 미국은 이스라엘을 발현하여 그것을 점령했을 것이다. 캐나다가 중동에 있었으면 미국은 이스라엘을 발현하여 그것을 점령했을 것이다. 트럼프가 가장 아쉬워할 일은 미국이 이스라엘을 하나 밖에 만들지 않았다는 것이리라. 현대 서구 문명은 필요 이상으로 많은 전쟁을 생산했고 필요 이상으로 많은 사람을 죽게 했다. 이런 문명이 지구의 주도적인 문명이라는 것은 너무도 큰 비극이다. 


다행히도 이 문명은 약화되고 있다. 예컨대, 많은 사람들이 미국의 중동 지배권 약화를 예상한다. 미국의 이란 침공은 그러한 흐름을 되돌리려는 갸냘픈 몸짓에 불과하다. 이 지역에서 앞으로 한 번 더 그러한 전쟁이 날까? 그런 전쟁이 또 일어난다면 그것은 또다른 "필요 이상으로 발발한 전쟁"이 될 것이다. 또다른 전쟁을 벌이기 전에 미국이, 중국이 안정적인 에너지 소스를 확보하는 것을 방해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아먹을 정도로는 똑똑해지기를 바랄 뿐이다.


오늘, 한국의 친척 어른 한 분이 돌아가셨다. 매우 똑똑한 분이셨지만 쉽지 않은 삶을 사셨다. 내가 대학생일 때 전국 무전 여행을 했었고 그 분 집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소주를 앞에 두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던 기억이 난다. 그 분이 말씀하셨다. "나에게 문제는 말이다, 나에게 항상 관심은 말이다, 그것은 자살이다..." 까뮈를 읽으셨을까? 건강을 위해 조신하게 사신 적이 없으셨고 병원에 입원해서도 담배를 피셨다. 그러다 몇 달 전 통화를 했는데 이런 말씀을 하셨다. "ㅇㅇㅇ야, 나는 말이다, 나는 요즘 더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당뇨 등으로 이미 몸은 만신창이가 된 상태였다. 무엇이 그 분을 변하게 했을까? 무엇이 그 분에게 더 많은 시간을, 더 많은 빛을 갈구하게 하였을까? 그것은 스피노자적인 절대 진리가 아니었다. 파우스트가 "순간이여 멈추라" 라고 외치던 순간의 그 사업상의 충만감, 만족감도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이 자식들, 손주들로부터 사랑받고 존경받고 걱정받고 있다는 감정이었다. 유치환은 지식이 그대의 고뇌를 다스려주지 못한다면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떠나자고, 그 그림자 하나 없이 작열하는 태양 아래로 가자고 말한다. 사막은 고뇌를 다스려줄 수 있을까? 고뇌는 관계성의 한 양상일 뿐이다. 지식과 사막과 사업은, 철학은 고뇌라는 이름의 관계에의 갈망을 만족시켜 줄 수 없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 말해서 달라이 라마가 옳았을 지도 모른다. 동양의 사상가, 예컨대 유가의 사상가들이 옳았을 지도 모른다. 인간 조건의 가장 커다란 부분은 관계적인 것, 요컨대 가족 관계와 그것의 확장일 수 있다. 이러한 관계성은, 말하자면 소프트웨어적이다. 서구인의 삶에 완전히 체화되어 있는 독립성, 자립성에의 절대적 가치 평가가 이제 새로운 대안과 나란히 진열될 기회를 맞게 될지도 모른다. 서구 문명이 소프트웨어적 관점에서 이완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그렇게 본다. 그리고 그런 현상이 더 심화되기를 기원한다. 현대의 사람들이 하나의 종합이기를 바란다. 


너무 두서없다. 어쨌든... 그냥 올리기로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미국-이스라엘의 이란 침공 사태를 매일 매일 뉴스로 지켜보고 있다. 한 시대가 끝나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일단 미국은 문명의 모든 규칙을 파괴함으로써 자신의 패권이 끝나가고 있음을 자백하고 있다. 협상 중에 협상 상대방을 폭살하는 것에 어떤 정당화가 가능할까? 175명의 초등학생을 오폭이든 뭐든 죽게해놓고 사과도 없이 발뺌을 하면서 어떻게 스스로를 문명 세력, 문명 진영이라 말할 수 있을까?


반면 이란은 놀라운 자제력을 발휘하면서 적절한 대응을 하고 있다. 미국-이스라엘이 정유 시설을 공격하기 전에는 정유 시설을 공격하지 않고, 금융 기관을 먼저 공격하기 전에는 금융 기관을 공격하지 않는다. 중동 각지의 미군 기지에 공격을 집중하여 미군 기지들이 주둔국으로부터 비싼 돈을 받아가며 보호하는 것이 중동 국가들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뻔한 진실을 다시 한번 확인케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여 미국이 보호하고자 하는 잇권의 실체를 폭로한다. 즉, 에너지 패권. 이란은 달러가 아닌 위안화로 결제한 석유 화물은 자유 통행이 가능하도록 보장할 것이라고 한다. 대놓고 미국 페트롤 달러의 핵심을 겨냥하는 것이다. 뼈가 부수어지고 피와 살점이 터져나가는 와중에 이처럼 고도의 사유와 강철같은 자제력을 필요로 하는 대응을 하고 있는 이란 문명에 경외감을 아니 느낄 수 없다. 이에 비하면 미국은 즉흥적인 대응으로 일관하는 매우 얕은 세력이다. 그 깊이로 보건대 미국은 제국이 아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어린 시절 나는 반전주의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철학자 버틀란드 럿셀이 반전 운동으로 감옥에 갔다는 사실에 의아해했다. 적군이 침공해오는데 어떻게 반전주의가 가능할 수 있지? 


그러나 지금은 반전주의가 옳다고 생각한다. 지금 전쟁을 벌이고 있는 나라들을 보라. 우크라이나, 러시아, 이란, 이스라엘, 그리고 미국. 그리고 그 나라의 지도자들을 보라. 전쟁의 가장 주요한 동기는 그 나라 정치 지도자들의 정치적 이해 관계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있는가? 한국에서 윤석열이 어떻게든 국지적 충돌을 일으키려 했던 이유에 대해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한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