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위치
호미 바바 지음, 나병철 옮김 / 소명 / 200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으로 탈식민주의가 문제시되기 전인 90년대 중반 이 책의 원본을 가지고 있었다. 그때는 특별한 인상도 없는 한 권의 원서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탈식민주의의 중심에 놓인 문제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 책이 번역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의 사건이 될 만큼 바바의 책은 난해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원서를 읽어나가면서 논의 내용이 정리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도 되돌아보면 나의 무지와는 달리, 바바가 구사하는 표현상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적지 않은 분량에 역주까지 붙여가며 번역의 수고를 다한 저자의 노고에는 두 손을 마주쳐 박수를 보냄이 당연하다. 그런데 몇 가지 지적하고 싶은 점이 있다. 간혹 본문과 중복되는 내용이 역주에 포함되어 있다. 역주라면 풀어서 알기 쉽게 함이 목적이지, 저자의 말을 반복함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불필요한 구석도 꽤 적지 않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요건 또 다른 문제이겠는데, 후반부로 갈수록 오류가 많이 발견된다는 사실이다. 번역이나 교정을 하다 보면 아무래도 뒤로 갈수록 지치게 마련이라 허점을 노출할 가능성이 많은 게 사실이다. 그리고 색인 역시 해당 단어가 언급된 전체가 제시되어 있지 않아서 부족한 느낌이 있다.

풍부한 배경 지식을 갖지 않은 상태에서, 인쇄된 한 권의 책에만 의존할 경우, 생각하지 못한 오류를 범할 수도 있다. 4페이지 저자의 서문에는 조안 고프젝(joan gopjec)이라는 인명은 이와 같은 오류의 전형적 사례일 것이다. 원서에서는 C와 G를 구분할 때 가끔 착오를 일으킬 수 있다. 이는 이와 같은 착오에서 빚어지는 실수이다. 조안 콥젝이 누구인지 알만한 사람은 대충 알고 있다는 말씀. 이 외 이 책의 독자들로부터 여러 가지 지적이 출판사나 저자에게 전해졌을 것이라 믿고 나머지는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직접적인 식민지 경험 속에서 근대화를 추구해온 우리 입장에서 탈식민주의는 새삼 또 다른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제국주의와 민족주의, 서구와 우리라는 이분법 속에서만 사유하고 저항을 생각해 온 우리에게 있어 탈식민주의는 우리의 지난 근대적 경험들을 우리라는 정체성을 분열과 혼성의 입장에서 되돌아보게 만든다. 단순한 반식민주의가 아닌 탈식민주의는 본질적 정체성을 가정하지 않으면서 그 혼성화의 계기들이 만들어내는 제3의 공간이 있을 수 있음을 지적하고, 거기에서 문화를 재구성하는 방법을 시사한다. 굳어진 이분법적 사유에 식상할대로 식상해진 우리에게 있어 이런 제안은 참신한 발상이다.

그러나 바바가 주장하는 기호의 공간, 언표작용과 분열의 공간이 우리의 경험을 반추하는 데 있어서 하나의 흥미로운 서사를 제공해줄 수는 있다 하더라도, 그런 입지점을 전면적으로 내세우기 위해서 기존의 거대서사를 가볍게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거대사서와 미시서사가 결합된 관점으로 우리의 경험을 이해할 수 있을 때, 바바의 논의는 우리에게 생명력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이다.

바바의 탈식민주의가 비서구를 가정하는 것같으면서도 본질적으로는 서구 지식을 세련되게 변형시킨 산물일 수도 있다는 의심을 품는 것은 당연하며, 전략적으로도 필요한 태도이다. 바바가 아무리 중요한 이론가로 상찬된다 하더라도 우리의 경험을 이해하고 서술할 수 없다면 그 얼마나 공허할까. 바바의 서문에서 드러나듯이 바바의 이론은 1980년대 미국에서 발생한 신역사주의와 비슷한 입지점을 가지고 있다. 기존의 역사에서 배제된 소수자의 관점으로 역사를 읽어내겠다는 것과 특히 문화라는 프리즘으로 다양한 영역을 포괄하는 문화사로서 위치짓겠다는 것 등이 그 둘의 유사점이다. 그러고 보면 신역사주의나 탈식민주의는 서구적 산물, 그것도 미국 중심의 제국주의 중심부 학계에서 발생한 문화적 산물이다. 그 점을 인지한 상태에서 우리는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