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 위의 삶 - 21세기 문화 총서 10
셰리 터클 지음, 최유식 옮김 / 민음사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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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20-30대 도시 생활인의 상당수는 컴퓨터와 지내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많다. 수치로 환산하면 컴퓨터는 디지털 시대의 부모이자 연인이자 친구로서 우리 삶에 절대적으로 군림하고 있다. 컴퓨터가 오작동을 일으키거나 네트워크 접속 불량을 일으키면 마치 가까운 누군가가 큰 사고를 당한 것처럼 순식간에 공포에 휩싸이고, 컴퓨터를 회생시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한다. 이런 현상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이제 실제보다는 가상을 통해서 인간은 사유하고 욕망하는 새로운 유형의 인간으로 거듭난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이런 라이프스타일을 조명하고 반성하게 해주는 책들은 많지 않은 듯하다. 최근 들어 부쩍 늘어난 디지털 관련 서적들 중에서도 인터넷 시대의 자아 정체성의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룬 책들은 보기 드문 형편이다. 대개의 책들은 디지털 시대로의 변화를 이끈 과학기술의 내적 메커니즘을 추적하거나 디지털 위주의 미래 사회에 대한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전망으로 현상 분석을 단숨에 뛰어넘는 책들이다.

디지털 시대의 일상을 살아가는 현대인의 자아 정체성에 컴퓨터와 인터넷이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 그 속에서 인간들이 어떻게 욕망을 해소하고 자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빚어지는 문제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우리는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좀 더 이해하고 어떤 전망을 얻고 싶어 한다.

그럼에도 국내 저자들의 책들은 우리 일상의 문제들을 조망하기보다는 거시적인 문제틀들에 집착하여 현상 분석과 해석, 전망을 원하는 독자들에게는 별로 도움을 주지 못했다. 그만큼 우리의 지식 문화 속에서 학자들이 실제적인 문제들을 제대로 집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셰리 터클의 <스크린 위의 삶>은 이런 상황 속에서 번역된, 매우 의미 있는 책일 듯하다. 디지털과 심리학이라는 다소 상반되는 영역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온 저자는 프로이트류의 정신분석학이 현대 사회의 디지털 라이프에서 빚어지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유효한 방향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천 명에 가까운 사람들과 일일이 대화를 나누고 그 성과를 바탕으로 인공지능과 인공생명의 문제, 사이버문화생활의 윤리성 등 전통적인 자아 정체감에 컴퓨터와 인터넷으로 구성된 새로운 가상공간이 어떤 효과를 초래하는지 검토하고 있다.

조사 대상자를 일일이 인터뷰하면서 자신의 문제의식을 검토하는 이와 같은 민족지적 연구 방법은 미국 서적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연구 방식이다. 인용된 개인들로부터 생생한 음성을 전해 듣는 듯한 느낌을 가지게 하는 이와 같은 연구 방법은 저자뿐만 아니라 독자들마저 책 속으로 끌어들이는 강한 흡입력을 가진 방식이다.

여하튼 터클의 이 책은 기존의 사이버문화론과는 달리 우리의 컴퓨터 유저에게도 낯설지 않은 환경을 연구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흥미를 가지고 읽을 수 있는 부분이 많다. 네트워크 초창기 시절의 머드가 주 논의 대상이기는 하나, 우리는 여기서 pc통신의 경험을 그대로 대입하여 읽을 수 있다. 그리고 가상공간에서 펼쳐지는 유저들의 다양한 움직임이 기존의 실제 공간 속에서의 윤리로 규제되고 이해되어야 하는지, 아니면 가상공간의 자아는 실제 공간의 자아와는 전혀 다른 존재인지 등의 문제도 우리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 문제이다.

다만 아쉬운 점은 급변하는 디지털 환경에 부합되기에는 이 책도 오래된 듯한 느낌을 준다는 사실이다. 1995년에 나온 이 책은 불과 10년 사이의 변화를 따라잡기에는 조금 부족한 듯하다. 8년 사이의 거리를 좁히고 터클의 문제의식을 한층 정교화 하는 일이 남아 있는 셈이다. 이것은 터클의 과제일 수도 있겠지만, 국내의 뜻있는 학자의 과제일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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