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루가 꺼진 은신처
이치은 지음 / 알렙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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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독서 패턴은 대개 일정할 것이다. 책의 종류나 장르, 독서 시간대나 시간 등등. 한번 형성된 그런 패턴들은 대체로 일정하게 유지될 것이고, 그런 항상성이 깨지는 걸 막기 위해 노력도 할 것이다. 그중 어떤 하나에 변화가 생기기도 하지만, 그런 변화의 순간들이 왜, 어떻게 찾아왔는지를 의식적으로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예를 들면 나는 소설을 좋아하지만, 결코 많이 읽는 편은 아니다. 1년에 몇 권 읽지 않는다. 몇 권 되지 않는 독서량을 기준으로 이렇다 저렇다 하는 건 무의미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대체로 소설 독서에 있어서 적어도 나는 보수적인 편이다. 정평이 난 작품들 위주로 선별해서 읽는다. 소위 말하는 고전의 범주에 드는 작품들이라면 굳이 창작 연대나 작가의 국적이나 성별은 따지지 않는다. 다만, 그때그때의 기분이나 자극에 따라서 가끔 골라 읽는 정도다. 현대에도 소설들은 계속 등장하고 있지만, 그것들을 선별할 만한 정보가 부실한 경우가 많으므로 섣불리 찾아 읽게 되지는 않는 것같다. 그러나 누군가의 추천이라는 계기가 있다면 가끔 새로운 작품들에 관해 관심을 가져보게도 되는 것같다. 그 수많은 소설들을 누가 무슨 수로 다 관심을 둘 수 있단 말인가. 그렇기에 추천은 정말 중요한 계기가 된다. 물론 그 추천자에 대한 신뢰가 바탕이 된다는 전제하에서.

 

그런 바탕 하에서 관심을 두게 된 작가가 이치은이다. 짐작대로 물론 한국 작가다. 90년대에 등단했으니 고전의 반열에 오르고 말고를 따기에는 아직 이른 시점이다. 그러나 누군가가 이 작가에 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난 흘려듣는 척했지만, 그 이름을 인상 깊게 들었고 그가 어떤 작품들을 써왔으며 어떤 부류의 작가인지 관심이 있었다. 그러다 가장 최근에 발간된 이 작품을 읽게 됐다. 나는 특이한 습관이 있는데, 작품을 읽을 때 하루에 딱 20쪽만 읽는 것이다. 더도 덜도 안 된다. 20쪽만 읽기. 이건 마치 한 끼 밥을 먹는데 쌀 2,000알만 먹기와 비견될 수 있는 행위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런 습관이랄까 규칙을 깨뜨리고 읽어버리고 말았다.

 

누가 무슨 이유에서 기획한 건지는 모르지만 암살의 정황에 연루된, 각자의 사연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가는 이야기 방법을 취하면서 전개된다. 이처럼 단일한 화자가 등장하지 않는 전개 방식은 이제 더 새롭다고는 할 수 없다. 그래서 특별히 당혹스러움은 없었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엉성하던 그물코가 촘촘히 짜여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잘 짜인 각본 아래에서 자기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연기자들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느낌이었다.

 

이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퀜틴 타란티노의 영화들이나 <레옹>같은 킬러 영화, <세일러복과 기관총>같은 일본영화, 그리고 암울한 디스토피아 영화들, 기억과 현실의 착종과 분리 불가능성을 주제로 한 2000년대 영화들이 생각났다. , 불가사의한 명령에 시달리며 끊임없이 미로를 헤매는 카프카 소설들, 그리고 꿈과 현실이 뒤죽박죽으로 얽혀있는 초현실주의 화가들의 그림들이. 작가는 이 소설의 동기가 인디밴드 어어부프로젝트의 노래라고 했지만.

 

등장인물들은 사연이 있지만, 작가는 감정을 배제한 채, 그들의 행위와 거기서 느끼는 불안과 긴장감, 미혹 등에 관해서만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 불행한 사람들 다수는 결코 행복한 결말을 갖지 못한다. 그리고 끝내 암살 프로젝트의 발주자와 그의 동기에 대해서 독자는 알 수 없다. 이 소설에는 안정적인 기승전결도 없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놀람보다는 그것마저 허락하지 않는 당혹스러움만을 주저음으로 하는 이상한 소설이다.

 

소설만큼 다양한 취향과 관심하에서 분리해서 취할 수 있는 독서 영역이 있을까. 누군가는 장르 서사의 독자일 것이고, 누군가는 공인된 리얼리티 서사의 독자일 것이고, 누군가는 공인이 필요하지 않거나 그걸 부정하는 서사의 독자일 것이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이 소설은 마지막 독자를 위한 서사인 것같다. 독서의 결과로 환상이나 현실을 요구하는 독자가 아니라 불확실과 혼돈과 비몽사몽을 요구하는 독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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