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프레이야 > 아름다운 손상
모 일간신문 문화면에 조그맣고 소박한 칼럼란이 있다. '일기'라는 제목의 칼럼인데 조말선 이라는 여류시인의 글이 마음에 쏙 들어온다. 창에 내리는 시인의 정의가 먼저 마음을 잡아끈다.
내 몸에 창을 내고 싶다...
<아름다운 손상>
창은 건물이라는 육체의 아름다운 손상이다. 이 손상된 부분으로 햇살이 가득하다. 햇살이 아까워서 오래 창가에 앉아 있는다. 등이 따끈해질 무렵이 되면 키가 조금 자라는 건 아닐까, 나는 화초의 입장이 되도록 움직이지 않는다.
하나의 창으로 수많은 창들이 보인다. 대문이 사실적인 출입구하면 창문은 낭만적인 출입구이리라. 거리두기와 거리좁히기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공간인 창을 뛰어넘는 것은 파격이거나 도덕이 아니다. 그러나 사랑의 세레나데는 언제나 창가에서 들려온다. 창은 누군가 도착하고 떠나가는 것을 확연히 목격한다. 어느 날 유치한 봄꽃들이 천지를 장악한 걸 확인하고 덩달아 유치해질 줄 아는 것이다. 창으로 인해 마음이 깨지기 쉬우므로 도를 닦을 때는 면벽하기를! 병적인 페쇄주의가 아니라면 누구나 '남으로 창을' 내고 싶어한다.
과묵한 건물이라 하더라도 창을 가진 건물은 아름답다. 마주보는 건물의 창들이 수많은 눈동자 같다. 그럿은 미루어 짐작함직한 생활의 모양새를 가리고 새까맣게 반짝인다. 아름다운 손상이다. 아름다운 훼손이다. 건물의 육체의 내부가 아니라 내면이 투명해지는 것이다. 저런 훼손이라면 이렇게 햇살을 듬뿍 쪼인 날 내 몸에 창을 내 몸에 창을 내고 싶다. (2004.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