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4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 - 길 샤함

스트라빈스키 불새 모음곡 3번(1945)


크라이슬러 아름다운 로즈마리

그리그 'Lezter Fruhling' from Zwei Elegische Melodien op.34-2  

엘가 The wilde bears


12.05

하이든 교향곡 100번 G장조 <군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알프스 교향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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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얀손스와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은 특별하다. 예리하게 조절되는 셈여림이나, 정밀하게 세분화된 프레이징, 멜로디 라인에 온기를 더하고 광채를 내는 것까지, 모든 작품을 그들만의 방식으로 체화하기 때문이다. 어떤 곡을 연주하든 악구 단위로 해체했다가 신중하게 재구성한 것처럼 황금비율로 배합된 음향이 흘러나온다. 지휘자의 음악관과 오케스트라의 비르투오시티, 오랜 헌신과 호흡으로 만들어진 가지런한 음향세계. 오케스트라 팀워크의 이상형이 있다면 이들의 음악-만들기에 가까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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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은 오케스트라의 안정적인 바탕 위에서 바이올린이 변칙적으로 농담을 풀어놓는 듯한 연주였다. 1악장은 음정이 플랫되고 박자가 다소 어긋나는 등 샤함의 바이올린이 흔들렸는데, 카덴차를 지나며 특유의 유려한 개성을 되찾았다. 2악장은 피아니시모의 향연. 이들만큼 균일한 밀도의 작은 소리를 낼 수 있는 다른 오케스트라가 있을까 싶다매 내한마다 또 레코딩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를 살짝 넘는 소리'를 만드는 데 도가 튼 지휘자와 오케스트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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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내한의 정점은 스트라빈스키의 불새 모음곡이었다. 작곡가의 치밀한 오케스트레이션에 대한 감탄과, 이 까다로운 음향설계를 찬란한 디테일로 구현하는 오케스트라에 대한 감탄을 동시에 했다빛을 받으면 형형색색 무지개를 쏟아내는 스테인드글라스라고 해야할까. 악구 하나하나 투명하게 드러나길 원하는 지휘자의 음악관이 고감도 오케스트라를 만나 눈부신 정밀함을 성취한 듯 했다. 두고두고 아껴 기억할 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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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묘하게 세공되지 않은 순간이 없었다. 서주 베이스 음형의 음산한 밀도와 자로 잰 듯한 하모닉스, "파 드 되"의 정치한 목관 앙상블과 고혹적인 현악의 레가토. 예민한 귀를 가진 지휘자의 섬세한 통제 탓에, 솔리스트들의 실력이 개인기로 과시되지 않고 음향적 균형에 녹아들었다. "공주의 호로보드"에서는 얀손스가 프레이징의 마술사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끊어질듯 말듯 현과 관을 넘나드는 모든 프레이즈가 누빈 구석 없이 매끄러웠다. 론도가 끌날 무렵 피어오른 약음은 극히 아득했는데, 그 덕분에 뒤를 때리듯 튀어나온 카슈체이 댄스에 객석 전체가 움찔했다. 처음에는 브라스가 흔들리는 등 앙상블이 조금 흐트러졌지만, 이내 여태껏 들어보지 못한 디테일이 쉼없이 쏟아졌다. 음표 하나 흘리지 않는 아티큘레이션이 단조로운 음형에도 숨결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다만 정교한 음향을 위해 템포를 규칙적인 박절에 가두는 느낌이었다.) 이어 하프의 반복되는 오스티나토와 함께 "자장가"의 선율이 울려퍼졌다. 관능적인 색채가 연주장을 휘감았고, 아연한 기분에 작게 탄식했다. 피날레에 대한 기억은 사실 좀 추상적이다. 음향적이라기보다는 촉각적인 경험에 가까웠다융단처럼 깔린 현악의 피아니시모 위에서 호른의 선율이 황홀한 흐름을 타기 시작했다. 프레이징이 마법을 부려 기나긴 크레셴도가 이음새 하나 없이 한순간에 부풀었다. 마지막 총주에 이르자 치솟는 트레몰로 위에 금관이 더해졌고, 거대한 광채가 장벽처럼 우뚝 섰다. 숨 막히게 유려한 도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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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빼어난 실황을 경험하면 곡이 완전히 달리 보이곤 한다. 앞선 불새가 그랬고, 군대교향곡도 그런 경우였다. 악구와 악구가 탄력적으로 반응해 하나의 유기체를 이루는 천의무봉의 연주. 모든 성부가 적절한 순간에 빈틈없이 이행하고 교차하니, 음향에서 놀라운 입체감이 살아나는 게 당연했다. 만화경처럼 형태를 바꿔가며 등장하는 악상들이 치밀한 기교로 맞물릴 때는 거의 호사스러운 추동력을 느꼈다단편적인 모티브를 각양각색으로 변주하는 곡의 고전적 완성도만큼이나, 이 유희적인 모티브 활용에 매순간 활기를 불어넣는 지휘자와 악단의 집중력에 탄복했다. 곡과 해석과 연주가 일체가 된 느낌. 현대악기로 연주하는 하이든으로는 이 이상이 가능할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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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석의 스펙트럼을 서사성과 순음악성을 양끝에 놓고 구분한다면, 마에스트로는 보통 둘 사이에서 극단적인 순음악성을 택했다. 알프스 교향곡도 마찬가지였다. 얀손스는 알프스의 세부를 지독하게 조탁해 혼돈에 가까운 순간에도 미묘한 뉘앙스를 구분했다극적인 긴박함이 줄고 질서있는 충만함이 가득했다. 교향시적 서사보다 순도 높게 정제된 음향 그 자체를 탐닉하는 것처럼 보였다. 다만 지휘자의 초정밀세공이 스트라빈스키나 하이든만큼 곡과 어울리는 지는 의문이었다. 연주에 호불호가 갈렸다면 아마 이 결벽적인 순음악성에서 비롯되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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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프레이즈가 정합적으로 분기했다 결합했고, 단원들이 촘촘한 설계도를 벗어나는 일은 좀처럼 드물었다어떤 장면은 기예에 가까운 기교로 연마되어 있었다. 가령 "수풀과 덤불에서 길을 잃다"는 모티브가 대위적으로 뒤엉켜 난잡하게 연주되기 쉬운 부분이다. 그런데 이날 연주는 레코딩에서도 듣기 힘든 수준으로 반음계적 푸가가 선명하게 직조되었다. 부점리듬의 모티브가 돌발적으로 번뜩이는 '"위험한 순간"도 더없이 절륜했다. 기술적 완성도만으로도 감탄할 만한 장면들. 곡과 해석이 가장 감격적으로 공명한 부분은 이 곡의 절정이기도 한 "정상에서"였다. 알프스 정상에 선 감흥이 더없이 충만한 화성적인 밸런스로 노래되었다. 지휘자의 개성이 잘 드러났던 다른 장면은 "천둥과 폭풍우". 정신없이 퍼부어지는 퍼커션을 뚫고 현악과 목관의 속주가 음형 음형 분리되어 결마다 구별될 정도였다. 하이든에서부터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까지, 텍스쳐가 복잡하면 복잡할수록 얀손스의 현미경은 집요하게 배율을 높였다. 폭풍우 이후부터는 투어의 마지막이라 그런지 연주에서 피로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오케스트라는 끝까지 의도된 궤도 위에서 찬연한 음향을 빚었다. 공연을 끝낸 얀손스는 거의 탈진해 있었다. 음악적으로 인간적으로도 높은 수준에 오른 지휘자와 오케스트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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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들의 공연을 다섯 번 경험하며 거듭 느끼는 것이지만, 악마만큼이나 천사도 디테일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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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8

드보르작 교향곡 9번 '신세계에서'

무소륵스키/라벨 전람회의 그림


J.슈트라우스 피치카토 폴카

드보르작 슬라브 무곡 op.72 no.7


11.19

R.슈트라우스 돈 주앙, 장미의 기사 모음곡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


그리그 솔베이지의 노래


 무無를 살짝 넘는 소리였다. 울림은 투명했지만 이상하게도 빈틈이 없었다. 지휘자의 세공이 정치한 만큼, 연주자들의 집중력은 단단했다. 피아노에서 피아니시모로, 피아니시모가 다시 피아니시시모로, 한 줌의 셈여림을 덜어낼 때마다 음악의 밀도는 오히려 높아졌다. 이들이 연주한 쇼스타코비치의 완서악장은 작은 소리에 바쳐진 경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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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악구를 보듬는 하나의 완결된 세계. 얀손스와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의 음향은 고유의 맥박과 규칙을 지니고 있었다. 지휘자와 오케스트라는 한순간도 예사로 넘기지 않았다. 곡을 완전히 쪼갰다가 조각조각 각별한 뉘앙스로 이어붙인 듯 했다. 물감 위에 물감을 덧대면서 색깔의 다채로운 변화를 시험하는 것처럼, 성부 위에 성부를 덧댈 때마다 곡의 빛깔이 섬연하게 바뀌었다. 조정에 조정을 거듭해 음향의 위상을 정비하는 세밀함이 솔직히 지독하다 싶었다. 단원들은 온 힘을 다해 그들의 까다로운 우주에 헌신하고 있었다. 스스로의 동력으로 돌아가는 질서에 기름칠을 하듯 얀손스의 지휘는 유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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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케스트라는 거대한 팔레트였다. 제1바이올린부터 콘트라베이스까지, 플룻에서 튜바까지, 어디에 얼마만큼 힘을 주거나 빼면 소리의 무게와 명암이 어떻게 변하는지, 지휘자와 오케스트라는 속속들이 알고있는 듯 했다. 가령 이런 순간. 전람회의 그림 연주 중 얀손스가 베이스에 신호를 주자, 저현의 그윽함이 현악 전체에 퍼져 소리가 금세 어둑한 깊이를 얻었다. 마치 검은 잉크 한 방울이 삽시간에 물 속에 번지는 것처럼, 지휘자의 지시에 반응하는 감도가 유난히 빼어난 오케스트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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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이는 지나치게 길들여진 드보르작이라고 불평할 수도 있겠다. 얀손스는 작곡가의 출생지에 무관심했다. 그의 해체와 조립을 거친 '신세계'는 구태를 한참 벗어나 있었다. 오로지 순음악적인 찬연함으로 빛났다. 무결하게 다듬어진 2악장의 몇몇 순간은 마치 영원할 것 같았다. <전람회의 그림>은 '무소륵스키'보다는 '라벨'에 방점이 찍혔다. 시계공의 정교한 오케스트레이션에 얀손스와 그의 오케스트라만큼 적합한 상대를 찾을 수 있을까. 시작 직후 튜바주자가 부품을 떨궈 생긴 약간의 흔들림은 오래 가지 않았다. 정밀하게 작동하는 시계 속을 들여다 볼 때의 황홀함. 그는 장엄한 피날레에 이르러서도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그저 가는 시간이 아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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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날의 1부는 올해로 탄생 150주년을 맞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작품들로 채워졌다. 돈 주앙의 흐드러진 관능을 푸지게 노래하는 총주 뿐 아니라, 이야기의 진행을 설명하는 관현악적 레치타티보도 정성스럽게 다듬어져 있었다. 얀손스의 조형감각은 조금도 기우뚱하지 않았다. 장미의 기사 모음곡은 삼중창의 절정에서 보여준 현악의 깨질 듯한 정결함만큼이나, 왈츠를 주무르는 지휘자의 우아한 활력이 기억에 남는다. 마리스 얀손스는 왈츠리듬을 가장 능란하게 구사하는 지휘자 중 한 사람임이 분명했다. 1부가 끝난 후 이미 공연이 끝난 것처럼 커튼콜이 연신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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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깐깐한 피아니스트의 아집은 다행히 행운이 되었다. 지메르만이 내한을 거부해 생긴 빈 자리는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으로 채워졌다. 오래도록 음미하고 곱씹을 연주였다. 입체적으로 부각된 악상들이 서로를 겨누어 동시다발로 움직이자, 날실과 씨실이 날렵하고 촘촘하게 교차했다. 3악장 '라르고'에 이르러서는 한숨마저 조심스러운 약음이 무대 위로 피어올랐다. 몇몇 음악가들만이 도달할 수 있는 높이로, 하나의 스타일이 극단에 닿는 것을 보았다. 이틀 간의 연주 중 정수였고, 백미였다. 4악장의 코다는 바지런히 쌓아올린 성채처럼 묵직했다. 목관의 장중한 읊조림에서 시작되는 푸가토는 어느새 현악의 금빛 물결로 넘실거렸다. 얀손스에게는 소리의 크기보다 소리의 내용이 중요했다. 과장이 지양된 정직한 환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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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주위의 공기가 엷은 광채로 물드는 것만 같았다. 마지막 앵콜로 그리그의 <솔베이지의 노래>를 연주할 때였다. 지휘자와 오케스트라의 협업은 내밀한 정점에 달해 있었다. 그리고 약간의 침묵. 얀손스는 거의 탈진해 포디움 위에서 내려왔다. 관객의 환호 속에 무대를 떠날 때 그는 다리를 절었다. 퇴장하는 그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응시할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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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3번 op.37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 90.58

 

앵콜) 슈베르트 군대 행진곡

 

코리아 심포니 오케스트라 / 이대욱

 

 

 은빛 잔향을 남기며 허공을 거니는 그의 담담한 피아니시모에 그냥 한숨을 쉬었다. 노쇠한 탓에 빼먹은 많은 음표들이 어쩐지 사소하다 싶었다. 그는 작고 소박하게 노래했지만, 돌아오는 울림은 그렇지 않았다. 아늑한 신비와 기묘한 정적이 콘서트홀을 떠돌았다. 말년에 이른 대가들이 종종 건네곤 하는 알 수 없는 경이를 오랜만에 맛보았다. 남은 생애가 줄어들수록 음악의 밀도는 오롯이 높아지는 게 어떤 이들이 보여주는 드문 경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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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 전주곡 C#단조 op.45

쇼팽 전주곡 op.28

쇼팽 2개의 녹턴 op.27

쇼팽 스케르초 1번 B단조 op.25

쇼팽 연습곡 op.25 中 8곡

 

앵콜) 쇼팽 연습곡 op.10 no.12 '혁명'

       쇼팽 발라드 1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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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콜로프,아바도,무티에 이은 네번째 발구르기+전석 스탠딩 오베이션(쉬프와 볼로도스도 기립박수가 있었으나 전석은 아니었던 걸로 기억.) 잘츠부르크에서 인기좋은 노인이었다. 그리고 그럴 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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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폴론의 사도애써 조탁하지 않아도 마냥 빛이 나는 음색. 고도로 응축된 단단함 같은 게 느껴졌다. 흔히 말하는 옥구슬 굴러가는 소리가 폴리니의 피아노가 아닐까 싶었다. 유별난 명료함과 조금의 과장도, 부풀림도 없는 매끈한 흐름. 그러나 건반 찍는 기계에 가까웠던 젊은 시절에 비하면 기교적으로 노쇠한 게 분명했다. 예전의 무결점 기교마인이 아니었다. 엇나간 음표들이 꽤 있었고 종종은 페달링이 눈에 띄게 남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음악적인 고집은 여전히 변함없었다. 표현을 흐릴지언정 템포는 절대로 양보하지 않았다. 스트레이트한 흐름에 악상을 구조적으로 배치하되, 프레이징은 유창하게 처리하고, 호흡은 간결하게 가져갔다. 흡사 아폴론적인 정연함, 건강함. 호수에 비친 빛이 반사되어 산란될 때의 찬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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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여행을 통해 여러차례 느낀 것이지만, 피아노 대가들의 공통점 중 하나는 터치에서 건반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몸이 완전하게 릴렉스된 탓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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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곡 전주곡 C샵 마이너. 이런 짧은 소품에서도 쇼팽의 예민한 감수성을 느낄 수 있다. 시적인 반복과 날카로운 우수, 말미에 터지는 수사적인 탄성. 피아노의 음유시인이라 할 만 하다. 전주곡 op.28. 폴리니는 이 대곡을 단번에 꿰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젊은 시절 무자비한 연주에 비하면 많이 누그러진 모습이었다.(그도 이제 등굽은 60대 노인..) 연주하기에 힘에 겨운 패시지도 종종 있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차 언급하지만) 폴리니에게 음악적인 양보는 없었다누군가의 말대로 미스터치란 건반을 잘못 누르는게 아니라 음악을 잘못 연주하는 것이다. 2개의 녹턴. 이 곡을 이렇게 고상하게 연주할 수 있는지 처음 알았다. 일체의 센티 없이, 두터운 화장 없이 그냥 그 자체로 빛나는 맨얼굴 같았다. 스케르초 1. 명쾌한 연주였다. 마지막의 명인기에선 탄식이 절로 나왔다. 덕분에 옆의 할아버지는 막판에 호흡곤란이 왔다. 마지막으로 에튀드 op.25 8무엇보다 '겨울바람'은 더이상 바랄 게 없는 최상의 연주였다강단있는 음색에 고음에서 빛을 내는 아르페지오섬뜩한 기운을 품은 코랄. 동시에 템포는 고집스레 지켜졌다. 정확히 날아간 화살같이 거침없는 쾌연이었다. 다만 그 이후의 '대양'은 지쳐서 그런지 페달이 남용돼 표현이 지저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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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앵콜은 혁명 에튀드와 발라드 1. 둘다 폴리니에게 기대할 수 있는 연주 그대로였다. 특히 발라드 1번은 폴리니의 기하학적 음악관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수학문제 푸는 게 취미라는 그답게, 악상의 조리있는 배치에 힘을 쓴 논리정연한 연주였다. 눈부시게 빛나는 음색은 과분한 덤이었고.. 역시나 퍽 감동적인 연주. 이토록 아이덴티티가 분명한 대가라니! 취향의 호불호는 대가의 미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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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짓도 이제 끝이구나..소콜로프로 시작해서 폴리니로 끝났다. 하나같이 개성 넘치는 명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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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 건반 파르티타 2

브람스 환상곡 op.116

슈만 피아노 소나타 3관현악 없는 협주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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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흐 파르티타 2번은 엄격한 템포에 반복을 모두 지켰다. (물론 반복을 할 때는 장식음을 넣거나 셈여림을 다르게 하는 등의 미묘한 변화를 주었다.) 탄탄한 아티큘레이션으로 모든 성부가 제 목소릴 내는 가운데 곡의 담론구조가 명징하게 드러났고, 이로 인해 성부 간의 대위법적 대화, 수평적 위계가 온전히 지켜졌다. 그가 젊을 때 녹음한 동곡 연주에 비하면 과격함이 줄고, 명상적인 분위기와 섬세한 표정이 더해졌다. 레코딩에서는 다소 신경질적으로 들렸던 그의 음색이 실황에서는 동그랗게 빛을 내며 고전적인 격조로 반짝였다. 사라방드의 숨죽인 걸음과 그윽한 깊이, 론도의 기습적인 질주, 카프리치오의 장려한 결론, 모두 더없이 조화로웠다. 그저 유유한 흐름에 몸을 맡기면 그만이었다. 거듭 속으로 감탄하고 있는 데 어느새 연주가 끝났네.. 다른 이들도 내 감상과 같았는지 다음 곡인 브람스 환상곡이 시작될 때 까지 박수가 끊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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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흐의 음악이 수차원의 성부를 아우르는 합리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대화라면, 브람스의 음악은 세계와 갈등하는 인간의 실존적인 대결이다. 충만한 조화와 완전한 평온, 합법칙적인 질서에 대한 신앙적인 믿음이 바흐가 딛고 선 대지라면, 견딜 수 없는 부조화와 끊임없는 의심, 사납게 덤비는 회의는 브람스가 딛고 선 대지이다. 이렇듯 거대한 균열과 분열로 맥없이 요동치는 땅 위에서 브람스는 끊임없이 고민하고 치열하게 대결한다. 그러나 베토벤과 같은 계몽적인 확신에서 오는 완전한 극복을 노래하기에는 브람스가 산 시대가 그리 녹록치 않았다. 바그너의 출현으로 이전 질서의 단단한 토대에 금이 가기 시작한 때에, 그리고 무엇보다 스스로 바그너의 대항마를 자처했던 브람스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더욱 집요하게 되묻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음악은 종종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위압적인 대위법으로 제 자신을 단단하게 무장하곤 한다. 이것이 옳은가, 내가 하고 있는 것, 믿고 있는 것이 옳은가 하는 질문, 거의 강박적으로 되풀이되고 되풀이되는 질문에 그는 근사한 대답을 얻길 기대하지만-마치 그의 교향곡 1번의 휘황찬란한, 어떻게 보면 절실하기까지 한 피날레와 같이- 결국 종국에 그가 마주한 것은 그의 교향곡 4번에서 볼 수 있는 파사칼리아의 장렬한 산화 즉, 허공에 지르는 비명과 같이 대답 없는 소멸이다. op.116에서부터 이어지는 말년 브람스의 피아노 소품들은 이렇듯 쇠락해가는 풍경을 바라보는 그의 비관에 찬 시선으로 쓰여졌다. 말년에 이르러 온전한 낙관에 이르지 못하고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질문에 둘러싸여 있는 노인의-그는 고작 60대의 나이에 이미 그 누구보다 늙어버렸다- 음울한 뒷모습을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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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른손 성부와 왼손 성부의 마치 주먹질을 주고받는 듯한 충돌은 브람스의 대결이 더없이 필사적이고 치열한 것임을 보여준다. 두터운 화음이 만들어내는 혼탁한 색감은 브람스가 짓고 있었을 모호한 동시에 심오한 표정-그러나 베이스의 짙고 어두운 숨결에서 알 수 있듯 낙관보다는 비관에 가까운 표정-을 드러낸다. 소콜로프가 과격하게 옥타브를 오르내릴 때 늙은 브람스가 여전히 고군분투하고 있음을, 쓸쓸한 은빛 음색으로 느린 악구 속에서 신음할 때 브람스가 힘겹게 고통을 반추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결론적으로 마지막 카프리치오에서 내가-혹은 브람스가 목격한 것은, 결국 일말의 파국이다. 브람스 환상곡 op.116에 가슴을 시리게 하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황혼과 같은 아련함에서 오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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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면 슈만은 세계를 집어삼킨 인간이다. 그러나 그것은 실은 병적인 착각 혹은 착란에 가깝다. ‘관현악 없는 협주곡으로 명명된 슈만의 세 번째 소나타는 괴기스럽게 화려하고 악마적으로 산만한다. 슬라보예 지젝은 이 곡에 대해 슈만의 광기를 언급하며 "실체적 상징적 질서인 큰 타자속에서 지탱물을 점차로 빼앗기는 정신증적 격리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에 대한 가장 정확한 공식"이라고 설명했다. 독주자가 협주곡의 한 구성원으로서의 제 자신의 위치를 망각한 상태는 마치 세계에 제 자신만이 존재한다고 믿는 인간, ‘큰 타자를 부정하는 정신병에 걸린 인간과 같다는 의미일 게다. 그러므로 브람스와 그의 후원자이기도 했던 슈만은 실은 서로 정반대의 지점에 위치해 있다. 지젝은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에 대해 바이올린에 대항한 협주곡이라며 오케스트라의 장중한 교향악적 무게는 바이올린의 솔로 목소리를 삼켜버리는 바, 그것의 표현적 박진력과 겨루면서 그것을 짓누르며, 그것을 교향악적 직물의 요소들 가운데 하나로 축소시킨다.”고 말한 바에서 알 수 있다. 브람스가 세계와 갈등하는 왜소한 인간이라면 슈만은 세계를 집어삼킨 과잉된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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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난해한 곡을 해부하는 소콜로프의 연주는 더없이 정확하고 예리했다. 단적으로 말해 그의 해석은 폴리니와 호로비츠를 훌쩍 뛰어넘는 것이었다. 호로비츠가 슈만의 신경증적 다채로움을 극단적으로 과장해 단편적인 주제를 장식적으로 치장하고 나열하는데 그친다면, 또한 폴리니가 정신없이 놓인 조각들을 애써 정리하고 결합해서 엉성한 구조물이라도 만들어내려고 분투한다면(그래서 그는 곡을 산만하게 하는 두 개의 스케르초를 뺀 초판을 연주했다.), 소콜로프는 특유의 탁월한 조감능력으로 분열과 열정 가운데서 전 악장을 관통하는 하나의 흐름을 명민하게 포착해냈다. (그가 만들어내는 내밀하고 일관된 흐름은 정말 경이롭다. 그가 연주하면 음표와 음표 사이의 자리 잡은 쉼표조차 분명한 소리를 낸다. 마치 음표와 쉼표 사이에서 레가토가 이뤄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1악장에서 스케르초 악장으로 넘어갈 때는 그 흐름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자칫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였다. 불레즈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는 음악의 궤도를 이해하고 있는 연주자다.) 더불어 그는 슈마네스크한 화려함을 널찍한 팔레트로 현란하게 색칠하는 것도 놓치지 않았다.(물론 이는 그가 그의 손 끝에서 만들어내는 수백 가지의 음색과 뉘앙스 덕분이다.) 그의 성취는 마치 혼돈에 가까운 불길 속에서 단단한 보석을 움켜진 것과 같다. 소콜로프의 구조적 직관은 늘상 감탄스러운 것이었지만 특히 슈만 연주의 경우 가히 절묘한 경지라고 느꼈다. 이렇듯 엉켜있는 실타래처럼 불가해한 곡일수록 연주자의 역량을 가늠할 수 있는 좋은 척도가 되는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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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곡을 완전히 집어삼켜 그 흐름을 자기 뜻대로 통제하는 대가의 신묘함에 거듭 감탄했다. 여느 연주가들처럼 곡을 탐닉하다 그 흥에 겨워 본래 의도했던 흐름에서 이탈하는 음표가 그에게는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음표가 자신이 원하는 만큼의 음량과 음색, 뉘앙스로 철저히 통제되어 연주되는 느낌이었다. 결벽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예민하고 또 냉정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이렇듯 얼음같이 차가운 그의 손길에서 만들어진 음악이 기이하게 뜨거운 기운을 낸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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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대단히 음악적인-그의 몸짓을 표현할 다른 수사를 찾지 못 하겠다- 제스처를 취하며 연주한다. 그가 건반을 다룰 때 나타나는 불가사의한 아름다움은 그의 무뚝뚝한 외모를 뛰어넘는 무언가가 있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건 그가 연주하는 음악이 그의 제스처에 고스란히 반응한다는 점이다. , 그의 제스처는 우미한 동시에 기능적이다. 그가 건반을 애무한 듯 매만지면, 더없이 아름답고 아늑한 음향이 따스하게 노래한다. 반면 그가 건반을 학대하듯 내리치면, 거대한 음향이 날카롭게 공명한다. 그의 제스처는 과시적인 쇼맨쉽과는 다르게 철저히 음악적 목적에 종속되어 있는 듯 보였다. 나는 이렇듯 고상한 몸짓이 오롯이 음악이 되는 광경을 종종 목격하곤 한다. (카를로스 클라이버와 클라우디오 아바도의 경우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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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오늘 처음으로 연주회장에서 브라보를 외쳤다. 열렬한 환호성과 함께 커튼콜이 15번 정도 이어졌고, 앵콜이 6곡 정도 연주되었다.(쇼팽, 슈베르트, 라벨이었던 것 같다. 일일이 기억하지는 못하겠다.) 기나긴 커튼콜 끝에 객석에 불이 켜진 뒤에도 박수는 끊이지 않았다. 소콜로프가 다시 나와 이제 됐다며 작별인사를 했고 그제야 -나를 포함한-사람들은 자신들의 무자비함을 뒤늦게 깨닫고는 공연장을 떠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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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콜로프의 슈만 피아노 소나타 3번. 2010년 로테르담 실황. 이런 건 공유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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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ino 2012-05-19 0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소콜로프를 듣고 지젝을 읽는 몇 안되는 한국 분이시군요! 반갑습니다. 저도 브리콜라주님이 가셨던 공연과 동일 프로그램을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들었었습니다. 바로 전 슈베르트-슈만 프로그램은 파리와 오스트리아 빈에서 들었었고요. 정말 소콜로프는 언어가 아닌 음악 그자체로 예술 아니 더 나아가 삶에 대한 사람들의 가치관 자체를 송두리째 바꾸어버리는 진정한 예술가입니다.

저와 제 주변의 친구 몇몇은 헤비 지젝리더이자 소콜로프 매니아들입니다. 사실 이런 관심사를 가지고 한국에서 대화 가능한 사람들의 장을 넓히는 것은 쉽지 않은데! 정말 반갑습니다!

브리콜라주 2012-06-17 07:48   좋아요 0 | URL
소콜로프가 지젝이 책 써내듯 음반을 내주면 얼마나 좋을까요..ㅎㅎ 저 역시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