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흐 건반 파르티타 2

브람스 환상곡 op.116

슈만 피아노 소나타 3관현악 없는 협주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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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흐 파르티타 2번은 엄격한 템포에 반복을 모두 지켰다. (물론 반복을 할 때는 장식음을 넣거나 셈여림을 다르게 하는 등의 미묘한 변화를 주었다.) 탄탄한 아티큘레이션으로 모든 성부가 제 목소릴 내는 가운데 곡의 담론구조가 명징하게 드러났고, 이로 인해 성부 간의 대위법적 대화, 수평적 위계가 온전히 지켜졌다. 그가 젊을 때 녹음한 동곡 연주에 비하면 과격함이 줄고, 명상적인 분위기와 섬세한 표정이 더해졌다. 레코딩에서는 다소 신경질적으로 들렸던 그의 음색이 실황에서는 동그랗게 빛을 내며 고전적인 격조로 반짝였다. 사라방드의 숨죽인 걸음과 그윽한 깊이, 론도의 기습적인 질주, 카프리치오의 장려한 결론, 모두 더없이 조화로웠다. 그저 유유한 흐름에 몸을 맡기면 그만이었다. 거듭 속으로 감탄하고 있는 데 어느새 연주가 끝났네.. 다른 이들도 내 감상과 같았는지 다음 곡인 브람스 환상곡이 시작될 때 까지 박수가 끊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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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흐의 음악이 수차원의 성부를 아우르는 합리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대화라면, 브람스의 음악은 세계와 갈등하는 인간의 실존적인 대결이다. 충만한 조화와 완전한 평온, 합법칙적인 질서에 대한 신앙적인 믿음이 바흐가 딛고 선 대지라면, 견딜 수 없는 부조화와 끊임없는 의심, 사납게 덤비는 회의는 브람스가 딛고 선 대지이다. 이렇듯 거대한 균열과 분열로 맥없이 요동치는 땅 위에서 브람스는 끊임없이 고민하고 치열하게 대결한다. 그러나 베토벤과 같은 계몽적인 확신에서 오는 완전한 극복을 노래하기에는 브람스가 산 시대가 그리 녹록치 않았다. 바그너의 출현으로 이전 질서의 단단한 토대에 금이 가기 시작한 때에, 그리고 무엇보다 스스로 바그너의 대항마를 자처했던 브람스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더욱 집요하게 되묻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음악은 종종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위압적인 대위법으로 제 자신을 단단하게 무장하곤 한다. 이것이 옳은가, 내가 하고 있는 것, 믿고 있는 것이 옳은가 하는 질문, 거의 강박적으로 되풀이되고 되풀이되는 질문에 그는 근사한 대답을 얻길 기대하지만-마치 그의 교향곡 1번의 휘황찬란한, 어떻게 보면 절실하기까지 한 피날레와 같이- 결국 종국에 그가 마주한 것은 그의 교향곡 4번에서 볼 수 있는 파사칼리아의 장렬한 산화 즉, 허공에 지르는 비명과 같이 대답 없는 소멸이다. op.116에서부터 이어지는 말년 브람스의 피아노 소품들은 이렇듯 쇠락해가는 풍경을 바라보는 그의 비관에 찬 시선으로 쓰여졌다. 말년에 이르러 온전한 낙관에 이르지 못하고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질문에 둘러싸여 있는 노인의-그는 고작 60대의 나이에 이미 그 누구보다 늙어버렸다- 음울한 뒷모습을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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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른손 성부와 왼손 성부의 마치 주먹질을 주고받는 듯한 충돌은 브람스의 대결이 더없이 필사적이고 치열한 것임을 보여준다. 두터운 화음이 만들어내는 혼탁한 색감은 브람스가 짓고 있었을 모호한 동시에 심오한 표정-그러나 베이스의 짙고 어두운 숨결에서 알 수 있듯 낙관보다는 비관에 가까운 표정-을 드러낸다. 소콜로프가 과격하게 옥타브를 오르내릴 때 늙은 브람스가 여전히 고군분투하고 있음을, 쓸쓸한 은빛 음색으로 느린 악구 속에서 신음할 때 브람스가 힘겹게 고통을 반추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결론적으로 마지막 카프리치오에서 내가-혹은 브람스가 목격한 것은, 결국 일말의 파국이다. 브람스 환상곡 op.116에 가슴을 시리게 하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황혼과 같은 아련함에서 오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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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면 슈만은 세계를 집어삼킨 인간이다. 그러나 그것은 실은 병적인 착각 혹은 착란에 가깝다. ‘관현악 없는 협주곡으로 명명된 슈만의 세 번째 소나타는 괴기스럽게 화려하고 악마적으로 산만한다. 슬라보예 지젝은 이 곡에 대해 슈만의 광기를 언급하며 "실체적 상징적 질서인 큰 타자속에서 지탱물을 점차로 빼앗기는 정신증적 격리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에 대한 가장 정확한 공식"이라고 설명했다. 독주자가 협주곡의 한 구성원으로서의 제 자신의 위치를 망각한 상태는 마치 세계에 제 자신만이 존재한다고 믿는 인간, ‘큰 타자를 부정하는 정신병에 걸린 인간과 같다는 의미일 게다. 그러므로 브람스와 그의 후원자이기도 했던 슈만은 실은 서로 정반대의 지점에 위치해 있다. 지젝은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에 대해 바이올린에 대항한 협주곡이라며 오케스트라의 장중한 교향악적 무게는 바이올린의 솔로 목소리를 삼켜버리는 바, 그것의 표현적 박진력과 겨루면서 그것을 짓누르며, 그것을 교향악적 직물의 요소들 가운데 하나로 축소시킨다.”고 말한 바에서 알 수 있다. 브람스가 세계와 갈등하는 왜소한 인간이라면 슈만은 세계를 집어삼킨 과잉된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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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난해한 곡을 해부하는 소콜로프의 연주는 더없이 정확하고 예리했다. 단적으로 말해 그의 해석은 폴리니와 호로비츠를 훌쩍 뛰어넘는 것이었다. 호로비츠가 슈만의 신경증적 다채로움을 극단적으로 과장해 단편적인 주제를 장식적으로 치장하고 나열하는데 그친다면, 또한 폴리니가 정신없이 놓인 조각들을 애써 정리하고 결합해서 엉성한 구조물이라도 만들어내려고 분투한다면(그래서 그는 곡을 산만하게 하는 두 개의 스케르초를 뺀 초판을 연주했다.), 소콜로프는 특유의 탁월한 조감능력으로 분열과 열정 가운데서 전 악장을 관통하는 하나의 흐름을 명민하게 포착해냈다. (그가 만들어내는 내밀하고 일관된 흐름은 정말 경이롭다. 그가 연주하면 음표와 음표 사이의 자리 잡은 쉼표조차 분명한 소리를 낸다. 마치 음표와 쉼표 사이에서 레가토가 이뤄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1악장에서 스케르초 악장으로 넘어갈 때는 그 흐름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자칫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였다. 불레즈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는 음악의 궤도를 이해하고 있는 연주자다.) 더불어 그는 슈마네스크한 화려함을 널찍한 팔레트로 현란하게 색칠하는 것도 놓치지 않았다.(물론 이는 그가 그의 손 끝에서 만들어내는 수백 가지의 음색과 뉘앙스 덕분이다.) 그의 성취는 마치 혼돈에 가까운 불길 속에서 단단한 보석을 움켜진 것과 같다. 소콜로프의 구조적 직관은 늘상 감탄스러운 것이었지만 특히 슈만 연주의 경우 가히 절묘한 경지라고 느꼈다. 이렇듯 엉켜있는 실타래처럼 불가해한 곡일수록 연주자의 역량을 가늠할 수 있는 좋은 척도가 되는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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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곡을 완전히 집어삼켜 그 흐름을 자기 뜻대로 통제하는 대가의 신묘함에 거듭 감탄했다. 여느 연주가들처럼 곡을 탐닉하다 그 흥에 겨워 본래 의도했던 흐름에서 이탈하는 음표가 그에게는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음표가 자신이 원하는 만큼의 음량과 음색, 뉘앙스로 철저히 통제되어 연주되는 느낌이었다. 결벽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예민하고 또 냉정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이렇듯 얼음같이 차가운 그의 손길에서 만들어진 음악이 기이하게 뜨거운 기운을 낸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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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대단히 음악적인-그의 몸짓을 표현할 다른 수사를 찾지 못 하겠다- 제스처를 취하며 연주한다. 그가 건반을 다룰 때 나타나는 불가사의한 아름다움은 그의 무뚝뚝한 외모를 뛰어넘는 무언가가 있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건 그가 연주하는 음악이 그의 제스처에 고스란히 반응한다는 점이다. , 그의 제스처는 우미한 동시에 기능적이다. 그가 건반을 애무한 듯 매만지면, 더없이 아름답고 아늑한 음향이 따스하게 노래한다. 반면 그가 건반을 학대하듯 내리치면, 거대한 음향이 날카롭게 공명한다. 그의 제스처는 과시적인 쇼맨쉽과는 다르게 철저히 음악적 목적에 종속되어 있는 듯 보였다. 나는 이렇듯 고상한 몸짓이 오롯이 음악이 되는 광경을 종종 목격하곤 한다. (카를로스 클라이버와 클라우디오 아바도의 경우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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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오늘 처음으로 연주회장에서 브라보를 외쳤다. 열렬한 환호성과 함께 커튼콜이 15번 정도 이어졌고, 앵콜이 6곡 정도 연주되었다.(쇼팽, 슈베르트, 라벨이었던 것 같다. 일일이 기억하지는 못하겠다.) 기나긴 커튼콜 끝에 객석에 불이 켜진 뒤에도 박수는 끊이지 않았다. 소콜로프가 다시 나와 이제 됐다며 작별인사를 했고 그제야 -나를 포함한-사람들은 자신들의 무자비함을 뒤늦게 깨닫고는 공연장을 떠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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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콜로프의 슈만 피아노 소나타 3번. 2010년 로테르담 실황. 이런 건 공유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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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ino 2012-05-19 0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소콜로프를 듣고 지젝을 읽는 몇 안되는 한국 분이시군요! 반갑습니다. 저도 브리콜라주님이 가셨던 공연과 동일 프로그램을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들었었습니다. 바로 전 슈베르트-슈만 프로그램은 파리와 오스트리아 빈에서 들었었고요. 정말 소콜로프는 언어가 아닌 음악 그자체로 예술 아니 더 나아가 삶에 대한 사람들의 가치관 자체를 송두리째 바꾸어버리는 진정한 예술가입니다.

저와 제 주변의 친구 몇몇은 헤비 지젝리더이자 소콜로프 매니아들입니다. 사실 이런 관심사를 가지고 한국에서 대화 가능한 사람들의 장을 넓히는 것은 쉽지 않은데! 정말 반갑습니다!

브리콜라주 2012-06-17 07:48   좋아요 0 | URL
소콜로프가 지젝이 책 써내듯 음반을 내주면 얼마나 좋을까요..ㅎㅎ 저 역시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