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8
드보르작 교향곡 9번 '신세계에서'
무소륵스키/라벨 전람회의 그림
J.슈트라우스 피치카토 폴카
드보르작 슬라브 무곡 op.72 no.7
11.19
R.슈트라우스 돈 주앙, 장미의 기사 모음곡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
그리그 솔베이지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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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無를 살짝 넘는 소리였다. 울림은 투명했지만 이상하게도 빈틈이 없었다. 지휘자의 세공이 정치한 만큼, 연주자들의 집중력은 단단했다. 피아노에서 피아니시모로, 피아니시모가 다시 피아니시시모로, 한 줌의 셈여림을 덜어낼 때마다 음악의 밀도는 오히려 높아졌다. 이들이 연주한 쇼스타코비치의 완서악장은 작은 소리에 바쳐진 경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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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악구를 보듬는 하나의 완결된 세계. 얀손스와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의 음향은 고유의 맥박과 규칙을 지니고 있었다. 지휘자와 오케스트라는 한순간도 예사로 넘기지 않았다. 곡을 완전히 쪼갰다가 조각조각 각별한 뉘앙스로 이어붙인 듯 했다. 물감 위에 물감을 덧대면서 색깔의 다채로운 변화를 시험하는 것처럼, 성부 위에 성부를 덧댈 때마다 곡의 빛깔이 섬연하게 바뀌었다. 조정에 조정을 거듭해 음향의 위상을 정비하는 세밀함이 솔직히 지독하다 싶었다. 단원들은 온 힘을 다해 그들의 까다로운 우주에 헌신하고 있었다. 스스로의 동력으로 돌아가는 질서에 기름칠을 하듯 얀손스의 지휘는 유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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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케스트라는 거대한 팔레트였다. 제1바이올린부터 콘트라베이스까지, 플룻에서 튜바까지, 어디에 얼마만큼 힘을 주거나 빼면 소리의 무게와 명암이 어떻게 변하는지, 지휘자와 오케스트라는 속속들이 알고있는 듯 했다. 가령 이런 순간. 전람회의 그림 연주 중 얀손스가 베이스에 신호를 주자, 저현의 그윽함이 현악 전체에 퍼져 소리가 금세 어둑한 깊이를 얻었다. 마치 검은 잉크 한 방울이 삽시간에 물 속에 번지는 것처럼, 지휘자의 지시에 반응하는 감도가 유난히 빼어난 오케스트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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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는 지나치게 길들여진 드보르작이라고 불평할 수도 있겠다. 얀손스는 작곡가의 출생지에 무관심했다. 그의 해체와 조립을 거친 '신세계'는 구태를 한참 벗어나 있었다. 오로지 순음악적인 찬연함으로 빛났다. 무결하게 다듬어진 2악장의 몇몇 순간은 마치 영원할 것 같았다. <전람회의 그림>은 '무소륵스키'보다는 '라벨'에 방점이 찍혔다. 시계공의 정교한 오케스트레이션에 얀손스와 그의 오케스트라만큼 적합한 상대를 찾을 수 있을까. 시작 직후 튜바주자가 부품을 떨궈 생긴 약간의 흔들림은 오래 가지 않았다. 정밀하게 작동하는 시계 속을 들여다 볼 때의 황홀함. 그는 장엄한 피날레에 이르러서도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그저 가는 시간이 아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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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날의 1부는 올해로 탄생 150주년을 맞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작품들로 채워졌다. 돈 주앙의 흐드러진 관능을 푸지게 노래하는 총주 뿐 아니라, 이야기의 진행을 설명하는 관현악적 레치타티보도 정성스럽게 다듬어져 있었다. 얀손스의 조형감각은 조금도 기우뚱하지 않았다. 장미의 기사 모음곡은 삼중창의 절정에서 보여준 현악의 깨질 듯한 정결함만큼이나, 왈츠를 주무르는 지휘자의 우아한 활력이 기억에 남는다. 마리스 얀손스는 왈츠리듬을 가장 능란하게 구사하는 지휘자 중 한 사람임이 분명했다. 1부가 끝난 후 이미 공연이 끝난 것처럼 커튼콜이 연신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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깐깐한 피아니스트의 아집은 다행히 행운이 되었다. 지메르만이 내한을 거부해 생긴 빈 자리는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으로 채워졌다. 오래도록 음미하고 곱씹을 연주였다. 입체적으로 부각된 악상들이 서로를 겨누어 동시다발로 움직이자, 날실과 씨실이 날렵하고 촘촘하게 교차했다. 3악장 '라르고'에 이르러서는 한숨마저 조심스러운 약음이 무대 위로 피어올랐다. 몇몇 음악가들만이 도달할 수 있는 높이로, 하나의 스타일이 극단에 닿는 것을 보았다. 이틀 간의 연주 중 정수였고, 백미였다. 4악장의 코다는 바지런히 쌓아올린 성채처럼 묵직했다. 목관의 장중한 읊조림에서 시작되는 푸가토는 어느새 현악의 금빛 물결로 넘실거렸다. 얀손스에게는 소리의 크기보다 소리의 내용이 중요했다. 과장이 지양된 정직한 환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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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주위의 공기가 엷은 광채로 물드는 것만 같았다. 마지막 앵콜로 그리그의 <솔베이지의 노래>를 연주할 때였다. 지휘자와 오케스트라의 협업은 내밀한 정점에 달해 있었다. 그리고 약간의 침묵. 얀손스는 거의 탈진해 포디움 위에서 내려왔다. 관객의 환호 속에 무대를 떠날 때 그는 다리를 절었다. 퇴장하는 그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응시할 수 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