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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4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 - 길 샤함

스트라빈스키 불새 모음곡 3번(1945)


크라이슬러 아름다운 로즈마리

그리그 'Lezter Fruhling' from Zwei Elegische Melodien op.34-2  

엘가 The wilde bears


12.05

하이든 교향곡 100번 G장조 <군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알프스 교향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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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얀손스와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은 특별하다. 예리하게 조절되는 셈여림이나, 정밀하게 세분화된 프레이징, 멜로디 라인에 온기를 더하고 광채를 내는 것까지, 모든 작품을 그들만의 방식으로 체화하기 때문이다. 어떤 곡을 연주하든 악구 단위로 해체했다가 신중하게 재구성한 것처럼 황금비율로 배합된 음향이 흘러나온다. 지휘자의 음악관과 오케스트라의 비르투오시티, 오랜 헌신과 호흡으로 만들어진 가지런한 음향세계. 오케스트라 팀워크의 이상형이 있다면 이들의 음악-만들기에 가까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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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은 오케스트라의 안정적인 바탕 위에서 바이올린이 변칙적으로 농담을 풀어놓는 듯한 연주였다. 1악장은 음정이 플랫되고 박자가 다소 어긋나는 등 샤함의 바이올린이 흔들렸는데, 카덴차를 지나며 특유의 유려한 개성을 되찾았다. 2악장은 피아니시모의 향연. 이들만큼 균일한 밀도의 작은 소리를 낼 수 있는 다른 오케스트라가 있을까 싶다매 내한마다 또 레코딩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를 살짝 넘는 소리'를 만드는 데 도가 튼 지휘자와 오케스트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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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내한의 정점은 스트라빈스키의 불새 모음곡이었다. 작곡가의 치밀한 오케스트레이션에 대한 감탄과, 이 까다로운 음향설계를 찬란한 디테일로 구현하는 오케스트라에 대한 감탄을 동시에 했다빛을 받으면 형형색색 무지개를 쏟아내는 스테인드글라스라고 해야할까. 악구 하나하나 투명하게 드러나길 원하는 지휘자의 음악관이 고감도 오케스트라를 만나 눈부신 정밀함을 성취한 듯 했다. 두고두고 아껴 기억할 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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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묘하게 세공되지 않은 순간이 없었다. 서주 베이스 음형의 음산한 밀도와 자로 잰 듯한 하모닉스, "파 드 되"의 정치한 목관 앙상블과 고혹적인 현악의 레가토. 예민한 귀를 가진 지휘자의 섬세한 통제 탓에, 솔리스트들의 실력이 개인기로 과시되지 않고 음향적 균형에 녹아들었다. "공주의 호로보드"에서는 얀손스가 프레이징의 마술사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끊어질듯 말듯 현과 관을 넘나드는 모든 프레이즈가 누빈 구석 없이 매끄러웠다. 론도가 끌날 무렵 피어오른 약음은 극히 아득했는데, 그 덕분에 뒤를 때리듯 튀어나온 카슈체이 댄스에 객석 전체가 움찔했다. 처음에는 브라스가 흔들리는 등 앙상블이 조금 흐트러졌지만, 이내 여태껏 들어보지 못한 디테일이 쉼없이 쏟아졌다. 음표 하나 흘리지 않는 아티큘레이션이 단조로운 음형에도 숨결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다만 정교한 음향을 위해 템포를 규칙적인 박절에 가두는 느낌이었다.) 이어 하프의 반복되는 오스티나토와 함께 "자장가"의 선율이 울려퍼졌다. 관능적인 색채가 연주장을 휘감았고, 아연한 기분에 작게 탄식했다. 피날레에 대한 기억은 사실 좀 추상적이다. 음향적이라기보다는 촉각적인 경험에 가까웠다융단처럼 깔린 현악의 피아니시모 위에서 호른의 선율이 황홀한 흐름을 타기 시작했다. 프레이징이 마법을 부려 기나긴 크레셴도가 이음새 하나 없이 한순간에 부풀었다. 마지막 총주에 이르자 치솟는 트레몰로 위에 금관이 더해졌고, 거대한 광채가 장벽처럼 우뚝 섰다. 숨 막히게 유려한 도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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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빼어난 실황을 경험하면 곡이 완전히 달리 보이곤 한다. 앞선 불새가 그랬고, 군대교향곡도 그런 경우였다. 악구와 악구가 탄력적으로 반응해 하나의 유기체를 이루는 천의무봉의 연주. 모든 성부가 적절한 순간에 빈틈없이 이행하고 교차하니, 음향에서 놀라운 입체감이 살아나는 게 당연했다. 만화경처럼 형태를 바꿔가며 등장하는 악상들이 치밀한 기교로 맞물릴 때는 거의 호사스러운 추동력을 느꼈다단편적인 모티브를 각양각색으로 변주하는 곡의 고전적 완성도만큼이나, 이 유희적인 모티브 활용에 매순간 활기를 불어넣는 지휘자와 악단의 집중력에 탄복했다. 곡과 해석과 연주가 일체가 된 느낌. 현대악기로 연주하는 하이든으로는 이 이상이 가능할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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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석의 스펙트럼을 서사성과 순음악성을 양끝에 놓고 구분한다면, 마에스트로는 보통 둘 사이에서 극단적인 순음악성을 택했다. 알프스 교향곡도 마찬가지였다. 얀손스는 알프스의 세부를 지독하게 조탁해 혼돈에 가까운 순간에도 미묘한 뉘앙스를 구분했다극적인 긴박함이 줄고 질서있는 충만함이 가득했다. 교향시적 서사보다 순도 높게 정제된 음향 그 자체를 탐닉하는 것처럼 보였다. 다만 지휘자의 초정밀세공이 스트라빈스키나 하이든만큼 곡과 어울리는 지는 의문이었다. 연주에 호불호가 갈렸다면 아마 이 결벽적인 순음악성에서 비롯되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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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프레이즈가 정합적으로 분기했다 결합했고, 단원들이 촘촘한 설계도를 벗어나는 일은 좀처럼 드물었다어떤 장면은 기예에 가까운 기교로 연마되어 있었다. 가령 "수풀과 덤불에서 길을 잃다"는 모티브가 대위적으로 뒤엉켜 난잡하게 연주되기 쉬운 부분이다. 그런데 이날 연주는 레코딩에서도 듣기 힘든 수준으로 반음계적 푸가가 선명하게 직조되었다. 부점리듬의 모티브가 돌발적으로 번뜩이는 '"위험한 순간"도 더없이 절륜했다. 기술적 완성도만으로도 감탄할 만한 장면들. 곡과 해석이 가장 감격적으로 공명한 부분은 이 곡의 절정이기도 한 "정상에서"였다. 알프스 정상에 선 감흥이 더없이 충만한 화성적인 밸런스로 노래되었다. 지휘자의 개성이 잘 드러났던 다른 장면은 "천둥과 폭풍우". 정신없이 퍼부어지는 퍼커션을 뚫고 현악과 목관의 속주가 음형 음형 분리되어 결마다 구별될 정도였다. 하이든에서부터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까지, 텍스쳐가 복잡하면 복잡할수록 얀손스의 현미경은 집요하게 배율을 높였다. 폭풍우 이후부터는 투어의 마지막이라 그런지 연주에서 피로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오케스트라는 끝까지 의도된 궤도 위에서 찬연한 음향을 빚었다. 공연을 끝낸 얀손스는 거의 탈진해 있었다. 음악적으로 인간적으로도 높은 수준에 오른 지휘자와 오케스트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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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들의 공연을 다섯 번 경험하며 거듭 느끼는 것이지만, 악마만큼이나 천사도 디테일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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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실의 단면은 매끄럽지 않다. 울퉁불퉁하거나 균열이 가 있고, 인과의 사슬이 뒤엉켜 있다. 지난해 말부터 올해 말까지 이어졌던 서울시향 사태도 그렇다. 지휘자가 자리에서 물러나는 혼란 속에, 오늘 밤 정명훈과 시향은 마지막 연주회를 갖는다. 예견했던 일이지만 그래도 급작스러운 마지막이다.

 

 우선 대표의 폭언이 있었다. 성공적인 커리어를 밟아온 대표의 업무방식은 폭언이었다. 13명의 직원이 시향을 떠났고, 나머지 14명의 직원은 그럼에도 시향에 남았다. 대표는 자신의 거친 언사가 서울시향의 어설픈 행정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 아마 그런 면도 있을 것이다. 불투명한 행정은 항공권비를 둘러싼 논란을 불렀다. 정명훈이 항공권비를 부당하게 횡령했다는 주장과, 오히려 누락되어 받지 못한 비용이 1억원에 달한다는 주장이 맞붙었다. 서울시향의 행정은 항공권비 내역을 제대로 소명하지 못할 정도로 주먹구구식이고 불투명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이 대표의 폭언을 온전히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어설픈 부하를 폭언으로 다스리는 대표의 말들은 드러난 것만 놓고 봐도 심각한 인권침해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뀌는 반전을 쫓는 언론들을 이 부분을 아예 누락해버린다.


 다음으로 증언이 엇갈리는 성추행 혐의가 있다. 대표는 증거불충분으로 무혐의 처분을 받았고, 직원은 무고죄로 고소를 당했다. 법원은 사실관계가 분명치 않다며 직원에 대한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정명훈의 부인과 비서가 직원들을 규합해 허위사실을 유포했다는 주장이 있고, 정명훈 측은 부인이 오히려 직원 구제에 힘을 보탠 것이라며 반박한다. 부인이 대표에 대한 반감을 직원과 공유하며 적극적으로 개입했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다만 부인이 직원들을 부추겨 성명서를 내게 한 것인지, 아니면 내부고발자인 직원들이 부인을 통해 정명훈이 구명에 나서게끔 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작용했을 수도 있다.) 휴대폰이나 전자기기를 사용하지 않는 정명훈과 접촉하는 방법은 부인을 통하는 것이라는 게 음악계 전언이니, 직원들이 부인을 창구로 정명훈에게 의견을 전달하려 했을 수도 있다. 다른 쪽으로는, 부인이 직원들의 처우 문제를 지렛대로 대표를 몰아내려 한 것일 수도 있다. 어느 것도 확실하지 않은 추측이다. 법적 쟁점은 성추행 무고에 있을 것이다. 성추행 혐의가 조작된 것인지, 조작된 것이라면 직원이 만들어낸 것인지, 아니면 부인의 개입에 의한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부인의 역할이 의견을 모으고 이슈 파이팅을 주도하는 데서 그치는지, 아니면 그 이상인지 불확실하다. 검증되지 않은 확신이 언론에 넘쳐난다. 차차 사실관계가 밝혀지리라 믿는다.

 

 서울시향에 관한 이야기는 이렇듯 모호하고 혼란스럽다. 선의와 악의가 섞여 있고, 확정되지 않은 사실들이 파편처럼 널려있다. 언론은 자극적이고 명료한 이야기를 원한다. 파렴치한 성추행범이었던 대표는 순식간에 무고한 피해자가 되었다. 사람들은 친MB라며, 친박원순이라며, 종북이라며, 부패한 예술가라며, 저마다 자신의 악당을 지칭하는 수식어를 정명훈에게 붙였다. (이 사태가 지극히 '한국적'인 이유다.) 왜 혈세를 클래식 음악에 들이냐는 냉소와, 예술가는 돈에 초연해야 한다는 훈계가 이어졌다. 언론의 목소리가 클수록 사건의 세부는 오히려 무시되었고, 결론이 나지 않은 이야기는 늘 성급한 결론으로 치달았다.

 

 그간 이뤄낸 것에 비해 초라한 지휘자의 퇴장도 안타깝지만, 무엇보다 시향 단원들이 걱정된다. 그들은 매해 계약을 새로 갱신하며, 불안정한 지위로 지난 10년을 버텨온 이들이다. 애호가들은 10년간 그들이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보았고, 그 뿌듯함의 기억을 나눴다. 그들의 성취와 노력이 최근의 일들로 무너지지 않길 바란다. 돌아보면 정말 근사한 순간이 많은 10년이었다. 서울시향의 앞날에 행운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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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8

드보르작 교향곡 9번 '신세계에서'

무소륵스키/라벨 전람회의 그림


J.슈트라우스 피치카토 폴카

드보르작 슬라브 무곡 op.72 no.7


11.19

R.슈트라우스 돈 주앙, 장미의 기사 모음곡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


그리그 솔베이지의 노래


 무無를 살짝 넘는 소리였다. 울림은 투명했지만 이상하게도 빈틈이 없었다. 지휘자의 세공이 정치한 만큼, 연주자들의 집중력은 단단했다. 피아노에서 피아니시모로, 피아니시모가 다시 피아니시시모로, 한 줌의 셈여림을 덜어낼 때마다 음악의 밀도는 오히려 높아졌다. 이들이 연주한 쇼스타코비치의 완서악장은 작은 소리에 바쳐진 경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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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악구를 보듬는 하나의 완결된 세계. 얀손스와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의 음향은 고유의 맥박과 규칙을 지니고 있었다. 지휘자와 오케스트라는 한순간도 예사로 넘기지 않았다. 곡을 완전히 쪼갰다가 조각조각 각별한 뉘앙스로 이어붙인 듯 했다. 물감 위에 물감을 덧대면서 색깔의 다채로운 변화를 시험하는 것처럼, 성부 위에 성부를 덧댈 때마다 곡의 빛깔이 섬연하게 바뀌었다. 조정에 조정을 거듭해 음향의 위상을 정비하는 세밀함이 솔직히 지독하다 싶었다. 단원들은 온 힘을 다해 그들의 까다로운 우주에 헌신하고 있었다. 스스로의 동력으로 돌아가는 질서에 기름칠을 하듯 얀손스의 지휘는 유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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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케스트라는 거대한 팔레트였다. 제1바이올린부터 콘트라베이스까지, 플룻에서 튜바까지, 어디에 얼마만큼 힘을 주거나 빼면 소리의 무게와 명암이 어떻게 변하는지, 지휘자와 오케스트라는 속속들이 알고있는 듯 했다. 가령 이런 순간. 전람회의 그림 연주 중 얀손스가 베이스에 신호를 주자, 저현의 그윽함이 현악 전체에 퍼져 소리가 금세 어둑한 깊이를 얻었다. 마치 검은 잉크 한 방울이 삽시간에 물 속에 번지는 것처럼, 지휘자의 지시에 반응하는 감도가 유난히 빼어난 오케스트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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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이는 지나치게 길들여진 드보르작이라고 불평할 수도 있겠다. 얀손스는 작곡가의 출생지에 무관심했다. 그의 해체와 조립을 거친 '신세계'는 구태를 한참 벗어나 있었다. 오로지 순음악적인 찬연함으로 빛났다. 무결하게 다듬어진 2악장의 몇몇 순간은 마치 영원할 것 같았다. <전람회의 그림>은 '무소륵스키'보다는 '라벨'에 방점이 찍혔다. 시계공의 정교한 오케스트레이션에 얀손스와 그의 오케스트라만큼 적합한 상대를 찾을 수 있을까. 시작 직후 튜바주자가 부품을 떨궈 생긴 약간의 흔들림은 오래 가지 않았다. 정밀하게 작동하는 시계 속을 들여다 볼 때의 황홀함. 그는 장엄한 피날레에 이르러서도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그저 가는 시간이 아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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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날의 1부는 올해로 탄생 150주년을 맞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작품들로 채워졌다. 돈 주앙의 흐드러진 관능을 푸지게 노래하는 총주 뿐 아니라, 이야기의 진행을 설명하는 관현악적 레치타티보도 정성스럽게 다듬어져 있었다. 얀손스의 조형감각은 조금도 기우뚱하지 않았다. 장미의 기사 모음곡은 삼중창의 절정에서 보여준 현악의 깨질 듯한 정결함만큼이나, 왈츠를 주무르는 지휘자의 우아한 활력이 기억에 남는다. 마리스 얀손스는 왈츠리듬을 가장 능란하게 구사하는 지휘자 중 한 사람임이 분명했다. 1부가 끝난 후 이미 공연이 끝난 것처럼 커튼콜이 연신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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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깐깐한 피아니스트의 아집은 다행히 행운이 되었다. 지메르만이 내한을 거부해 생긴 빈 자리는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으로 채워졌다. 오래도록 음미하고 곱씹을 연주였다. 입체적으로 부각된 악상들이 서로를 겨누어 동시다발로 움직이자, 날실과 씨실이 날렵하고 촘촘하게 교차했다. 3악장 '라르고'에 이르러서는 한숨마저 조심스러운 약음이 무대 위로 피어올랐다. 몇몇 음악가들만이 도달할 수 있는 높이로, 하나의 스타일이 극단에 닿는 것을 보았다. 이틀 간의 연주 중 정수였고, 백미였다. 4악장의 코다는 바지런히 쌓아올린 성채처럼 묵직했다. 목관의 장중한 읊조림에서 시작되는 푸가토는 어느새 현악의 금빛 물결로 넘실거렸다. 얀손스에게는 소리의 크기보다 소리의 내용이 중요했다. 과장이 지양된 정직한 환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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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주위의 공기가 엷은 광채로 물드는 것만 같았다. 마지막 앵콜로 그리그의 <솔베이지의 노래>를 연주할 때였다. 지휘자와 오케스트라의 협업은 내밀한 정점에 달해 있었다. 그리고 약간의 침묵. 얀손스는 거의 탈진해 포디움 위에서 내려왔다. 관객의 환호 속에 무대를 떠날 때 그는 다리를 절었다. 퇴장하는 그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응시할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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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크너 : 교향곡 9번
브루크너 (Anton Bruckner) 작곡, 아바도 (Claudio Abbado) 지휘, / 유니버설(Universal) / 2014년 7월
평점 :
품절


음이 침묵으로 스민 후에도 음악은 남았다. 마지막 질료마저 덜어낸 순수형상처럼. 지나온 드라마의 깊이가 아득해, 소리없는 에필로그가 영영 끝나지 않을 것만 같다. 신성을 위해 쓰인 곡이 과녁에 닿을 때, 정적을 사랑한 지휘자의 결말은 고요했다. 황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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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는 말수가 적고 조용했다. 여느 지휘자처럼 말하고 가르치는 것을 즐기지 않았다. 사실 듣는 게 성향에 더 맞았다. 그는 듣는 사람이었다. 그는 소리를, 그 중에서도 가장 작은 소리를, 나아가 침묵을 들었다. 말년의 그의 공연에서는 마지막 음향이 사라지고 난 후, 늘 정적이 찾아들었다. 모두가 숨죽였고, 박수는 오래도록 나오지 않았다. '작고 기품있고 연로한' 그는 침묵의 시선을 느끼며, 기묘한 공허를 길게 음미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연주한 곡은 브루크너 교향곡 9번이었다. 튜바의 긴 묵상 끝에 최후의 피치카토가 퉁기고 난 후에도, 아마 그러한 침묵이 자리잡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마지막 순간에도, 그는 오래도록 침묵을 듣고 있었을 것이다.



2.

 클라우디오 아바도는 음악 속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미켈란젤로 아바도는 바이올리니스트이자 베르디 음악원의 교수였다. 소문에 따르면, 미켈란젤로와 협연하기 위해 밀라노를 방문한 레너드 번스타인은 16살의 아바도가 '지휘자의 눈'을 갖고 있다며 칭찬했다고 한다. (탁견이었는지, 아바도는 훗날 번스타인 밑에서 1년간 뉴욕 필 부지휘자를 지낸다.) 12살의 아바도는 담벼락에 '바르토크 만세!'라고 낙서해 '바르토크'를 파르티잔으로 오인한 게슈타포의 의심을 사기도 했다. 아버지의 지도 아래 그는 어려서부터 피아노로 다른 악기를 반주하며 자랐다. 


"마치 대화하는 것 같았어요. 다른 이의 소리를 주의 깊게 듣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을 비집고 들어가 아직 이야기하지 않은 서로의 느낌과 생각을 파악하려고 노력했죠."  <지휘의 거장들> p.38


그는 "아버지의 실내악단과 함께 연주 여행을 다녔으며, 체임버 오케스트라를 직접 조직하기도 했다." (그리고 훗날 악단 조직의 귀재..로 성장한다.) 탱글우드의 지휘자 경연대회에서 우승한 20대의 전도유망한 아바도는 의외의 길을 택했다. 그는 이탈리아로 돌아가 파르마에서 3년간 실내악을 가르친다. 그의 어린 시절을 돌아봤을 때, 그리고 훗날 그의 삶을 생각해 봤을 때,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그리고 적절한 선택이었다.


"가르치는 것은 훌륭한 경험이었습니다. 나는 젊은 음악가들로부터 많이 배웠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연주했습니다. -지휘자 없이 스트라빈스키의 '병사 이야기'를 연주하거나, 바르토크의 두 대의 피아노와 퍼커션을 위한 소나타를 연주하는 식으로- 큰 그룹을 이루어 실내악을 하는 것이죠. 그래서 제가 유럽 연합 청소년 오케스트라(EUYO)를 시작했을때, 이는 같은 과정의 연속선 상에 있었습니다." 가디언 지와의 인터뷰


그 이후 "대규모로 연주하는 실내악은  ... 지휘자로서의 삶에서 꿈"이 되었다. 물론 그가 꿈꾼 실내악은 수십 명이 한 사람같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게 아니었다. 그의 실내악은 타인의 내밀한 소리에 귀 기울이고, 서로 대화를 주고 받는 것에 가까웠다. 베를린 필의 오보이스트인 알브레히트 마이어에 따르면, 아바도는 연주자가 지휘자의 지시를 기다리길 원치 않았다. 아바도는 플루티스트가 특정하게 프레이즈하면 오보이스트도 그런 프레이즈로 화답하길 원했다. 그는 트렘펫이 너무 소리가 크니 음량을 줄이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트럼펫이 현악의 연주를 따라가며 음량을 조절하도록 권유했다. 그의 실내악은 서로의 소리를 '듣는' 데서 시작한다. 그리고 말러와 같이 대규모 관현악 곡에서도 서로의 소리를 듣게 하는 것은, 많은 연주자들이 증언하는 아바도의 가장 놀라운 재능이다. 

 


3.

 고고학자였던 외할아버지를 닮아 아바도는 과묵했다. 자신을 '클라우디오'라고 소개하며 시작했던 베를린 필 상임 시절은 단원들이 조용한 리허설에 적응하지 못해 삐걱됐다. 베테랑 바이올린 주자 베스트팔은 "리허설에서는 아르농쿠르를, 연주장에서는 아바도를!"이라는 단원들의 농담을 전하기도 했다. 베를린 필은 '미스터 카라얀'의 선생님 같은 수업방식에 익숙했다. 악장 스타브라바에 따르면, 음악적으로도 두텁고 육중한 스타일에 익숙했던 단원들과 아바도는 자주 충돌했다. 90년대 중반에는 리허설 중 단원들 사이에서 고성이 오고갔다는 루머가 떠돌았다. 그의 상임시절 악장을 지냈던 콜야 블라허는 이렇게 말한다.


"아바도는 베를린에서 우리와 함께 작업하면서 대단히 위계적인 음악 작업에 민주주의를 도입하려 한 최초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새롭고도 힘들었습니다. 모두가 민주주의와 개인의 자유를 감당할 수 있어야 하니까요. 말이 나와서 말인데, 누가 어떻게 하라고 그냥 지시할 때가 훨씬 쉬운 법입니다." <마에스트로..> p.316


그가 음악을 만드는 방식은 단원들 모두에게 막중한 책임감을 요구했다. 단원 개개인은 단순히 지휘자의 지시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상대와 연관되고 연루되는 방식을 이해하며 연주해야 했다. "예컨대, 잉글리쉬 호른의 독주가 부각되도록 자신의 소리를 낮춰야 하는지, 첼로의 선율을 반주하는 대목인지, 트롬본을 받쳐주는 대목인지, 최대한 힘차게 연주해야 하는 대목인지"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는 물론 "오케스트라의 듣고자 하는 집단적인 의지가 작동"해야만 가능하다. EUYO에서 그와 함께 연주했던 BBC심포니의 수석 클라리넷 주자인 리차드 호스포드는 이런 이야기를 한다.


"목관 주자로서, 제가 발견한 그의 특별한 점은 그가 제가 연주하도록 놔둔다는 것이에요. 당신이 그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연주한다면, 설령 그것이 그가 생각했던 방식이 아니더라도, 그는 당신을 따라갈 거에요. 그리고 당신이 솔로를 할 때면, 그는 오케스트라가 당신을 따르게 할 겁니다. 그는 그가 원하는 것을 독단적으로 말하기보다는 당신의 생각에 힘을 불어넣습니다."


그에게 리허설은 공연에서 정점을 맞기 위한 느리지만 점진적인 고양의 과정이었다. 그가 하는 일은 특정 화성적, 선율적 국면에서 누구에게 귀 기울여야 하는 지 방향을 설정하는 정도였다. 반복적으로 서로의 소리를 듣는 집요한 과정을 통해, 곡에 대한 오케스트라의 이해는 밀도를 높여갔다. 연주자들은 큰 흐름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자유를 허락 받았다. 진정한 드라마는 늘 공연 당일 무대 위에서 일어났다. 지난한 도움닫기를 통과한 지휘자는 최상의 자유를 만끽하는 듯 보였다. 단원들은 그가 리허설에서 볼 수 없던 광채로 빛나는 것을 보았다. 포디움에 선 아바도는 왼손의 놀라운 활력을 날개 삼아 오케스트라와 함께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4.

 이 까다로운 과정이 이상에 도달한 것은 마지막 10년을 헌신한 루체른 시절이었다. 아바도가 오로지 그를 위해 모인 "친구들"과 음악을 만드는 과정은 그 자체로 흥미롭다. 그것은 지휘자와 오케스트라 사이에서 작용하는 비밀스러운 심리학의 열쇠가 된다. 여름의 루체른에서는 강렬한 '믿음의 전이'가 일어났다. 각양각색의 단원들을 단기간에 묶는 것은 그들의 강력한 믿음이다. 아바도가 '곡의 모든 것을 알고 있을 것'이라는 믿음. 아바도의 몸짓언어가 음악의 핵심을 정확히 반영한 것이라는 믿음. 더불어 그의 음악적 이상에 대한 전적인 신뢰. 콜야 블라허의 말에 의하면, 이는 물론 '착각'이다. 하지만 실제로 단원들이 아바도의 지휘에 맞춰 "불 속에라도 뛰어들게" 하는 실로 위력적인 착각이다. 과정은 이렇다. 단원들은 리허설의 반복으로 음악의 큰 흐름을 익히고, 다른 이의 연주에 귀 기울여 가며 자신이 나서야 할 때와 한 걸음 물러설 때를 익힌다. 아바도 역시 이 '집단적인 듣기' 과정에 동참해 단원들의 자유를 존중하고, 전체적인 구상을 조율한다. 물론 가장 결정적인 것은 곡에 대한 비범한 이해를 갖춘 지휘자의 우미하고 명료한 몸짓이고,  음악적 이상에 동의해 모인 단원들의 깊은 신뢰다. 단원들은 스스로 원하는 대로 연주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음악 전체의 흐름에 헌신하고 몰입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음향의 격정을 체화한 지휘자의 몸짓에 집중해 그의 즉흥적인 움직임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지휘자는 오랜 친구들을 믿고 한달음에 도약한다.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의 연주에서는 자연스러운 활력과 반짝이는 즉흥성이 공존한다. 그것은 자유와 규제 사이의 보기 드문 균형이다. 경이로운 믿음의 주고 받음이다. "아바도의 신체 언어는 루체른에서 소리 언어가 된다." 오랫동안 그의 오른편에서 비올라를 연주했던 (머리숱이 적은) 볼프람 크리스트는 말한다.


"굳이 말할 필요가 없어요. 그의 얼굴을 보면 우리가 너무 세게 연주하는지 어떤지 알 수 있으니까요. 말하지 않아도 그의 손에서 모든 것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스스로를 그의 몸짓에 맡기면 됩니다. 지식과 기술만 갖추고 있으면 그를 따라갈 수 있습니다. 루체른의 모든 연주자들은 물론 이럴 능력이 되죠. 하지만 그러려면 스스로를 믿어야 하고 그가 행하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특히 무대에서요. 음악회에서 그는 마법을 발휘합니다." <마에스트로..> p.311


가디언 지의 기자 톰 서비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마치 예언했던 대로 착착 이루어지는 과정과도 같다."



5.

 클라우디오 아바도에게는 원체험이라 할 사건이 있었다. 그는 7살 때 라 스칼라에서 드뷔시의 '녹턴'을 들었다. 


"드뷔시의 녹턴 세 곡이 내가 처음으로 들은 음악입니다. 그날 안토니오 과르니에리가 지휘를 했죠. 그 자리에서 음악가가 되기로, 지휘자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런 마술과도 같은 일을 나도 하고 싶었으니까요. 하프와 트럼펫이 연주하던 그 순간..." <마에스트로..> p.287


그는 그날 밤 일기에 "지휘자가 되어 녹턴을 지휘한다"고 써놓았다. 그리고 이 풋풋한 다짐은 훗날 근사하게 이루어졌다. 그가 베를린 필과 녹음한 드뷔시의 녹턴에서는 미묘한 색채로 서로를 부딪는 파도의 춤사위를 들을 수 있다. 이탈리아인 아바도는 푸치니를 연구할 시간에 드뷔시를 공부하겠다고 했다. 심지어 바그너마저 그의 손을 통해 -이런 말이 가능하다면- '드뷔시의 세례'를 받았다. 그와 베를린 필의 파르지팔 모음곡이 그렇다. 엄숙한 음향은 겹겹의 층으로 분절되어 갖가지 빛깔로 산란한다. 투명한 선율이 보드라운 잔향을 남기며 고상한 호흡으로 노래한다. 물론 이는 너무 편협한 감상이다. 그는 단지 드뷔시의 시선을 거친 바그너에 머물지 않았다. 그보다는 둘 사이의 근본적인 연관성을 고민했다. 아바도의 어떤 연주는 드뷔시와 바그너의 우아한 종합을 이루곤 한다. 바그너는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작곡 과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나의 세밀하고 깊은 예술을 이제 이행의 미학이라 이름 붙이고 싶다. 이런 수많은 이행이 한데 빚어져 나의 공예품이 탄생하기 때문이다." <지휘의 거장들> p.37


아바도의 손 끝에서 실현되는 것 역시 이 '이행의 미학'이다. 그의 지휘에서 비롯되는 음악적 흐름은 세부를 사려깊게 살피면서도 쾌적한 유속을 잃지 않는다. 악구의 사소한 모세혈관부터 선율의 거대한 줄기까지, 음악은 쉼없이 이행되며 끝없는 흐름을 이룬다. 음악 평론가 볼프강 슈라이어가 '레가토의 원칙'이라 이름 붙인 것. 이것이 아바도의 드뷔시와 바그너에서 일관되게 발견할 수 있는 그 무엇이다. 그의 레가토는 멜로디 라인에 윤을 내는 게 아니라, 음향을 흐르게 하는 것이었다. 톰 서비스를 인용하자면, "이렇게 끝없이 이어지는 느낌이야말로 아바도의 몸짓이 지시하는 바다. 그가 왼손으로 계속해서 전하는 음악적 아이디어가 바로 이것인데, 이로써 그는 악기들이 연주하는 개별 성부들 위에 더 높은 음악적 흐름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볼프람 크리스트는 아바도가 '레가토의 광신자'라고 말한다.


"현악과 목관 주자들이 가장 까다롭게 여기는 연주 가운데 하나인데, 활이나 호흡의 길이에 구애받지 않는 선율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죠. 활의 길이 때문에 선율이 끊겨서는 안되고, 음악 전체의 선율을 따라가려고 해야 합니다. 그는 레가토의 광신자입니다." <마에스트로..> p.315


톰 서비스의 인상적인 부연설명은 이렇다.


"아바도는 음악가들이 ... 곡의 시작과 마지막을 연결해주는 거대한 음악적 라인의 일부가 되기를 원한다. 이것은 어떤 활의 길이나 호흡의 길이보다도 긴 시간의 흐름이다. 그에게 이런 아이디어를 어떻게 떠올리는지 물어보자 그는 가장 낮은 더블베이스 성부에서 가장 높은 제1바이올린에 이르기까지 작품에서 화성 라인이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 분석함으로써 자신이 지휘하는 작품을 파악한다고 말했다." <마에스트로..> p.315


세부는 단순하게 나열되지 않는다. 혹은 유난스런 강박으로 도드라지거나 과시적으로 부각되지 않는다. 맥락과 유리되어 불필요하게 곤두서지 않는다. 모든 악구는 서로의 연관을 묻고 대답하는 과정에서 거대한 구조의 일부로 자리잡는다. 아바도의 연주는 "음악적 재료들이 서로 긴밀하게 층을 이루며 연결된 것"으로 형상화된다. 부분과 부분 사이의 관계는 서로가 서로를 유심히 '듣는' 배려에서 발생한다. 섬세한 조율을 통해 프레이즈와 프레이즈는 정밀하게 맞물린다. '듣고자'하는 의지는 무의미해보이는 세부에 의외의 색채와 분명한 표정을 불어넣는다. 마치 모든 악상이 저마다 생명을 얻어 다채로운 톤으로 목소리를 내고 듣는 듯하다. 상대의 맥박에 귀 기울이는 가운데, 음악은 커다란 선을 그리며 하나의 숨결로 나아간다. 아바도의 이상향은 부분과 전체의 절묘한 변증법에 있었다. 그는 찰나에서 총체적인 구상이 읽히는 마술을 원했다.


"아바도가 다른 어떤 지휘자보다 많이 사용해서 내 베를리오즈 악보 곳곳에 적은 단어가 있었는데, 그것은 '들으세요...'라는 말이었다. 그는 오케스트라의 나머지 연주들에게 오보에의 선율을, 바이올린의 곡조를, 튜바의 삽입음을, 더블베이스의 바탕음을 '들으라고' 말했다. 이를 통해 자신이 음악을 어떻게 듣는지, 오케스트라가 소리를 청중에게 어떻게 전달하기를 원하는 지 어렴풋이 보여주었다. 또 다른 특징은 거의 리허설 내내 그의 얼굴에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마에스트로..> p.319


아바도는 그보다 앞서 베를린 필 상임을 지낸 푸르트벵글러를 흠모했다. 이 전설적인 지휘자가 "음악 전체의 의미를 하나하나의 음과 프레이징 속에서까지 정확하게 짚어 내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우상과 여러모로 달랐던 아바도는 이 점에서만큼은 그를 닮았다. 몇몇 놀라운 순간들이 생각난다. 그가 말러 교향곡 9번에서 들려주었던, 혼돈과 난장을 일관하는 초연하고 강력한 의지. 혹은 베토벤 교향곡 9번 4악장. 쏜살같이 푸가토를 뚫고 한순간 환희의 송가로 도약할 때 비등하는, 그 열광적인 숨가쁨. 무엇보다 드뷔시의 '바다'에서 빛나던, "함께 숨을 쉬는 느낌"에 완전히 매료된 그의 모습.



6.

  그가 마지막 음표 뒤에 찾아오는 침묵을 음미하듯, 그의 삶이 지나온 감미로운 자리를 음미한다. 2013년 8월 26일 루체른. 아바도는 그의 "친구들"과 슈베르트 교향곡 8번과 브루크너 교향곡 9번을 연주한다. 그리고 이것이 오랜 여정의 끝이었다. 내겐 그날 연주됐던 작품이 두 개의 미완성곡이라는 게 사뭇 놀랍다. 그는 무언가를 종결짓고 마무리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늘 '다르게 듣기'를, '새롭게 듣기'를 원했다. 아바도의 삶은 그의 음악이 그러하듯, 경계를 넘는 유연한 흐름이었다. 벽을 허물고, 스스로를 갱신했다. 자신의 말을 빌리자면, 언제나 "한계를 넘어 무언가 새로운 방법을 찾으려 노력"했다그의 과묵함과 소년같은 미소는 끝없는 탐구욕과 더 나은 연주를 향한 은근한 고집을 숨기고 있었다. 말년에 이르기까지 그는 늘 분주했다. 새로운 앙상블을 꾸리고, 새로운 방식으로 연주했다. 구태의연한 무소륵스키 악보에 분노했고, 잊혀진 로시니의 작품을 찬연하게 일깨웠다. 고전음악과 근현대음악을 동시에 공연했으며, 베토벤을 전혀 다른 해석으로 두 번 녹음했다. 암 수술 이후 악보가 달리 보인다며 즐거워했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자신이 연주해보지 않았던 슈만 교향곡의 악보를 살피고 있었다. 그러므로 부고 기사에 붙은 '지난 시대의 마지막 거장'이란 헌사는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그의 음악적 유산은 미지의 목소리에 예민하게 반응해, 늘 새롭게 '듣고자' 했다는 데 있다. 아바도는 어린 시절 유난히 따랐던 외할아버지와 이탈리아 북부의 산길을 걸었던 추억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분은 말씀이 별로 없으셨어요. 많은 것을 배웠죠. 내게는 듣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합니다. 서로의 소리를 듣는 것,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을 듣는 것, 음악을 듣는 것, 그리고 침묵을 듣는 것도요."  <마에스트로..> p.292


그와의 이별이 남긴 침묵에 유난히 귀를 기울이게 되는 이유다.



<인용출처>
















- http://blog.naver.com/liviuscato

- Tom Service,"The Maestro", The Guardian, 2007

- David Nice, "Claudio Abbado Obituary" The Guardian, 2014

- Daniel.J.Wakin, "For a Maestro, Energy is the Only Limitation", The New York Times, 2007

- Allan Kozzin, "Claudio Abbado is dead at 80", The New York Times,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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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이 좋은 탓인지 나는 말년의 아바도의 공연을 3번 볼 수 있었다 그의 해석은 수수께끼의 해답이었고, 우아한 지휘는 마냥 감탄스러웠다. 애호가로서 오랜 우상이었던 그의 죽음이 애석하고, 슬프다. 예전부터 짐작했던 것보다도 훨씬.


 사실 세상 일에 무관심하지 않았던 (그래서 그람시의 정당을 지지하고, 공장에서 연주했으며, 루이지 노노와 협력했던) 그의 정치적인 면모나, (하이브리드 자동차를 사용하고, 사르데나의 별장에 9000그루의 나무를 심은 게 말년의 자랑이었던) 생태주의자로서의 면모는 이 글에서 전혀 다루지 않았다. 오늘날 유수의 악단들 거의 대부분에 그가 만든 청소년 오케스트라에서 배출된 단원들이 자리잡고 있다는 다니엘 하딩의 말 역시 기억에 남는다. 하딩은 그의 유산이 두 세대에 이를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또한 쿠바의 청소년 오케스트라의 설립자였으며, 베네수엘라의 '엘 시스테마'를 지지한 가장 유명한 음악가 중 하나였다. 클래식 음악(그리고 물론 현대음악)의 미래를 위해 끊임없이 분투했던 그의 노력 역시 이 글에서는 다뤄지지 않은 부분이다. 정리하다보니 자신의 예술과 삶이 이렇게 조화를 이룬 예술가는 드물지 않나 싶다.

 

 놀랍도록 풍부한 삶의 변두리 증인으로, 그와 짧게 나마 동시대를 함께 한 것이 행운이었다. 

 클라우디오 아바도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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