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그는 말수가 적고 조용했다. 여느 지휘자처럼 말하고 가르치는 것을 즐기지 않았다. 사실 듣는 게 성향에 더 맞았다. 그는 듣는 사람이었다. 그는 소리를, 그 중에서도 가장 작은 소리를, 나아가 침묵을 들었다. 말년의 그의 공연에서는 마지막 음향이 사라지고 난 후, 늘 정적이 찾아들었다. 모두가 숨죽였고, 박수는 오래도록 나오지 않았다. '작고 기품있고 연로한' 그는 침묵의 시선을 느끼며, 기묘한 공허를 길게 음미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연주한 곡은 브루크너 교향곡 9번이었다. 튜바의 긴 묵상 끝에 최후의 피치카토가 퉁기고 난 후에도, 아마 그러한 침묵이 자리잡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마지막 순간에도, 그는 오래도록 침묵을 듣고 있었을 것이다.
2.
클라우디오 아바도는 음악 속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미켈란젤로 아바도는 바이올리니스트이자 베르디 음악원의 교수였다. 소문에 따르면, 미켈란젤로와 협연하기 위해 밀라노를 방문한 레너드 번스타인은 16살의 아바도가 '지휘자의 눈'을 갖고 있다며 칭찬했다고 한다. (탁견이었는지, 아바도는 훗날 번스타인 밑에서 1년간 뉴욕 필 부지휘자를 지낸다.) 12살의 아바도는 담벼락에 '바르토크 만세!'라고 낙서해 '바르토크'를 파르티잔으로 오인한 게슈타포의 의심을 사기도 했다. 아버지의 지도 아래 그는 어려서부터 피아노로 다른 악기를 반주하며 자랐다.
"마치 대화하는 것 같았어요. 다른 이의 소리를 주의 깊게 듣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을 비집고 들어가 아직 이야기하지 않은 서로의 느낌과 생각을 파악하려고 노력했죠." <지휘의 거장들> p.38
그는 "아버지의 실내악단과 함께 연주 여행을 다녔으며, 체임버 오케스트라를 직접 조직하기도 했다." (그리고 훗날 악단 조직의 귀재..로 성장한다.) 탱글우드의 지휘자 경연대회에서 우승한 20대의 전도유망한 아바도는 의외의 길을 택했다. 그는 이탈리아로 돌아가 파르마에서 3년간 실내악을 가르친다. 그의 어린 시절을 돌아봤을 때, 그리고 훗날 그의 삶을 생각해 봤을 때,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그리고 적절한 선택이었다.
"가르치는 것은 훌륭한 경험이었습니다. 나는 젊은 음악가들로부터 많이 배웠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연주했습니다. -지휘자 없이 스트라빈스키의 '병사 이야기'를 연주하거나, 바르토크의 두 대의 피아노와 퍼커션을 위한 소나타를 연주하는 식으로- 큰 그룹을 이루어 실내악을 하는 것이죠. 그래서 제가 유럽 연합 청소년 오케스트라(EUYO)를 시작했을때, 이는 같은 과정의 연속선 상에 있었습니다." 가디언 지와의 인터뷰
그 이후 "대규모로 연주하는 실내악은 ... 지휘자로서의 삶에서 꿈"이 되었다. 물론 그가 꿈꾼 실내악은 수십 명이 한 사람같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게 아니었다. 그의 실내악은 타인의 내밀한 소리에 귀 기울이고, 서로 대화를 주고 받는 것에 가까웠다. 베를린 필의 오보이스트인 알브레히트 마이어에 따르면, 아바도는 연주자가 지휘자의 지시를 기다리길 원치 않았다. 아바도는 플루티스트가 특정하게 프레이즈하면 오보이스트도 그런 프레이즈로 화답하길 원했다. 그는 트렘펫이 너무 소리가 크니 음량을 줄이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트럼펫이 현악의 연주를 따라가며 음량을 조절하도록 권유했다. 그의 실내악은 서로의 소리를 '듣는' 데서 시작한다. 그리고 말러와 같이 대규모 관현악 곡에서도 서로의 소리를 듣게 하는 것은, 많은 연주자들이 증언하는 아바도의 가장 놀라운 재능이다.
3.
고고학자였던 외할아버지를 닮아 아바도는 과묵했다. 자신을 '클라우디오'라고 소개하며 시작했던 베를린 필 상임 시절은 단원들이 조용한 리허설에 적응하지 못해 삐걱됐다. 베테랑 바이올린 주자 베스트팔은 "리허설에서는 아르농쿠르를, 연주장에서는 아바도를!"이라는 단원들의 농담을 전하기도 했다. 베를린 필은 '미스터 카라얀'의 선생님 같은 수업방식에 익숙했다. 악장 스타브라바에 따르면, 음악적으로도 두텁고 육중한 스타일에 익숙했던 단원들과 아바도는 자주 충돌했다. 90년대 중반에는 리허설 중 단원들 사이에서 고성이 오고갔다는 루머가 떠돌았다. 그의 상임시절 악장을 지냈던 콜야 블라허는 이렇게 말한다.
"아바도는 베를린에서 우리와 함께 작업하면서 대단히 위계적인 음악 작업에 민주주의를 도입하려 한 최초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새롭고도 힘들었습니다. 모두가 민주주의와 개인의 자유를 감당할 수 있어야 하니까요. 말이 나와서 말인데, 누가 어떻게 하라고 그냥 지시할 때가 훨씬 쉬운 법입니다." <마에스트로..> p.316
그가 음악을 만드는 방식은 단원들 모두에게 막중한 책임감을 요구했다. 단원 개개인은 단순히 지휘자의 지시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상대와 연관되고 연루되는 방식을 이해하며 연주해야 했다. "예컨대, 잉글리쉬 호른의 독주가 부각되도록 자신의 소리를 낮춰야 하는지, 첼로의 선율을 반주하는 대목인지, 트롬본을 받쳐주는 대목인지, 최대한 힘차게 연주해야 하는 대목인지"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는 물론 "오케스트라의 듣고자 하는 집단적인 의지가 작동"해야만 가능하다. EUYO에서 그와 함께 연주했던 BBC심포니의 수석 클라리넷 주자인 리차드 호스포드는 이런 이야기를 한다.
"목관 주자로서, 제가 발견한 그의 특별한 점은 그가 제가 연주하도록 놔둔다는 것이에요. 당신이 그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연주한다면, 설령 그것이 그가 생각했던 방식이 아니더라도, 그는 당신을 따라갈 거에요. 그리고 당신이 솔로를 할 때면, 그는 오케스트라가 당신을 따르게 할 겁니다. 그는 그가 원하는 것을 독단적으로 말하기보다는 당신의 생각에 힘을 불어넣습니다."
그에게 리허설은 공연에서 정점을 맞기 위한 느리지만 점진적인 고양의 과정이었다. 그가 하는 일은 특정 화성적, 선율적 국면에서 누구에게 귀 기울여야 하는 지 방향을 설정하는 정도였다. 반복적으로 서로의 소리를 듣는 집요한 과정을 통해, 곡에 대한 오케스트라의 이해는 밀도를 높여갔다. 연주자들은 큰 흐름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자유를 허락 받았다. 진정한 드라마는 늘 공연 당일 무대 위에서 일어났다. 지난한 도움닫기를 통과한 지휘자는 최상의 자유를 만끽하는 듯 보였다. 단원들은 그가 리허설에서 볼 수 없던 광채로 빛나는 것을 보았다. 포디움에 선 아바도는 왼손의 놀라운 활력을 날개 삼아 오케스트라와 함께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4.
이 까다로운 과정이 이상에 도달한 것은 마지막 10년을 헌신한 루체른 시절이었다. 아바도가 오로지 그를 위해 모인 "친구들"과 음악을 만드는 과정은 그 자체로 흥미롭다. 그것은 지휘자와 오케스트라 사이에서 작용하는 비밀스러운 심리학의 열쇠가 된다. 여름의 루체른에서는 강렬한 '믿음의 전이'가 일어났다. 각양각색의 단원들을 단기간에 묶는 것은 그들의 강력한 믿음이다. 아바도가 '곡의 모든 것을 알고 있을 것'이라는 믿음. 아바도의 몸짓언어가 음악의 핵심을 정확히 반영한 것이라는 믿음. 더불어 그의 음악적 이상에 대한 전적인 신뢰. 콜야 블라허의 말에 의하면, 이는 물론 '착각'이다. 하지만 실제로 단원들이 아바도의 지휘에 맞춰 "불 속에라도 뛰어들게" 하는 실로 위력적인 착각이다. 과정은 이렇다. 단원들은 리허설의 반복으로 음악의 큰 흐름을 익히고, 다른 이의 연주에 귀 기울여 가며 자신이 나서야 할 때와 한 걸음 물러설 때를 익힌다. 아바도 역시 이 '집단적인 듣기' 과정에 동참해 단원들의 자유를 존중하고, 전체적인 구상을 조율한다. 물론 가장 결정적인 것은 곡에 대한 비범한 이해를 갖춘 지휘자의 우미하고 명료한 몸짓이고, 음악적 이상에 동의해 모인 단원들의 깊은 신뢰다. 단원들은 스스로 원하는 대로 연주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음악 전체의 흐름에 헌신하고 몰입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음향의 격정을 체화한 지휘자의 몸짓에 집중해 그의 즉흥적인 움직임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지휘자는 오랜 친구들을 믿고 한달음에 도약한다.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의 연주에서는 자연스러운 활력과 반짝이는 즉흥성이 공존한다. 그것은 자유와 규제 사이의 보기 드문 균형이다. 경이로운 믿음의 주고 받음이다. "아바도의 신체 언어는 루체른에서 소리 언어가 된다." 오랫동안 그의 오른편에서 비올라를 연주했던 (머리숱이 적은) 볼프람 크리스트는 말한다.
"굳이 말할 필요가 없어요. 그의 얼굴을 보면 우리가 너무 세게 연주하는지 어떤지 알 수 있으니까요. 말하지 않아도 그의 손에서 모든 것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스스로를 그의 몸짓에 맡기면 됩니다. 지식과 기술만 갖추고 있으면 그를 따라갈 수 있습니다. 루체른의 모든 연주자들은 물론 이럴 능력이 되죠. 하지만 그러려면 스스로를 믿어야 하고 그가 행하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특히 무대에서요. 음악회에서 그는 마법을 발휘합니다." <마에스트로..> p.311
가디언 지의 기자 톰 서비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마치 예언했던 대로 착착 이루어지는 과정과도 같다."
5.
클라우디오 아바도에게는 원체험이라 할 사건이 있었다. 그는 7살 때 라 스칼라에서 드뷔시의 '녹턴'을 들었다.
"드뷔시의 녹턴 세 곡이 내가 처음으로 들은 음악입니다. 그날 안토니오 과르니에리가 지휘를 했죠. 그 자리에서 음악가가 되기로, 지휘자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런 마술과도 같은 일을 나도 하고 싶었으니까요. 하프와 트럼펫이 연주하던 그 순간..." <마에스트로..> p.287
그는 그날 밤 일기에 "지휘자가 되어 녹턴을 지휘한다"고 써놓았다. 그리고 이 풋풋한 다짐은 훗날 근사하게 이루어졌다. 그가 베를린 필과 녹음한 드뷔시의 녹턴에서는 미묘한 색채로 서로를 부딪는 파도의 춤사위를 들을 수 있다. 이탈리아인 아바도는 푸치니를 연구할 시간에 드뷔시를 공부하겠다고 했다. 심지어 바그너마저 그의 손을 통해 -이런 말이 가능하다면- '드뷔시의 세례'를 받았다. 그와 베를린 필의 파르지팔 모음곡이 그렇다. 엄숙한 음향은 겹겹의 층으로 분절되어 갖가지 빛깔로 산란한다. 투명한 선율이 보드라운 잔향을 남기며 고상한 호흡으로 노래한다. 물론 이는 너무 편협한 감상이다. 그는 단지 드뷔시의 시선을 거친 바그너에 머물지 않았다. 그보다는 둘 사이의 근본적인 연관성을 고민했다. 아바도의 어떤 연주는 드뷔시와 바그너의 우아한 종합을 이루곤 한다. 바그너는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작곡 과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나의 세밀하고 깊은 예술을 이제 이행의 미학이라 이름 붙이고 싶다. 이런 수많은 이행이 한데 빚어져 나의 공예품이 탄생하기 때문이다." <지휘의 거장들> p.37
아바도의 손 끝에서 실현되는 것 역시 이 '이행의 미학'이다. 그의 지휘에서 비롯되는 음악적 흐름은 세부를 사려깊게 살피면서도 쾌적한 유속을 잃지 않는다. 악구의 사소한 모세혈관부터 선율의 거대한 줄기까지, 음악은 쉼없이 이행되며 끝없는 흐름을 이룬다. 음악 평론가 볼프강 슈라이어가 '레가토의 원칙'이라 이름 붙인 것. 이것이 아바도의 드뷔시와 바그너에서 일관되게 발견할 수 있는 그 무엇이다. 그의 레가토는 멜로디 라인에 윤을 내는 게 아니라, 음향을 흐르게 하는 것이었다. 톰 서비스를 인용하자면, "이렇게 끝없이 이어지는 느낌이야말로 아바도의 몸짓이 지시하는 바다. 그가 왼손으로 계속해서 전하는 음악적 아이디어가 바로 이것인데, 이로써 그는 악기들이 연주하는 개별 성부들 위에 더 높은 음악적 흐름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볼프람 크리스트는 아바도가 '레가토의 광신자'라고 말한다.
"현악과 목관 주자들이 가장 까다롭게 여기는 연주 가운데 하나인데, 활이나 호흡의 길이에 구애받지 않는 선율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죠. 활의 길이 때문에 선율이 끊겨서는 안되고, 음악 전체의 선율을 따라가려고 해야 합니다. 그는 레가토의 광신자입니다." <마에스트로..> p.315
톰 서비스의 인상적인 부연설명은 이렇다.
"아바도는 음악가들이 ... 곡의 시작과 마지막을 연결해주는 거대한 음악적 라인의 일부가 되기를 원한다. 이것은 어떤 활의 길이나 호흡의 길이보다도 긴 시간의 흐름이다. 그에게 이런 아이디어를 어떻게 떠올리는지 물어보자 그는 가장 낮은 더블베이스 성부에서 가장 높은 제1바이올린에 이르기까지 작품에서 화성 라인이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 분석함으로써 자신이 지휘하는 작품을 파악한다고 말했다." <마에스트로..> p.315
세부는 단순하게 나열되지 않는다. 혹은 유난스런 강박으로 도드라지거나 과시적으로 부각되지 않는다. 맥락과 유리되어 불필요하게 곤두서지 않는다. 모든 악구는 서로의 연관을 묻고 대답하는 과정에서 거대한 구조의 일부로 자리잡는다. 아바도의 연주는 "음악적 재료들이 서로 긴밀하게 층을 이루며 연결된 것"으로 형상화된다. 부분과 부분 사이의 관계는 서로가 서로를 유심히 '듣는' 배려에서 발생한다. 섬세한 조율을 통해 프레이즈와 프레이즈는 정밀하게 맞물린다. '듣고자'하는 의지는 무의미해보이는 세부에 의외의 색채와 분명한 표정을 불어넣는다. 마치 모든 악상이 저마다 생명을 얻어 다채로운 톤으로 목소리를 내고 듣는 듯하다. 상대의 맥박에 귀 기울이는 가운데, 음악은 커다란 선을 그리며 하나의 숨결로 나아간다. 아바도의 이상향은 부분과 전체의 절묘한 변증법에 있었다. 그는 찰나에서 총체적인 구상이 읽히는 마술을 원했다.
"아바도가 다른 어떤 지휘자보다 많이 사용해서 내 베를리오즈 악보 곳곳에 적은 단어가 있었는데, 그것은 '들으세요...'라는 말이었다. 그는 오케스트라의 나머지 연주들에게 오보에의 선율을, 바이올린의 곡조를, 튜바의 삽입음을, 더블베이스의 바탕음을 '들으라고' 말했다. 이를 통해 자신이 음악을 어떻게 듣는지, 오케스트라가 소리를 청중에게 어떻게 전달하기를 원하는 지 어렴풋이 보여주었다. 또 다른 특징은 거의 리허설 내내 그의 얼굴에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마에스트로..> p.319
아바도는 그보다 앞서 베를린 필 상임을 지낸 푸르트벵글러를 흠모했다. 이 전설적인 지휘자가 "음악 전체의 의미를 하나하나의 음과 프레이징 속에서까지 정확하게 짚어 내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우상과 여러모로 달랐던 아바도는 이 점에서만큼은 그를 닮았다. 몇몇 놀라운 순간들이 생각난다. 그가 말러 교향곡 9번에서 들려주었던, 혼돈과 난장을 일관하는 초연하고 강력한 의지. 혹은 베토벤 교향곡 9번 4악장. 쏜살같이 푸가토를 뚫고 한순간 환희의 송가로 도약할 때 비등하는, 그 열광적인 숨가쁨. 무엇보다 드뷔시의 '바다'에서 빛나던, "함께 숨을 쉬는 느낌"에 완전히 매료된 그의 모습.
6.
그가 마지막 음표 뒤에 찾아오는 침묵을 음미하듯, 그의 삶이 지나온 감미로운 자리를 음미한다. 2013년 8월 26일 루체른. 아바도는 그의 "친구들"과 슈베르트 교향곡 8번과 브루크너 교향곡 9번을 연주한다. 그리고 이것이 오랜 여정의 끝이었다. 내겐 그날 연주됐던 작품이 두 개의 미완성곡이라는 게 사뭇 놀랍다. 그는 무언가를 종결짓고 마무리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늘 '다르게 듣기'를, '새롭게 듣기'를 원했다. 아바도의 삶은 그의 음악이 그러하듯, 경계를 넘는 유연한 흐름이었다. 벽을 허물고, 스스로를 갱신했다. 자신의 말을 빌리자면, 언제나 "한계를 넘어 무언가 새로운 방법을 찾으려 노력"했다. 그의 과묵함과 소년같은 미소는 끝없는 탐구욕과 더 나은 연주를 향한 은근한 고집을 숨기고 있었다. 말년에 이르기까지 그는 늘 분주했다. 새로운 앙상블을 꾸리고, 새로운 방식으로 연주했다. 구태의연한 무소륵스키 악보에 분노했고, 잊혀진 로시니의 작품을 찬연하게 일깨웠다. 고전음악과 근현대음악을 동시에 공연했으며, 베토벤을 전혀 다른 해석으로 두 번 녹음했다. 암 수술 이후 악보가 달리 보인다며 즐거워했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자신이 연주해보지 않았던 슈만 교향곡의 악보를 살피고 있었다. 그러므로 부고 기사에 붙은 '지난 시대의 마지막 거장'이란 헌사는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그의 음악적 유산은 미지의 목소리에 예민하게 반응해, 늘 새롭게 '듣고자' 했다는 데 있다. 아바도는 어린 시절 유난히 따랐던 외할아버지와 이탈리아 북부의 산길을 걸었던 추억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분은 말씀이 별로 없으셨어요. 많은 것을 배웠죠. 내게는 듣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합니다. 서로의 소리를 듣는 것,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을 듣는 것, 음악을 듣는 것, 그리고 침묵을 듣는 것도요." <마에스트로..> p.292
그와의 이별이 남긴 침묵에 유난히 귀를 기울이게 되는 이유다.
<인용출처>
- http://blog.naver.com/liviuscato
- Tom Service,"The Maestro", The Guardian, 2007
- David Nice, "Claudio Abbado Obituary" The Guardian, 2014
- Daniel.J.Wakin, "For a Maestro, Energy is the Only Limitation", The New York Times, 2007
- Allan Kozzin, "Claudio Abbado is dead at 80", The New York Times,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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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이 좋은 탓인지 나는 말년의 아바도의 공연을 3번 볼 수 있었다 그의 해석은 수수께끼의 해답이었고, 우아한 지휘는 마냥 감탄스러웠다. 애호가로서 오랜 우상이었던 그의 죽음이 애석하고, 슬프다. 예전부터 짐작했던 것보다도 훨씬.
사실 세상 일에 무관심하지 않았던 (그래서 그람시의 정당을 지지하고, 공장에서 연주했으며, 루이지 노노와 협력했던) 그의 정치적인 면모나, (하이브리드 자동차를 사용하고, 사르데나의 별장에 9000그루의 나무를 심은 게 말년의 자랑이었던) 생태주의자로서의 면모는 이 글에서 전혀 다루지 않았다. 오늘날 유수의 악단들 거의 대부분에 그가 만든 청소년 오케스트라에서 배출된 단원들이 자리잡고 있다는 다니엘 하딩의 말 역시 기억에 남는다. 하딩은 그의 유산이 두 세대에 이를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또한 쿠바의 청소년 오케스트라의 설립자였으며, 베네수엘라의 '엘 시스테마'를 지지한 가장 유명한 음악가 중 하나였다. 클래식 음악(그리고 물론 현대음악)의 미래를 위해 끊임없이 분투했던 그의 노력 역시 이 글에서는 다뤄지지 않은 부분이다. 정리하다보니 자신의 예술과 삶이 이렇게 조화를 이룬 예술가는 드물지 않나 싶다.
놀랍도록 풍부한 삶의 변두리 증인으로, 그와 짧게 나마 동시대를 함께 한 것이 행운이었다.
클라우디오 아바도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