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그너는 위험한가 - 현대 철학과 바그너의 대결
알랭 바디우 지음, 슬라보예 지젝 발문, 김성호 옮김 / 북인더갭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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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체의 저 유명한 애증과 결별 이후, 서구의 빛나는 사상가들은 자신의 교활한 맞수로 리하르트 바그너를 지명해왔다. 바디우에 따르면, 철학사에서 바그너와의 대결은 하나의 장르가 될 정도였다. 아이러니한 것은 결정적인 전환점이 바그너 자신이 죽은 후에 찾아왔다는 점이다. 이 악당의 고약한 마법이 오스트리아의 순진한 화가 지망생마저 감화시켰기 때문이다. 이 바그네리안 청년의 이름은 (바그너에게는 불운하게도) 아돌프 히틀러였다. 역사는 바그너에게 불리하게 흘러갔다.  철없는 바그너의 후손들은 나치와의 긴밀한 관계를 자랑했다. 아우슈비츠에서 발퀴레의 기행이 흘러나왔다는 끔찍한 증언은, 그의 음악에 홀로코스트의 그림자를 덧씌웠다. 그는 자연스럽게 원파시스트라는 오명을 뒤집어썼고,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그의 반유대적 기질과 허황된 쇼비니즘, 망상적 민족주의와 역겨운 인간성이 들춰졌다. 이렇듯 무덤에서 불명예스럽게 소환된 그는 수 번의 준엄한 역사적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악당 특유의 기이한 매력으로 형별의 집행을 매번 면했다. 바그너 음악의 생명력은 가히 놀라운 것이다. 여전히 홀린듯이 바이로이트를 향하는 저 수많은 바그네리안들이 몸소 이를 증명한다. 더군다나 탄생 200주년을 맞은 올해에는 세계 곳곳의 오페라 극장과 콘서트홀에서 쉬지않고 그의 음악이 울려 퍼질 것이다. 긴 세월이 흘렀음에도 (니체의 말을 빌려) 이 '늙은 마법사'의 흑마술은 여전히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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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정이 이렇다보니, 바그너의 이름은 그의 위대한 음악 때문만이 아니라 오래된 (그러나 여전히 뜨거운) 논란거리로서 살아남았다. 우리 시대의 저명한 철학자 알랭 바디우가 이 길고 긴 논쟁에 또 하나의 주장을 보탰다. [바그너는 위험한가]는 이 논쟁적 개입의 결과물이다. 특이한 것은, 바그너와 다퉜던 선배 철학자들과 달리 그가 검사가 아닌 변호사를 자처했다는 점이다. '바그너의 음악은 위험하리마치 파쇼적이며 그 역사적, 예술적 시효를 다했는가'에 대한 그의 대답은 단호한 '아니오'이며, 오히려 그는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바그너를 건 그의 내기는 이러하다.


 "내가 표명하는 입장은 우리가 순수예술의 부활 직전에 와 있다는 것이겠는데, 바로 이 지점에서 바그너가 호출되어야 한다. 내 가설은 순수예술이 다시 한 번 우리 미래의 일부가 되었다는 점이다." (p.127)


 바그너의 변호에 나선 바디우는 노회한 검사들이 그의 유죄를 이끌어 내기 위해 제시한 의혹과 죄목들을 하나, 하나 정교하게 검증한다. 그 검증 속에서 증명되는 바, 바그너에게 퍼부어진 추문에는 부당한 면이 있고 (일부는 분명 그에게 책임이 있으나), 더군다나 바그너의 '음악'에는 바그너 자신의 인간적 교활함을 뛰어넘는 계시적인 차원이 있다. 그가 순수예술의 황혼이자 낡은 시대의 종결자라는 게 검사들의 판단이나, 바디우는 이에 반대하여 바그너를 새로이 호명한다. 바디우의 용감한 주장에 따르면, 바그너는 다가올 순수예술을 예감한 자, 새로운 예술의 시작을 열어 젖힌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배심원 석에 앉아, 피고 바그너를 두고 검사와 변호사가 날카롭게 맞붙는 지점을 차근차근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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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매력적이고도 선정적인 고발은 정치적-이데올로기적인 비판일 것이다. 바그너가 파편화된 게르만 인민들을 단일한 민족국가로 묶어내기 위해 자신의 음악을 치명적으로 악용했다는 다소 흔한 주장이 여기에 속한다. 바그너는 독일의 신화를 제재로 삼는 자신의 악극을 통해 민족국가로서 '독일'을 형상화하고자 시도했으며, 이는 결국 음악을 정치적-신화적 목적론에 봉사하는 프로파간다로 이용한 셈이었다. 그의 음악에 주된 특징이라 할 '과도한 관능'은 수많은 청중을 무기력하고 붙잡아 두기 위함이며, 장엄한 신화적 판타지로 포장된 국수주의적 망상을 주입하기 위한 교묘한 흑마술, 청중들을 허구적으로 결속시키기 위한 기만적인 덫이다. 그의 사상은 가히 나치 이전의 나치즘, 원파시즘이라 할 만 한데, 당장의 정치적-사회적 분열과 모순을 넘어서는 해결책으로 신화적인 종합을 빼어나게 극적으로 제시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바그너의 이 거대한 기획은 물론 후대의 바그네리안 히틀러에 의해 궁극적으로 실현될 터, 바그너는 나치즘의 오래된 미래에 다름 아니다.

 다음 죄목은 보다 내밀한 것으로 바그너의 음악과 철학이 오랫동안 대립한 지점에서 전선이 형성되는, 미학적-철학적 비판이다. 바그너 자신의 악명높은 슬로건인 '총체적 예술작품 total artwork'에서 알 수 있듯, 그의 음악은 본질적으로 '총체화'의 작인, 이질적인 것들을 먹어치우는 헤겔적인 '동일화'의 작인으로 기능한다. (이는 개인의 특이성을 각별히 존중하는 관용적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악담이 아닌가!) 가령 그의 자랑스런 발명품인 무한선율을 보라. 라쿠라바르트에 따르면 무한선율은 분절된 말을 무차별적인 가락에 녹여버리는, 악질적인 동일화 장치다. 음악은 불연속이 제거된 매끄러운 연속성으로 청중에게 강요되며, 듣는 이들은 쉼없는 흐름에 강압적으로 떠밀린다. 이는 물론 그의 음악이 (철학사의 바그너로서 역시 또 한 명의 궁극의 악당이라 할 '헤겔'의 바로 그 의미에서) '변증법적'이라는 것이다. 


 "차이들은 긍정적인 피날레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실로 우리는 차이들, 불협화음들, 불연속들 속에 빠져 버린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최종적으로 중요한 것은 화해다. 긍정적 피날레가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바로 그것이며, 불협화음은 뒤에 이루어질 그것의 발전의 견지에서가 아니라 그것의 궁극적 제거- 설사 이 제거가 지연되거나 속도가 늦춰지거나 특히 다른 요소들 사이에 휘말려 버린다 해도 -의 견지에서 탐색된다." (p.119)


여기서 알 수 있듯 바그너의 '고통'은 진정 고통이 아니라 단지 종착역으로 가기 위한 간이 정거장이다. 고통은 궁극적인 해결과 종합에 이르는 길 위에 놓여진 불쾌한 통과의례이며, 극에 탄력을 부여하는 요란한 장애물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한 선율' 속에 휘말려 도착하게 되는 장소는 모든 차이들이 지양되고 무화되는 종합의 장소이며, 이 종합은 물론 기만적인 신화적 서사에 귀속된다. 매혹적인 음악의 배면에 자리잡은 것은 신화적인 서사의 은밀한 강요다. (동일한 맥락에서 바그너의 또다른 발명품인 라이트모티프는 '음악에 대한 서사적 기호의 강요'다.) 바그너는 자신의 오만한 해결책을 등 뒤에 두고, 청중들을 거짓 모험에 빠뜨리고 허황되게 구원하며, 현란하게 들볶아 능청스럽게 동일화한다.


 "니체, 하이데거, 아도르노, 라쿠라바르트는 모두 바그너를 다채롭게 구성된 대중에게 음악적 통일성을 강제하는 자, 차이들에 그 통일성을 강요하며 그 결과 타자성이라는 차이들의 본질적 성격이 사라지거나 용해되게 만드는 자로 보는 점에서 일치한다. ... 이 저자들이 종종 언급하는 두 번째의 , 더 정치적인 이유는 바그너의 음악이 이 통일성이 궁극적으로 민족 일반의 비전, 특수하게는 독일 민족의 비전 -그것도 통일되고 동일주의적이며 신화적인 것에 봉사한다는 것이다. 음악의 통일은 사실상 이데올로기적 작업이기도 하다." (p.91-92)


 바그너는 이제 철저하게 수세에 몰린 듯 하다. 우리에게 남은 일은 포스트모던의 담지자들이 헤겔에게 하던 것과 비슷할 지 모른다. 그가 죽은 자리에 거대한 비석을 세우는 것. 그 비석을 경계석 삼아 '순수예술의 기획, 여기서 끝나다'라고 선언하고 과장벽이 심했던 옛 거인을 영원히 떠나보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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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디어 변호사 바디우가 개입할 차례다. 바디우가 새로이 구축하려는 바그너는 비열한 원파시스트로 딱지 붙은 '첫 번째' 바그너와는 다른 '두 번째' 바그너가 될 것이다. 총체화-동일화로부터 분리된 바그너, "총체화에서 분리된 위대함"의 그 바그너. 이를테면 이제 "우리는 바그너적 파편화 속으로의 모험을 감행해야 할 것이다" (p.127) 왜냐하면 새로운 바그너는 "연속성과 불협화음", "국지적인 것과 전체적인 것"이 연루되고 충돌하는 그 지점에서 출현하는 "바그너 자신의 파편화 양식" 속에 있기 때문이다.

 우선 바그너가 모든 차이를 무화시키고, 신화화된 정치적 목적에 종속시키기 때문에 그의 악극은 다만 동일성의 자기전개라는 주장이 있다. 그 과정에서 여러 인물들이 겪는 고통은 궁극적으로 그것의 치유에 편입되는 바, 진정한 고통이 아니다. 그것은 '순수한 현재'로서 경험되지 않는, 이미 지나간 과거형의 고통일 뿐이다. 그러나 바디우의 변론에 따르면, 바그너적 인물들이 겪는 고통은 실로 존재하며, 그것도 '현재적으로' 존재한다. 가장 먼저 물어야 할 것은 바그너적 인물들의 고통이 어디서 오는가 하는 점이다. 바로, 그들 주체성의 중핵에 자리잡은 '분열'로부터 온다. "이전의 오페라에서는 주체의 정체성이 종종 관습적 인물유형의 문제"였다면, 바그너적 주체는 "본질적으로 자기자신의 분열, 내적 분리에서 정체성"을 취한다. 


  "바그너에서 고통받는 주체는 변증법에 포괄될 수 없는 분열, 치유될 수 없는 분열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사실 어떤 진정한 해결의 가망도 없이 내적 이질성을 확립하는 주체 내의 분열이다." (p.136~137)


예컨대, 육체적이고 이교도적인 사랑과 궁정풍의 플라토닉한 사랑 사이에서 분열된 탄호이저가 그렇다. (사실 어떤 면에서 그는 인격화된 분열일 뿐이다.) 궁극적인 바그너적 주체는 내적 분열로 고통받는 인물인 바, 그는 그 고통으로 인해 한 곳에 머물지 못하고 수많은 곳을 방랑한다.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이나, '반지'의 보탄을 보라. (무엇보다 작곡가 자신의 삶 역시 그러했다.) 이러한 분열의 절대적 고통은 그의 음악 속에서 강력한 음향과 미답의 기술적 성취로 구현된다. 바디우의 명명에 따르면 '비통함의 음악'이 바로 그 고통의 현존을 가능케 한다. 반음계의 극단적인 사용으로 조성체계의 수평적 평온을 무너뜨리고, 과감한 불협화음의 광기로 몸부림치는 그의 음악을 떠올려 보라. 물론, 그는 그 고통이 언젠가 사라지고, 하나의 아름다운 의미를 얻으리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거기에 "비변증법적 분열의 파괴적 결과들"에 대한 "탐색"이 있는 한 고통도 거기에 있다. 이를 단순히 종국의 화해로 손쉽게 환원할 수 있는가? 여기서 우리는 또다른 핵심적인 논쟁점인 바그너 음악의 목적론적 성격에 관해 따져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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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야를 넓혀서, 바디우는 바그너를 "마르크스와 다윈, 그 밖의 19세기 인물"들의 대열에 든 자로 생각한다. 바그너의 모든 오페라는 "사실상 어떤 가능성의 탐색, 즉 19세기의 진보적 차원에 어울리는 종결의 가능에 대한 탐색"이라 볼 수 있으며, 여기에는 "음악이 정향되는 모든 것을 통일하는 단 하나의 중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양한 가능성들에 대한 탐색"이 있다는 것이다.(p.145) 바그너에게는 궁극적인 단 하나의 해결책만이 있다는 세간의 비판과 달리, 그에게는 분열을 끝맺기 위한 여러가지 가능태에 대한 고민이 있다. 


"그에게 피날레에 이르는 길은 주저함으로 특징지어지는 어려운 과정이었고, 그는 몇가지 해석 또는 가설을 열어두는 경향이 있다." (p.147)


바디우가 범주화하는 제각각 상이한 세가지 결말은 <신들의 황혼>,<명가수> 그리고 <파르지팔>이다. 신들이 파멸한 이후 세계에 대한 책임이 인류 일반에게 이양되는 <신들의 황혼>의 피날레, 독일의 본질로서 특정한 정치적 체제가 아닌 '독일 예술'이 호명되는 <명가수>의 피날레, '기독교 너머에 무엇이 오는가'에 대한 대답으로 '기독교적 총체성의 형상적 또는 미적 재긍정'을 내세운 <파르지팔>의 피날레. 이들은 각각 당대인들이 마주한 질문에 대한 음악적, 극적 모색의 결과물로서 각각 상이한 논리와 상이한 대답을 갖는다. 바그너에게는 실상 단 한 가지의 대답으로 귀속되는 수 가지 질문이 아니라, 여러 질문에 대응하는 여러 대답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바디우의 주장을 통해 우리는 두 번째 바그너를 간략히 나마 이렇게 요약할 수 있겠다. 바그너적 주체는 분열을 자신의 본질로 삼는 주체이며, 그 분열로 인해 극심한 괴로움을 겪는 주체, 고통을 물리치려 정처없이 방황하는 비극적 주체이다. 더불어 바그너는 자신의 시대가 마주한 질문에 치열하게 대답하고자 노력했던 인물이었고, 그에게는 단 하나의 대답이 아닌 다양한 질문에 대한 상이한 대답이 있었다. 각각의 악극은 고유한 가설을 갖고 있는 바, 이 가설들 사이에서 해결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바그너는 "하나의 일방적 가능성이나 단일한 관념을 강요"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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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이 모든 특징들의 핵심에는 "국지적 세포들이 하나의 전체적 상황을 구상할 수 있게 만드는 변화들에 대한 비할 데 없는 통달mastery이 자리하고 있다." 여기서 반박되는 것은 라이트모티프에 대한 반대자들의 오랜 비난이다. 신화적 서사를 단순 주입하는 장치에 불과하다는 반대자들의 비난과 달리, 바디우에 따르면 라이트모티프의 기능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신화적이거나 서사적이라고 볼 수 있는 극적 발화'의 역할 그리고 반대자들이 보지 못하는 다른 하나는  '극적이거나 서사적인 함의가 전혀 없는, 비서술적인 내적-음악적 전개부'의 역할이다. 


"그러므로 라이트모티프는 하이든이 세포적인 小모티프들을 다루는 방식에 비견되는 편이 나을텐데, 하이든의 교향곡에서 이 모티프들은 뒤틀리고 변형되면서 엄밀히 말해 하나의 전개부도, 선율도 아닌 독특한 것을 만들어낸다." (p.42) 


즉, 라이트모티프는 단순히 서사적 기호가 아닌 상이하게 변형가능한 음악적 세포로 봐야한다. 그 세포들이 창조적인 방식으로 결합되고 변형되며 만들어지는 음악적 만화경이 바그너 특유의 환상적인 흐름을 다채롭게 물들이는 것이다. 거기에는 분명, 부분과 전체가 맺는 관계에 대한 '어떤 의미심장하고 혁신적인 관념'이 있다.   


 "그가 자기 작품의 전반적 구상을 국지적 세포들의 변화에 연관되도록 만든 덕분에 - 때로 약간의 술책이 있기는 했지만(그가 교활한 사람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 필연적으로 그는 단순히 어떤 것을 종결시킨 사람이 아니라 새로운 어떤 것의 창시자가 되었다." (p.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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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일련의 고발과 변론을 잠정적으로 마무리지어야겠다. 다만 서둘러 결론을 내리기에 앞서, 우리가 되짚고 넘어가야 할 두 가지가 있다. 우선, 이제는 하나의 상식이라고 해야 할 '작품'과 '그 작품에 대한 창작자의 의도'와의 구분이다. 바그너에 대한 비판의 다수가 이 필수적인 구분을 고려하지 않은 탓에 생겨난다. 바그너 자신이 '이제 예술과 시대는 종합되었다'고, '문제는 해결되었다'고 떠들석하게 선언할지라도, 바그너의 악극들에는 종합과 해결을 주저하는 듯한 망설임이, 이리저리 고민하는 듯한 탐색의 흔적이 남아 있음을 우리는 앞선 바디우의 논변을 통해 살펴보았다. (바디우의 표현대로 이러한 주저함은 바그너 특유의 '과장된 종결의 제스처'와 어색하게 공존한다.) 바그너 자신이 자랑스레 떠벌리는 '총체적 예술작품'은 말 그대로 하나의 야망적인 슬로건일 뿐이다. 우리는 '복잡성의 결여, 흐름의 통일성에 대한 다수성의 종속'이라는 의례적인 비판이 그의 작품 자체에서 입증되는지 정교하게 살펴봐야 한다. 그리고 바디우의 주장에 따르면, 바그너의 음악에는 차이를 먹어치우는 동일성이 아닌 차이와 동일성 간의 '독특한 상호작용'이 있다.

 다음으로 하나의 작퓸을 시대적 맥락 속에서 파악하려는 역사주의적 해석을 맹신하지 않는 태도다. 이 책의 발문을 쓴 슬라보예 지젝을 인용하자면,


"하나의 작품은 자신의 역사적 맥락에 비추어 영원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역사적 순간의 도전에 응하는 방식을 통해 영원하다." (p.234)


바그너에 대한 과도한 역사주의적 독해가 놓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하겐을 자위하는 유대인"으로, "암포르타스의 상처"를 "매독"으로 환원하는 역사주의적 독해는 하나의 작품이 다양한 시대를 거치며 자신의 현재적 유효성을 증명하는 바로 그 '형식적 구조'를 보지 못한다. 당대의 맥락을 철저하게 고증하더라도 이를 빠져나가는 어떤 '열려있음'이 위대한 예술작품에는 반드시 있다. 지젝의 말을 다시 빌리자면,


"바그너의 작품은 유럽 모더니티의 교착상태에 대한 어떤 비전과 그에 대한 응답을 구현하는 바, 이 비전과 응답은 결코 원파시즘적인 것으로 일축해 버릴 수 없다." (p.234~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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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에게는 두 명의 바그너가 있다. 한 명은 지극히 역겨운 유사-파시스트로 자신의 음악을 도구삼아 세상의 혼돈을 단 칼에 종결짓고자 하는 형이상학적 바그너다. 다른 하나는 분열과 그에 따른 고통에 내몰려 이곳저곳을 방황하며 해결과 종합의 가능성을 -다소간 망설이며- 예감하는 바그너다. 이 둘 중 어느 쪽을 취할 지는 순전히 듣는 이의 선택이다. 바그너가 자신의 시대에 맞서 분투하는 가운데 그의 작품이 얼마나 다양한 스펙트럼을 갖게 되었는지는, 바디우와 살펴본 것으로 충분히 알 수 있다. 어쩌면 바그너가 오늘날 여전히 하나의 '경우'로서 여러 사상가들의 도전과 시비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 자체가 그의 유별난 매혹과 현재적 유효성을 증명하는 것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가장 처음으로 돌아가서,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바그너는 위험한가'는 어쩌면 그 누구보다도 바그너에게 적절한 질문일 것이다. 저 위대한 사상가들이 왜 그의 음악을 불쾌한 위협으로 경험했는가? 이는 바그너가 분열에 맞서 총체적인 것, 공동의 것, 새로운 집단성을 상상하고 창조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파시즘의 기운이 발 밑에 그림자를 드리우던 시대를 산 니체, 전체주의적 광기를 몸소 목격한 아도르노, 나치즘의 외상적 상처를 외면할 수 없었던 라쿠라바르트에게 바그너의 이러한 욕망은 분명 '위험하게' 보였으리라. 하지만 일종의 분쇄기계처럼 세계를 누비며 온갖 기성 질서를 갈갈이 해체시키고 있는 전방위적 자본주의의 오늘날은 어떠한가? 원자화된 개인의 황폐한 풍경에 부재한 것은 물론 '공동의 것'에 대한 상상력이다. 바디우가 거듭 강조하듯, 바그너의 가장 비범한 업적은 그가 그의 음악 속에 부분과 전체가 연루되는 양상을 "비할 데 없는 통달"로 아로새긴 데 있다. 그에게는 분열을 넘어서는 종합에 대한 유토피아적 열망이 있다. 이전 시대의 종교적 형이상학에 의지하지 않는 새로운 연대의 가능성에 대한 음악적 탐색이 있다. 과잉해석의 여지가 다분하지만, 바디우가 바그너를 옹호하고자 하는 것은 이 때문일지 모른다. 오늘날 국지적인 특이성으로 조각조각 분열되어 있는, 자폐적이라 할 향유에 취해 세상에 대한 냉소로 병들고 있는 이들을 어찌 '묶어낼' 것인가? 바그너의 음악 속에서 흘러나오는, 부분과 전체의 황홀한 상호작용이야말로, 도래하지 않은 순수예술을 위한 지침으로 남아 있다. 어쩌면 바그너는 그가 창조한 인물들처럼 분열 속에 '열려있다'. 그는 '영웅없는 영웅주의'나 '총체화에서 분리된 순수예술'과 같은 역설적인 조어로 정의할 수 밖에 없는, 정착되지 못한 의미들의 소란 속에 있다. 이 끝나지 않은 방황의 흔적에서 무의미를 볼 것인가, 가능성을 볼 것인가. 이를테면, 신들의 황혼을 응시하는 군중과 같은 처지다. 바디우의 내기는 분명하다. '두 번째 바그너'를 위한 시간은 아직 채 오지 않았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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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불레즈와 파트리스 셰로의 <신들의 황혼> 피날레.


 

"구원의 모티프는 온 세상에 전해지는 전언이지만, 모든 무녀들과 마찬가지로 오케스트라는 불분명하며 그 전언을 해석하는 데는 여러가지 방식이 있다. ... 우리는 불신과 불안을 안고서 - 이 인류가 품고 있는 한없는 희망, <반지> 전체에 걸쳐 인간을 분열시켜온 극악한 싸움에서 언제나 말없이, 그리고 보이지 않게 위험에 처해졌던 그 희망에 필적한 불신을 안고서 - 그 소리를 듣지 않는가, 그래야 하지 않겠는가? 신들은 삶을 살았고, 그들 세계의 가치는 재구성되고 재발명되어야 한다. 인간은 마치 절벽 끝에 서 있는 듯하다 - 그들은 땅의 저 깊은 곳에서 울려오는 신탁에 긴장하여 귀를 기울인다." 

셰로를 인용하는 지젝을 재인용(p.317~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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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 동문선 현대신서 102
미셸 슈나이더 지음, 이창실 옮김 / 동문선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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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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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쎄, 도대체 해독불가다. 애써 정의하자면 시적이고 사변적인 전기다. 아니, 전기가 아니라 하나의 복잡한 미로다. 저자는 굴드의 괴팍한 행동과 언행을 비의적으로 드러내며(혹은 감추며), 이를 설명하기보다는 일종의 신비로운 삽화처럼 묘사한다. 이 난해한 스케치가 드러내는 것은, 온몸으로 겨울을 껴안은 채 꼬부라진 나목, 단단한 고독 속에 놓인 고요한 황홀경이다. 이를테면, 굴드의 복잡함과 모호함은 해명되지 않고 보존된다. 혹은 굴드는 해명을 피해 달아나는 복잡함과 모호함 그 자체로 드러난다. 그러므로 이 전기가 해독이 불가능함은 어쩌면 나보다 굴드 쪽에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굴드를 위해 쓰여진 이 짧은 책의 탁월함일 수도 있겠다.) 그는 세상의 설명과 논리가 닿지 않는, 엄밀한 고독 위에 거처를 마련한 이였으므로. 그의 푸가는 특유의 잔향없는 단호함으로, 경쾌한 잰걸음으로, 침묵 속으로, 아무도 없는 곳으로, 쉼없이 도망간다. 헛소리로 정리하자면, 그가 이미 떠난 자리에만 그가 있다. 남은 것은 도취 속에 새어나오는 흥얼거림 뿐이다. 내밀하게 몸을 섞는 푸가와 숨소리의 기이한 뜨거움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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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의 인문학 - 인문주의와 민주적 비판 에드워드 사이드 선집 6
에드워드 W. 사이드 지음, 김정하 옮김 / 마티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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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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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사명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유럽적인 (그리고 유럽중심적인) 사명이었던 것은 사실이나, 그는 그 사명 속에서 인간 역사의 단일성을 믿었고, 근대 문화와 민족/국가주의의 호전성 속에서도 해롭고 또는 적대적일지 모르는 타자를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믿었으며, 자신의 관점이 지닌 한계와 지식의 불충분함을 건강하게 인식하고서 멀리 떨어진 저자의, 그리고 먼 역사적 시대의 내적 삶 안으로 들어가도록 하는 낙관주의를 가슴 깊이 믿었습니다."(p.138)

 

 이 글에서 칭송한 아우어바흐의 미덕은 사이드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되리라.

 

 E.사이드의 책은 늘 내 마음을 흔든다. 역자가 "난해하고도 장황한, 그렇지만 아름답고 절절"하다고 표현한 그의 문장은 독자를 적당히 긴장시키면서도 사려깊은 온기가 묻어난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를 움직이는 것은 그의 '낙관주의', 스스로 인식의 지평이 지닌 한계를 겸허하고 '건강하게' 인정한다면, '해롭고 적대적일지 모르는 타자를 이해할 수 있다'는 진솔하고도 낙관적인 믿음이다. 자기가 그어놓은 테두리에서 한발짝도 나가길 두려워하고, 남이 그 경계선에 살짝 닿는 것조차 '폭력'이라 나무라는, 한없이 여리고 까다로운 정신의 자폐성이 마치 반짝이는 장신구처럼 과시되는 오늘날에 말이다. (그리고 이 장신구에서는 나도 자유롭지 않다.)

 

사이드는 묻는다. 우리는 특정한 장소에, 특정한 학교나 대학에, 일하는 장소에, 특정한 국가에 특정한 시간, 상황 아래 놓여 있다. 이 주어진 지평과 제한을 고스란히 받아들여야 하는가 아님, 그것들에 도전해야 하는가? 사이드가 주장하는 인문주의적 '저항'은 자신에게 주어진 세계에 도전하는 대담하고 비판적인 정신을 뜻한다.

 

"인문학자의 임무는 어떠한 위치나 장소를 점하는 것도, 어느 곳에 그저 속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인문학자는 우리의 사회, 누군가의 사회, 타인의 사회에서 문제시되며 유통되는 사상과 가치에 내부인이면서 외부인이어야 합니다." (p.113)

 

사이드의 인문주의(humanism)가 '인간'을 폐기한 현대 사상가들의 냉소와 조소 속에서 빛나는 이유는, 인간 본연의 한계인 '비극적 결함'-어느 누구도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지평에서 자유롭지 않다-을 인정하고 이에 저항하는 치열함과, "시대와 문화를 초월해 우호적이고 정중한 지성으로서 서로의 관점에서 서로를 이해하려 애쓴다면" 타자와의 "공감어린 대화"가 가능하리라는 절실한 낙관 덕분이다. (알튀세르식으로 : '나는 이데올로기 속에 있다'라고 말함으로써 우리는 진정으로 이데올로기의 악순환 속에서 벗어난다.) 이는 오늘날 수많은 포스트모던의 담지자들에게서는 발견하기 힘든 '낯선 이에 대한 환대', '친절함'의 미덕이다.

 

 하지만 인간만이 인간이 이뤄놓은 것들을 이해할 수 있다는 그의 비코적, '인문주의'적 믿음이 진정한 광채를 얻는 순간은 그가 '추방의 장소'에 머물기를 자처할 때이다.

 

"지식인이 임시로 거하는 집은 유감스럽게도 그 안에서 누구도 후퇴하거나 해결책을 찾을 수 없는 긴급하고 저항적이며 비타협적인 '예술의 영역' ... 오직 이 불안정한 추방의 장소 속에서 포착될 수 없는 것의 어려움을 포착할 수 있으며 어찌 되었든 애쓰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p.198)

 

그가 '예술'이라 부르는 비타협의 공간, 해명되거나 해소될 수 없는 외상의 공간에 서있기를 고집할 때, 그리고 그 공간 안에서만 불가능한 것이 일말의 가능성으로 움튼다는 사실을 단언할 때, 그는 비로소 단순한 낙관을 넘어선다. '인간에 대한 사랑'은 '인간의 필연적인 결함'을 숨김없이 껴안을 때야 가능하다는, 그 불치의 결함이 인간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단초가 되기도 한다는 '인간적인' 깨달음으로의 도약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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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행과 역설 - 장벽을 넘어 흐르는 음악과 정치, 개정판 에드워드 사이드 선집 3
에드워드 W. 사이드·다니엘 바렌보임 지음, 노승림 옮김 / 마티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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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15


여러가지 매력적인 쟁점을 다루고 있는 대담집이지만,

그 중 딱딱한 주제 하나만 골랐다.


'원전연주'와 '정격성' 그리고 '작곡가의 의도'

 

 -

 에드워드 사이드가 말하길,

 "정격성이 과거에 관한 것이라는 생각은 정말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현재에 관한 것이며, 현재가 과거를 바라보고 구성하는 방법에 관한 것이며, 또한 현재가 어떤 과거를 원하는가에 관한 것입니다. ... 지난 30년간 18세기 음악을 연주하며 드러난 '정격성'을 향한 욕망을 보십시오. 그것은 대형 오케스트라의 미끈하고 풍성한 사운드에 대한 반작용이었을 뿐입니다. ... 정격성이란, 과거를 구성하는 방법을 두고 일어난 현재의 다툼과 연관이 되어있을 뿐입니다. 강조하고 싶은 점은 바로 이겁니다. 과거는 재구성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죠. ... 이처럼 정격성과 과거에 대한 문제를 더 깊게 파고든다면, 우리는 '타자'에 대한 문제에 다시 도달하게 됩니다. 거기에는 오늘날의 이슈 뿐만 아니라 과거에 대해 누가 특권을 가지고 있는가의 문제도 포함됩니다. 이는 음악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격운동에서도 매우 분명하게 드러나는 일종의 우월의식입니다."(p.186~189)

 

 "누가 베토벤을 그렇게 연주하는가?"라며 분통을 터뜨리는 일부 원전주의 애호가들의 분노에는 진리로 고양된 과거의 한 순간을 향한 퇴행적인 동경이 엿보인다. 그들은 과거의 어느 시점 -보통 고전음악이 작곡된 바로 그 '순수한' 순간-을 손아귀에 쥐고는, 자신의 방식만이 옳다며 떼를 부린다. 사이드 말대로 이는 마치 '순결한 역사의 우리를 오염시키는 이방인은 누구인가?'라며 으르렁대는 광신적 근본주의자의 완고함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원전연주 역시 단지 과거를 재구성하는 현재적 방식 중 하나일 따름이며, 결코 '유일하게 올바른' 길이 아니다. (이는 물론 상식적인 해답이다.) 그들이 맹신하는 '역사주의적' 진리들, 작곡된 바로 그 순간의 악기와 편성을 고스란히 '재현'함으로써 가장 순수하고 완전한 형태의 연주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고약한 믿음은, 가장 순수하고 완전한 형태의 환상일 뿐이다.

 

 우리는 이런 원전연주의 완고함에서 서구 고전음악의 케케묵은 (동시에 절대적인) 지침 중 하나인 '작곡가의 의도'를 마주하게 된다. 원전연주의 맹신자든, 표현주의의 화신이든 간에, 고전음악 연주가들은 유독 '작곡가의 의도'에 목을 맨다. 그리고 이 '작곡가의 의도'에 대한 집착은 악보의 해석(혹은 연주자의 해석적 자유)의 문제와 직결된다. 스코어를 하나의 텍스트로 간주한다면,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텍스트의 독해에 어느 정도까지의 자유가 허락되는가" 즉, "연주자는 어느 정도까지 '자의적'으로 스코어를 해석낼 수 있는가"이다. 우리는 '작곡가의 의도'에 어떻게 근접할 수 있으며 (혹은 주제넘은 믿음으로 어떻게 '완전한 실현'에 이를 수 있으며), 동시에 어느 정도까지 거리를 확보하고, 자유를 얻어낼 수 있는가? 물론 가장 엉터리는 "모든 것이 악보에 다 있으니, 내가 할 일은 그것을 단순하고 충실하게 다시 재현하는 것"이라는 궤변일 것이다. 바렌보임을 인용하자면,

 

 "그런 의미에서 (악보에의) 충실함을 논할 때 그 충실함은 대체 무엇에 대한 것일까요? 여기서 언급되는 충실함의 대상이 되는 악보는 그저 아주 근사치에 가까운 빈약한 체계일 뿐입니다. ... 만약 눈 앞의 인쇄물을 단지 적혀있는 그대로만 재생하고자 시도할 뿐 그 이상 아무런 의미도 담지 않는다면, 그런 일은 불가능하기도 하거니와 -따라서 이것은 충실하다고 말할 수 없죠- 완전히 비겁한 행동입니다. 왜냐하면 상호관계와 음의 정량을 이해하기 위한 수고를 거부하고, 그 밖의 다른 것에 대해서는 일절 말하지 않겠다는 소리니까요." (p.168~169)

 

 텍스트를 있는 그대로 재현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교조주의적 믿음은, 성경이나 코란을 문자 그대로 실현할 수 있다고 믿는 (그리고 그렇게 해야한다고 강박하는) 종교적 원리주의자와 다시 한 번 엄밀한 근친성을 보인다.(이를 텍스트 페티시즘이라 부르고 싶다.) 그들이 요상한 강박 속에 놓치고 있는 것은 텍스트가 독자들에게(그리고 연주가들에게) 자명하고 투명한 지시나 명령이 아닌 히스테리컬한 수수께끼로서 등장한다는 것이다. 오래된 구조주의적 교훈에 따라 기표에 달라붙는 기의가 근본적으로 '자의적'이듯이, 악보가 가리키는 저 '작곡가의 의도' 역시 근본적으로 '모호'하다. '작곡가의 의도'를 실현하고자 하는 연주자는 절대적으로 막막한 장벽 앞에 서 있으며, 텍스트는 (즉, 스코어는) 자신의 진실을 캐내어 보라며 연주자를 침묵의 위압으로 다그친다. 연주자들의 공들인 해석과 치밀한 연주(바렌보임의 표현으로는 '소리의 물리적 구현')는 이 모호한 동시에 준엄한 심문관에게 바치는 나름의 대답이다. 요점은 텍스트가, 악보가 완벽한 형태로 (즉, 모든 의미가 훼손되지 않고, 어떤  '매개'도 거치지 않은 채) 고스란히 재현되고 구현될 수 없다는 것, 텍스트와 그것의 구현 사이에는 구성적이고 본질적인 방식으로 어떤 간극이, 어떤 불가능성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물리적인 장벽일 수도, 기교적인 장벽일 수도, 무엇보다 시대적인 장벽일 수도 있다. 그토록 치밀한 고증을 거쳤다는 원전주의 음악가들 조차 '우리 시대'의 산물이며, 그런 의미에서 시대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는 작곡가가  '창조의 순간' 꿈꾸었던 그 원대하고 풍요로운 계획에 비하면 연주가의 해석과 연주는 늘 무언가 불완전하고 결핍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악보나 보면서 상상 속에서나 음악을 들어야 하는가?) 핵심은 정확히 그 반대다. 악보와 연주자의 연주 사이에 자리잡은 이러한 불가능성은 연주자로 하여금 그가 나름의 대답으로 해석과 연주를 멈추지 않게 하는 긍정적이고 실정적인 조건으로 기능한다. 상황이 근본적으로 모호하다는 것, 자신의 대답이 작곡가가 의도했던 바로 그것이었는지 확신할 어떠한 근거도 부재하다는 것이야말로 연주자가 극도의 성의로 해석과 연주를 계속하게 하는 원천이 된다. (모든 것이 완전히 실현되어 있다면 무엇하러 그것을 헛되이 반복하겠는가?) 또한 우리는 "늘 무언가 불완전하고 결핍되어" 있는 쪽은 오히려 텍스트와 스코어라는 것, 물리적으로 실현된 소리의 풍요로움과 이 풍요로움이 가져오는 격렬한 감정에 비하면 텍스트는 '그저 아주 근사치에 가까운 빈약한 체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악보는 언제나 연주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고, 어떠한 스코어도 그것의 실현에 선행하여 군림하는 즉자적 실체로 행세할 수 없다. 저명한 작곡가인 동시에 도저한 연주자이기도 한 불레즈가 말하기를,

 

 "악보나 작곡가의 의도를 하나의 보이지 않는 원천으로 간주한다면, 이에 대한 지각은 청자의 관점을 반영함으로써 이루어 집니다. 결코 원천을 그대로 직지각할 수 없습니다. 주변이 밝아지면 불이나 빛이 있다는 건 알지만 직접 눈으로 확인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지요. 지휘자가 악보를, 연주자가 지휘자를, 그리고 청중이 연주자의 소리를 들으며 스스로의 모습을 반영하는 과정은 마치 한 줄로 서 있는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 또한 청중의 입장에서 근원이라고 생각하며 바라보는 대상은 사실은 환상입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사실 거울에 비친 모습일 뿐이죠."(p.171~172 약간 변형해 인용)

 

 급진적인 결론으로 나아가자. 모든 개개의 연주를 관장하는 즉자적 실체, 연주자들의 절대적 지침, '작곡가의 의도'는 다만 하나의 환상이다. 그것은 결코 '직지각'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단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작곡가의 의도'는 지휘자와 악보, 연주자와 청중의 상호주관적 네트워크 속에서 유추되는 유령적 참조점이며, 우리가 결코 악보의 완전한 실현에 이를 수 없다는 외상적 진실, 필연적 무능력을 감추기 위해 등장한 구성적인 오인, 환상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가 '작곡가의 의도'에 근접했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인 끝에 우리가 꿈꾸던 바로 그곳에 도달했노라고 단언할 때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다름 아닌 '거울에 비친 우리 자신의 왜곡된 형상'일 뿐이다.

 

 이제 다시 '정격성'으로 돌아가자. '원전연주'(authentic play)의 고고학적 집착은 어쩌면 (이미 시체가 된 작곡가의 '진정한' 의도에 결코 도달할 수 없다는) 끔찍한 곤경을 피하기 위한 증상적 해결책이 아닌가 싶다. 작곡가가 의도했던 "진정한" 연주에 대한 강박이 그들을 작곡된 그 순간의 역사적 상황마저 그대로 재현하고 연출해야 한다는 원전주의적 강령으로 이끌었을 지도 모른다. (전혀 딴 얘기지만, 어쩌면 이는 오늘날의 이슬람,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에게서도 마찬가지다. 모든 종류의 지역적 독특성이나, 전근대적인 전통들이 허물어지는 '세계화', '자본주의'의 오늘날, 그들은 땅이 꺼진 듯한 궁극적 허망함을 피하기 위해, 자신들의 전통적인-종교적인 지침에 더욱더 매달리는 것이다. '좋았던 옛날'로 도망치는 어느 수구주의자처럼 말이다.) 그리고 이것이 그들이 마주한 악보라는 종이조각-말없는 심연-에 대한 그들 나름의 대답이었을 것이다. 다소 거칠게 말해서, 고전음악을 여전히 살아 있게 하는 것은 과거를 재구성하고자 하는 욕망이며, 잃어버린 과거의 향유와 순수한 완벽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불가능한 욕망이다. '정격성'에 대한 갈구는 모든 여타의 해석들이 어딘가 다소 탈구되어 있고, '정격적'이지 못한 한에서 지탱된다. 그리고 이것이 어쩌면 지금도 위대한 작곡가들의 음악이 여전히 새로운 영혼을 얻어 연주되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물론, 원전연주 역시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스코어의 전례없는 지평을 열어젖혔다는 의미에서 혁신적인 결실이다. 즉, 여기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특정 해석적 경향이 아닌 그와 함께 수반되곤 하는 '태도'의 문제다.)

 

 별볼일 없어 보이는 음표, 사소한 악상기호 조차 우리에게 무거운 침묵으로 제 자신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가능한 수많은 경우의 수 가운데, 자신을 어떤 밸런스로, 템포로, 프레이징으로, 하나의 이야기로서, 총체로서 구원해낼 것인가? 이에 대한 대답은 시대마다, 연주자마다 다를 것이고, 또한 그러므로, 멈추지 않을 것이다. '작곡가의 의도'가 '텅 빈' 지침으로 제공되는 한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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