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작고 말라서, 겨울 외투를 입었다기보다는 옷 더미에 몸을 파묻고 걸어 다닌다는 인상을 주는 녀석’(p15)이 바로 소목이다.어울리던 친구들과 아지트 삼으려 들어간 폐가에서 소목은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살해하는 현장을 목격한다.노인의 비명에 친구들은 다 도망가고 소목은 벗어놓은 외투도 챙기지 못하고 도망친다.그렇다고 집으로 갈 수는 없고 도시의 유명한 집안의 딸인 나울을 찾아가 자신이 본 장면을 이야기한다.이야기를 들은 나울은 학교 시험을 대체할 에세이를 쓸 예정이라면서 함께 폐가에 가 줄 것을 부탁한다.소설은 시대 배경을 언제라고 정확하게 규정짓지 않고 다만 학교에서 정규 과목으로 기억학을 배울 만큼 기억에 대해 중요하게 생각하는 시대이다.사람들은 대부분 가까운 사람의 죽음도 쉽게 잊지만 어떤 이들은 어떤 죽음도 잊지 못하게 되는 ”특이체질‘이 되기도 한다.소목은 어린 시절 형의 죽음 뒤 자신만 기억하는 형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누구도 믿지 않은 경험이 있기에 폐가에서 살인을 목격한 뒤 특이체질로 변한 자신의 대해 말하기를 두려워한다.소설은 소목이 경험한 형의 일과 엄마의 죽음 뒤 모든 것을 잊고 소목만을 기억하는 나울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망각과 기억에 대해 말하고 있다.우리는 시간이 지나면서 어떤 기억은 사라져 버리기도 하고 별 것 아닌 일처럼 기억되기도 하고 또 다른 기억은 시간이 지날수록 선명해지기도 한다.이기적으로 보이던 나울의 진심을 알게 된 순간 소설은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로 변하고 풋풋한 소년소녀의 연애담이 된다.
나의 첫도둑질그것은 남의 몸속에서 이루어졌다.신박한 제목의 소설의 첫 문장이다.태어나면서 엄마의 뱃속에서 누구의 것인지도 모르는 뼛조각을 훔쳐 나온 ‘사미’는 그것이 자신의 첫 도둑질임을 안다.엄마는 뼛조각을 옷장 가장 아래쪽 서랍에 보관한다.“그리고 어느 정도 머리가 자란 내가 당신에게 모질게 혹은 비겁하게 굴려고 할 때마다 눈을 맞추며 말했다. 아……뼈가 아프다.”(p10)이런 말을 할 때면 사미는 엄마가 자신을 미워한다고 생각한다.사미는 신이 주신 재능이 훔치는 것이라 믿으며 “극도의 의연함과 차분함 그리고 평화 속에서” (p18)물건들을 훔친다.양손에 숨길 만한 사물이라면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훔칠 수 있는 재능을 갖은 사미는 ’필요해서‘, ’원해서‘ 가 아닌 한계를 넓히기 위해 훔친다.그러던 어느 날 도서관에서 초콜릿을 훔치다 난생처음 ’성준’에게 들키고 그 후 무언가를 훔치려 하는 순간 매번 제지당한다.성준은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는 사미 앞에 소중히 간직한 엄마의 의안을 보여주며 자신이 사미에게 집착하는 이유를 설명한다.작가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어 이 소설을 썼을까 소설을 덮고 한참을 생각했다.사미는 결핍을 채우기 위해서 물건을 훔치기 시작하고 성준의 형 성구는 엄마의 사랑을 되찾기 위해 사미의 재능을 빌린다.사미가 필요 없는 물건을 훔칠 때마다 특별히 착한 사람이 아닌 나도 그 손을 꼭 잡아주고 싶다.만약 엄마가 뼛조각 이야기를 하지 않고 결핍을 느끼게 하지 않았다면 사미는 자신의 재능을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엄마가 성구를 성준이 살펴야 할 형으로 대우하지 않았다면 이야기는 달라졌을까.혹시 사미가 진짜 훔치고 싶은 건 엄마의 마음이 아니었을까.엄마인 나는 소설 속에서 못난 엄마를 찾아내 들여다보며 나를 반성하게 된다.
얼마 전 김보영 작가의 #고래눈이내린다 를 읽고 작가의 다른 이야기도 궁금해 고른 소설이다.평소 많이 써오던 sf 소설을 기대하며 읽은 이야기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소설이었지만 작가의 다른 장르를 볼 수 있어 더 좋았다.암으로 돌아가신 주은의 엄마 장례식장에 친가와 외가의 친척들을 비롯 초대하지 않은 백수 친구 민재까지 참석해 시끌벅적하다.특히 기이한 일을 겪은 뒤 번듯한 대학교수직을 버리고 새천국재림교회에 입교한 큰아버지는 전도에 목소리를 높인다.오랜만에 한 자리에 모인 가족들은 망자를 위해 슬퍼하기보다는 각자 알고 있는 기이한 일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하고 ‘주은‘은 장례식장에 앉아 있는 돌아가신 ’엄마‘를 보게 된다.사경을 헤매던 엄마는 주은에게 가고 싶은 곳을 말하지만 끝내 어디에도 가지 못하고 엄마가 돌아가시자 주은에게는 후회만 남는다.소설 속 장례 장면을 예소연 작가의 #그개와혁명 의 장례식장 모습과 오버랩하며 읽었다.예소연 작가의 장례식이 소설 속에서나 꿈꿀 수 있는 장례식장의 모습이라면 김보영 작가가 그린 장례식장은 울다가 웃기도 하는 현실 그대로의 장례식을 그리고 있다.눈을 감으면 ‘변위‘의 세계로 떠날 수 있는 주은이지만 너무나 현실적으로 엄마의 병을 대해 엄마는 병원에만 계시다 돌아가신다.주은이 후회하는 모습은 병으로 가족을 잃은 사람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던 하는 후회이기에 주은의 심정을 공감하며 읽게 된다.작가는 ‘왜 똑똑한 사람들이 그리 쉽게 사이비에 빠지는가?”를 생각하다 소설을 썼다고 한다.헤프게 기이를 경험하면 그것은 일상이고 보통의 일이지만 한 번의 기이한 경험은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기도 한다.한 번의 경험으로 사이비에 빠진 큰아버지의 현재의 모습이 질문의 답이 아닌가 싶다.장례식장의 에피소드는 초초초사실주의 문학, 주은의 변위는 역시 sf 작가다운 설정이어서 좋다.
<본 도서는 비채 서포터즈 활동 중 제공받았습니다.>우화소설은 동물이나 식물을 비롯 기타 사물이 인격화되어 주인공으로 등장해 그들의 행동에서 풍자와 교훈을 주는 이야기입니다.우리가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우화소설로는 “이솝우화”가 있습니다.젊은 도공이 맨 처음 만든 항아리가 오줌독에서 범종의 음관 역할을 하는 과정을 담은 “항아리”를 시작으로 정호승 작가의 우화소설 <항아리>에는 모두 44편의 짧은 우화소설이 담겨 있습니다.선인장으로 태어난 게 늘 불만이었던 ‘선인장 이야기‘는 타고 난 태생은 물론 아버지의 지혜까지 무시한 아들 선인장은 말 안 듣는 ‘청개구리‘를 떠오르게 합니다.‘밀물과 썰물‘ , ’동고동락‘, ’열쇠와 자물쇠’ 처럼 제목에서 알 수 있듯 함께 해야만 존재감이 드러나는 것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그들은 한 몸처럼 함께 해야 빛을 내고 완벽해지는 존재들이지만 처음에는 무조건 반목합니다.어떤 이들은 다시 돌아와 상대를 이해하고 함께 하지만 파괴를 선택해 모두가 불행해지기도 하는 이야기에서 현실의 인간관계도 생각해 보게 됩니다.우화 소설집에는 ’비익조’ ,‘상사화‘, ’인면조‘, ’창덕궁 잉어‘, ’오동도‘, 등 전해 내려오는 옛이야기 속 주인공이 등장하는 이야기도 있습니다.특히 동백꽃이 아름다운 ’오동도‘ 이야기는 뭍으로 나간 사랑하는 사람을 하염없이 기다렸을 소녀의 마음이 전해져 눈물처럼 뚝뚝 지는 붉은 동백꽃이 다르게 느껴지기도 합니다.하드커버의 소설집은 만듦새가 튼튼하고 아름답습니다.저는 습관처럼 처음부터 차례로 이야기를 읽었습니다만 단편인 우화소설은 순서 없이 아무 페이지나 펼쳐 읽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많은 시간을 들여 처음부터 끝까지 읽지 않고 잠깐의 짬을 내 한 편씩 곱씹으며 읽으면 더 좋은 소설집입니다.그래서 긴 이야기를 읽는데 어려움을 느끼는 독자가 읽기에도 좋고 누군가에게 선물한다면 오래도록 곁에 두고 함께 할 소설집입니다.
<본 도서는 후즈갓마이테일 출판사에서 선물 받았습니다.>작가는 2008년 런던 채류 중 런던 사우스켄싱턴에 있는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V&A 박물관)을 관람객이자 창작자로 자주 찾았다고 합니다.세계 최대 규모의 예술. 디자인 전문 박물관은 ‘모두를 위한 교실’을 모토로 설립됐고 배우고 관찰하며 창의적 영감을 얻을 수 있도록 설계돼 있다고 하네요.처음엔 박물관 자체에 매료돼 종종 방문했는데, 어느 날 문득 직접 그리고 싶은 생각이 들었고 마음에 드는 작품을 하나씩 골라 그리기 시작했답니다.아무리 아름다운 작품도 20분 이상 바라보는 일은 힘들지만 드로잉을 하면서 20분은 훌쩍 지나갔다고 합니다.어떤 대상을 그릴 때는 그릴 대상을 보면서 그리지 그리면서 본다는 생각을 해 보지 못한 나는 “그리면서 본다”는 제목을 다시 곱씹어 봅니다.그리면서 보는 과정을 통해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닌 ‘관찰하는 경험‘을 하게 된 작가는 창작의 기쁨은 물론 그 전시물이 내 것이 된 듯한 만족감을 얻었다고 합니다.‘드로잉 에세이‘로 분류된 책은 작가가 드로잉을 시작했던 이유와 만족감을 프롤로그에 담아 설명하는 것을 시작으로 ‘20분 바라보는 드로잉 여행‘의 방법과 준비물까지 자세히 안내하고 있습니다.들어가기 전 드로잉 작품을 보는 법까지 세세히 알려주고 있어 박물관에 전시된 작품에 한층 가깝게 다가가게 해 줍니다.작가가 직접 그린 30여 점의 드로잉을 보는 것도 충분히 즐겁지만 작가가 알려주는 깨알 같은 드로잉 여행 꿀팁은 앞으로 드로잉 여행을 시도해 볼 누군가에게 그야말로 꿀팁이 될만합니다.사철제본이라 드로잉을 볼 때 어떤 방해도 없이 활짝 펼쳐지는 점도 좋고 책의 띠지가 박물관을 그린 드로잉 작품이라는 사실도 띠지를 소중하게 간직하게 합니다.거기다 “V&A 박물관 찾아보기“ 의 QR 코드를 찍어 보면 실제 전시 물건 사진과 드로잉을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작가가 세심한 관찰을 통해 그린 그림을 보고 글을 읽는 동안 무엇인가 그리면서 보고 싶다는 생각을 내내하며 책장을 넘겼습니다.언제 실현 가능할지는 모르지만 꼭 시도해 보고 싶은 드로잉 여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