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의 여름
츠지무라 미즈키 지음, 구수영 옮김 / 내친구의서재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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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세한 내면 묘사가 돋보이는 소설 <호박의 여름>. 긴 분량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읽히는 이 작품은 미스테리 추리 소설이자 성장소설이다. <차가운 학교의 시간은 흐른다>로 유명한 츠지무라 미즈키의 최근작이기도 하다.



이야기의 시작은 30년 전 여름학교 터에 묻힌 백골 사체가 발견되면서 부터다. 관련 의뢰를 받은 변호사 노리코는 자신이 어렸을 때 그 여름학교를 방문한 적이 있다는 걸 기억해낸다. 설마 백골 사체는 그녀가 아는 사람일까? 노리코는 기억을 되짚으며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 여름학교에서의 일들을 마주한다. 특히 그녀의 마음 한 켠에 소중하게 남아있는 여름학교에서의 친구 미카와 얽힌 기억들을 찾아나간다.



<호박의 여름>을 읽으면서 ‘아이의 시간과 어른의 시간은 연결되어있다‘는 저자의 말을 자주 떠올렸다. 어린시절의 나와 지금의 나는 같은 사람일까? 분명한 건 어렸을 때의 특정 기억들이 지금의 나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어린 시절의 나는 무력했지만,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를 구해줄 수 있다는 것. 그런 의미에서 어른이 된 노리코는 어렸을 때의 자신을, 친구 미카를 구하는 사람이다. 그녀는 아이였던 과거의 자신과 미카의 손을 잡아준다. 이 부분은 소설 후반부에 이르러 드러나는데, 차곡차곡 쌓인 서사가 고요히 폭발하는 듯해 무척 좋아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이 소설의 가장 큰 테마는 부모의 역할이 아닐까 싶다. 여름학교의 주최측이었던 ‘미래학교‘는 아이들을 따로 모아 생활하게 하며, ‘생각하는 힘을 가진 아이‘로 키워내는 단체다. 그곳에서 자란 아이는 어떤 어른이 될까? 미래학교는 성공한 것일까? 저자는 아이가 어른이 되고, 또 다른 아이의 부모가 되는 순환을 그려내며 독자에게 되묻는다. 진정한 부모의 역할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소설 초반부에는 아이의 시선에서, 후반부에는 부모의 시선에서 이야기가 그려지기에 독자로서는 다양한 관점에서 상황을 바라볼 수 있는 셈이다.



가볍지 않은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다 읽고 나면 따뜻함을 느끼게 된다. 누구에게나 있는 어린시절을 생각나게 하기 때문일까. <호박의 여름>. 유년시절의 미스테리와 우정, 성장 이야기를 만나고 싶은 분들께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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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 싶다 쓰고 싶지 않다
전고운 외 지음 / 유선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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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있고 믿을만한 필진과 뾰족한 기획이 만나면 정말 매력적인 책이 탄생하는구나. 책 한 권을 온전히 다 읽기 어려운 요즘, 간만에 딴생각 하지 않고 재미있게 읽었다. 출판사 유선사의 첫 책이자, 쓰는 사람들의 ‘쓰고 싶지만 쓰기 싫은 마음‘을 담은 <쓰고 싶다 쓰고 싶지 않다>. 전고운, 이석원, 이다혜, 이랑, 박정민, 김종관, 백세희, 한은형, 임대형 아홉 작가의 글들이 실려있다. 필진 라인업만 보고도 꼭 읽어봐야겠다 싶었던 책.

이 책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던 이유는 저자들의 쓰고 싶지만 쓰기 싫은 모호한 마음이 솔직하게 담겨있기 때문이다. 글들을 읽다보면 ‘아 나만 그런게 아니었어!‘하는 안도감이 생긴달까. 영화감독, 소설가, 에세이스트에게도 반짝 하고 글을 써내는 초능력 따위는 없는 것이다. 그들도 미루고, 좌절하고, 다시는 쓰지 말자고 다짐하고, 정말 쓰고 싶은 글은 대체 언제 쓸 수 있을까 고민한다. ‘결과가 어떻든 쓰기 만만했던 글은 단 한 편도 없었다‘고 말하며, 급기야 워드를 사용하면 걸작을 써야할 것 같아 부담스러워 메모장에 글을 쓴다고 고백한다. 이처럼 개성이 각기 다른 아홉 분의 솔직한 마음이 글 속에 오롯이 담겨있어 좋았다. 역시 나만 글쓰기 앞에서 망설이는게 아니었다니까.

그런데 결국 쓰고 싶지 않다는 말은 쓰고 싶다는 말과 같다. 너무 잘 쓰고 싶어서, 스스로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 되려 쓰고 싶지 않다고 생각해버리는 것이다. 저자들이 글쓰기를 정말 온 마음을 다해 싫어한다면 당연히 이 책을 위해 원고를 보내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쓰기 싫은 마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쓰고 싶은 마음이 그보다 훨씬 크기에 우리는 글을 쓴다. 또한, 글 쓰는 일을 생업으로 삼지 않더라도 지금 이 순간 글을 쓰고 있다면 그 사람은 글 쓰는 사람이다. 그러니 이 책 속의 쓰는 마음에 대한 이야기는 글 쓰는 사람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한 셈이다.

가장 깊이 다가왔던 문장은 한은형 소설가의 ‘‘쓰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쓰지 않았던 시간들만큼 고통스러운 것은 없다‘(195p) 였다. 완벽하게 준비된 바로 그 순간은 없으니 지금 당장 쓸 것. 바로 나에게 하는 말.

+
5월 19일부터 서촌 어피스어피스 @apiece_apeace 에서 Writers‘ Room 전시도 열린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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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의 기쁨 - 길바닥을 떠나 철학의 숲에 도착하기까지
토머스 채터턴 윌리엄스 지음, 김고명 옮김 / 다산북스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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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sing my cool. 알을 깨고 나오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용기, 다른 하나는 지혜.

길바닥에서 깡패를 흉내내며 흑인 또래 집단에 들어가고자 애쓰던 소년이, 다른 누군가가 되려는 노력을 멈추고 맨 얼굴의 자기 자신을 발견해나가는 이야기 <배움의 기쁨>.

알을 깨고 나올 준비가 되었을 때, 저자가 집요하게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되물을 수 있었던 건 아버지의 서재에서 발견한 책들 덕분이다. 흑인으로서 학업을 지속하기 어려웠던 시대에 사회학 박사학위까지 따낸 저자의 아버지. 온화한 독재자였던 아버지가 저자에게 준 것은 바로 지혜다. 책 속에서 훌륭한 조언을 구할 수 있으리라는 지혜.

그리고 저자에게는 용기가 있었다. 폭력에 폭력으로 대응하지 않고 그냥 걸어나올 수 있는 용기, 무지를 인정하고 배울 수 있는 용기, 자라온 환경과 물리적인 거리를 둘 수 있는 용기, 과거의 신념을 깨끗하게 뒤로할 수 있는 용기. 가장 결정적으로, 자기 자신을 직면할 수 있는 용기. 용기를 가진 자만이 알을 깨고 나올 수 있다.

저자는 흑인 사회의 정신적 빈곤이 바로 그들의 문화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빈곤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흑인뿐만 아니라 집단 속에 숨은 채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알려고 하지 않는 이들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는 이야기다. 빈곤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 내가 아닌 다른 누가 되려고 하지 말라, 집요하게 묻고 또 물으며 스스로가 누구인지 알아내라, 비교하지 말고 자기 자신이 되어라. 누구나 알고 있지만 실행하기는 어려운 것들이다. 알 속에 머무를 것인지, 껍질을 부수고 나올 것인지도 선택이다.

빠르게 읽었지만 곰곰히 생각할 것들이 많았던 책.

‘우리는 스스로를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우리가 동경하던 래퍼과 깡패들처럼 오만과 허세라는 넝마로 자신의 무지를 가리고 있었다. 개성있는 인격체로서 자신을 계발하는 것보다 고정관념의 화신이 되는 쪽이 훨씬 쉬웠다.‘(144-145p)

+ 책을 다 읽고나니 <배움의 기쁨>이라는 제목이 아쉽게 느껴졌다.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보면 내가 이 책을 다시 한 번 들여다보고 읽게된 이유가 타라 웨스트오버의 <배움의 발견>과 비슷한 제목이어서였던 터라, 마케팅적으론 좋은 제목이겠구나 싶다. Losing my cool이라는 원제가 훨씬 멋지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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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의 방 - 박정민 천우희 안재홍 변요한 이제훈 주지훈 김남길 유태오 오정세 고두심 자기만의 방
정시우 지음 / 휴머니스트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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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민, 천우희, 안재홍, 변요한, 이제훈, 주지훈, 김남길, 유태오, 오정세, 고두심 배우의 인터뷰가 담긴 <배우의 방>. 배우가 나 자신으로 돌아가는 곳, 배우의 공간에서 진행된 인터뷰. 열 명 배우들의 솔직하고 편안한 모습들을 만날 수 있다. 배우라는 직업인으로서가 아니라 매일을 살아가는 인간 자체로서의 모습들이 보여 읽는 내내 즐거웠다. 유명 배우들도 모두 나와 다를 것 없이 똑같이 고민하고, 도전하고, 상처받고, 나아간다. 이런 마음들이 인터뷰 속에 포장없이 솔직하고 투명하게 담겨있어 좋았다.

누구나 자신을 드러내고 표현할 수 있는 시대다. SNS 활동을 계속할수록 겉으로 보여지는 것과 보여지지 않는 것 사이의 간극을 조율하는게 어렵다는 생각을 종종한다. 당연히 그 둘 사이의 간극이 없는 것이, 있는 그대로의 나를 솔직하게 내보이는 것이 최상책이겠지만 나에게는 아직 어렵다. 인터뷰들에서 공통적으로 느껴졌던 건, 배우들이 모두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받아들이고자 한다는 것. 어쩔 수 없다는게 나쁜게 아니니 받아들이자는 천우희 배우의 말, 나를 솔직하게 오픈해서 이야기하는게 좋다는 이제훈 배우의 말, 머리를 굴려서 얻어낼 수 있는 건 별로 없으니 솔직해져야한다는 주지훈 배우의 말 등등. 가짜 속에서 진짜를 끌어내 보여주는 일을 업으로 삼는 이들의 말이라 더욱 와닿았다.

나는 아직 업을 찾지 못한 상태, 그러니까 첫번째 산에조차 도착하지 못한 상태라 열 명 배우들의 이야기가 두번째 산으로 가고있는 선배들의 이야기처럼 들렸다.(*데이비드 브룩스는 첫번째 산은 커리어 발전을 향해 나아가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삶의 방식이고, 두번째 산은 타인과 함께하고 나누는 삶의 방식이라 이야기한다. 적고나니 첫번째 산과 두번째 산을 합쳐서 넘어버리면 되는거 아닌가 싶기도 하다.) 무엇이든 빠르게 정하고 싶어하는 나는, 영화를 자신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말하는 이제훈 배우의 말이 내심 부러웠다. 하지만 내가 나의 업을 찾아가는 과정 또한 아주 재미있을 것이다. 실패하더라도 그것 나름대로 얻는게 있겠지. 더 이상 조급하거나 불안하지는 않다. 세상이 나를 바라보는게 중요한게 아니라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니까(주지훈 배우의 인터뷰 중에서). 인터뷰는 결국 한 사람의 생을 끌어내는 작업이기에, 읽고 나면 어쩔 수 없이 나 자신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된다. 스스로에게 던질 좋은 질문들을 꽤 건져냈다는 점에서도 만족스러웠던 책, <배우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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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크 머리를 한 여자
스티븐 그레이엄 존스 지음, 이지민 옮김 / 혜움이음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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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박감 넘치는 호러소설 <엘크 머리를 한 여자>. 죄의식과 복수, 대물림되는 폭력의 고리를 다루고 있다. 페이지를 거듭할수록 독자를 맹렬하게 몰아붙이는 에너지가 느껴지는 소설이기도 하다.



이야기는 이렇다. 네 명의 원주민 청년들이 금지 구역으로 엘크 사냥을 떠난다. 문제는 상황이 순식간에 꼬여 단순한 사냥이 처형의 현장이 되어버렸다는 것. 이 사건은 청년들에게 씻을 수 없는 죄의식을 심어준다. 죄는 씻겨질 수 있는가? 어떻게? 10년 뒤, ‘엘크 머리를 한 여자‘가 네 명의 원주민 청년들에게 차례로 모습을 드러낸다. 피의 복수가 시작된 것이다.



소설의 전개는 끊임없이 독자의 관념을 뒤흔든다. 환상인지 실재인지 모를 ‘엘크 머리를 한 여자‘도 독특하지만, 서술 관점의 변화야말로 흥미로운 포인트다. 소설의 중반부부터 ‘엘크 머리를 한 여자‘가 ‘너‘로 지칭되며 서술의 관점이 뒤바뀌는데, 이때부터 독자는 원하든 말든 이야기의 일부가 된다. 가파르게 진행되는 전개 덕에 그야말로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한 줄 한 줄 읽게 되는 것. ‘이 이야기 대체 뭐지?‘하고 읽기 시작했다가 속수무책으로 빨려들게 되는 소설. 구성이 참 영리하고 치밀하다.



그런가하면 소설 속에 드러난 현대 원주민들의 문화적 정체성도 주목할만한 요소다. 네 명의 청년들 중 두 명은 원주민 보호 구역을 떠나고, 나머지 두 명은 남는데, 백인 사회에 섞이고자 하면서도 원주민 전통을 지키고자 하는 모습이 교차된다. 주인공들이 ‘엘크 머리를 한 여자‘와 마주하며 겪는 감정적 동요는 이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두고 겪는 존재론적 동요로 치환될 수 있다. 호러 소설이라는 표면적 층위를 따라 읽어도 충분히 흥미로운 작품이지만, 그 이면에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염두에 두고 읽을 때 한층 더 깊이있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이것저것 차치하고, 아무런 사전정보 없이 읽었을 때 오싹함의 절정을 느낄 수 있는 호러 스릴러 소설. 다소 잔인함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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