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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기원 - 인간의 행복은 어디서 오는가
서은국 지음 / 21세기북스 / 201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에 대한 핵심 내용들은 앞 선 다른 이들의 서평을 통해서 잘 소개된 것 같습니다. 저 역시 행복심리학에 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 온
사람으로 이 책은 조금 비평적 시각에서 읽어보고 싶습니다. 관점이란 사물과 현상을 보는 하나의 시선입니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삼차원에서 사는 인간은
사물이나 현상을 한 번에 전체적인 시각으로 볼 수 없기 때문에 하나의 관점을 채택할 수 밖에 없습니다. 시점을 바꿀 때마다 새로운 인식에
도달하게 되고 시야가 그만큼 확장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저자는 "행복"에 관해서 다윈의 진화론적 관점에서 조명한다고 분명한 관점을 밝히고
있습니다. 저자의 관점을 따라가면서 다섯가지 정도의 주제를 토론해보고자 합니다.
1. 아리스토 텔레스의 목적론적
행복론과 진화론적 행복론은 서로 배치되는가?
저자는 행복을 보는 진화론적 관점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행복관은 서로
반대된다고 봅니다. 참고로 네이버 사전에서 "
행복주의"란 철학적 개념으로
"행복을 인생의 최고 목표로 삼고, 이것의 실현을 도덕적 이상으로 삼는 윤리설. 쾌락주의가 쾌락을 최상의 목표로 삼는 데 비하여, 이것은 이성적ㆍ정신적인 만족 따위의 포괄적인 만족을 구한다는 데서 차이가 있다. "라고 풀이되어 있습니다.
요컨대 인간의 존재 목적 자체가 행복이라고 아리스토 텔레스는 주장하는 데 반하여 진화론적 관점에서는 행복이 생존과 번식을 위해서 존재한다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두 관점은 언뜻 보면 서로 배치되는 것 같지만 하나의 맥락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자는 진화론의
이론적 근거로 물리학자 캐론의 "이유없는 우주"의 개념으로 무목적성을 강조합니다. 세상은 그 누군가의 계획과 목적에 의해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인간이 더 똑똑해지기 위해 살아온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또한 "인간은 수천개의 부품으로 이루어진 시계보다 복잡한 존재지만 이 복잡성 자체가
초자연적인 힘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p.47)라고 단언합니다. 이런 저자의 주장과 가정을 따른다면 우주의 어떤 존재도, 인간을 비롯한
지구상의 어떤 생명체도 외부에서 주어진 목적이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주장은 타당한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는 분명하고도 강력한
목적의지를 지니고 있다고 또한 기술합니다. 그것은 곧 "생존과 번식"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진화의
산물이며, 모든 생각과 행위의 이유는 결국 생존을 위함이다."(p.48)
"그것은
'생명체가 가진 모든 생김새와 습성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생존과 짝짓기를 위한 도구'라는 점이다. 너무 중요해서 다시 한 번쓴다. 동물의
모든 특성은 생존과 번식이라는 뚜렷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이다.(p.55)
"그러나 이
오랜 관점과 진화론은 정면 대립된다. 앞서 보았듯이 진화론적 관점에서 인간의 모든 특성은 생존을 위해 최적화된 도구다. 밀러에 의하면, 신체적
특성뿐 아니라 고차원의 정신적인 특성도 이 '생존도구'의 역할을 한다."(p.59)
진화론의
기본가정이 우주의 무목적성이라면 유기체들의 이러한 강력한 목적지향적 의지는 어떻게 발생했는지 궁금해집니다. 전제와 주장이 일치하려면 목적 없는
우주이기에 어떤 생명체도 목적지향적인 경향성을 지지니 않는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설사 그것이 생존과 번식일지라도 말입니다. 그런데 원시인들이
사용했던 돌도끼부터 제가 사용하고 있는 컴퓨터와 인터넷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만든 도구야말로 가장 강력한 목적지향적인 성향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아리스토 텔레스의 행복론과 진화론적 행복론은 언뜻 보기에 반대로 보이지만 철학적 차원에서는 하나의 관점입니다. 전자는 인간의 존재
목적을 행복이라고 보았고 후자는 생존과 번식으로 본 것일 뿐입니다. 아리스토
텔레스는 플라톤의 제자로,사물의 본질인 이데아(아르케)가 개별적인 존재 외부에 있다고 보는 스승의 관점을 취하지 않고 개별존재 내부에 포함되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진화론적인 행복관은 차라리 플라톤의 이데아 사상과 배치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지요.
2. 아리스토 텔레스가 말하는 행복의 개념과 진화론적 행복은 같은
개념인가?
우리는 어떤 현상이나
사물을 비교하기 위해서는 양자의 개념을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서로 많은 오해를 불러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네이버
어학사전에서 "행복"이라는 단어의 풀이를 찾아보면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어 흐뭇함. 또는 그러한 상태"라고 합니다. 말하자면
행복이란 생활 속에서 느끼는 만족과 기쁨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생활"은 만족과 기쁨"을 느끼는 맥락적인 요소이고 만족은 욕구가 충족된 것을,
기쁨은 느때 느껴지는 긍정적인 정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또한 행복은 크고 작은 생활사와 행복 사이에 자극에 대한 자신의 주관적 평가와 의미부여
과정이 포함될 것입니다. 그런데 먹고 자고 일하고 사랑하는 일상의 삶은 몸으로 하는 것이기에 행복은 생물학적 차원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아리스토 텔레스는 행복을 최고의 선과 동일시합니다(p.46). 최고 선이란 가장 인간답게 기능하는 상태이자 자신의 삶에 최고로 만족하는 상태라고
새겨도 좋겠군요. 여기서 아리스토 텔레스의 행복에 대한 개념이 과연 인간의 생물학적인 차원을 배제했는가 의문이 듭니다.
그렇다면 저자가
생각하는 진화론적 행복의 개념은 무엇일까요? 안타깝게도 저자가 직접적으로 행복에 대한 조작적 정의를 내린 부분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본문안에 정보들을 종합해 보면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행복은 곧 쾌감이라는 것입니다. 몇 군데 저자의 글을 인용해
봅니다.
"자연은 기막힌
설계를 했다. 내 생각에, 개에게 사용된 새우깡 같은 유인책이 인간의 경우 행복감(쾌감)이다. 개가 새우깡을 얻기 위해 서핑을 배우듯, 인간도
쾌감을 얻기 위해 생존에 필요한 행위를 하는 것이다."(,p.68)
"그래서 행복은
'한 방'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쾌락은 곧 소멸되기 때문에, 한 번의 커다른 기쁨보다 작은 기쁨을 여러번 느끼는 것이
절대적이다."(123)
그런데 행복과
쾌감은 같은 말일까요? 행복이라는 감정이나 상태는 기쁨과 설렘, 황홀함, 평안함, 흥분과 같은 감각적 감정을 기반으로 하지만 결코 같은 것은
아닙니다. 이는 마치 통증이 따가움과 쓰림, 아픔과 같은 통각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같은 차원의 개념이 아닌 것가 같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평생동안 만성 통증으로 고통을 당하는 가운데 통증과 통각의 관계를 평생 파헤쳐온 맬러니 선스트럼의 책 < 통증연대기 : 은유 역사 미스터리 치유그리고 과학>에서 잘 설명합니다. 통각은 오감을 통해서 느껴지는 불쾌하고 고통을 주는
느낌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통각이 곧 통증, 특히 만성 통증이 되지는 않습니다. 팔이나 다리 등 신체의 일부를 잃어버린 사람의 경우에도 상실된
신체 부위를 통해서 강렬한 통증을 느낀다는 사실을 통해서 통증과 통각이 같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통각이 마치 피아노의 현의 진동이라면
통증은 그 진동을 기반으로 펼쳐지는 음암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같은 원리로 행복이란 육체적인 감각기관을 통해서 느껴지는 쾌감을 기초로하지만
반드시 쾌감이 느껴진다고 행복한 것은 아니고 반대로 통증이 느껴진다고 불행해지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알콜 중독자가 술을 마실 때 몸은
이완되어 쾌감을 느끼지만 마음도 행복하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청소년기에 자위를 하면 몸이 쾌감을 느끼지만 마음은 심한 죄책감을 느끼고
행복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부모들은 자식을 위해서 몸이 부셔져라 노동을 하면서도 마음은 행복하다고 합니다. 오히려 적절한 통증과 고통은 큰
행복감을 안겨주기도 합니다. 인도의 요가승들은 철 침이 가득박힌 침상에서 누워자고 꼰 다리를 또 꽈서 몸을 괴롭히며 행복해 합니다. 이런 예를
들자면 끝이 없을 것 같습니다. 요는 쾌감과 행복은 동의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리스토 텔레스의 행복에 대한 개념과 진화론적 관점, 정확하게
생리적 쾌감의 관점의 행복에 대한 개념이 같지 않은 데 둘을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3. 쾌감(행복)이 항상 생존과 번식에 도움이 되는가?
"인간이 현재
가진 신체적 모습과 생각, 감정. 이는 우연히 갖게 된 특징이 아니다. 앞에서 설명했듯 모두 생존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보유하게 된
특징이다."(63)라고 저자는 가정하고 행복의 느낌, 즉 쾌감 역시 인간의 생존과 번식에 도움이 되기에 진화의 과정에서 발현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쾌감"이 생존에 항상 도움이 되는지 않는다는 게 저의 판단입니다. 오히려 생존에 도움이 되는 감정은 쾌감보다는 불쾌감이기 때문입니다.
정서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는 인간의 감정은 목적이 있는데 쾌감은 지금 행동과 사회적 관계를 촉진하는 기능을 하고 불쾌감은 반대로
행동을 멈추게 할뿐 아니라 관계도 소원하게 합니다. 비유컨대 쾌감이 자동차의 엑셀레이터라고 하면 불쾌감은 브레이크라고 하겠습니다. 예컨대 높은
빌딩 난간에 여러분이 서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밑을 내려다 보니 사람과 자동차가 콩알만하게 보이는 높이입니다. 이때 불안감을 느끼는 것과
짜릿한 스릴을 느끼는 것 중 어느 감정이 생존에 도움이 될까요? 또 밤길에 으슥한 골목에서 괴한과 마주 쳤을 때 그 사람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신뢰, 호감을 느끼는 것과 순간 불안한 감정을 느끼는 것 어느 쪽이 생존에 도움이될까요? 물론 유아기에 양육자에 대한 애착은 생존에 필수적인
감정입니다만 이 역시 낯 선 사람에 대한 불안(낯가리기)를 전제로 한 것입니다. 곤충들 가운데는 단 한번의 짝짓기 쾌락을 추구하다가 암 컷에게
잡아 먹히고맙니다. 종족의 번성을 위해서 개인인 생존을 포기하는 셈입니다. 그 곤충이 종족의 번식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한다는 자아초월적인
목적의식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인지 아니며 물불 가리지 않고 쾌락만 추구하다 목숨을 잃는 것인지 궁금해집니다.
그러므로
쾌감이 생존을 위해서 항상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고 불안과 분노, 슬픔같은 불쾌한 감정의 도움을 받아 분별있게 활용될 때 그러하다고 해야할
것입니다.
4. 행복, 선천적인 요인이 중요한가, 후천적인 요인이 중요한가?
저자는 행복의
기원에 대해서,생물이 진화의 과정에서 생존과 번식의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자기 스스로 만들어낸 도구라고 봅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논거는 개인의
행복감의 50%정도가 유전적인 기빌에 기인한다는 것입니다. 50퍼센트는 결코 작은 비율이 아니긴 합니다만 행복이 생존에 그처럼 중요하다면,
인간의 존재 목적 자체가 생존과 번식이라면 왜 100%가 아닌가 의구심이 듭니다. 우리나라 인구 10만명당 자살율 추이를 살펴보면 80년 대
이전에는 10명도 채 안되는 것이 최근 들어 30명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이는 세계에서 2위이며(2013년)과 노인과 청소년 자살율은 세계
1위를 마크하고 있습니다. 그에 비해서 자살율이 제로이거나 그에 근접한 나라들은 오히려 이디오피아나 가나와 같은 아프리카 최
빈국들입니다. 인류가 기왕에 진화하는 김에 어떤 상황에서도 불행감이나 절망감 따위는 느끼지 않도록 철저하게 긍정적인 유전자라면 좋은텐데
말입니다. 차라리 진화의 위계에서 하등 동물로 분류되는 지렁이나 곤충들은 자살하는 개체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저 역시
행복에 대해서 너무 추상적이고 거시적인 관점은 반대합니다. 하지만 행복의 관점을 생물학적인 관점으로만 환원시키는 것 역시 반대합니다. 인간의
행복을 쾌감으로만 설명하기에는 너무 부족한 것 같습니다. 행복의 후천적인 요인이 50%나 된다는 사실은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우리에게 깊은
통찰을 줍니다. 다시 말해서 자극과 반응사이에 생각하는 나가 있는 셈입니다. 이 점을 함께 고려할 때 행복에 대한 더 깊은 이해와 실천에 이를
수 있을 것이며 대부분의 긍정심리학자들 역시 행복에 이르기 위한 구체적이고 실천가능하며 과학적으로 검증된 방법을 강조합니다. 만약 행복해 지는
데 있어서 그런 가능성이 없다면 저자의 책도, 저의 글도, 이 글을 읽는 분들의 수고도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할
것입니다.
5. 유기체에게 외부의 설계자는 존재할 필요가 없는가?
저자에 따르면
진화론은 어떠한 외부자의 의도나 설계를 철저히 배제합니다. 설계자가 없으니 당연히 우주에 어떤 지성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오직 "우연"과 오랜
시간이만이 존재할 뿐이지요. 하지만 진화론에도 여러가지 갈래가 있어서 우주적인 설계자를 가정한 진화론도 존재합니다. 예를 들자면 프랑스의
신부였던 떼야르드 샤르뎅(Pierre Teilhard de Chardin)은 우주 전체를 하나의 생명체로 보고 오메가 포인트를 향해서 스스로
진화해 간다고 보았습니다. 우주가 무목적적이 아니라 스스로가 궁극적인 목적을 지니고 진화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이지요. 진화론자들이
주장하는 우연에 의한 돌연변이는 물리적 차원에서의 일정한 법칙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무한한 세월이 흘러도 그런현상은 발생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자는 진화론이 무목적적인 우주관에 기초해 있다고 하지만 정작 자신의 주장에서는 설계된 진화론을 말합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인간은 행복해지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만들어진 동물이다. 조금 더 냉정하게 표현하자면 인간은 생존 확률을 최대화
하도록 설계게된 생물학적
기계고, 행복은 이 청사진 안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p.64)
말하자면 저자의 설명을 살펴보면 자연=설계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은 진화론 자체가
자연의 일정한 질서를 전제로합니다. 우연에 의한 돌연변이와 그들이 지닌 적응에 적절한 특질들이 반복적으로 변함없이 유전되지 않는다면 진화는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말해서 질서 안에서 발생한 우연만이 유전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연에 엄연하게 존재하는 물리적 질서는 생명체의
진화에 있어서 외부적 설계자 역할을 한다고 보는 게 더 타당할 듯 싶습니다.
끝으로 이
책에서 소개한 행복에 대한 여러 가지 실험과 발견들은 마음에 새겨둘만 합니다. 특히 한국인들의 행복을 진단한 장은 많은 공감이 갑니다. 물론
행복에 대한 원리들을 꼭 진화론적인 관점에서만 해석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단순히 행복감의 생리적 차원의 설명으로 족할
것입니다.
사람을 세우는 사람 이영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