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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정신 - 세상을 바꾼 책에 대한 소문과 진실
강창래 지음 / 알마 / 201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서점에 가서 책을 고를 때 서문과 목차를 읽는다. 그 부분이 내 마음을 건드린다면 그 책을 구매한다. 이제는 ‘오프라인’ 서점보다는 ‘온라인’ 서점을 더 많이 이용하지만 책을 고를 때의 기준은 변함이 없다.
[책의 정신]은 내가 고른 책이 아니라 독서모임에서 선정된 책이지만 위의 방법으로 읽을 만한 책인지를 판단했을 때 충분히 가치가 있는 책이다. ‘들어가는 말’에는 앞으로 저자가 이야기할 내용이 무엇인지 명료하게 제시되어 있다.
근래에 미국인이 쓴 (번역된) 책을 몇 권 읽었는데 모두 서문이 명료했다.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지 분명하게 밝히고 시작하는 그들의 전개방식(?)이 마음에 들었었다.
이 책 역시 서문부터 기대를 갖게 했다. 내 기대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채워졌다. 책은 다섯 가지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포르노소설과 프랑스대혁명”, “아무도 읽지 않은 책”, “고전을 리모델링해드립니다”, “객관성의 칼날에 상처 입은 인간에 대한 오해”, “책의 학살, 그 전통의 폭발”. 흥미로운 제목이다. 흥미로운 제목에 비해 내용이 부실했을 경우에 우리는 ‘낚였다’는 표현을 쓰곤 하는데 이 책은 분명 ‘낚는’ 책은 아니다. 제목만큼 흥미로운 내용으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이야기 “포르노소설과 프랑스대혁명”에서는 혁명이 일어나게 된 배경에는 ‘성’과 같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이 억압되는 과정이 있었음을 제시한다. (내 생각에는 저자가 의미하는 포르노소설과 우리가 소위 ‘야동’이라고 부르는 영상물과는 약간의 괴리가 있다고 본다. 저자가 이야기한 포르노소설은 사회적 배경을 가진 이야기인데 비해 우리가 아는 ‘야동’은 행위에 몰두하기 때문에 배경이 삭제된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과 같은 기본적인 욕망을 왜 억압하게 되었는지의 과정 역시 충분히 설명하고 있다. (‘성’ 자체가 중요하다기보다는 ‘성’으로 대변되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을 이야기하고 있다.)
두 번째 이야기 “아무도 읽지 않은 책”에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는 조금 다른 ‘갈릴레오’와 ‘뉴턴’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지동설의 시작은 코페르니쿠스의 《천구의 회전에 대하여》임에도 교황청에서 쉽게 출판 허락을 받고 훌륭한 책으로 인정도 받았다. 오히려 그 영향을 받은 갈릴레오의 《대화》라는 책이 논란을 일으키고 종교재판을 받게 된다. 이유는 코페르니쿠스는 자신의 이론을 정면적으로 드러내지 않았던 데에 비해 갈릴레오는 천동설을 믿는 사람을 바보로 표현했기 때문이었다. (당대에 지동설이 왜 신성모독으로 인식되었는지는 책에 자세히 나온다.)
또한 종교 재판을 받고 자신의 이론을 철회했던 갈릴레오는 기억되지만 신념을 굽히지 않았던 조르다노 브루노는 잊혀졌다는 슬픈 사실 역시 알려준다. 갈릴레오가 유명해진 이유는 그가 새로운 이론을 제시했거나 혼자서 그 이론을 주장했기 때문이 아닌 종교재판을 받았기 때문에 “계몽주의자들이 좋은 선전 재료”로 활용할 수 있었다는 역사적 맥락도 짚어준다.
뉴턴이 쓴 《프린키피아》는 어렵기 때문에 거의 읽히지는 않은 책이며 논리적인 오류도 많았다. 또한 뉴턴은 과학자라기보다는 연금술사에 가까웠다. 그런 그가 유명해지게 되는 맥락에는 뉴턴의 ‘만유인력’이 계급사회가 정당한 구조가 아님을 암시하게 되는 또 하나의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후대의 계몽주의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한 사람’이 뛰어난 사람이라기보다는 역사적으로 필요한 맥락들과 만나는 사람이었을 뿐이다. 그들의 이론이 오류 없이 완벽한 이론이기 때문이 아니라 후대에 또 다른 생각이 싹 트게 하는 계기를 마련했기 때문임을 알려준다. 이런 저자의 입장에 공감했다. 역사에 남은 인물들이 가진 빼어남에 주목하기보다는 그들이 주목받을 수 있었던 당대의 맥락이 무엇인지를 짚어내야 한다. 역사는 언제나 승자의 입장에 서 있기 때문이다. 승자가 아닌 패자를 헤아릴 수 있을 때 우리 사회가 더 발전할 수 있다고 믿는다.
같은 이야기는 세 번째 이야기 “고전을 리모델링해드립니다”에도 이어진다. 우리가 훌륭하다고 믿는 ‘소크라테스’와 ‘공자’의 진면목을 짚어낸다. 소크라테스는 독재정권을 지지하는 인물이었으며 그를 고발했던 인물은 민주투사였던 아니토스였다. 아테네보다는 스파르타를 지향했던 소크라테스가 재판에 끌려나오게 된 시기는 민주정권이 들어섰던 시기였으며 그의 죄목에는 평등권에 대한 부정과 독재자에 대한 옹호가 있음을 밝힌다.
공자의 《논어》 역시 상식적인 이야기에 불과하다. 공자가 유명해지게 된 배경에는 “한무제가 중앙집권적 국가체계를 확립하기 위해 유교를 국교로 채택했고 공자의 제자였던 자공에서 맹자로 이어지는 공자의 성인화 작업이 있었을 뿐이다.(201쪽)”
“오래 된 고전들은 원래의 것이 아닐 확률이 매우 높다. 어쩌면 그것들은 오랜 세월 동안 시련을 견디고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때마다 주류 이데올로기를 가진 편집자의 의도에 맞게 적당히 변경되어 오늘에 이른 것일지 모른다.(176쪽)”
“전체주의자인 소크라테스를 읽게 만들면 민주주의자인 페리클레스나 솔론을 읽을 시간과 여유가 줄어들고, 엘리트주의자인 공자를 읽게 하면 평화주의자이며 하층민의 대변자였던 묵자를 읽을 시간과 여유가 없다.(177-180쪽)”
왜, 라는 질문을 던져보는 일은 삶에 꼭 필요한 과정이라고 믿는다. 우리가 고전이라고 믿는 책들을 대할 때도 그래야 할 필요성이 있음을 저자를 통해 깨닫는다. ‘유명함’에 주목하기보다는 ‘유명할 수 있었던 이유가 왜일까’를 질문할 때에 그 이면을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생각하기는 이데올로기에 속지 않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니까.
적용하자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자본주의가 인류의 시작과 더불어 발행한 것이 아닌데 자본주의를 넘어서지 못할 것처럼 믿게 만드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또한 물어볼 필요가 있겠다.
네 번째 이야기 “객관성의 칼날에 상처 입은 인간에 대한 오해”는 인간이 ‘본성’을 타고나는가, 아니면 ‘양육’으로 만들어지는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최근의 동향은 타고난다 쪽으로 더 무게를 기울이고 있는 것 같지만 이 또한 “이데올로기의 영향”이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음을 저자는 제시한다.
“본성과 양육을 다루는 책들은 좀더 조심스럽게, 비판적으로 읽어야 한다. 스티븐 제이 굴드(1941~2002)의 말대로 과학에 대한 지식 역시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강하게 받기 때문이다. 심각한 경우 “이 논쟁에 참여한 사람들이 상대방에 대해 어떤 주장을 전개했는지를 자세히 따라가 보면 잘못된 인용, 왜곡된 인용, 의도적인 엉터리 해석, 잘못된 해석 등이 너무 많(《본성과 양육》, 142쪽)이 발견될 가능성이 있다.”(221-222쪽)”
그렇기 때문에 “독자들은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우선 완전히 객관적인 것은 없다는 점을 인정하자. 어떤 논픽션에도(과학이라는 것에도) 일정 정도의 픽션(저자의 주관이)이 더해진다고 봐야 한다. 객관적이란 주관성의 페르소나이기도 하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인간의 감각은 사실이 아니라 해석을 인지할 뿐이기 때문이다. 결국 좋은 책이란 명확한 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질문을 던짐으로써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겠는가.(239쪽)”
저자는 본성과 양육의 역사를 되짚으며 각 관점의 문제점을 살펴본다. “본성을 극단적으로 옹호하는 이론”이 우생학, 사회생물학, 유전공학 그리고 진화심리학으로 변모해가는 과정을 살피고 그에 대한 문제점을 이야기한다. “양육 쪽으로 치우친 이론”이 행동심리학으로 자신의 이론을 증명하려고 했지만 이 또한 문제점이 있었음을 지적한다.
이러한 관점을 가지고 이해할 때 무엇이 맞다는 결론은 내릴 수 없다. 인간은 유전에 의해 타고나기도 하지만 환경에 의해 영향을 받기도 한다. 둘 중 하나를 가지고 설명하려고 들 때 데이터는 왜곡될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 이야기 “책의 학살, 그 전통의 폭발”은 《20세기 이데올로기, 책을 학살하다》라는 책에 관한 이야기이다. 책이 학살되었던 사건들을 통해 책의 의미를 생각해보도록 하고 있다.
이 책이 내게 의미 있었던 이유는 ‘비판적 사고’를 권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반짝이는 것을 동경하지만 반짝이는 것의 이면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는 일에는 게으르다. 왜 반짝일까, 반짝이게 되는 과정에서 무엇이 희생되었을까를 생각해 본다면 단지 반짝임을 동경하지는 않게 될 것 같다. 당신과 같이 그 이면을 짚어낼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