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는 자기가 가봤던 블루스퀘어 서점이 얼마나 좋았는지 종종 말하곤 했다.
위에서 내려오는 등이 책 모형이야. 여기 저기 앉아서 쉴수도 있고, 분위기가 너무 좋아.
그래서 이번 서울행에 꼭 거길 같이 가봐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난 그때 서점에 대해 별 감흥이 없었다.
책으로 가득찬 서점은 언제나 설렘과 흥분을 주었지만 이 날은 읽을 거리가 크레마에 가득이었고,
무거운 가방엔 마음에 드는 책을 있던들 바로 구입해서 담지도 못 할터였다.
게다가 파주 북소리에서 가득 꽂힌 서가는 나름 만족스러워서
여기보단 블루스퀘어 서점이 훨 나아 라고 이야기하는 친구에게
아 그래? 맞장구를 쳐주긴 했어도
서점은 서점이야. 서점은 그냥 책이 있는 곳이야. 그 책들이 주는 분위기는 서점마다 다 틀려 라는 혼자만의 생각을 한다.
서점은 딱 친구 말대로였다.
책이 많았고, 여기 저기 앉아서 책을 보거나 쉴 수 있는 의자가 있었고, 위에서 내려오는 등은 책 모형이었다.
좀 이따가 다시 만나~
친구는 손을 흔들곤 서가 사이로 사라졌다.
난 서점 중간에 오도카니 서서 친구를 바라보고,
아동용 책장 사이 앉아 있는 부부와 그들의 귀여운 애기를 바라보고,
복층처럼 위치한 책장 앞 의자에 앉아 아래의 오고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는 커플을 바라봤다.
유리벽으로 보이는 테라스의 사람들을 바라봤고,
책장 사이 조그만 의자에 앉아 홀로 책을 보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봤고,
서점내 커피 전문점에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난 지금 뭘 해야하나.
가방은 무겁고, 옷도 무겁고, 다리도 무겁다.
사람들을 피해 한쪽 책장으로 비켜서니 익숙한 사진이 커버로 쌓인 책이 보인다.
피 묻은 칼을 들었고, 얼굴 또한 피가 묻어 날카롭게 앞을 응시하고 있는 이준기였다
언젠가 같이 일하던 레지던트가 드라마 달의연인-보보경심에서
강하늘과 아이유의 절절한 애정신이 참으로 좋았다 라고 했었다. 두 손을 가슴에 꼭 모은채로
중국에 드라마가 먼저 나왔는데 그때 등장하는 남자 배우들이 모두 변발을 했음에도 꽤나 인기가 좋았다 라고도 했다.
볼만한 드라마가 있느냐는 내 질문에 대한 답이었고, 보보경심과 구르미그린달빛을 권해 주면서 한 말이었다.
개인적으로 로맨스는 싫어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따로 찾아 볼 정도로 좋아하진 않아서,
아니 시간 맞춰 드라마를 따로 챙겨보지 않아서가 맞겠구나.
이런 저런 이유로 당시에는 보지 않았던 드라마들을 최근에 몰아보기 시작 했는데 그 중 하나가 달의 연인이었다.
비록 레지던트가 좋았다는 강하늘과 아이유의 이야기가 담긴 초반 이후로는 중단 했고,
그 뒤에 본 구르미그린 달빛도 비슷한 회차에서 중단하긴 했어도 대충의 줄거리는 알고 있엇다.
궁금해서 변발의 남배우들이 나오는 중국 드라마를 찾아 보기도 했지만 역시 초반에 중단했다.
난 로맨스 소설은 읽은 적이 거의 없다.
하지만 읽지 않아도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과 해를 품은 달이 드라마화 되기 전에 미리 내용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접해 있기는 했다.
세상의 모든 로맨스를 다 자기것화 했던 여동생이 책이건 드라마건 조곤 조곤 이야기를 해 준 까닭이다.
시집 가기 전 여동생은 티비 앞에 앉아 로맨스 소설을 들고 있었고, 난 컴퓨터 앞에 앉아 미드를 보며 게임을 했다.
그래서 왕에게 날리는 살을 여주인공이 받아내는데...
여동생이 말을 하면 몬스터를 향해 열심히 마법을 날리며 난 물었다.
살을 왜 날리는거야?
왕을 해하려고 날리는 거지
그걸 여주인공이 받아낸다고?
응! 그래서 그 뒤에 어떻게 되냐면.......
잠시 이준기를 바라보다가 첫 페이지를 펼친다.
- 때는 한여름이었다. 초봄의 새파란 새싹은 봄날이 온 걸 기뻐하는 것처럼 가벼운데 한여름의 초록 잎은 그에 비해 묵직했다
고개를 든다. 로맨스 소설 아니던가?
잠시 정면을 바라보다가 주위를 둘러보며 앉을 곳을 찾기 시작했다.
아까 전에 본 부부와 애기가 자리를 비워 아동용 책장 앞에 작은 의자가 비어있다.
사람들이 오면 비워주기로 하자 생각을 하고 가서 가방을 내려 놓고 자리를 잡았다.
교통사고를 당해 정신을 잃었던 현대의 25살 장효는
청나라 강희제 시절 8황자의 측복진 동생인 귀족 가문의 마이태 약희로 깨어난다.
약희가 후에 십황자의 부인이 될 곽라라 명옥과 한바탕 싸움을 할때
난 아동용 서가에서 다른 의자로 자리를 옮겼다.
치렁한 옷자락을 밟아 넘어질 뻔 해서 책을 놓칠새라 꼭 쥐고 의자에 앉아 있으니
얼마 안 있어 친구가 다가와 건너편에 앉는다.
내가 말했다.
가려면 말해. 난 좀 읽고 있을 게.
친구는 재미있으냐 물었고,
나는 겉표지의 이준기 사진때문에 편견에 사로 잡힌 이상한 기분이 들어 대답을 한다.
쉽게 읽혀. 재미도 있고, 그런데 좀 오글거려.
친구는 책으로 고개를 돌렸고, 나도 다시 읽기 시작했다.
13세의 약희는 어리지만 실제 그 안의 영혼은 어리지 않기에 그 시절 약희가 보여주는 현대 여성의 행동은
늘 다른 사람의 눈에 띄었고, 매력적이었다. 그래서 사랑을 받았고, 그 때문에 위험에 처하기도 했다.
8황자에게 귀한 팔찌를 선물로 받았지만 팔찌의 원래 주인은 자신의 언니인 측복진 약란이란 걸 알게 된 약희가
팔찌를 빼려하자 좋아하는 사람에게 준거라며 8황자는 빼지 못하게 한다.
언니를 좋아 해서 2년간 그녀를 기다렸던 그가 이제는 동생인 약희를 부인으로 맞겠다 말한다.
자 이제는 다들 예상 가능하겠지만 이상하면서도 너무 당연한 로맨스 공식인 주인공 심리 상태가 나온다.
약희는 자신의 언니를 사랑하는 마음과 8황자가 언니에게 보여준 사랑을 알면서도 자신의 팔목의 팔찌는 빼지 않는다.
갈까? 친구의 목소리가 들렸다. 읽고 있던 책은 다시 꽂아 뒀는지 어느새 빈손이었다. 나도 책을 덮고 일어섰다.
블루스퀘어 근처에 있는 디저트 카페는 눈이 핑 돌아갈 예쁜 케이크들이 많아서 정신 없이 구경을 했다.
다 맛 보고 싶었고, 다 사가고 싶었다.
이동을 해야 하기에 좀더 보관이 쉬운 빵을 사들고 애초에 계획했던 케이크는 포기를 했더니
아쉬운 마음이 들어 괜히 진열장 유리를 더듬었다.
이제 숙소에 돌아가서 짐을 놓고 나와서 전 집을 가자.
우리는 들뜬 마음이었고, 편의점에서 맥주와 안주를 사면서 모든 게 계획대로 되리라 생각 했었다.
숙소에 도착한 친구는 한쪽면 절반을 채운 유리창에 탄성을 지르더니
옷을 벗고 목욕 가운만 걸치고는 침대에 올라 창 밖을 향해 만세를 부른다.
나가기로 한 거 아녔어?
친구는 좀 앉아서 맥주 좀 먹고 나가자고 했는데 그 말을 들은 난 아마도 오늘 일정은 여기가 끝이 될거라 짐작을 한다.
이제 5시가 갓 넘은 시간이었다.
웃으며 친구와 같은 복장에 같은 자세로 누워 티브이를 켜서 야구 중계를 틀어 놓는다.
맥주를 냉장고에 넣고, 마른 안주와 빵은 테이블이 없어 대신 의자를 끌어다가 펼쳐놨다.
침대에서 의자로 손을 뻗기가 힘들었던 난 그냥 바닥에 앉아 빵을 먹기 시작했는데
한 손으로 먹다가 떨어진 빵 부스러기를 쓸어 모으고 한 손으론 크레마를 켰다.
그리고 맥주를 냉장고에 넣기 전, 친구가 화장실에 갔을때 모바일로 결제를 한 보보경심을 다운 받는다.
로맨스 소설을 구입한 나에게 놀라워 하면서, 결제 버튼을 누를때 딱히 고민을 안 했다는 사실엔 더 놀라웠다.
약희는 궁녀가 되어 자금성 생활을 시작한다.
건청궁에서 황제에게 드릴 차를 끓이면서 한국에선 이준기가 역할을 맡았던 4황자와 본격적으로 엮기기 시작한다.
현대에서 이미 4황자가 옹정제가 되는 것을 아는 약희가 앞으로 황제가 될 그에게 단순히 밉보이기 싫다는 의도로 시작된
그의 대한 정보 캐기는 여러 사람들과 당사자인 4황자에게 엉뚱한 오해를 불러 일으키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을 겪으면서 4황자는 약희에게 관심이 가게 된다. 그래서 키스를....
그렇지~ 이렇게 되는거지~ 실실 웃고있으려니 안치홍이 안타를 친다.
맥주를 손에 든 친구가 두 손을 머리 위로 들었고, 나도 같이 두 손을 들고 좌우로 왔다 갔다 흔들며 노래를 한다.
안타 치고~~~ 도루 하고~~
기아는 3회에만 9점을 냈다.
냉장고에서 맥주를 하나 더 꺼내 온다. 바닥에 다시 앉아 맥주를 마시고, 쥐포를 먹고, 맥주를 마시고, 빵을 먹었다.
친구도 맥주를 마시고, 쥐포를 먹고, 다시 맥주를 마시고, 과자를 먹는다. 손으로는 침대를 내리치며 응원가를 부른다.
내가 말했다.
화순고 김선빈이 처음 기아에 올때 내가 엄청 신나했잖아. 기억나? 친구가 고개를 끄덕인다.
친구는 한참 김종국 선수에게 빠져있던 시기였는데
경기 후 정류장에서 그땐 갓 신인이었던 김선빈을 알아보며 인사하니 좋아하더라는 말을 해준다.
그 김선빈이 결혼을 한 건 알아?
친구 눈이 두배는 더 커진다.
선수에 대한 열정은 예전과 달라져서 순위와 점수만 보는 친구임을 알기에
아마도 이사실은 모를 거라 생각하고 이야기를 한건데 대체나 모르고 있었다.
작년에 했어. 내가 웃으며 말했다. 군대 가기 전에 미리 혼인 신고는 했다더라
아.... 친구가 탄식 한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흐른거야? 그 어린애가 결혼을 했어?
나는 킬킬거렸다. 벌써 10년 전이야. 맥주를 친구의 맥주와 부딪히며 외친다.
브라보~ 그리고 덧붙였다. 이따 흰머리 뽑아줄게.
약희는 여 주인공 버프를 받았기에 일을 잘하고, 똑똑하고, 겸손하다. 그래서 황제인 강희제의 신임을 받는다.
심지어 미래의 사람이라 역사가 앞으로 어찌 될지도 알고 있다.
건청궁의 생활이 진행 될수록 8황자와 4황자의 사이도 점점 분명해 지는데
8황자는 4황자와 대립관계에 있었던 인물이었던 만큼 계산적인 사람이었고 이건 사랑도 포함이었다.
약희는 초원을 달리는 말 위에서 8황자 품에 안겨 그에 대한 애정을 처음으로 내보이는데 그것을 눈치 챈 팔황자가 말한다.
"네 마음속에도 내가 있었던 거야!"
그는 내 귓가에 부드러우면서도 깊은 한숨을 쉬더니 다시 중얼거리듯 반복했다.
"너도 날 생각하고 있었어!"
어유~ 어유~ 어유~ 오글거려. 어유~ 어떻게 하지.
난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에 누워버린다. 기아는 6회에 4점을 더 냈다.
친구는 말이 없었는데 그렇다고 중계를 보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곧 잠들겠네. 생각을 한다.
문득 친구가 나를 보더니 묻는다.
뭐 보는거야?
아? 이거? 나는 갑자기 무언가 부끄러워 진다. 그냥 판타지?
친구는 다시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고, 난 왜 보보경심이라 바로 말을 못했는지 이유를 생각한다.
약희는 8황자에게 황제자리를 원하느냐 묻고 그 자리를 원하는 거라면 자신은 그와 함께 할 수 없다고 한다.
4황자를 견제하는 8황자는 미래의 옹정제의 미움을 타지 않으려는 약희의 행동을 오해하고
왜 그러는지 정확하게 설명을 할 수가 없기에 약희도 답답하기만 하다.
친구는 침대에 들어가 이불을 덮는다. 난 티비와 불을 끄고, 침대에 기대 앉아 독서등을 켰다.
드디어 그 일이 일어났다.
8황자는 4황자를 잡기 위한 덫을 놓고, 거기에 4황자는 걸려들었지만 13황자가 나서 대신 죄를 고한다.
강희제는 진노하고 13황자는 구금당하는데 기생 녹무는 13황자와 함께 하기 위해 약희에게 부탁을 한다.
약희는 강희제에게 녹무를 13황자에 지내게 해달라 간청하지만 강희제는 허락대신 약희에게 벌을 내린다.
약희는 친한 친구인 13황자를 위해 무릎을 꿇었고, 비가 왔다.
그 순간 8황자는 자신에게서 약희가 완전히 벗어났음을 알았고, 4황자와 약희는 서로에 대한 마음을 확실히 하게 된다.
4황자는 이때의 일을 결코 잊지 않는다.
약희에 대한 확실해지고 깊어진 애정도 8황자의 계략도 모두 잊지 않는다.
황제 자리 다툼에서 계략으로 8황자를 내쳤음에도 후에 옹정제가 되어서도 8황자를 끊임없이 압박한다.
실제 역사가 그러했고, 드라마도 그리한다.
마침내 4황자가 황제에 올라 옹정제가 되고, 약희는 그의 여자가 되어 곁에 있게 되지만 그녀는 곧 알게 된다.
8황자와 연인관계에 있을 때 그에게 자신이 해주었던 미래에서 온 말.
그로 인한 나비효과로 4황자는 누명을 썼고, 13황자는 10년간 청춘을 버리는 구금을 당했고,
약희 또한 소중한 아이를 잃고 절대 임신하지 못하는 몸이 되었다는 걸.
또한 언니의 죽음 이후로 4황자 곁에 있으면서 점점 자신의 사람들은 죽는다는 사실에 절망한다.
견딜수 없었던 약희는 14황자에게 부탁을 하여 그의 측복진으로 옹정제의 분노를 뒤로 하고 자금성을 떠난다.
하지만 약희에게 죽음이 다가오고 그럴수록 그녀는 4황자가 그립다.
죽음을 앞에 두고 그녀는 옹정제에 대한 마음을 글로 쓰지만 편지를 오해한 옹정제는 보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보고 싶었던 옹정제를 보지 못하고 그녀는 죽는다.
눈물이 떨어졌다.
아이 씨... 나는 왜 여행와서 기분 좋게 호텔 침대에 누워선 질질 짜고 있는거냐.
아. 수치스러워.
내가 왜 로맨스를 읽으면서... 심지어 오글거린다니까?
잘 읽히긴 하지. 정말 잘 읽히긴 하는데 진짜 오글거려. 읽는 내내 그 부분이 신경 쓰여서 힘들었어.
옹정제는 상소문을 통해 마이태 약희가 죽은 사실을 안다.
황제가 보낸 밀정이 숨어있음을 간파한 14황자가 일부러 약희에게 친밀하게 대하는 모습을 보고 받은 옹정제는 분노했고
더이상 약희에 대한 동향을 올리지 마라 명령한다. 그로 인해 그녀가 죽어가는 것을 보고 받지 못했던 그는 그녀가 죽고 나서야 상소문을 통해 상황을 알게 되어 큰 충격을 받는다
그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혼잣말을 했다.
"믿을 수 없어! 약희가 이렇게까지 짐을 미워할 리 없다!"
그러다가 무슨 생각이 났는지 책상을 뒤지기 시작했다.
상소문을 하나하나 바닥에 집어 던지던 그가 마침내 윤제가 '황제 폐하 친전' 이라고 써서 보낸 편지를 찾아냈다.
윤진은 떨리는 손으로 편지 봉투를 열어 보았다. 뜻밖에도 안에 봉투가 하나 더 들어있었다.
봉투에는 역시 '황제 폐하 친전' 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보다 더 익숙할 수 없는 필체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윤진의 눈앞이 새까매졌다.
그가 비틀거리자 윤상이 얼른 그를 붙잡았다. 윤진의 손에 있는 편지 봉투를 보는 그도 눈앞에 뿌옇게 흐려졌다.
나도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심지어 흐느꼈다.
친구는 다행히 자고 있어서 독서등 아래 엎드려 울고 있는 내 상황을 알지 못했고, 앞으로도 모를 것이다.
진짜 미치겠다. 나는 여기서 왜 이렇게 통곡을 하고 있는 건가?
머리는 빙빙 돌고, 약희 언니가 죽을때부터 울은 탓에 너무 오래 울어서 이젠 머리까지 아프다.
약희가 죽고, 옹정제와 등을 돌렷던 8황자와 9황자도, 옹정제와 가장 가까웠으며 대신 죄를 뒤집어썼던 13황자도 죽었다.
그는 천하를 발 아래에 두었지만 혼자였다.
누구도 넘보지 못할 곳에 있었지만 외로웠고, 그 외로움을 알아줄 사람도 없었다.
옹정 8년 음력 섣달그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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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도 미움도 모두 떠나고 이제 그만 남아 있었다.
새벽 한시가 넘었다.
내일은 아니다 날이 바뀌었으니 오늘은 일찍 일어나 조식을 먹어야 하고, 서대문 형무소와 종묘를 가야한다.
너무 울어서 눈과 목이 아프다. 독서등을 끄고 누워 두통이 오는 머리를 손으로 감쌌다.
여행으로 온 흥분과 맥주가 더 해져서 그런 것 같다.
그래서 이렇게 감정 이입이 되었나보다. 그냥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친구는 가늘게 코를 골며 자고 있있고, 그런 그녀를 보자니 문득 흰머리 뽑아주기로 했던 약속이 떠오른다.
모로 누워 나도 잠을 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