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가기로 했고, 6시 45분 서울행 기차를 예매했다. 

6시에 지하철역에서 만나기로 한 친구가 약속 시간에 나타나질 않는 나 때문에 애가 타고 있을때 나는 꿀잠 중이었다


들려오는 알람 소리에 습관처럼 종료 버튼을 누르려다 

일어나세요 문구 대신 친구의 이름이 뜨는 걸 보는 순간 내 모든 시간이 정지했다.


미안해

통화 버튼을 누르며 아직은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친구에게 사과를 한다.

미안해. 재차 사과한다.

어디야?

진짜 미안해. 빨리 갈게. 먼저 기차역에 가 있어.

대답 없는 친구의 숨소리엔 짜증과 급함이 섞여있었다.

아마도 제 시간에 도착 못할 나를 두고 어찌 해야할지 머릿속으로 계획을 수정 중일것이다.


샤워를 하고, 머리는 축축하게 두고, 민둥민둥한 얼굴에 발칙한 레드오렌지 립스틱만 올려둔다.

책상 위를 쓸어 화장품 가방과 전날 미리 챙겨둔 속옷 주머니를 가방에 담았다.

애초에 입고 가려던 꼬까옷 대신 바닥에 널려있던 옷들을 걸친다.


콜 택시가 도착하자 얼굴과 목덜미에 미역처럼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치우지도 못하고 차에 뛰어들었다. 

젖은 머리와, 거친 숨소리와, 핸드폰을 들었다 놨다하는 나를 보며 기사님이 묻는다.

늦었소?

난 고개를 두번 세번 끄덕였다. 

6시 45분 출발이라는 말에 기사님은 간신히 도착은 하겠지만 이라며 말끝을 흐린다.


이른 시간이라 아직 도로에 차는 적었고, 

기차역과 우리집 거리는 멀지 않았고,

친구와 커피 한잔 할 시간은 있어야 할텐데 라며 나와 같이 가슴 졸여주는 기사님 덕분에 

6시 37분에 기차역에 도착을 해서 친구의 따가운 눈초리를 받아냈다.


기차는 제시간에 출발을 했다.

배가 고파왔다. 커피도 간절했는데 머리는 계속 축축했다. 

화장기 없는 얼굴엔 발칙한 레드오렌지가 있었다.


좌석에 앉아 어지러운 가방 속에서 화장품 도구가 든 포켓을 꺼냈다가 도로 집어넣는다.

각종 색조 화장품들과 메이크업 붓들이 들어있어 부피가 크다.

그 옆엔 쿠션과 거울이 들어있는 핸드백용 소형 파우치도 있었다.

고작 1박2일에 무겁게 이걸 왜 가져온 걸까? 아침에 풀 메이크업 할 시간도 없을텐데

이번 여행은 많이 걸을거라서 가방을 가볍게 하려던 게 어제까지의 계획이었는데

가방 자체가 무게가 있는 가죽 가방이었고,

담겨진건 부피가 큰 노트에 화장품가방 두개에 입은 옷은 또 어떻고?

날씨 생각 안하고 걸쳐입은 아우터는 길이가 길어서 무겁고, 그 때문에 더웠다.

아까부터 입술만 둥둥 뜬 내 얼굴이 일그러진다.  



일단 계획은 이래. 친구가 말했다.

서대문 형무소는 내일 갈거고

응.

오늘은 숙소근처에 박물관들을 가보자. 오후엔 블루스퀘어와 그 근처에 있는 디저트가게를 가는거야.

응.

일단 나는 점심 먹을 곳을 찾아볼게 

전이 먹고싶어.

내 말에 친구가 좋은 생각이라며 이번에는 숙소 근처 전집을 검색해서 나에게 보여준다.

일단 박물관을 가고 블루스퀘어를 들르고, 디저트가게에서 케잌을 사는거야. 그리곤 숙소에 와서 짐을 두고, 

전집을 가서 포장이 된다고 하면 포장을 하고, 아니면 거기서 먹고 들어와서 숙소에서 맥주를 또 먹자.

응. 졸린 음성으로 대답을 하는 내 시선이 정면 티비의 광고에 꽂힌다.

파주 북소리가 내일까지네?

친구가 고개를 든다.

뭐라고?

파주 북소리 축제가 내일까지야.

친구는 파주까지 가는 길을 검색했는데 먼저 검색이 된 내가 말한다

합정역에 거기 가는 버스가 있어 2200번 잘 오는 버스는 아니라고 하는데?


자~ 일단 계획은 이래. 친구가 다시 말했다.

파주를 가서 둘러보고, 박물관은 일단 시간이 안될 듯 하니 상황을 보고, 

내가 말을 자르며 단호하게 말한다. 난 케잌을 포기 할 수 없어.

그건 나도 그래. 친구가 대답한다.

그러니까 이렇게 하는거야. 친구는 말을 이었다.

파주에 갔다가 오후에 블루스퀘어에 들르고 케이크를 사고, 숙소에 들렀다가 전집을 가는거지. 어때?

잠시의 생각 후에 내가 대답했다.

파주 가는건 상관없지만 지금 작가와 만남같은 이벤트는 다 예약이 찼을테고,

시간도 안되서 제대로 거길 느끼지 못 할텐데? 우리가 미리 알지 못했잖아.

그냥 가는 것에 의미를 두면 안될까? 

그런 곳을 잘 모르는 친구는 축제라는 단어에 무언가 대단한 볼거리가 있을걸로 생각을 한 듯하다.

보나마나 거리 조금 걷다가 금방 지겨워 할텐데. 

하지만 생각과는 다른 대답을 난 한다. 오늘 난 지각을 했으니까.

그래 가보자. 파주 가보고, 오후에 케이크먹자.


기차를 내려 지하철을 두번 타고 합정역에 내려 2200번 정류장을 찾기위해 잠깐의 삽질을 했더니

어느 순간 파주행 버스 안이었고, 

자리가 없어 친구와 따로 떨어져 앉은 내 귀에 넬의 기억을 걷는 시간이 두번째로 재생 될 때쯤 북소리 현장에 서 있었다.   


건물에 들어서자 오픈된 공간에 이름모를 작가님이 독자들과 소통중이었다. 

난 잠깐 이야기를 들어볼 심산으로 벽에 가득히 꽂힌 책들을 손가락으로 쓸며 서 있었고, 친구는 그냥 지나친다.

그러다 책 한권을 꺼내들고 읽기 시작했는데 친구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다.

친구와 나는 늘 따로 행동하다가 마지막에 만나곤 했기에 사라져가는 친구를 난 굳이 따라가지 않는다.



 

 남자는 강마을에 있었고, 동생의 여자를 기다렸다.

 동생은 장애가 있었고, 독실한 신자였고, 자살을 했다.


 그가 동생의 여자에게 섬이 자꾸 자기를 부른다고 말했다.

 강마을에 도착 후 연결된 전화기 너머 여자는 죽고 싶다고 그에게 말한다.

 그런 그녀에게 자신도 같은 생각이라며 오라고 한다.

 이곳으로,

 죽기 위해 강마을로 오라고 한다.

 여자는 정리하고 오겠다고 했지만 

 그 문장을 읽기 전 그녀가 오지 않을 것을 난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두사람의 대화 속에 동생의 죽음이 연관 되어 있음을 알았다.



“안 오면…… 날더러 어쩌라는 건가.”  


소설의 첫 페이지.

마지막 열차가 떠나고 비어있는 대합실에서 그가 뱉은 이 한마디에 모든게 함축되어 있었다.


결번이라는 소리만 들려오는 그녀와의 연결음을 뒤로 하고 몸이 구겨진채 그가 걸었다.

연결이 끊긴 그녀의 존재가 애초에 존재 한것인지 아닌지 모호한 생각의 경계에서 그가 죽으러 간다.

거동이 힘들었던 동생처럼 걸어 강마을에 있는 섬으로 죽으러 간다.


그 섬에서 그는 주막에 들어간다. 그리고 여주인에게 술을 청한다.

자신의 아들의 할아버지를 아버지로 만들어 사는 여주인은 그와 마주보고 앉아 대화를 한다.

삶에 대해서, 그녀는 그 삶을 비극과 희극에 비유한다. 

그러다가 그녀가 그에게 당신은 죽을 수 없으니 돌아가라며 호통을 친다.


“고통을 겪는 시늉을 하는 네 행동이 동생의 죽음을 더 우습게 만들잖아! 그걸 몰라서 하는 말이야!”


구토를 위해 뛰쳐나온 그가 의식을 잃어갈 무렵, 의식이 아니라 세상이 바뀌는 무렵, 아니 새로운 세상이 나타날부렵 

그 무렵 그가 뒤돌아 본 주막이 있던 자리는 노적가리가 하나 세워져있을 뿐이다.


그는 거기에서 자다가 뛰쳐나온 것일까?

그렇다면 지금까지 일은 다 꿈인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꿈인걸까?

죽지 못할거니 돌아가라며 호통치던 여주인이 있던 주막?

연결되지 않았던 동생의 여자?

장애가 있는 동생의 자살?

동생이 처음 자신의 여자를 소개시켜준 날?

아니면 그의 삶 전부인건가?


그가 들어간다. 그 노적가리로 옛날이야기로 쌓아올린 것 같은 그 노적가리로 따뜻할 것만 같은 그곳으로 사라진다.

이렇게 그의 이야기가 끝인건지, 또 다른 이야기가 될지



<인형의 마을>에 실려있던 첫번째 단편 "노적가리 판타지"를 읽어낸 후 난 도로 책을 꽂아 놓는다.

손가락으로 지긋이 제목을 눌러보곤 중얼거린다.


“안 오면…… 날더러 어쩌라는 건가.”  


뒤에선 아직도 작가와의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고, 날은 더웠고, 입고 있는 아우터로 인해, 

그리고 책을 많이 읽는다며 허세를 부리면서 정작 한국 작가들에 대해선 무지한 나로 인해 더 더웠다.

시원한게 필요했다. 


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복도를 지나 다른 공간으로 갔다고 한다. 중간에서 그녀를 만나 시원한 에이드를 마셨다.

친구는 벌써 지겨워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난 알 수 있었다. 


그래도 둘이 같이 건너간 다른 전시실에 있던 타자기 모형앞에서 그녀는 프로필에 바꿀 사진을 찍었고,

그걸 꽤 마음에 들어했다. 


오다 보았던 피노키오 박물관은 직원이 어른끼리 왔으면 별다른 흥미가 없을거라고 말해줘서 도로 나왔다.


이제 가자!


도로의 한가운데 서서 드디어 친구가 말했다. 도착 후 한 시간이 겨우 지났을 뿐이었다.

파주까지 에이드 마시고, 프로필 사진 찍으러 온거냐? 내가 웃으며 묻고나서 말을 덧붙였다.

다음엔 계획을 세워서 작가와의 대화같은 것도 예약하자.

내 말에 친구는 그러자고 말하며 온 것에 의미를 두는거지~ 라고 다시 말한다.


실실 웃음이 나온다.


6시 20분에 집을 나섰는데 1시가 되어가는 그 때에 우린 도로에서만 4시간을 보냈고, 이젠 또 이동하러 가야했다. 

하지만 걷는 것은 오래지 않아서 다리가 아프진 않았는데 어깨는 무거워서 아팠다. 그리고 더웠다.


이제부터는 많이 걸어야할 텐데 옷을 벗어 집으로 택배를 보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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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7-09-18 16: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 만나러도 한 번 오라니깐욧!!

버벌 2017-09-19 10:15   좋아요 0 | URL
연락할 생각을 했어요. 한데 쑥스러워서 ㅠㅠ 발칙한 레드 오렌지 보여드리고 싶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