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2008년 3월 15일자

[책동네 산책]요즘 아이들이 읽는 책

얼마전 인사동에서 대학 동창 둘을 만났다. 때늦은 눈이 내리는 밤. 우리들은 자꾸만 과거로 떠밀려갔다. 술잔이 두어 순배 돌았을 때에는 1980~90년대의 어디쯤을 헤매고 있었다. 지난날의 추억이란 씹기 좋은 안주였다.

‘아차’ 하는 사이 대화가 이 ‘책동네 산책’으로 옮겨져 있었다. 신문을 잘 안 읽는 줄 알았던 친구 A 왈. “사실 네가 감수성이 없다는 건 아니까 지금 쓰는 방식을 더 다듬는 게 낫지 않을까.” 맞습니다. 오늘 술값은 그대가 내세요.

대화의 주제는 다시 과거로 흘러갔다. 소싯적 읽던 책. 뭐가 있었더라. ‘그림동화전집’-아마 계몽사판이었을 거다-과 ‘삼국지’를 몇 번이나 반복해 읽었고, 초등학교 6학년 때는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 시리즈에 꽂혔다. 친구 B는 ‘정글북’과 ‘괴도 루팡’ 시리즈를 댄다. 괴도 루팡이라니. 모리스 르블랑이라는 작가는 우리의 명탐정 홈즈까지 제 멋대로 등장시켜 우스갯거리로 만들지 않았던가.

셜록 홈즈냐 루팡이냐, 옥신각신하는 걸 듣고 있던 A가 “성격대로 읽네”라고 한 마디 한다. 그러면서 제 얘기를 꺼낸다. “조숙해서 초등학교 때 한국문학과 세계문학전집을 다 읽었다”고. 세로쓰기로 된 양장본까지 모두 독파했다고 덧붙였다. 사춘기 소녀의 초경을 오미자 빛깔로 묘사한 소설의 한 장면을 방금 읽은 것처럼 기억해내기까지 했다. 이런….

‘추억의 책’이란 그런 마력이 있는 모양이다. 요즘 아이들이 읽는 책? 세 살배기 아이의 아빠와 노총각, ‘돌아온 싱글’이 뭘 알까. 그런데 요즘 베스트셀러 목록을 보면 뭔가 할 말이 생길 것도 같다. 이번 교보문고 아동 분야 베스트셀러 10위권에는 ‘어린이를 위한 시크릿’ ‘어린이를 위한 경제습관’ ‘어린이를 위한 마시멜로 이야기’ ‘어린이를 위한 자율’ ‘리더:성공한 위인들의 리더 방법’ 등 자기계발서가 7종이나 올랐다. 대부분이 성인출판물 시장에서 흥행에 성공하고 있는 책들을 ‘어린이를 위한’ 수준으로 맞춘 책들이다. 아동용 자기계발서라는 ‘블루오션’을 개척했다고 찬탄해야 할 일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린이 책은 결국 부모들이 구입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기성 세대가 아이들에게까지 이런 책들을 권하고 있다는 사실도 씁쓸하다. 아이들이 먼 훗날 ‘추억의 책’을 안주 삼아 얘기할 때 이런 책들을 거론하는 장면을 떠올리는 것도 그렇다.

평생 어린이 문학을 일궈온 이오덕 선생(1925~2003)의 유고 평론집 ‘어린이를 살리는 문학’(청년사)이 이번주 출간됐다. 그는 책에서 “어린이책은 무엇보다 재미있어야 한다”면서도 “재미는 그 책 속에 아이들이 생각하고 있는 절실한 문제가 들어 있어야 비로소 느낄 수 있다”고 밝혔다. 또 어린이들이 읽는 좋은 책을 골라내는 일은 “정신의 긴장”을 요구하며, 부모들이 책을 직접 읽어보는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선생이 오늘날 어린이 책에 얽힌 ‘세태’를 보면 무슨 말을 할까.

〈 김진우기자 jwkim@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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