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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의 밤 기담문학 고딕총서 3
니꼴라이 고골 지음, 조준래 옮김, 이애림 그림 / 생각의나무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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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고골은 가장 위대한 러시아 작가 중 한 사람이지만, 정작 그는 일생동안 우크라이나어를 모국어로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오월의 밤』에는 민족적이고 종교적인 색채가 짙게 풍긴다. 언제나, 어김없이, 카자크인들에 대한 애정과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 이교도에 대한 비웃음이 감초처럼 숨어있다. 자, 이런 고골의 손을 거친 슬라브 설화의 세계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오월의 밤』이 만들어 놓은 세계에서 인간은 악마와 공존하고 있다. 악마의 존재는 두렵고 기이하지만 위화감을 주지는 않는다. 악마는 인간의 고통스럽고 시끌벅적한 일상의 한 부분일 뿐이다. 「비이」의 마녀, 「무서운 복수」의 마법사, 「성 요한제 전야」의 바사브류크. 사람들은 이들 존재에 화를 내고, 맞서고, 욕을 하면서도 그 존재를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마치 이웃처럼. 인간은 왜 그들을 이야기하게 되었을까? 우리의 삶은 유한하다. 그러니 그 한계도 뚜렷하다. 한 마디로 인간의 삶이란 초라하고 나약하기 그지없다. 이런 우리라서, 닿지 못할 것과 이르지 못할 곳에 대한 바람과 두려움으로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은 아닐지.
 
중단편 6작품을 모아놓은 이 책에서 앞 부분에 수록된 두 편은 어둡고 무섭다. 「비이」에서 난데없이 나타나-등 뒤에 붙어 얼굴을 볼 수 없다는 것이 당하는 입장에서는 더 큰 공포다-알 수 없는 곳으로 끝도 없이 달리게 만드는 마녀는 무섭다. 「무서운 복수」에서 영혼의 영원한 안식을 담보로 이루어진 복수의 요구는 너무도 어둡다. 하느님 앞에서 죽은 이가 요구했던 그 끔찍한 복수는 어둡고 무섭고 깊고 지독하다. 이 두 작품에 비해 뒤에 수록된 나머지 작품들은 절망의 빛이 덜하며 조금은 교훈적이고 혹은 밝고 명랑하기까지 하다.

악마와의 마주침은 「저주받은 땅」의 할아버지처럼 잠시 고생하는 것으로 끝나기도 하고, 「물에 빠져 죽은 처녀」의 레프코처럼 호박이 넝쿨째 굴러오는 행운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성 요한제 전야」의 페트로처럼 한 줌 재로 돌아가는 경우도 있다. 이렇듯 그 과정과 결말은 제각각이지만 그 시작은 결국 한 뿌리에서 나온다. 인간의 탐욕과 공포다.

그러니 악마의 이야기를 즐기기는 하되 악마와 가까운 사이가 되고 싶지 않거들랑 욕심도 그만그만하게, 두려움도 그만그만하게 자신을 단속하시기를.

"나는 그가 왜 죽게 됐는지 알아. 그건 그가 두려워했기 때문이야. 만일 무서움만 타지 않았다면 마녀는 그에게 아무 해코지도 하지 못했을 거야." p88-「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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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담 (양장) 기담문학 고딕총서 1
라프카디오 헌 지음, 심정명 옮김 / 생각의나무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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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옛날 이야기는 무섭지도 않고 유치하잖아." 冊張을 뒤적이던 동생이 하는 소리다. 어떤 면에선 맞는 이야기다. 라프카디오 헌의 1904년작 『괴담』은 일본의 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전통적인 설화를 그의 아내 입으로 한번 거르고, 그리스인인 작가 본인의 글로 한번 더 거른 것이 『괴담』이다. 설화를 그대로 옮긴 것은 아니지만, 10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본다면 이 작품도 우리에게는 그저 원형 그대로인 설화로 다가올 수 있다. 가공되지 않은 날것이 보여주는 무언가 결핍된 듯한 이야기. 그러나 이 이야기에서 얼마나 많은 환상적인 세계가 탄생했을 것인가를 생각하면 이 작품을 그저 유치한 옛날이야기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이 100년 전의 이야기는 세련되지도 치밀하지도 않다. 그러나 이 작품의 미덕은 수많은 환상문학의 밑거름으로만 머물지 않는다. 21세기를 사는 독자라고 해도, 『괴담』에 수록된 이야기 한 편 한 편이 지닌 재미와 매력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이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친숙하다. 도깨비나 이승을 떠도는 인간이 아닌 것들에 관한 이야기는 우리에게도 많지 않은가. 그렇다면 책읽기는 더욱 수월해진다.

 

이승에 남은 미련 때문에 떠도는 혼, 애달픈 사랑으로 다시 태어나서도 인연을 맺는 연인, 귀신까지 홀리는 뛰어난 재주, 선녀와 나무꾼을 생각나게 하는 설녀의 이야기 등 하나같이 애절하면서도 서늘한 매력을 품고 있다. 특히 '귀신도 울린다' 할 정도의 뛰어난 비파 솜씨를 뽐내던 호이치가 정말 귀신들의 연회에 초대되었던 「귀 없는 호이치」이야기. 칠흑같이 캄캄한 밤에 죽은 천황의 무덤 앞에 앉아 촛불처럼 환하게 타오르는 도깨비불 가운데서 비파를 타던 호이치의 모습을 그려보면 그 괴기스런 분위기가 뿜어내는 아름다움이 잊히지 않는다. 우리나라 전래동화 '은혜 갚은 까치'를 생각나게 하는 「원앙」. 배가 고파 수컷 원앙을 사냥한 손조 앞에서 제 부리로 배를 찢어 목숨을 끊은 암컷의 모습은 섬뜩하면서도 반려자에 대한 지독한 사랑과  손조에 대한 깊은 원한이 선명하게 그려진 이야기다. 이처럼 수록된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짧지만 붉은 핏빛처럼 강한 인상을 주는 것이 특징이다.

 

『괴담』의 아쉬움이라면 「해바라기」부터 이어지는 이야기들이 앞에 수록된 이야기들과 자연스런 흐름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단편집이지만 전체가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질 수 있는 작품들이었다면 작품집에 대한 인상이 더 강하게 남을 수 있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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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어드는 아이 - 에드워드 고리 시리즈 에드워드 고리 시리즈 10
플로렌스 패리 하이드 지음, 강은교 옮김, 에드워드 고리 그림 / 두레아이들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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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혼'이라는 안쓰러운 아이가 등장하는 [줄어드는 아이]는 플로렌스 하이드와 에드워드 고리의 '트리혼 3부작' 가운데 첫 번째 책이다. 이 작품 [줄어드는 아이]는 비교적 의도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책이다.

 

트리혼은 어느 날 문득 깨닫는다, 자신이 줄어들고 있음을. 시렁에 손이 닿지 않고, 옷은 점점 커지고, 식탁 앞에서 반듯이 앉았지만 부모들은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며 바르게 앉으라고 야단을 친다. 트리혼은 이 무서운 현실에 어쩔 줄을 모른다. 부모님께 말씀드리지 않고 뭘 하고 있는 거냐고? 물론 부모님께 말씀을 드렸다. 그러나 사람이 줄어드는 법은 없다면 오히려 꾸중만 들었다. 담임도 교장도 주변에서 트리혼이 도움을 요청'해야 할' 그 누구에게서도 도움을 받지 못한다. 도움은커녕 이해와 위로조차 구경하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고 어른들의 무관심이 심해질수록 트리혼의 줄어듦도 속도가 붙어 결국 부모님도 트리혼의 문제를 인정하게 된다. 그렇다고 달라진 것은 없다. 그러니까 이해와 위로... 뭐 이런 것은 여전히 구경할 수 없다는 말이다. 엄마는 자신이 좋은 엄마였는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아빠는 채소를 먹으라는 안 하느니만 못한 소리나 중얼댄다.

 

트리혼은 자신을 지켜주고 이해해주리라 생각했던 어른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받을 수가 없었다. 트리혼은 점점 체념하게 되었을 것이다. 자신의 줄어드는 몸에 대해서가 아니라 어른들에 대해서 말이다. 결국 트리혼은 다시 커진다. 침대 밑에서 '줄어드는 아이들의 위한 게임'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트리혼은 깨달았을 것이다. 자신의 문제 앞에서 고민하고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뿐이라는 것을.

 

몸이 줄어드는 상황을 겪으며 트리혼은 성장했다. 씁쓸하고 외로운 세상을 조금 경험한 것이다. 이것이 그리 나쁜 상황은 아니다. 어차피 세상살이가 다 그 모양이니까. 무조건 부모나 주변의 어른들을 탓할 일도 아니다. 그들의 뻔뻔한 무관심이 옳은 것은 아니지만, 부모나 주변의 어른들이 과연 언제까지 그를 돌봐주겠는가. 줄어드는 아이가 나오는 이 이야기는 성장에 관한 이야기다. 어른들의 관심으로 행복하고 말갛게 자라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혼자 꿋꿋하게 자라는 이야기도 나름 괜찮지 않은가. 트리혼의 성장은 마지막 장면에서 나타난다. 몸이 연두색으로 변하는 문제를 만난 트리혼은 생각한다.

'이건 아무한테도 얘기 않는 게 낫겠어. 내가 아무 소리 않으면 아무도 그걸 알아채지 못할 거야.'

 

부모와 아이가 읽는다면 부모의 사랑과 관심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생각하며 읽을 이 책, 그러나 나는 부모도 아니고 아이도 아니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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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그림 속을 거닐다 - 인상파의 정원에서 라파엘전파의 숲속으로, 그림으로 읽는 세상 '근대편'
이택광 지음 / 아트북스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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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옛 서양 사람들은 이미지가 원본을 본뜬 것이라고 생각했단다. 그래서 원본, 즉 사실에 가까운 그림을 훌륭한 그림으로 보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세상이 움직이자, 사람도 움직이고 예술도 움직였다. 특히 서양은 근대 사회에 들어서면서 격변을 겪게 되고 이에 따라 예술도,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예술관도 변했다. 이택광의 [근대 그림 속을 거닐다]는 근대라는 격변기를 살았던 당시의 화가들이 어떤 방식으로 근대성의 문제와 대면했는가를 살펴보는 책이다. 인상파와 라파엘전파를 통해 근대를 읽고, 산업혁명이 낳은 근대를 통해 역으로 당시의 화가들과 그들의 작품을 읽는 책이다. 저자는 말한다. "그림은 조용히 벽에 걸려 있지만, 그 그림 속에서 우리는 소용돌이치는 세상을 본다."

 

 

도상학이나 구도, 인물이나 사물 배치, 화법, 나아가 미술사나 思潮 따위에 기대어 그림 읽기를 시도하는 책은 많다. 그러나 이 책은 그림을 그림으로서만 읽지 않는다. 그림을 읽되 당시의 정치와 사회상을 통해 그림을 읽고, 그림을 통해 그 사회 또한 읽고 있다. 앞서 말한 일반적인 그림 읽어주는 책들에서 얀 반 에이크의 [아르놀피니의 결혼]은 정교하고 치밀한 묘사나 거울을 활용한 구도, 종교적 상징 등에 주목한다. 좀 더 나아가면 일반적인 초상화와 다른 시민적 초상화라는 점 등을 언급한다. [근대 그림 속을 거닐다]에서는 당시 딸이 집안의 재산 일부로 여겨졌던 점을 언급하며 이 그림이 결혼 서약식의 기념이라기보다는 상환할 물품 목록에 재산의 일부인 딸도 포함된다는 의미를 약정하기 위함이라고 읽고 있다. 이 작품에 대한 어떤 이야기도 명확한 증거가 없으므로 이 가설(?)이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이 부분이 이 책의 그림 읽기가 가지는 특징을 잘 보여주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근대 예술은 기술의 발달이 낳은 가치의 세속화에 타격을 입는다. 근대성은 예술의 가치를 세속화시켰다. 예술가들은 여기에 각자의 방법으로 저항했다. 러스킨의 이론에 바탕한 라파엘전파는 신화나 신비주의의 세계관으로써 과학에 기반을 둔 당시의 사회 모습이나 당시 사람들의 세계관을 제어하고자 했다. 마네를 필두로 한 인상파 화가들은 과학에 기반을 둔 세계관-경험을 바탕으로 한 실증주의와 같은 선상에 있는-을 채택했다. 그들은 자기의 세계관에 맞추어 근대와 대면했다. 그래서 같은 라파엘전파라 해도, 인상파라 해도 모두 같지는 않다. 마네와 모네, 피사로와 드가가 제각각이다. 카유보트와 모네의 생라자르 역의 풍경이 다르고, 모네와 피사로의 풍경을 그리는 방식이 다르다.

 

 

마네와 인상파가 예술을 '가상'으로 인정하고 들어갔다면, 러스킨과 라파엘전파는 예술을 '현실' 내지는 더 나아가서 그 현실 너머의 '진리'로 받아들였다.(193쪽) 인상파는 어두운 현실을 그대로 직시했고, 라파엘전파는 옛 영광을 끌어다 어두운 현실-그들의 눈에 그렇게 보였을-을 교화하려했다는 인상이다. 쿨한 인상파와 순진한 라파엘전파라고나 할까. 결국 인상파는 추상주의를, 라파엘전파는 상징주의를 낳았다.

 

 

앞서 몇 번이나 언급했듯 그림을 통해 시대를 읽는 이야기이므로 다루는 범위가 폭 넓다. 좁게는 화가들의 출신이나 교우관계에서부터 넓게는 역사, 예술론, 철학에까지 이야기가 마구 달린다. 그러나 저자는 매우 친절하게 그 길을 안내하고 있어 특별한 배경지식이나 준비 없이도 즐거운 책읽기가 가능하다. 이렇게 친절한 책임에도 불구하고 본인은 러스킨의 예술론이나 막바지에 종종 등장하는 몇몇 철학자들의 이론에 대한 공부가 워낙 없었던 탓에 가는 걸음이 좀 더뎌지기도 했다. 그러나 시종일관 저자가 독자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음은 분명하다. 또한 이 책은 저자서문에서 비치는 저작의도를 제대로 살린 책이다. 어떻게 생각해봐도 이 책은 제목이 말하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림을 통해 근대를 읽는다는 그 목표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절묘하게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단순히 그림의 감상법이나 그림에 얽힌 뒷얘기나 화가의 신변잡기를 통해 그림을 읽는 것이 아니다. 근대라는 시대적 특수성을 통해 그림을 읽고, 그림을 통해 그 시대를 읽고 있는 것이다. 그림을 이렇게까지 읽어낼 수 있다니 역시 공부는 좋은 것이다.

 

 

나는 그저 인상에 의지한 감상밖에 못하는 사람이라선지 그것은 그것 나름대로의 의미와 매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렇게 그림을 밀어붙이면 그림도 나도 너무 지치지 않겠는가. 그렇지만 아는 만큼 보인다는 사실 또한 분명하니까 그림 공부에 욕심이 생기기도 한다. 폴란드 화가 벡신스키는 자신의 그림을 자신도 모른다며 굳이 이해하려하지 말라고 했단다. 이미지에 명백한 해답은 없다면서... 명백한 해답이 없는 만큼 우리는 그림을 원하는 대로 마구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럴수록 공부가 필요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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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일 나다 - 첨단 패션과 유행의 탄생
조안 드잔 지음, 최은정 옮김 / 지안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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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날 프랑스라는 나라에 루이 14세라는 왕이 살았어요. 루이 14세는 번쩍거리는 것, 반짝거리는 것, 휘황찬란한 것들을 너무도 사랑했던 것이지요. 썩은 물에 백조를 풀고, 온 거리에 불빛을 밝히고, 다이아몬드 단추를 몇 백 개씩 옷에 치렁치렁 달고 뽐을 냈답니다. 방의 온 벽을 거울로 장식하기도 했고 말이지요. 루이 14세의 이런 취향은 돈이 매우매우 많이 들었어요. 그러나 루이 14세는 앞서가는 센스 덕분에 사치를 하면 할수록 국가 경제에 도움을 줬답니다. 루이 14세가 살던 그 시대에 이미 메이이 백작부인이라는 슈퍼모델이, 스타마케팅이, 패션잡지와 기자가, 스타일과 브랜드가 꿈틀거리기 시작했어요. 누구 때문에? 루이 14세 덕분이지요. 그의 사치 덕분에 지금의 프랑스가 누리는 멋지고 세련된 이미지가 가능했다는군요. 뭐... 이런 동화같기도 하고 옛날 이야기같기도 한... 그런 이야기.

 

처음 몇 章을 읽었을 땐 "오호~ 그랬어? 그랬군!" 하며 눈을 번쩍였다. 프랑스의 명품 산업, 나아가서 현대의 패션과 명품의 역사를 루이 14세에게서 풀어내는 이야기가 새롭고 흥미로웠다. 그러나 뒤로 갈수록 같은 이야기의 반복에 지친다고 해야 할까. 옷과 헤어스타일, 구두, 요리, 카페, 샴페인, 다이아몬드, 화려한 도시의 야경, 접이 우산, 고급 가구, 향수와 화장품, 파티까지. 다양한 이야깃거리처럼 보이지만 사실 한번만 말해도 통할 비슷한 것들이고, 책에서 풀어놓은 이들의 성장과정 역시 비슷하니 솔직히 지겨웠다. 장마리우스의 접이 우산은 몇백 년 전에 만들어졌다는 걸 믿을 수 없을 만큼 오늘날의 그것과 차이가 없었다는 점이나, 옛 시대 영광의 얼굴들 가운데 다이아몬드처럼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는 물건이 있는가 하면 거울이나 우산처럼 그 처지가 하늘과 땅만큼 달라진 물건들이 있다는 것 등은 재미있었지만 말이다.

 

루이 14세 이전의 프랑스는 그저 유럽의 많은 나라 가운데 하나인, 별 특색도 자랑거리도 없는 그냥 프랑스였다. 그러나 루이 14세가 등극하고부터 프랑스는 더이상 그냥 프랑스가 아니게 되었다. 온 유럽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그들의 삶을 주시하고 흠모하고 모방하는, 유럽에서 가장 세련되고 앞서가고 아름다운 나라가 된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일찌기 남다른 미적감각과 그것을 위해 다른 모든 것을 던지고 뒤로 미룰 수 있는 배포(?)가 있었던 루이 14세 덕이다.

 

루이 14세 이전에는 의식주가 그저 의식주로서의 기능만을 담당했다. 옷은 입는 것, 음식은 먹는 것, 집은 사는 곳으로. 그러나 루이 14세가 등극하고는 달라졌다. 그저 생활일 뿐이었던 것들이 그의 화려한 미적 감각을 통해 하나의 스타일로 자리잡게 되었다. 유행이 되고 동경의 대상이 되고 이를 이용하여 부를 축적하는 새로운 것이 되어 버렸다. 온 유럽이 쇼핑 거리와 카페 지도가 담긴 파리 여행 안내서를 들고 파리로 파리로 몰려들었다. 올 수 없다면 물건을 수입했고, 물건을 살 수 없다면 그들의 생활 스타일을 담은 판화나 프랑스풍 옷을 입은 인형만이라도 구경하려고 몰려들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열광하는 아니 열병을 앓게 만드는 명품과 이것들을 소유함으로써 같이 따라온다고 믿고 있는 '멋진 삶'이라는 것의 모태가 루이 14세였고, 우리가 지금 프랑스에 대해 가진 생각들-막연하게 느끼고 있는 선입견이든 제대로 된 판단이든-역시도 태양왕 루이 14세로 인해 시작되고 완성되었다는 이야기다. 그것을 말하고 있다.

 

접이 우산의 발명이 여성들로하여금 자연을 마주하고 자아를 성찰하게 하여 일단의 여성 작가를 등장시켰다는 이야기처럼 17세기 파리의 변화를 오로지 루이 14세에게 맞추는 것은-책의 저작 의도가 그러니 강조하려는 바가 있었겠지만-좀 지나친 감이 있지만 새롭고 흥미있는 '패션의 역사'라고 생각한다. 허나 가로등 유지와 관리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것 뿐만 아니라 루이 14세의 사치처럼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들까지 결국은 그 부담이 시민들의 몫이라는 걸 생각하면 씁쓸함이 남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그의 사치가 오늘의 파리를 만들었고 다양한 효용 가치를 낳았다고 해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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