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일 나다 - 첨단 패션과 유행의 탄생
조안 드잔 지음, 최은정 옮김 / 지안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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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옛날 옛날 프랑스라는 나라에 루이 14세라는 왕이 살았어요. 루이 14세는 번쩍거리는 것, 반짝거리는 것, 휘황찬란한 것들을 너무도 사랑했던 것이지요. 썩은 물에 백조를 풀고, 온 거리에 불빛을 밝히고, 다이아몬드 단추를 몇 백 개씩 옷에 치렁치렁 달고 뽐을 냈답니다. 방의 온 벽을 거울로 장식하기도 했고 말이지요. 루이 14세의 이런 취향은 돈이 매우매우 많이 들었어요. 그러나 루이 14세는 앞서가는 센스 덕분에 사치를 하면 할수록 국가 경제에 도움을 줬답니다. 루이 14세가 살던 그 시대에 이미 메이이 백작부인이라는 슈퍼모델이, 스타마케팅이, 패션잡지와 기자가, 스타일과 브랜드가 꿈틀거리기 시작했어요. 누구 때문에? 루이 14세 덕분이지요. 그의 사치 덕분에 지금의 프랑스가 누리는 멋지고 세련된 이미지가 가능했다는군요. 뭐... 이런 동화같기도 하고 옛날 이야기같기도 한... 그런 이야기.

 

처음 몇 章을 읽었을 땐 "오호~ 그랬어? 그랬군!" 하며 눈을 번쩍였다. 프랑스의 명품 산업, 나아가서 현대의 패션과 명품의 역사를 루이 14세에게서 풀어내는 이야기가 새롭고 흥미로웠다. 그러나 뒤로 갈수록 같은 이야기의 반복에 지친다고 해야 할까. 옷과 헤어스타일, 구두, 요리, 카페, 샴페인, 다이아몬드, 화려한 도시의 야경, 접이 우산, 고급 가구, 향수와 화장품, 파티까지. 다양한 이야깃거리처럼 보이지만 사실 한번만 말해도 통할 비슷한 것들이고, 책에서 풀어놓은 이들의 성장과정 역시 비슷하니 솔직히 지겨웠다. 장마리우스의 접이 우산은 몇백 년 전에 만들어졌다는 걸 믿을 수 없을 만큼 오늘날의 그것과 차이가 없었다는 점이나, 옛 시대 영광의 얼굴들 가운데 다이아몬드처럼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는 물건이 있는가 하면 거울이나 우산처럼 그 처지가 하늘과 땅만큼 달라진 물건들이 있다는 것 등은 재미있었지만 말이다.

 

루이 14세 이전의 프랑스는 그저 유럽의 많은 나라 가운데 하나인, 별 특색도 자랑거리도 없는 그냥 프랑스였다. 그러나 루이 14세가 등극하고부터 프랑스는 더이상 그냥 프랑스가 아니게 되었다. 온 유럽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그들의 삶을 주시하고 흠모하고 모방하는, 유럽에서 가장 세련되고 앞서가고 아름다운 나라가 된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일찌기 남다른 미적감각과 그것을 위해 다른 모든 것을 던지고 뒤로 미룰 수 있는 배포(?)가 있었던 루이 14세 덕이다.

 

루이 14세 이전에는 의식주가 그저 의식주로서의 기능만을 담당했다. 옷은 입는 것, 음식은 먹는 것, 집은 사는 곳으로. 그러나 루이 14세가 등극하고는 달라졌다. 그저 생활일 뿐이었던 것들이 그의 화려한 미적 감각을 통해 하나의 스타일로 자리잡게 되었다. 유행이 되고 동경의 대상이 되고 이를 이용하여 부를 축적하는 새로운 것이 되어 버렸다. 온 유럽이 쇼핑 거리와 카페 지도가 담긴 파리 여행 안내서를 들고 파리로 파리로 몰려들었다. 올 수 없다면 물건을 수입했고, 물건을 살 수 없다면 그들의 생활 스타일을 담은 판화나 프랑스풍 옷을 입은 인형만이라도 구경하려고 몰려들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열광하는 아니 열병을 앓게 만드는 명품과 이것들을 소유함으로써 같이 따라온다고 믿고 있는 '멋진 삶'이라는 것의 모태가 루이 14세였고, 우리가 지금 프랑스에 대해 가진 생각들-막연하게 느끼고 있는 선입견이든 제대로 된 판단이든-역시도 태양왕 루이 14세로 인해 시작되고 완성되었다는 이야기다. 그것을 말하고 있다.

 

접이 우산의 발명이 여성들로하여금 자연을 마주하고 자아를 성찰하게 하여 일단의 여성 작가를 등장시켰다는 이야기처럼 17세기 파리의 변화를 오로지 루이 14세에게 맞추는 것은-책의 저작 의도가 그러니 강조하려는 바가 있었겠지만-좀 지나친 감이 있지만 새롭고 흥미있는 '패션의 역사'라고 생각한다. 허나 가로등 유지와 관리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것 뿐만 아니라 루이 14세의 사치처럼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들까지 결국은 그 부담이 시민들의 몫이라는 걸 생각하면 씁쓸함이 남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그의 사치가 오늘의 파리를 만들었고 다양한 효용 가치를 낳았다고 해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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