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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그림 속을 거닐다 - 인상파의 정원에서 라파엘전파의 숲속으로, 그림으로 읽는 세상 '근대편'
이택광 지음 / 아트북스 / 2007년 1월
평점 :
절판
옛 서양 사람들은 이미지가 원본을 본뜬 것이라고 생각했단다. 그래서 원본, 즉 사실에 가까운 그림을 훌륭한 그림으로 보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세상이 움직이자, 사람도 움직이고 예술도 움직였다. 특히 서양은 근대 사회에 들어서면서 격변을 겪게 되고 이에 따라 예술도,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예술관도 변했다. 이택광의 [근대 그림 속을 거닐다]는 근대라는 격변기를 살았던 당시의 화가들이 어떤 방식으로 근대성의 문제와 대면했는가를 살펴보는 책이다. 인상파와 라파엘전파를 통해 근대를 읽고, 산업혁명이 낳은 근대를 통해 역으로 당시의 화가들과 그들의 작품을 읽는 책이다. 저자는 말한다. "그림은 조용히 벽에 걸려 있지만, 그 그림 속에서 우리는 소용돌이치는 세상을 본다."
도상학이나 구도, 인물이나 사물 배치, 화법, 나아가 미술사나 思潮 따위에 기대어 그림 읽기를 시도하는 책은 많다. 그러나 이 책은 그림을 그림으로서만 읽지 않는다. 그림을 읽되 당시의 정치와 사회상을 통해 그림을 읽고, 그림을 통해 그 사회 또한 읽고 있다. 앞서 말한 일반적인 그림 읽어주는 책들에서 얀 반 에이크의 [아르놀피니의 결혼]은 정교하고 치밀한 묘사나 거울을 활용한 구도, 종교적 상징 등에 주목한다. 좀 더 나아가면 일반적인 초상화와 다른 시민적 초상화라는 점 등을 언급한다. [근대 그림 속을 거닐다]에서는 당시 딸이 집안의 재산 일부로 여겨졌던 점을 언급하며 이 그림이 결혼 서약식의 기념이라기보다는 상환할 물품 목록에 재산의 일부인 딸도 포함된다는 의미를 약정하기 위함이라고 읽고 있다. 이 작품에 대한 어떤 이야기도 명확한 증거가 없으므로 이 가설(?)이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이 부분이 이 책의 그림 읽기가 가지는 특징을 잘 보여주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근대 예술은 기술의 발달이 낳은 가치의 세속화에 타격을 입는다. 근대성은 예술의 가치를 세속화시켰다. 예술가들은 여기에 각자의 방법으로 저항했다. 러스킨의 이론에 바탕한 라파엘전파는 신화나 신비주의의 세계관으로써 과학에 기반을 둔 당시의 사회 모습이나 당시 사람들의 세계관을 제어하고자 했다. 마네를 필두로 한 인상파 화가들은 과학에 기반을 둔 세계관-경험을 바탕으로 한 실증주의와 같은 선상에 있는-을 채택했다. 그들은 자기의 세계관에 맞추어 근대와 대면했다. 그래서 같은 라파엘전파라 해도, 인상파라 해도 모두 같지는 않다. 마네와 모네, 피사로와 드가가 제각각이다. 카유보트와 모네의 생라자르 역의 풍경이 다르고, 모네와 피사로의 풍경을 그리는 방식이 다르다.
마네와 인상파가 예술을 '가상'으로 인정하고 들어갔다면, 러스킨과 라파엘전파는 예술을 '현실' 내지는 더 나아가서 그 현실 너머의 '진리'로 받아들였다.(193쪽) 인상파는 어두운 현실을 그대로 직시했고, 라파엘전파는 옛 영광을 끌어다 어두운 현실-그들의 눈에 그렇게 보였을-을 교화하려했다는 인상이다. 쿨한 인상파와 순진한 라파엘전파라고나 할까. 결국 인상파는 추상주의를, 라파엘전파는 상징주의를 낳았다.
앞서 몇 번이나 언급했듯 그림을 통해 시대를 읽는 이야기이므로 다루는 범위가 폭 넓다. 좁게는 화가들의 출신이나 교우관계에서부터 넓게는 역사, 예술론, 철학에까지 이야기가 마구 달린다. 그러나 저자는 매우 친절하게 그 길을 안내하고 있어 특별한 배경지식이나 준비 없이도 즐거운 책읽기가 가능하다. 이렇게 친절한 책임에도 불구하고 본인은 러스킨의 예술론이나 막바지에 종종 등장하는 몇몇 철학자들의 이론에 대한 공부가 워낙 없었던 탓에 가는 걸음이 좀 더뎌지기도 했다. 그러나 시종일관 저자가 독자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음은 분명하다. 또한 이 책은 저자서문에서 비치는 저작의도를 제대로 살린 책이다. 어떻게 생각해봐도 이 책은 제목이 말하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림을 통해 근대를 읽는다는 그 목표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절묘하게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단순히 그림의 감상법이나 그림에 얽힌 뒷얘기나 화가의 신변잡기를 통해 그림을 읽는 것이 아니다. 근대라는 시대적 특수성을 통해 그림을 읽고, 그림을 통해 그 시대를 읽고 있는 것이다. 그림을 이렇게까지 읽어낼 수 있다니 역시 공부는 좋은 것이다.
나는 그저 인상에 의지한 감상밖에 못하는 사람이라선지 그것은 그것 나름대로의 의미와 매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렇게 그림을 밀어붙이면 그림도 나도 너무 지치지 않겠는가. 그렇지만 아는 만큼 보인다는 사실 또한 분명하니까 그림 공부에 욕심이 생기기도 한다. 폴란드 화가 벡신스키는 자신의 그림을 자신도 모른다며 굳이 이해하려하지 말라고 했단다. 이미지에 명백한 해답은 없다면서... 명백한 해답이 없는 만큼 우리는 그림을 원하는 대로 마구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럴수록 공부가 필요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