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장과 마르가리타 1
미하일 불가코프 지음, 박형규 옮김 / 문예출판사 / 2006년 8월
평점 :
절판


<거장과 마르가리타>를 읽은 것은 이번이 세 번째이다. 절판되었던 책이 재발간된다는 소식에 좋아라하며 사람들에게 권했는데, 막상 전에 두 번이나 읽은 책의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 것이다. 악마가 등장하는 꽤나 유쾌하고 재미있는 작품이었다는 인상과 떠들썩했던 악마와 그의 수하들이 고독하고 음울한 태도로 말을 타고 하늘을 날아가는 마지막 장면만 떠올랐다. 이래서야 좋아하는 작품이라고 말하는 것도 부끄럽다. 생각난 김에 다시 거장과 마르가리타를, 악마를 만나기로 했다. 책을 펼쳐서 읽기 시작하자 벌써 인물들이, 그들의 대화가, 얽히고설킨 사건들이 하나하나 돌아오기 시작한다.

 

소설은, 예수는 결코 존재한 적이 없는 가상의 인물임을 역설하는 편집장과 시인의 대화로 시작한다. 그리고 그들 앞에 나타난 이상한 외국인의 문제 제기. “만일 신이 없다면, 누가 인간의 삶을 지배하며 지상의 모든 질서를 유지하는가.” 편집장은 인간 스스로가 지배한다고 대답하지만, 외국인은 내일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상할 수도 없고 언제 죽을지 알지도 못하는 인간이 어떻게 계획을 세우고 자신의 문제를 지배할 수 있을까 되묻는다.

볼란드라고 자신을 소개한 이 외국인은, 짐작하다시피, 악마다. 악마의 존재는 반대로 신의 존재 또한 긍정한다. 그러나 불가코프가 딱히 기독교나 예수를 옹호하고자 했던 것은 아닌 듯 하다. 예수아 하노츠리(예수)를 처형한 본디오 빌라도의 고통에 대해서도 상당 부분 언급되지만, 이 역시 종교적인 배경이라기보다는 양심에 어긋나는 행동으로 인한 괴로움으로 보인다. 전 사회와 사상을 통제하려고 덤벼드는 소비에트의 무모함을 비판하고, 그런 사회에서 양심에 따라 소신있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의 고뇌를 표현하기 위해 신과 악마라는 초월적 존재를 끌어들였다고 봐야 할 것이다.

 

볼란드의 시끌벅적한 수하들은 모스크바의 곳곳에서 요란한 사건을 일으킨다. 편집장의 아파트는 악마의 소굴로 변하고, 검은 마술사 볼란드의 쇼가 열린 극장에서는 12시가 되면 사라져버릴 신데렐라의 드레스에 부끄러운 줄 모르고 덤벼드는 부인들과 곧 종이 조각으로 바뀔 돈을 한 장이라도 더 줍겠다고 드잡이하는 상류층 인사들의 어리석은 모습이 쇼보다 더욱 화려하게 펼쳐진다. 볼란드의 부하들은 방문하는 곳마다 사람들의 혼을 쏙 빼놓아 줄줄이 정신병원으로 보내버린다. 이 괴상하고 우스꽝스러운 일행은 얼굴을 찌푸리고 이 소동이 마뜩하지 않다는 듯,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데, 이런 모습은 우리의 탈춤을 연상시키는 구석이 있다. 멀쩡한 얼굴을 어그러진 탈 뒤에 감추고 양반을 맘껏 희롱하는 광대놀음이랄까. 때문에 경직된 사회와 오만한 인물들에 대한 조롱이 한층 두드러진다. 

 

불가코프는 스스로를 풍자가로 불렀다고 한다. 그가 풍자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물론 소련 사회이다. 1920년 대 한창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벌이며 신랄한 풍자로 인기를 얻던 불가코프는 20년대 말에 이르면 결국 더 이상 출판을 할 수 없는 처지가 된다. 사회주의 사상과 혁명의 당위성을 주장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소비에트 사회에 대한 비판만 쏟아내는 그의 작품을 열성 공산주의자들이 좋아했을 리 만무다. 때문에 이 책에 등장하는 ‘거장’에게 투영된 불가코프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거장은 예수와 본디오 빌라도의 만남에 관한 소설을 썼으나, 이런 작품이 소비에트 문학계에 받아들여질 리 없다. 비평가들의 혹평에 이어 그의 거처를 빼앗으려는 음모에 휘말린 거장은 스스로 원고를 불태우고 정신병원에 들어간다. 이에 비해 글 한 줄 쓰지 않으면서 ‘문학협회’의 회원증을 얻은 사이비 문학가들은 얼마나 대단한 위세를 떨치는지. 볼란드의 부하들이 소동을 일으키고 불을 내는 한 장소로 문학협회를 선택한 것도 당연해보인다. 볼란드는 ‘원고는 절대로 불타지 않는다.’고 말하고, 그의 말대로 거장의 원고가 돌아온다. 자신의 원고도 언젠가는 세상의 빛을 보리라는 희망을 피력한 것일까. 유작이 된 <거장과 마르가리타>는 불가코프의 사후 20여 년이 지나서야 공개되었고, 20세기 러시아 문학의 가장 뛰어한 작품 중 하나로 꼽힌다.

 

이 작품에서 가장 매력적인 인물은 누가 뭐래도 마르가리타이다. 뛰어난 과학자의 아내로 멋진 아파트에서 호사스럽게 살던 마르가리타는 어느 날 길에서 만난 거장과 사랑에 빠진다. 거장이 사라지고 난 뒤 우울한 나날을 보내다 거장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에 악마의 무도회의 여주인 자리를 수락한다. 연인을 잃은 안타까움에 눈물 흘리는 가련한 여인에서 악마의 무도회의 당당한 여주인으로 변신한 마르가리타는 변화를 그대로 즐기고, 그 힘을 이용하여 거장을 공격한 평론가의 아파트를 부숴버리는 호쾌한 모습을 보여준다. 악마에게 자신을 내주었다고 해서 후회하거나 고통스러워 하지 않는, 자신의 선택을 믿는 마르가리타가 사랑스럽다.

 

이 작품은 러시아에서 TV 드라마로 만들어져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작품을 읽다 보면 장(章)으로 끊어 시리즈 드라마를 만들기에 충분해 보인다. 여러 편의 희곡을 쓰고 무대에 올려 성공을 거두었던 불가코프의 특징이 살아 있다. 거기에 풍자와 조롱으로 웃음을 선사하고 있으니 이만한 대본이 또 있을까. 사회를 통제하려는 권력이나 권위를 내세우는 인물들이 어찌 1930년대 소련에만 존재할 것인가. 오늘날 러시아나 우리나라에서 불가코프의 작품이 통할 수 있는 이유가 있다.

기꺼이 두 번 세 번 손에 잡을 수 있는 책, 내용을 되새기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새로운 재미와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책이야말로 좋은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책은 사람마다 다를 테지만, <거장과 마르가리타>는 내게는 틀림없이 좋은 책이다. 아마 몇 년 후에도, 문득 떠오를 때면 또 꺼내 들고 읽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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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10-17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을까 말까하는 책입니다 ㅡㅡ;;

blowup 2006-10-17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짜임이 촘촘하고, 상징이 풍부하고, 행간이 많은 책들은, 여러 번 읽어도 새롭지요.
얼블루 님의 이 리뷰, 몹시 땡기면서도 한번 보고 저걸 다 읽어낼 수 있을까, 염려스럽습니다.

2006-10-17 15: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urblue 2006-10-17 15: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만두님, 여전히 고민하고 계신 거여요? ^^ 이 책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너무 반가워서 재미있는 책이라고 마구 떠들었지만, 다시 읽어보니 모든 사람에게 재미있을 만한 책은 아닌 것 같더라구요. 일단 님께서 좋아하시는 추리 소설적인 요소같은 건 안 보이니까요.

나무님, 님이 말씀하시는 건, 어떨 땐, 곧이 안 들려요. 설마 님이 상징을, 행간을 못 읽으실까요? 에이, 말도 안 된다구요.

2006-10-20 17: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urblue 2006-10-20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작품 좋아하신다니, 제가 더 반갑습니다. ^^

2006-11-01 12: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11-01 14:3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