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린 희망 유재현 온더로드 6
유재현 지음 / 그린비 / 2006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언젠가 에세이류를 싫어하는 이유가 독자에게 주어지는 수동적인 역할에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소설의 경우 작가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글을 썼는가와 관계없이 한 작품은 자체로 생명력을 가지게 되고, 그로부터 어떤 의미를 추출해내느냐 하는 것은 온전히 독자에게 주어지는 몫이다. 주도권은 독자에게 있다. 반면 수필은 글쓴이의 개인적인 생각과 느낌을 독자에게 강요하는 글이며 독자는 그것을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둘 중 하나를 택할 수 밖에 없다.

 

기행문 역시 수필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이므로 크게 다르지 않다. 그나마 직접 가 본 곳에 관한 여행기라면 내가 본 것과 필자가 본 것이 어떻게 다른지 혹은 동일한 대상에 대한 감상이 같은지 다른지 확인하는 재미라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곳을 보여주는 여행기에 대해서는 실상 뭐라 할 말이 없다. 한 나라든 한 도시든 결코 좁지 않은 여행지에서 필자가 선택한 대상과 그에 대한 감상을 일방적으로 전해 들어야 하는 나는 그것이 옳다고도 그르다고도, 혹은 안목이 좋다고도 나쁘다고도 말할 수 없다. 나는 미술관 말고 공원을 보고 싶다구요, 라고 투덜거려봐야 필자에게 전해질 리도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현지인이 아닌, 그저 스쳐 지나갈 뿐인 여행객의 눈에 비친 한 지역의 이미지를 나는 믿지 않는다. 그러니 박물관 기행이든 건축 기행이든 뭔가 테마가 있는 여행기 외엔 손을 대지 않는다. (책에 있어서는, 나는 꽤 까다로운 편식증과 편협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럼에도 이 책을 손에 든 건, 여행지가 다름아닌 쿠바이기 때문이고, 제목이 <느린 희망>이기 때문이다. 체 게바라, 카스트로, 혁명, 수준 높은 교육/의료 서비스, 아바나,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 야구, 미사일 위기, 경제 봉쇄, 난민, 관타나모 기지. 쿠바에 관한 내 지식은 딱 요만큼에서 한 치도 더 나아가지 못한다. 언젠가 이 나라에 가 볼 날이 올지, 물론 알 수 없다. 앞으로 한 40년쯤 더 산다고 해도, 글쎄, 태평양 너머에 있는 이 섬나라가 과연 내 생에 어떤 인연을 갖고 있을까. 하지만, 아니, 그렇기에 쿠바는 야릇한 설렘을 주는 곳이다.(현지인들이 내 말을 듣는다면 헛소리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만.) 더하여, <느린 희망>이라는 제목은 저자가 쿠바를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는지를 알려준다. (자연스럽게 <슬로 푸드><희망의 밥상>이 연상된다.) 그러므로 쿠바라는 넓은 땅 안에서 그가 선택해 보여줄 것들에 대해 의심을 버릴 수 있다. 이렇게, 나는 쿠바 여행기를 만났다. (, 이래서 여행기를 읽는구나, 하는 갑작스런 깨달음이라니.)

 

어차피 기행문의 형식이란 건 없다. 여행자가 보고 싶은 걸 보고 말하고 싶은 걸 말하면 그만이다. 보통 초보 여행자들은, 관광안내책자에 소개된, 남들 다 보는 것을 보고 나서 남들 다 하는 얘기를 똑같이 하곤 한다. 그래서야 굳이 책을 만들 의미도, 읽을 재미도 없다. 유재현은 그다지 시시콜콜하지 않다. 인터넷에서 혹은 관광책자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내용들은 아예 빼버린 듯 하다. 그가 직접 찍었다는 사진 속에는 쿠바의 자연 경관, 건축물, 혁명의 추억 등이 담겨있지만, 무엇보다 많이 보이는 것은 사람들이다. 백인, 흑인, 인디오, 뮬라토, 메스티소 등등 온갖 인종들이 온갖 표정과 포즈로 존재한다. 그는 그들로부터 사는 이야기를 듣고, 보통의 여행객들이 간과하기 쉬운 현지인들의 삶을 보았다. 물론 이 정도로 그가 쿠바를 속속들이 알게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터이다. 그러나 어려운 경제 여건 속에서도 낙천적으로 살아가는 쿠바인들 사이에서 느리지만 결코 사라지지는 않은 희망을 찾을 수 있을 만큼은 보았다고 해도 좋지 않을까. 여행자가 품기 쉬운 감상이나 호들갑스러운 과장 없이 소박하고 담담하게 그러한 희망을 피력한 것도 장점이랄 수 있겠다. 쿠바의 첫 여행기를 잘 만나서 다행이다. 이런 여행기라면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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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6-09-01 0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피델 카스트로의 생이 얼마 안남았다고 하더군요...
이제 쿠바의 중심에 있던 인물이 생을 마감하는군요....^^

비로그인 2006-09-01 0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에세이와 여행기를 대리체험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가 떠나기는 귀찮거나 사정이 여의치 않고(그놈의 사정이란 게 언제나 그렇지요), 대신 이유식을 먹듯 천천히.
그래서인지 내 마음과 딱 맞는 에세이스트를 찾기란, 내 마음과 딱 맞는 여행 동반자를 찾는 것만큼이나 힘들어요. 나는 흰 테이블보와 빳빳한 광목 천을 원하는데 레이스가 화려한 베르사유의 침실을 원하는 동반자를 만난다면 책 한 권의 여행이 내도록 괴로우니까요. 그런 의미에서는 이 책을 만난 것, 저도 참 다행이라 생각했더랬습니다.

blowup 2006-09-01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가 떠먹여 주는 느낌. 근데 무슨 맛인지 잘 모르겠는 데서 오는 불편함. 그런 것이었나봐요. 제가 여행기를 재미없어 하는 이유가. 이국적인 장소에 혼자 도취해서는 끊임없이 스스로의 매혹을 동어반복하는 여행기가 제일 피곤해요.

urblue 2006-09-01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스토님, 그러게요. 그런데 일흔 넘은 동생에게 권력이양이라니, 역시 독재국가인가 했더랍니다.

주드님, 저는 그 대리체험의 필요성을 잘 느끼지 못하는 듯 합니다. 내가 가보거나 말거나. 실상 제가 직접 간다고 해도 남들이 전해주는만큼 잘 볼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지만 (워낙에 여행을 안 다닙니다, 제가. --;), 그럼에도 여행기는 영 땡기지를 않아요. 그래도 이 책은 괜찮았습니다만, 과연 이런 여행기를 또 만날까 싶네요. ^^

나무님, 저만 그런게 아니군요. ㅎㅎ 여행지와 현지인들을 신기하게(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바라보는게 저는 영 불편합니다. 어딜 가든 그곳에 사는 것처럼 다소 심드렁하게 보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