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은 예전에 이 선생님에 관한 페이퍼를 쓰다가 그만둔 일이 있습니다. 이벤트 공고를 보고 생각난 김에 마무리를 지을까 하는 마음으로 참가합니다. ^^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무수히 많은 선생님들과 만났지만 현재도 내 기억에 남아 있는 선생님은 단 두 분 뿐이다. 한 분은 중학교 2학년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국어를 가르치셨던 여자 선생님. (어째서 이런 일이 가능하냐면, 워낙 규모가 작은 소도시라 선생님들이 대개 근처의 학교에서 옮겨 다니기 때문.) 나를 엄청 예뻐하신 분인데, 이 분 얘기도 나중에 한번 하긴 해야겠다.

 

다른 한 분은 중학교 3학년 때 담임이었던 영어 선생님. 이 분의 마스크는 로빈 윌리암스를 닮았다. 아마 한 두 해 전에 동네 극장에서 <죽은 시인의 사회>가 상영되었었고, 그래서 3월 2일 첫날 교실문을 열고 들어오신 선생님을 보자마자 여기저기서 키팅 선생님이다~ , 캡틴! 하는 웃음 섞인 웅성거림이 새어 나왔다.

 



선생님은 영화 속의 키팅 선생님 만큼이나 재미있고 좋은 분이셨다,고 기억된다. 수업 시작하기 전에는 항상 학생들을 책상에 엎드려 있게 하셨다. 드르륵 미닫이 문을 열고 들어오셔서 교탁 위에 출석부와 교과서를 올려놓고는 고개를 들라.라고 말씀하시면 학생들이 모두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반장이 인사. 처음 한동안은 이런 희한한 방식에 키득거리고 웃었지만, 그것이 학생들의 주의를 집중시키는데 효과적이라는 건 확실했다. 수업 중 중요한 부분을 강조할 때는 별로 말씀하셨는데, '자, 이건 별 다섯 개'하시면 그 부분에 별 다섯 개를 그려넣곤 했다.

 

시골의 작은 학교인데다 당시는 단일 교과서였으므로 수업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고 몇 년씩 해오던 걸로 근근히 버티는 교사들도 꽤 많았는데, 선생님은 무척 열심이셨다. 키팅 선생님처럼 환하게 웃으셨고, 우리가 지루해 할라치면 재미있는 얘기도 해 주셨다. 그 중 유독 기억나는 것은 운명의 상대에 관한 얘기다. 운명의 짝을 만나면 그 순간에 바로 알아볼 수 있다고 하셨다. 망치로 머리를 친 것처럼 ~하는 울림이 있든지, 딸랑딸랑 종이 울리든지 한다고. 사모님을 처음 봤을 때 종이 울렸단다. (애인을 처음 봤을 때 이랬냐 하면, 음)  

 

내가 반장으로 뽑혔다. 사실 1,2 학년 때에는 후보로 추천이 되어도 안 하겠다고 버텼었는데, 이 때 반장을 하겠다고 한건 역시 선생님 때문이었을 거다. 선생님은 반장이 일을 하기 편한 시스템을 학기 초에 만들어 주셨다. 예를 들면 과제라든지 돈이라든지 이것저것 걷어야 할 것들을 여러 명이 나누어서, 돌아가면서 하게 하셨다. 1번, 11번, 21번, 31번, 41번이 각각 10명 씩 책임지고 걷은 후 내게 건네 주는 것이다. 다음은 2번, 그 다음은 3번. 요즘의 학교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당시는 뭘 그리 많이 제출했는지, 이런 일은 끊임이 없었던 것 같다. 다른 반들은 대개 몇 명씩 빠지는 경우가 빈번했지만, 우리 반은 그런 일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익숙해지고 나자 조금 이상한 걸 발견했다. 특히나 각종 회비니 뭐니 하는 돈이 관련된다든가 하는 경우 선생님이 조회나 종례 시간에 아이들에게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내가 다른 일로 교무실에 가면 그 일을 총괄하는 선생님이 묻는다. 블루야, 너네 반도 이거 걷고 있지? 난, 조그만 게 영악했다고 해야 할지, 그런 거 못 들었는데요, 라고는 절대 안하고, . 대답하고는 교무실 칠판에서 해당 사항을 찾아 반에 돌아와 아이들에게 전달했다. 그렇게 해도 우리 반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고등학교 입학 시험을 끝내 놓고 다들 긴장했던 마음이 한껏 풀어져 있을 때, 이제 수업은 더 안 해도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선생님은 고등학교 교과서를 복사해서 수업을 진행하셨다. 제법 어려웠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이들이 못하겠다고 떼를 쓰자 얼굴이 굳은 선생님이 내게 물으셨다. 너도 못하겠냐? . 무척 화를 내셨던 것 같다. 그 자리에서인지 나중에 따로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내게 실망했다는 말씀도 하셨다. 어린 나이에 무척 충격이었던 나는 고등학교 진학 후에 선생님께 긴 편지를 드리기도 했다.

 

아무튼 선생님과의 기억은 대개 좋은 것이었고, 마지막의 일조차 나를 예뻐하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몇 년 전, 무슨 일로인가 선생님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는데, 문득 선생님이 과연 내게 좋은 분이었던 걸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다른 모든 아이들에게는 여전히 좋은 분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게는, 나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학급의 반장이었던 내게는 정말 좋은 선생님이었던 걸까. 얼마 전 친구에게 당시에 돈이나 다른 걸 걷는 것과 관련해 그런 일이 있었다고 얘기했더니 친구는 그런 건 몰랐다고, 놀랐다고 대답했다. 16살 아이에게 그런 일을 하게 한 건 절대 옳지 않았다고.

 

지금도 가끔은 선생님이 떠오른다. 한쪽으로는 여전히 가장 기억에 남는 훌륭한 선생님으로, 다른 한쪽으로는 옳지 않은 행동을 한 선생님으로. 어쩌면 한쪽은 일부 내 잘못도 있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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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3-14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추행 샘도 계셨으니 뭐, 할 말이 없죠 ㅠ.ㅠ

로드무비 2006-03-15 0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인 이야기는 어디에도 빠지지 않는구랴.=3=3=3

urblue 2006-03-15 0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만두님, 헉... 설마 님께서 배운 사람 중에 있었다구요? ㅠ.ㅜ

로드무비님, ㅋㅋ 그런 것만 보시나요. 글구, 여기 말고 아프락사스님 서재에 있는 페이페어 추천해주세요!!

2006-03-15 09:4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