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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자히르
파울로 코엘료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05년 7월
평점 :
소설이 재미있기 위해선 몇 가지 조건이 있다. 기발한 상상력으로 이 세상과는 다른 새로운 세계를 펼쳐 보여주든지, 흥미진진한 사건 전개로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들든지, 등장 인물들의 심리가 섬세하게 묘사되어 감정이입이 이루어지게 하든지, 아름답거나 독특한 문체로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든지 하는 것들이다. 이런 조건들을 전부 갖추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이중 단 하나만 만족스러워도 엄청난 재미를 느낄 수 있다. 거기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감동을 준다면 그 소설은 좋은 작품이 될 것이다.
이 작품 <오 자히르>의 주인공은 프랑스에서 성공한 작가다. 노래 가사를 써서 다른 일을 할 필요가 없을 만큼의 돈을 벌었고, 부인 에스테르의 질책과 격려에 힘입어 그토록 바라던 글을 쓸 수 있게 되었으며, 그의 책들은 거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에스테르는 아름다울 뿐 아니라 현명하고 사려 깊으며, 기자로서 명성을 거두고 있는, 역시 대단히 뛰어난 여자다. 게다가 둘은 서로 사랑하고 있다. 그런데 어느날 에스테르가 아무런 말없이 사라진다. 남편은 이유를 알 수 없고, 부인은 이제 남편에게 자히르, 곧 집착의 대상이 된다. 작가는 부인이 사라진 이유를 납득하기 위해 과거를 돌이켜본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언제부터 부인과의 사이가 어긋나기 시작했는지 반추하면서 부인이 말했던 사랑의 본질에 접근해간다. 부인과 함께 사라졌다고 짐작한 청년 미하일과 작가의 새로운 애인 마리가 이 과정에 도움을 준다. 결국 작가는 사랑을 깨닫고 부인과 재회한다.
배경이 현대의 프랑스고, 주인공들은 소위 잘난 엘리트들이다. 새로운 세계관 같은 건 애초에 찾아볼 수 없다. 물론 작가가 그런 걸 염두에 두었으리라고 생각하지도 않지만 말이다. 어느날 갑자기 사라진 부인과 부인에게서 자유로워지지 못하는 남편이란 설정도 진부하기 이를 데 없다. 부인은 남편과 대화하기를 원하는데 남편은 그걸 모르고, 그래서 부인이 집을 나가고, 뒤늦게 사태의 본질을 깨닫고 반성한 남편이 부인을 찾아가 재결합한다, 라니. <사랑과 결혼>이나 <아침 마당>같은 TV 프로그램, 여성지 상담 코너의 단골 소재 아닌가. 흥미진진한 전개 같은 걸 기대하는 쪽이 이상하다. 오히려 얼마 전 미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결혼 전날 스스로 납치 당했다고 신고했던 철없는 예비신부 쪽이 소설의 소재로 더 신선하겠다.
에스테르가 왜 집을 나갔는지, 작가가 어떻게 자히르에서 벗어날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에스테르가 말하는 사랑, 미하일이 세계에 전파하겠다는 사랑, 작가가 마침내 깨달은 사랑, 이 사랑사랑사랑을 나는 이해할 수도 공감할 수도 없다. 인물들에게 감정이입은커녕 작가가 뭘 얘기하고 싶은지도 파악이 안 된다. 사랑이 그렇게 어려운 거였나. 혹은 2년의 공백과 지구 반 바퀴의 거리로 해결이 가능할 만큼 쉬운 건가. 사랑과 자유를 찾아 떠나는 구도의 여정이라지만, 카자흐스탄의 스텝이라는 배경은 오리엔탈리즘의 혐의가 다분하다.
작가와 독자 간에도 궁합이 있다. 남들이 아무리 칭찬을 해도 나로서는 읽을 수 없거나 읽더라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작가도 있고, 별로 주목받지 못하지만 내게는 최고인 작가도 있다. 어차피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작가들과 책들이 있는데, 맞지 않는다고 생각되면 굳이 애써 읽을 필요가 뭐 있을까. <연금술사>를 보고 나서 코엘료와는 인연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어찌 기회가 닿아 다시 <오 자히르>가 손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와의 인연은 여기까지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