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좋아하는 배우 에드워드 노튼과 제레미 아이언스, 리암 니슨이라는 썩 훌륭한 배우들이 출연하고, 리들리 스콧이라면 일정 정도의 비주얼과 재미를 보장할 텐데도, 역시 올랜도 블룸이 영 미덥지 않은 것이었다.
<반지의 제왕> 시리즈 세 편과 <캐리비안의 해적>, <트로이>까지 올랜도 블룸이 출연한 영화를 다섯 편 보았지만, 그의 이미지는 항상 똑같았다. 멋진 척 폼 잡는 잘생긴 귀족 도련님. 그런 그가 십자군 전쟁의 한복판에서 왕과 백성을 위해 싸우는 영웅을 어떻게 소화해낼 것인지 의문이었다.
일단 올랜도 블룸은 변신을 위한 노력을 하긴 했나 보다. 그간 운동을 좀 했는지 벗은 몸이 전보다는 근육질이다. 허여멀건한 얼굴을 조금 태웠으며 머리카락은 짙게 물들였다. 그러고도 모자랐다고 생각했나, 묵직한 인상을 주기 위해, 대사를 아낀다. 상대방이 뭐라뭐라 대사를 치면, 그는 그윽함을 흉내낸 눈길로 바라보기만 한다.
그래봤자, 라는 게 문제다. 전체적인 선이 여전히 가늘고 곱상하기만 한데다가, 입을 열면 목소리에 깊이가 없다. 전혀 포스가 느껴지지 않는다. 친구는 그가 패션 모델 같다고 했는데, 딱 그렇다. <글래디에이터>의 러셀 크로는 언감생심이고, 심지어 브래드 피트가 <트로이>에서 보여줬던 전사의 이미지조차 쫓아가지 못한다.
리암 니슨도, 제레미 아이언스도, 에드워드 노튼도 잠깐 밖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들이 머물렀다 떠난 빈 자리를 오로지 올랜도 블룸 혼자의 힘으로 채워야 하는데, 정말이지 벅차 보인다. 좀 더 말랑한 영화라면 나름 섬세하고 괜찮은 연기를 보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만, 이건 아니다.
영화를 보자면, 리들리 스콧의 전쟁씬은 여전하다, 라기보다는 이제는 그 정도도 보여주지 못하면 영화가 되질 않는다. 실감나긴 한다만 반지의 제왕이나 트로이 등과 비교해 큰 차별점을 느끼지는 못하겠다. 게다가 스토리는 확실히 엉성하다. 시골 마을의 대장장이였던 베일리언(올랜도 블룸)이 칼 몇 번 휘둘러 보았다고 뛰어난 기사가 되는 건, 그가 원래 운동 신경이 좋아서 그런 거라고 이해해주자. 별 개연성도 없이 잘생겼으니까 가장 아름다운 여자(심지어 유부녀라도!)의 사랑을 받는 것도 당연하지. 그렇지만 전투 경험 한 번 없이 수천의 병사를 질서정연하게 지휘하는 게 원래 그렇게 쉬운 거였나. 역시 잘생기고 핏줄 좋은 것들은 뭘 해도 잘 하는 건가. 흥이다.
그나마 진보라면, 영화가 아랍인들이나 살라딘을 야만인 혹은 적으로 그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십자군 내에서 전쟁을 도발하는 주전론자들이 오히려 상당히 야만스럽고 어리석게 보이고, 십자군 전쟁이 재물과 영토를 노린 침략의 전쟁임을 인정한다. 그만큼의 인식의 변화는 있는 모양이다.
에드워드 노튼의 얼굴을 볼 수 없다는 게 가장 아쉬운 점. 노튼의 새 영화는 언제 나오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