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코미디 영화를 극장에서 본 게 언제였더라. 아니, 극장에서 본 적이 있기나 한가. 기억나지 않는걸 보면 아마 없지 싶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러 간 건, 요즘 달리 끌리는 영화가 없다는 것과 외화들을 제치고 '박스 오피스 1위'를 2주째 고수하고 있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영화를 보고 나와서 친구에게 물었다. '그런데 이게 코미디 영화인가?' '판타지라고 할 수 있지.'라는 대답. 그렇다, 이 영화는 판타지다.

주먹을 쓸 땐 먹고 사는게 쉬웠다는, 이제는 개과천선한 전직 조폭 두목 신사장(오달수)은 매주 같은 번호로 로또를 한 장씩 산다. 그에게 주루루 딸린 식구들(만화방과 당구장과 다방 종업원들)과 잘 살아보기 위해. 비가 억수로 쏟아붓는 어느 여름 토요일 밤, TV 로또 추첨 방송에서 그들이 매주 적었던 그 번호들이 하나하나 나온다. 드디어 인생역전의 순간이 온 것이다. 그런데 복권을 사러 갔던 여종업원 장미(서영희)가 복권을 들고 사라진다. 신사장은 썩을대로 썩은 비리 형사 충수(이문식)에게 30억원을 약속하며 장미를 찾아달라 부탁하고, 신사장 수하의 재철(이정진)과 충수는 장미의 고향 마파도로 향한다. 일주일에 한번 배가 들어가는, 전 주민 5명의 무인도나 다름없는 섬. 이제부터 얘기는 섬에서 살아가는 다섯 명의 엽기 할머니들과 어리버리 두 남자의 좌충우돌 코미디로 이어진다. 

김수미, 김을동, 여운계 등 연기력으로는 이미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는 노장 연기자들이 보여주는 할머니들의 모습은 확실히 재미있고 유머러스하다. 특히 눈에 잔뜩 힘을 주고 욕지거리를 뱉어내는 김수미 할머니와 젊은 남자들의 등장에 곱게(!) 화장하고 나타나 애교를 부리는 김형자 할머니를 보면 웃지 않을 수 없다. 가볍게 '오버'하는 이문식과 더운 여름에 가죽 재킷입고 무게잡는 이정진도 귀엽다. 신사장 역의 오달수도 눈에 띈다. 배우들에 관해서라면 별 다섯도 전혀 아깝지 않다.

문제는, 영화가 배우들의 힘만으로 진행되지는 않는다는데 있다. 연기못하는 배우도 짜증스럽지만, 전혀 새롭지 않은 에피소드와 설득력없는 이야기 역시 보는 사람을 맥빠지게 한다. 시골 마을에서 벌어질 수 있는 사건이란게 그렇게 빤한건가. 이문식과 이정진의 겪는 일들은 대개 어디서 한번쯤은 본 내용이다. 일단 배우들 때문에 웃긴 하지만 그 웃음이 오래 갈 리 없다. 게다가 영화가 결말을 향해 나아갈수록 점점 더 황당해진다. 코미디니까 해피엔딩이어야 한다는 공식을 충실히 따르려고 했다면 차라리 좀 더 뻔뻔하게 밀어붙이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가족의 사랑에다, 갑자기 사람된 비리 형사와 조폭 두목이라니. 잠깐씩 웃다가 어설픈 '감동'의 시도에 어색하게 굳어진다. 그러니 '판타지'랄 수 밖에.

역시 요즘 볼 만한 영화가 없던 거였어, 라는 결론이다.

 

* 어떤 영화 프로그램에서 <발레교습소> 등의 영화들이 무거운 주제 의식 때문에 관객으로부터 호응을 얻지 못한다는 내용의 보도를 본 적이 있다. 다만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입소문을 타고 꾸준히 관객이 들고 있다나 어쨌다나. 심하게 말하자면 <발레교습소> 같은 영화 만들고 관객이 들기를 바라는게 말도 안되는 욕심이다. 영화 만드는 사람들이고 홍보하는 사람들이고, 기본적으로 영화가 좋아야 흥행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지. 만일 이 영화가 완전히 실패했다면, 역시 스타가 나오지 않는 영화는 안된다니까,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이 영화가 이 정도까지 선전하고 있는 건 모조리 배우들 덕이라는걸, 제발 좀 알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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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5-03-25 0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할머니들 연기 보고싶어 비디오로 빌려볼 생각을 하고 있음.
우리나라 영화 발전을 위해 극장 가서 본 것 잘하셨소.^^
(그런데 요즘 그렇게 볼 영화가 없나? '몽상가들'도 괜찮을 것 같던데...)

딸기 2005-03-25 0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적극(?) 추천합니다.

urblue 2005-03-25 0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몽상가들 아직 개봉 안 했어요. 이번주랍니다. 뭐 비디오로는 볼만해요.

딸기님, 고맙습니다. ^^

chika 2005-03-26 1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전 이들틈에서 더욱더 돋보일(?) 이정진의 연기가 궁금해지더라구요~ ^^;

2005-03-26 12:4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