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책 검사
그때는 물자절약이 한창이었지.
앞표지의 거무죽죽한 꼭두부터 뒷표지의 끝에 이르기까지
위아래 공백에 금을 긋고 세로로도 반을 나누어
빽빽하게 우리는 70년대를 메꾸어나갔다.
무엇을 썼느냐 하는 것보다는
한치의 여백도 없이 얼마나 아껴 썼느냐 하는 것이
우리가 받았던 공책 검사였다.
잘 부러지는 연필에 몇번씩 침을 발라 쓰면서도
우리의 땅이 연필심처럼 부러져가는 것을 몰랐었다.
자꾸만 찢어지는 공책을 달래어 숙제하면서도
그 순간 누군가 찢겨지고 있는 현실은 몰랐었다.
그저 빽빽하게 성실하게 메꾸어가는 것뿐이었다.
이제 80년대를 다 보내고 난 어느날 오후
아이들의 공책 검사를 한다.
혹시 다른 소리가 적혀 있지는 않나 검열당하는 시대에
무언가 또렷한 목소리를 지닌 공책 하나 찾으려고 뒤적거린다.
희고 매끄러운 여백 위로는
설명을 한 자도 빠뜨리지 않고 베껴놓은 우등생의 공책과
틀린 것조차 그대로 베껴쓴 들러리 공책들,
그 위에 빨간 별표 파란 별표 수없이 따 내리고
새까맣게 줄을 긋고 외워야만 대학을 가는 이 시대에
풍요에 길들여진 90년대의 첫장을 넘기면서
가장 곤궁한 시절, 내 손이 자꾸만 떨려온다.
─ 나 희 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