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책 검사

 

그때는 물자절약이 한창이었지.

앞표지의 거무죽죽한 꼭두부터 뒷표지의 끝에 이르기까지

위아래 공백에 금을 긋고 세로로도 반을 나누어

빽빽하게 우리는 70년대를 메꾸어나갔다.

 

무엇을 썼느냐 하는 것보다는

한치의 여백도 없이 얼마나 아껴 썼느냐 하는 것이

우리가 받았던 공책 검사였다.

 

잘 부러지는 연필에 몇번씩 침을 발라 쓰면서도

우리의 땅이 연필심처럼 부러져가는 것을 몰랐었다.

자꾸만 찢어지는 공책을 달래어 숙제하면서도

그 순간 누군가 찢겨지고 있는 현실은 몰랐었다.

그저 빽빽하게 성실하게 메꾸어가는 것뿐이었다.

 

이제 80년대를 다 보내고 난 어느날 오후

아이들의 공책 검사를 한다.

혹시 다른 소리가 적혀 있지는 않나 검열당하는 시대에

무언가 또렷한 목소리를 지닌 공책 하나 찾으려고 뒤적거린다.

 

희고 매끄러운 여백 위로는

설명을 한 자도 빠뜨리지 않고 베껴놓은 우등생의 공책과

틀린 것조차 그대로 베껴쓴 들러리 공책들,

 

그 위에 빨간 별표 파란 별표 수없이 따 내리고

새까맣게 줄을 긋고 외워야만 대학을 가는 이 시대에

풍요에 길들여진 90년대의 첫장을 넘기면서

가장 곤궁한 시절, 내 손이 자꾸만 떨려온다.

 

                                                                                                                             ─  나 희 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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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산 2004-10-11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백은 없는지 공책검사,
혼식을 하는지, 도시락 검사,
기생충은 없는지, 대변검사..... 요즘은 멸종한 검사들이네요.

urblue 2004-10-11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도시락 검사는 안 받았네요. ^^
그런데, 요즘은 아무것도 안 하나 보죠? 주변에 애들이 없다보니...

가을산 2004-10-11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시락 검사를 할때요, 쌀밥 싸온 애들이 다른 친구 도시락에서 보리를 빌려서(?)
밥 위에 알알이 박아 놓기도 하는데요,
선생님께서 숟가락을 들고 다니면서 위에만 보리를 얹은 것은 아닌지 밥 속을 뒤집어보기도 했답니다. ^^

urblue 2004-10-11 1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별 걸 다 했네요, 옛날에는. ^^

하얀마녀 2004-10-11 1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번째 연에 마음이 짠해지네요.

우리의 땅이 연필심처럼 부러져가는 것을 몰랐었다
그 순간 누군가 찢겨지고 있는 현실은 몰랐었다.

특히 위 두 절에서요.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