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더 이상 살 수 없다'거나, '죽을 것 같다'거나,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같은 생각을 하는 때가 있기 마련이다.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을 잃었을 때, 사랑에 배신당했을 때, 큰 사건을 겪었을 때 등등. 정신이 아득해지고 온 몸에 힘이 없고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무엇을 해야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순간들.

허나 그런 순간들은 의외로 쉽게 극복된다. 어쨌거나 인간은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야 하는, 육체를 가지고 있으니까 말이다. 아무리 '그 사람없이 내가 어떻게 살아!!' 라고 외쳐도, 대개의 사람들은, 결국 때가 되면 밥을 먹는다. 그리고 일상으로 돌아온다. 피폐해진 영혼을 치료하고 극복하는 데야 다른 노력이나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육신이 일상으로 돌아오는 건 너무나 쉽다.

아들을 잃고, 그 여파로 이혼을 하고, 직업 훈련소에서 아이들에게 목공을 가르치는 남자 올리비에. 그가 가르치는 소년들은 죄를 짓고 사회로부터 격리되었던, 다시 사회로 돌아가고자 노력하는 아이들이다. 그는 그런 아이들과 함께 하면서 나름의 보람을 느낀다고 말한다. 그런 그의 앞에 나타난 건, 5년 전 아들을 살해한 아이 모르간. 열 여섯 소년답지 않게 작고 여려 보이는 그 아이는 소년원에서 5년을 보냈고, 목공을 배우러 왔다. 올리비에는 이 소년에게 어떻게 할까.

영화는 삶을 흉내낸다. 되도록 일상의 모습과 닮아 보이기 위해 애쓰지만, 그렇다고 완전한 현실을 보여주는 건 아니다. 그래서야 극적인 효과를 줄 수 없다. 내가 사는 것과 똑같은 모습이라면, 관객들은 굳이 극장을 찾지 않을게다. 재미와 감동을 주기 위해서는 각색과 과장과 편집이 필요하고, 인물들로부터 적절한 거리를 유지해야 하고, 알맞은 때에 적당한 음악을 깔아주어야 한다. 대부분의 영화는 그렇게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 영화, 이런 모든 것들을 무시한다. 카메라는 올리비에로부터 거리를 두지 않는다. 끊임없이 흔들리는 핸드 헬드의 카메라가 주로 올리비에를 극단적으로 클로즈업하고, 올리비에와 전 부인, 올리비에와 모르간 사이를 왔다갔다하며 롱테이크가 이어지고, 그 안에 담긴 건, 그저 나날이 이어지는 올리비에의 일상 뿐이다. 아이들을 가르치고 밥을 먹고 집에 돌아와 간단한 운동을 하는 올리비에, 모르간에게 자꾸 시선을 주는 올리비에. 음악은 단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오직 얼마 안 되는 대사와 주변의 평이한 소음들 뿐.

그러니까, 영혼을 울리는 감동적인 화해, 따위는 애초에 기대할 수 없다는 거다, 이 영화에서는. 당신이, 당신의 아이를 죽인 사람을 만난다면 어떻게 할까. 그를 해칠까. 울고 소리지르고 발작이라도 일으킬까. 아니면 그를 용서하고 화해하며 아름다운 눈물을 흘릴까. 이 영화는 용서와 화해와 감동이라는 일반적인 영화의 주제를 강요하지 않는다. 그건 영화니까. 사람의 삶은 영화가 아니다. 보통의 사람들은 영화에서처럼 극적인 삶을 살지 않는다. 그저 평범하고 아무것도 없어보이는 일상만이 있을 뿐이다.

평범한 감동을 권하지 않기에 오히려 감동이 되는 영화, 현실을 적당히 흉내내는 게 아니라 진짜 삶을 보여주려고 애쓰는 영화. 가슴이 먹먹하다.

사족 한 가지. 평소에 나는 영화를 보면서 음악을 잘 듣지 못한다. 영화가 끝나고 나면 화면도 대사도 생각이 나는데, 음악만은 전혀 기억을 못한다. 그러니 이 영화를 보면서 음악이 쓰이지 않은 것에 대해 특별한 감흥이 있었던 건 아니다. 다만,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아무 소리가 없다는 것, 극장 안이 침묵으로 가득했다는 것만은 특이했다. 그리고 그건, '단절'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영화 자체는 진짜 삶 같았는데, 역시 허구라는 것, 이제 영화가 끝났으니 당신들은 다시 당신들의 생활로 돌아가라는 메시지, 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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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도 2004-09-06 0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를 보신다더니 이거 보셨나봐요. 전 못본건데 님의 수려한 글을 읽으니 마구 구미가 당깁니다. 갑자기 많은 페이퍼를 올리시니 제가 정신없이 보기는 봤는데 글마다 다 댓글을 달자니 적잖이 망설여지더군요.(제가 스토커인거 들통나기 싫어요!)
근데 극장에 가시는 줄 알았는데요...?
(자빠져 자느라 스토킹을 제대로 못한 어설픈 스토커의 구차한 질문;)

urblue 2004-09-06 0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토커라고 진작에 고백하셔놓고 뭘 또 새삼스럽게... ^^
토요일에 영화보고 들어와서 DVD랑 만화랑 또 보고, 일요일엔 하루 종일 집에서 굴렀답니다. 침대 커버랑 패드랑 싹 빨고 청소하고 한바탕 했지요. (이게 대답 맞는지 좀 헷갈리네...)

로드무비 2004-09-06 1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영화가 있었어요?
요즘 정신이 온통 적립금 5천 원에 팔려가지고설라무네...
저도 감상을 배제한 영화가 좋아요.
그냥 아무렇지도 않은 시선으로 등장인물을 따라가는...
보고싶네요.^^

urblue 2004-09-06 1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금방 끝날거에요. 빨리 보셔요. 하이퍼텍 나다에서 한답니다. 님 댁에서 좀 먼가...

에레혼 2004-09-06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영화를 보셨군요. 저도 갈망하는 영화인데..... 제가 사는 동네에서는 극장용으로 보기 어려울 듯하고, 나중에 디브이디라도 출시되면 구해서 봐야 할 것 같아요.
마지막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의 느낌... 그 자리에 있었던 듯 전해지네요.

유어블루님, 좋은 영화도 보시고, 좋은 리뷰도 쓰시고, 스토커도 있으시고^^, 부러워요!

urblue 2004-09-06 1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라도 안 보면 어디서 삶의 재미를 찾겠어요. ㅠ.ㅠ

어디에도 2004-09-06 1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나다에서 이거 해요? 안 그래도 어제 영화가 보고 싶어서 아니지
극장에 아주 가고 싶어서 뭔 영화들이 있나 한참 뒤적거렸었는데, 이건 못봤네요.
흑. 사실은 전 동네극장만 가요. 제가 좋아하는 씨네큐브, 하이퍼텍나다, 코아아트홀도 못가요. 흑흑. 왜냐고는 묻지 마세요.
제 몫까지 블루님이 영화 많이 보시고 이렇게 글 올려주세요. 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