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인간
왜 아우슈비츠의 생존자가 '인간이라는 수치'에 시달려야 했을까? 수치스러움을 모르는 가해자의 수치까지도 피해자가 고스란히 받아서 시달려야 하는, 이 부조리한 전도가 일어나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그가 '너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교의를 실천하는 고덕(高德)한 성인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유대인은 인간 이하'라는 사상에 희생된 까닭에, 그 사상을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사상으로 대치해야 하는 입장에 있기 때문이다. '독일인'도 물론 '인간'에서 예외는 아니다. 한번 파괴된 '인간'이라는 척도를 재건하려고 하는 한, '인간'이 저지른 죄는 어김없이 그들 자신이 짊어져야 하는 것이다.
(......)
나찌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유럽인이나 아메리카 대륙의 백인 입장에서 보면, 아프리카인, 아메리카 원주민, 아시아인, 오스트레일리아의 애보리저니(Aborigine), 뉴질랜드의 마오리 등 세계 각지의 원주민은 인간 이하인 존재였다. 일본인의 입장에서 보면, 조선인, 중국인, 류우뀨우(琉球) 민족, 아이누 민족, 타이완 원주민, 남양제도의 사람 등이 바로 인간 이하인 존재였다.
이런 사상의 희생자들은 멸시당하고, 굴욕적인 대우를 받고, 들볶이고, 노예로 혹사당하다 못해 아예 살육되었다. 그 각각의 장면에서 그들은 '같은 인간인데 왜?'라고 낮은 목소리로 신음했던 것이다. 근원적인 물음이다. 굴욕이나 고통과 함께 몸 안에 새겨진 이 근원적인 물음이 그들을 움직였고, '같은 인간'이라는 척도를 재건하는 어려운 위치로 그들을 내몰았다.
차별하는 자에게 '같은 인간'이라는 관념은 그냥 단순한 표어 정도로 처리할 수 있는 것이지만, 차별받는 자에게는 자신의 육체나 정신을 지키는 투쟁의 근거이며 무기이기도 하다. 그 때문에 피해자 측은 언제나 가해자를 포함한 새로운 보편성의 틀을 재구축하는 역할을 짊어지게 된다. 그것이 인류의 역사를 관통하는 변증법이다. (181-184쪽)
>> 접힌 부분 펼치기 >>
간혹 서평이나 어떤 글에서 다른 책 혹은 글에 대한 심각한 오독을 발견하고 아연실색할 때가 있다. 호불호라면 이해할 수 있다. 나만 해도 서경식의 글을 썩 좋아하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주제 내지 글을 쓴 의의 자체를 바꿔놓는 걸 보면 당황스러워 할 말을 잃는다. 사람은 자기가 아는 만큼만 보고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해야 할지. 하긴, 그러니까 서경식 같은 사람은 쁘리모 레비를 읽고 이런 책을 쓸 수 있는 거겠지.
책이나 다른 사람의 글을 읽고 함부로 말하지 말아야겠다. 내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적나라하게 드러날 테니. 좀 더 배울 때까지 입 다물고 있어야 할까.
<< 펼친 부분 접기 <<
서경식의 글을 썩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이 책은 인상적이다. 아무튼, 올해가 가기 전 쁘리모 레비의 책을 읽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