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공화국 - 프랑스 지리학자가 본 한국의 아파트
발레리 줄레조 지음, 길혜연 옮김 / 후마니타스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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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약 통장도 적금 통장도, 물려받을 유산도 하나 없는 남자와 여자가 결혼을 했다. 재테크고 부동산이고 관심도 없고 꼭 집을 소유해야 하냐는 생각으로 속 편하게 살아왔지만, 치솟기만 하는 집값과 전월세 대란이라던 지난 가을 당장 이사할 집을 구하지 못해 생난리를 치던 친구를 보면서 앞날이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맞벌이니까 소득이야 도시근로자 가구 평균에 비해 높은 편이라지만 그 외엔 쥐뿔도 없는 이 하층 부부가 집을 가지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주택 청약을 통한 아파트 분양 밖에 없어 보인다. 아파트를 싫어한다는 취향 같은 건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결국 주택 청약 통장과 적금 통장과 펀드 계좌까지 만들었다. 몇 개의 통장을 받아 들고 은행을 나서는 길에 장밋빛 전망이 아니라 우울한 한숨이 들러붙는다.

도쿄로 여행을 갔을 때 남자는 왜 아파트가 눈에 띄지 않는지 궁금해 했다. 물론 일본에도 고급 주상복합 아파트부터 대단지 아파트까지 있다고 한다. 미야베 미유키의 『이유』만 하더라도 고급 아파트와 관련한 사기 및 살인 사건을 다루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한국에서처럼 가는 곳마다, 눈길 닿는 곳마다 아파트단지가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좁고 길쭉한 2층집과 3~4층 규모의 공동주택이 대부분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상식, 땅덩이가 좁은 나라에서 많은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아파트가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상식이 진짜 상식이라면 인구밀도 높기로 유명한 일본이야말로 아파트를 많이 지어야 하지 않을까. 지진 때문일까. 그렇다면 다른 고층 건물들과 아파트들은 어떻게 설명할까?

지난 몇 달간 이런 대화를 나누고 고민을 하던 부부의 눈에 띈 것이 이 책 『아파트 공화국』이다. 프랑스 지리학자가 한국의 아파트에 관해 썼단다. 여기 사는 우리들은 잘 인식하지 못하지만 바깥에서 보기에 한국은 ‘아파트 공화국’이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아파트에 집착하는 이상한 나라인가보다. 

저자는 먼저 한국 아파트 단지 개발의 역사를 보고한다. 1950년대 후반 최초의 아파트가 등장한 이래 60년대까지 서울 시민들의 호응을 얻지 못했던 아파트가 70년대와 80년대의 개발 독재 시대를 거치면서 최고의 재테크 수단으로 자리 잡는 과정이 정리되어 있다. 여기서 주목할 만 한 점은 아파트가 개발 독재와 성장의 결과가 아니라 수단으로 작용했다는 사실이다. 대규모 사업으로 특정 건설업체들에게 막대한 이익을 안겨주었으며, 중·저소득층의 봉급생활자들에게 시세보다 낮은 가격으로 아파트를 분양하여 주택 소유와 자산 소득 증가라는 혜택을 줌으로써 그들을 고도 성장시대 독재체제의 옹호자로 만들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아파트 단지는 ‘중간계급 제조 공장’처럼 보인다.”는 지적이 뼈아프다. 서글프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우리의 현실이다. 대다수 봉급생활자들은 일정 기간 저축으로 목돈을 마련한 후 아파트를 분양 받고 은행대출로 잔금을 메운다. 그리고는 다달이 적지 않은 이자와 원금을 짧게는 몇 년 길게는 십 수 년씩 갚아나간다. 일단 아파트를 분양 받고 나면, 체제 변화는커녕 아파트 값이 떨어지는 작은 변화도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는 구조다.

프랑스와 비교할 때 한국 공공주택 정책의 가장 큰 차이점은 저소득 계층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프랑스에서 국민주택이란 “저소득층이 자신의 수입 안에서 집세를 낼 수 있는 주택”을 의미하고, 공공주택 정책은 “국가가 주택 부문에 관여하여 부의 이전 및 재분배를 도모하려는 것”이다. 반면 한국의 공공주택 정책은 개인적 차원의 소유와 매매를 기본으로 한다. 그리고 “한국인들은 정부 정책에 부응해 주택 구입의 재정적 부담을 받아들였다.” 따라서 “아파트가 가격으로 평가되는 상품이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천정부지로 오르기만 하는 집값을 잡겠다고 정부가 이런저런 대책을 내놓고 있지만, 한편에서는 집값이 떨어지면 경기가 침체되고 어쩌고 하는 내용의 신문 칼럼이 꾸준히 실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파트는 과연 우리에게 유일한 대안일까. 정부가 주장하고 우리 모두가 받아들인 “땅은 좁고 사람은 많기 때문”이라는 설명은 맞지 않다고 한다. 인구밀도가 높은 벨기에나 네덜란드에 대단지 아파트가 거의 없다는 사실, 국내에서도 대단지 아파트의 인구밀도가 오히려 낮다는 사실을 예로 든다. 또 “인구밀도에 대한 수학적 정의(인구/면적의 비례)에 기초한다고 해도, 아파트단지가 가장 조밀한 주거 공간을 제공하지는 않는다는 것이 증명됐”다고 하는데, 그 내용을 자세히 설명해주지 않은 것이 아쉽다. 그럼 우리 정부가 아파트단지 건설에 온 힘을 쏟아 붓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답은 간단하다. “도시에 관한 총체적인 통찰 없이 문제를 단기간에 해결하는 것으로 만족한다면, 아파트단지는 분명 가장 저렴하고 가장 큰 이윤을 남기는 해결책”이기 때문이다. “도시가옥을 소모품으로 취급하는 한국인 대다수의 ‘무심함’”이 정부 정책을 뒷받침하고 있기도 하다.

물론 많은 한국인들이 아파트를 선호한다. 저자가 인터뷰한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아파트를 선호하는 이유로 ‘편리함’과 ‘현대성’을 꼽았다고 한다. 하지만 저자의 눈에 비친 한국 아파트의 모습은 ‘현대적’이고 ‘서구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현대식 아파트에서의 전통 공간의 ‘재구성’」이었다. 저자는 한옥과 아파트의 구조를 비교하면서 아파트 다용도실(혹은 베란다), 욕실 등에서 ‘플라스틱 슬리퍼’로 갈아 신고 움직이는 것이 한옥에서 마당이나 부엌으로 나갈 때 신을 신는 것과 유사하다고 지적한다. 또 식탁이 있는데도 따로 상을 차려서 식사를 하거나 차를 마시는 모습에 주목한다. 즉 한옥의 불편한 점으로 지적되었던 사항이 아파트에서도 완전히 고쳐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실상 한국인들은 실제 아파트의 ‘현대성’보다 “아파트가 갖는 현대성의 이미지”에 현혹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도시의 형태에는 어떤 필연성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도시 형태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는 전적으로 거주민 및 정부의 비전과 정책에 달려 있다. 마지막 장에서 저자는 질문을 던진다. “한국은 어떤 도시 형태와 사회구조를 발전시키기를 원하는가? 그리고 그 기초 위에서 어떤 주택정책과 주거 공간을 만들어가기를 바라는가?” 과연 우리는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는가. 단기간의 저렴한 해결책으로 거주자의 생활과 개성을 무시한 똑 같은 아파트를 양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 속에서 개성과 취향을 찾겠다고 아우성치는 이들을 위해 점점 더 호화롭고 비싼 아파트를 짓고 있는 것은 아닌가.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을 아파트단지 밖으로 몰아낸 채 외면하고 무시하는 것은 아닌가. 저자의 마지막 말을 우리는 곰곰이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이것은 먼 미래가 아니라 바로 코앞에 닥친 문제이니까. 개인적으로는 소유나 재산으로서의 주택이 아니라 가족과 생활을 영위하는 주거 공간으로서의 집 한 칸을 합리적인 수준의 노력으로 장만할 수 있으면 하는 바람이다.

“대단지 아파트는 도처에서 대규모 도시문제뿐 아니라 정치적 초점들을 결집시키며, 여러 형태의 감시체제를 발전시키고 있다. 대단지의 형태는 그 자체로 사회 공간적 차별화를 낳지는 않지만, 적어도 이러한 차별화를 고착시키는 효과를 갖는다. 또한 대단지 아파트는 장기적으로 관리와 유지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들고 필연적으로 그 비용을 더 증대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이는 도시 형태의 견고함을 취약하게 만들어 프랑스에서처럼 쇠락의 길로 접어들거나, 한국에서처럼 일상화된 재개발의 결과를 낳는다. 주택이 유행 상품처럼 취급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별로 깊이 생각하지 않는 문제이지만, 결론적으로 말해 대단지 아파트는 서울을 오래 지속될 수 없는 하루살이 도시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2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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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7-03-06 1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경향신문 1면에 이 논문이 소개되어 페이퍼도 쓰고 보관함에도 넣었지만 ..다른 책에 밀려 아직 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리뷰가 너무 명료하게 정리되어 있어서 다른 분들이 리뷰를 책으로 대신할까 걱정될 정도네요.^^

urblue 2007-03-06 1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팀전님 페이퍼를 보고 이 책을 구입했습니다. 덕분에 재미있고 좋은 책 잘 봤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