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 - 현대성의 형성-문화연구 10
김진송 지음 / 현실문화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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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한국의 근대성에 대한 새로운 탐색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새로움은 어디서 연유하는 것일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이 연구가 주로 탐색하는 시대로 1930년대를 택했다는 점에서 나오는 것일 게다. 일반적으로 상상되는 한국, 혹은 조선의 1930년대는 암흑의 시대가 아니었던가?

우리는 '국사'를 배우면서 대략 1905년부터 조선이 식민지화됨으로써 우리 역사에 그늘이 드리워지기 시작했음을 느꼈고, 1910년부터 시작된 '일제 36년'에 대해서는 무단통치, 문화통치, 병참기지화정책 등으로 대강의 시대구분이 된다는 것을 배웠을 뿐이다. 그리고 각각의 시대는 그에 걸맞는, 서로 명도만 다른 어떤 무채색으로 채색되어지는 인상을 받았다. 그러다가 1945년 갑자기 조선반도에 찬란한 빛이 다시 비추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런데 왜 이 책은 한국의 근대성을 새로이 탐색하면서 1930년대를 다루는 걸까. 우리는 식민지 시대와 '근대'에 대한 식민지 근대화론과 수탈론 사이의 논쟁을 기억한다. 사실 이 논쟁은 각각의 논자가 근대라는 개념을 어떻게 규정하느냐 여하에 따라 그 입론이 판이해질 수밖에 없었으며 따라서 좀처럼 논쟁으로 성립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특히 식민지 근대화론은 식민 잔재가 아직도 청산되지 않았다고 여겨지는 이 땅의 '정서상' 정당화될 수 없고 수용될 수 없는 측면이 '분명'하게 존재했으며, 수탈론에서는 국민'국가'가 부재한 근대적 제요소의 발전은 '진정한' 근대가 될 수 없다고 못박았다. 그럼 얼토당토 않은 1930년대를 들여다보면서 한국의 근대를 이야기하는 이 책은 그렇다면, 또 한 번 수탈론자들을 열받게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이들은 다시 새로운 '~론자'들을 질타하고 반성시켜 순국선열을 모독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말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식민지 근대화 논쟁을 다소 스테레오 타입화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책은 그러한 논쟁의 문제설정에서 벗어나 있다. 즉, 이 연구에서는 '근대'가 선험적인 당위로, 지향해야 할 목표로, 각 품목을 정확히 채워넣어야 할 종합선물세트로 설정되어 있지 않다. 통속적으로 남발되는 말을 굳이 또 한 번 쓰자면, 이 책은 우리 현대사를 '있는 그대로' 보고자 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우리는 우리 역사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을까. 이건 복잡한 인식론적, 현상학적 개념들을 끌어들이는 문제인가? 그렇지만은 않다.

간단한 변명이 가능하다. 일단 역사학의 방법론을 따르는 연구라는 점에서, 이 책에서 주목할 점은, 새로운 사료를 사용함으로써 우리가 기존에 견지했던 시선으로는 포착되지 않았던 역사의 층위, 당대 사회의 결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새로이 동원되는 사료는 기존의 정치사회사나 경제사에서 사용했던 사상사적 저작이나 주요한 정치적 사건에 대한 관편 보고, 경제 통계수치가 아니라, 식민지 시대에 발행된 문예대중잡지이다.

사료의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근대를 설명하는 관점에 있어서도 '있는 그대로'라는 밑도끝도 없는 말에 대한 변명이 가능하다. 이 책은 '근대'를 우리가 사는 바로 이 시점과 동질적인 무엇으로 본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삶을 살아가는 모습, 우리가 가진 심성 등이 지금같은 모양이 된 게 언제쯤이냐를 찾아 역사를 다시 살펴보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의 탐구를 위해서 가장 적절한 사료는 그야말로 기존 역사학을 위해 '가공'되지 않은, 그대로 노출된 모습의 당시의 신문과 잡지였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놀라울 정도로 지금 우리가 사는 모습과 비슷한 시대를 발견한 것이 바로 1930년대였다.

광복 후 지난 5,60년의 현대사를 점철한 숱한 사건들을 겪어오며, 이제는 한참이나 멀어져 낯설기 그지 없는 식민지 암흑시대 1930년대에서, 우리는 근대적 인간으로서의 '나'를 만나는 것이다. 마치 우리가 지금 그러는 것처럼 '근대'를 당위적 목표로 설정한 인간들이, 식민지라는 모순적인 질곡의 상황에서 고뇌하며 꿈틀거리는 모습을, 그 누더기같지만 따뜻한 시선으로 보지 않을 수 없는 우리 자신을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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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인류학의 역사
가바리노 / 일조각 / 199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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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머윈 가바리노라는 미국 여성 인류학자가 쓴 책이다. 원제는 Sociocultural Theory in Anthropology: A Short History로, 직역하면 '인류학에서의 사회문화이론: 간략한 역사' 정도가 될 것이다. 이 책의 장점은 말마따가 설명의 간결성에 있다. 다루는 범위는 15,6세기 지리상의 발견에서부터 계몽주의 시대, 제국주의 시대, 그리고 현대(1970년대 전반까지)의 인류학까지 자못 광범하면서도, 꼭 짚어야 할 사건, 이론적 흐름, 학자 등을 핵심적으로, 또 깔끔하게 짚어 주는 매력이 있다.

또 '인류학'이라는 독립적인 분과제도 안에서의 역사만 다룬 것이 아니라 인류학 이론의 형성에 영향을 미친 사회사상의 조류를 설명하고 있는 것도 좋은 점이다. 어느 정도 사회과학, 서구현대지성사 등에 익숙하나 인류학에 대해서는 그다지 지식이 없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문화인류학 개론서로 활용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분량도 150여 페이지 정도밖에 안된다.

하나 불만이 있다면 번역에 대한 것이다. 물론 이해하기에는 전혀 무리가 없는 좋은 번역이지만, 독자에 대한 지나친 배려 때문인지 불필요한 역주가 과잉되어 있다는 느낌을 준다. 왜 하나의 영어 단어가 여려가지 방식으로 번역될 수 있다는 것을 번역이론서가 아닌 문화인류학 교과서에 실어야 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또 번역을 함에 있어서 굳이 한자를 노출시킬 필요가 있는가? 인류학을 공부하는 학부생들을 위해서 이 책을 번역했다고 한다면 가독성도 배려를 해 줘야 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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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수수께끼 - 마빈 해리스 문화 인류학 3부작
마빈 해리스 지음, 박종렬 옮김 / 한길사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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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빈 해리스는 일견 비합리하고 광신적인 것으로 보이는 관습이 나름의 존재 이유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그 사회의 토지, 노동력, 기술 등의 경제적 조건과 생태적 토대 등의 조건에 의해 엄격히 제한받는 문화적 산물임을 해명하고 있다. 그는 이런 현상을 기술함에 있어, 일면적인 현상에만 주목하지 않는다. 그의 설명이 궁극적으로는 그 사회가 처한 경제적 조건과 생태적 균형론으로 귀착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조금은 풍부한 느낌이 떨어지기는 한다. 그러나 그의 문화 관습에 대한 입론은 다른 인류학적 해석들도 그 가치를 무시할 수 없는 탄탄한 이론적 기반을 갖추고 있다.

예를 들어, 포틀라치는 그 자체로 경제적 소비 행위임과 동시에, 그 소비가 과시적임으로써 위신을 얻고 자신의 위치를 공고화할 수 있는 정치적 기제의 역할을 한다. 그리고 포틀라치를 주고받는 하나의 커다란 공동체를 상정함으로써 집단간의 교역이라는 측면에서도 해석하는 여지를 남기는 것이다. 인류학은 문화 현상을 두고 한가지 측면만을 살피지 않는다. 거기에는 정치·경제·생태, 그리고 성의 문제까지 다양한 측면들이 고려되어야만 하나의 문화 현상을 그 사회의 전체적인 체계 속에서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해리스의 문화와 수수께끼는 이러한 인류학적 접근의 전범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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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시골의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
프란츠 카프카 지음, 전영애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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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은 독자들에게 많은 숙제를 남기고 있다. 왜 하필이면 『변신』의 형태로 그러한 메시지를 전달해야 했는가? 왜 하필이면 벌레냐? 그리고 그레고르가 죽고 나서, 교외로 이사하는 잠자 씨 가족들이 행복해 보이는 이유는 또 뭔가? 그레고르가 벌레로 되지 않고, 그저 불치의 병에 걸렸다고 해도 - 그래서 아무 일도 못하고 앓아 누웠기만 해도 - 과연 그의 가족들은 그를 그토록 혐오했을까? 카프카가 생각하는 가족은 즉자태이지만, 가족이라는 것은 엄연히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가족은 어떻게 해서, 어떤 원리로 굴러가게 되는가. - 어찌 보면 이것이 카프카의 문제의식일 수도 있다.

조금 조악하지만 이런 해석을 해본다. 카프카가 그레고르를 불치병에 걸리게 하지 않고 '벌레'로 변신을 하게 한 것은, '혐오스러움'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왜, 가족을 위해 자기 한 몸 아끼지 않고 외판원 일을 하며 혼자서 가계를 책임지는 그레고르가 혐오스러운 존재인가? 원래 한 집단 안에서 자기 혼자 모든 일을 떠맡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칭찬받고 갸륵하게 여겨지지만, 동시에 같은 사람들로부터 질시와 배척도 받기 쉽다. 그레고르도 그의 가족 안에서 그런 존재가 아니었을까? 가족들은 그에게 고마워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를 '혐오'하기도 한 게 아닐까.

그레고르는 변신하기 이전에 집안의 실질적인 가장이었으며 '부의식' 자체였다. (그레테를 음악학교에 보내려고 벼르는 그를 떠올려 보자) 그가 벌레로 변신한 것은, 그에 대한 가족들의 무의식적 반발과 혐오가 반영된 것. 너무 무리한 해석인지도 모르겠다. 허나, 그레고르의 변신에서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그의 가족들에게 어떤 위기의식을 갖게 해 주었다.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는 날, 전차를 타고 교외로 나가는 잠자 씨 가족들은 미래에 대한 희망에 가슴이 부풀어 있다. 그레고르가 집안의 모든 것을 떠맡았을 때와는 다르다. 이제 그들은 각자 자신의 직업을 갖고 있었고 - 전혀 무능한 존재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 그들 각자가 가족이라는 공동체의 기둥이 되어 있다. 그리고 이 가족은 그레고르 때의 가족보다는 훨씬 안정되고 평온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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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전목마의 데드 히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 창해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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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무엇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실험정신이 돋보이는 책이다. 아니, 어떻게 보면 이것은 실험정신이 아닐 수도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사람들이 자기에게 이야기해 준, 자신들만의 특별한 혹은 평범한 사연들을 거의 그대로 옮겨 적었다. 그 뿐만 아니라 그 이야기를 건네 들은 그 상황까지도 옮겨 적었다. 그래서 마치 작가 자신의 일기장을 보는 느낌마저 든다. 작가가 언제 어디에 가서 누구를 만났으며, 그 누구와의 관계는 어떠하며, 그 사람은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었으며 하는 것들 말이다.

상당히 인상깊었던 점은 여기 등장하는, 특별한 사연을 가진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자신들의 사연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욕망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렇게 주위의 사람들이 자신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자신의 내면 속에 앙금처럼 쌓일 뿐, 그것을 글로 쓴다고 해서 그 행위를 통해 바깥으로 배출되거나 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분명 특권이다. 사람들은 무라카미가 소설을 쓰기 때문에, 소설을 쓰는 데 혹시라도 자신의 사연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자기 이야기를 들려준다. 거기에는 일상적 대화 속에서는 차마 드러나지 않았던, 삶의 온갖 기괴한 이야기들, 관음증, 욕망, 자기성찰, 자기발견이 이야기된다. 특별한 사연의 주인공들은 이러한 사연들을 자기 삶의 한 부분으로서 간직하고 있지만, 미쳐 그것의 의미를 규정하고 있지는 못하다. 그래서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싶어하는가 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들의 특별한 사연에 대해, 그렇게 성급하게 의미를 부여해서, 작품 속에 맥락화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그야말로, 글쓰기 행위를 통해 '배출'하는 것이 될지 모르나, 무언지 모를 공허함이 남을 것만 같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소설로 써낸 자신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그 사연의 주인공들은, 그 의미는 여전히 달무리에 싸여 어렴풋이 있지만, 그 애매한 만큼의 미감을, 그리고 위안을 얻을 것 같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삶이 이렇다' 하고 자못 냉정한듯 말하지만, 우리가 거기에서 삶을 바라보는 어떤 따뜻한 시선을 얻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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