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별짓기>가 다시 나왔다는 말을 듣고 반가운 마음에 서점에 가서 책을 찾아 상권 238쪽과 239쪽에 걸쳐 있는 도표를 펼쳐봤는데, 실망스럽게도 오른쪽 가운데 끝에 있는 문화자본과 경제자본의 거꾸로 된 '+'와 '-'가 수정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있었다. 이 책이 새물결에서 처음 번역되어 나온 것은 1995년이고, 한동안 품절되었다가 10년이 지난 작년 2005년 말에 같은 번역서의 2쇄가 나왔다. 학술서적이 재출간되는 것은 어지간한 책이 아니고서는 쉽게 오지 않는 기회이므로 이참에 기존의 번역본이 갖고 있었던 오류들을 수정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출판사와 역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바뀐 건 서체와 페이지 수 뿐.

최근에 어찌어찌 공짜 책이 생겨 찬찬히 읽어보는데, 마침 Richard Nice의 영역본도 있어 함께 읽어 보니 실제로 번역에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영역본도 불어 원본이 아니므로 역자의 개입이 있었을 거란 점을 참작해도, 한국어 번역본은 너무 문장이 어색한 것이 많고 명백히 오역인 부분이 드물지 않게 눈에 들어온다. 사실 이 책의 부제부터 '사회적 판단력 비판(critique sociale de jugement)'으로 직역하지 않고,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이라고 번역한 것도 해명을 요구해야 하는 부분인 것 같지만.. 어쨌든, 시간이 되는 대로 문제있다고 여겨지는 부분을 적어둘까 한다.

 

 

 

 

 

 

89쪽 중간 부분: [...] 이 ‘미학’이 사소한 것의 이미지나 혹은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같은 이야기가 되지만, 이미지의 시시함만을 거부하는 것은 전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판단은 이미지의 대상과 관련하여 결코 대상의 자율성이라는 이미지를 제공하지 않는다.

⇒ 이 ‘미학’이, 사소한 것의 이미지나―혹은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같은 이야기가 되지만― 이미지의 시시함을 거부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은 전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판단은 그 ‘대상의 이미지’에 ‘이미지의 대상’과 관련된 자율성을 부여하지 않는다.


109쪽 끝부분: 모든 순수한 미학적 반응과 함께

⇒ 모든 순수한 윤리적 반응과 함께 

[명백한 오역이다.]

 

116쪽 중간 부분: 미적 성향을 규정하고 있는 세계와 중성적 관계를 맺으려면 잠재적으로는 부르주아적 자기투입의 자세가 요구하는 진지함의 정신을 전복해야 한다.

⇒ 미적 성향을 규정하고 있는 세계와의 중성적 관계는 잠재적으로는 부르주아적 자기투입의 자세가 요구하는 진지함의 정신을 전복해야 한다.

["미적 성향을 규정하고 있는"이라는 어구가 "세계와의 중성적 관계"라는 어구 전체를 수식해야 한다.]

 

117쪽 첫문단: [...] 하지만 문화자본은 풍부하지만 경제자본은 빈약한 특정집단에 특유한 성향이나 이해관심과의 관계를 간파하지 못하는 한 예술가들이나 심미주의자들은 계속 정통성을 요구하기 때문에 서로 상대화하는 여러 취미들이 끊임없이 유희를 하는 과정에서 자신들도 모르게 일종의 절대적인 참조사항을 제공하게 된다.

⇒ 하지만 문화자본은 풍부하지만 경제자본은 빈약한 특정집단에 특유한 성향이나 이해관심과의 관계가 인식되지 못하는 한, 예술가들이나 심미주의자들이 계속해서 요구하는 정통성때문에, 서로 상대화하는 여러 취미들이 끊임없이 유희를 하는 과정에서, 그들은[예술가들이나 심미주의자] 자신들도 모르게 일종의 절대적인 참조사항을 제공하게 된다.


119쪽 표 이곳저곳: 적을 물리고 있는 어머니

⇒ 젖을 물리고 있는 어머니

[교열담당자의 부주의인 듯]


120쪽 중간 부분: [...] 이상화된 비전vision의 형태로 구분된 인접성

⇒ 이상화된 비전vision의 형태로 거리있는 인접성(distant proximity)


132쪽 3번째 줄: [...] 이 조기교육은 문화는 ‘포장술’에 불과하다는 이데올로기가 주장하듯이 동시적으로 주입되는 경향이 있는 언어나 문화와의 관계 양상에서만큼 그 효과가 그리 심원하거나 지속적이지는 않다.

⇒ 이 조기교육은 문화는 ‘포장술’에 불과하다는 이데올로기가 주장하듯이 그 결과의 깊이와 지속성에서라기보다, 동시에 그것이 주입하려는 경향이 있는 언어와 문화와의 관계양상의 측면에서 그러하다.


155쪽 4번째 줄: 획득양식의 효과는 가구, 의복, 요리처럼 일상생활에서 진행되는 통상적인 선택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이것들이 옛날부터의 뿌리깊은 성향을 특히 분명하게 드러내 주는 이유는 교육체계가 개입할 수 있는 장의 바깥에 놓여 있는 이것들이 실제로 노골적인 취향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취향에서는 주간여성지나 ‘이상적인 가정’을 단골 주제로 다루는 잡지처럼 [...]

⇒ 획득양식의 효과는 가구, 의복, 요리처럼 일상생활에서 진행되는 통상적인 선택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이것들이 옛날부터의 뿌리깊은 성향을 특히 분명하게 드러내 주는 이유는 교육체계가 개입할 수 있는 장의 바깥에 놓여 있는 이것들이 실제로 적나라한 취향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통상적인 선택에서는 주간여성지나 ‘이상적인 가정’을 단골 주제로 다루는 잡지처럼 [...]


155쪽 하단 87번 각주 중간 부분: [...] 특히 부분적으로 약호화된 지식으로서 실제적으로 기능하는 분류 ‘감각’의 변형(시대, 장르, 양식을 구분하는 문학사 서술 방식을 생각해 보라)은 선택받지 못하고 남겨진 사람들에게는 ‘상속화’ 감각에 몸을 맡기는 비율을 감소시켜 주는 기능을 한다. 그리고 이와 함께 경제적-문화적 유산에 따른 차이도 감소시킨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이러한 차이가 다른 곳에서는 그대로 지속되며, 이러한 장소에서 차별화를 위한 투쟁이 전개되는 경우 이러한 차이가 아주 강력하게 나타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오히려 실제로는 항상 이러한 경향으로 나아간다.

⇒ 특히 부분적으로 약호화된 지식으로서 실제적으로 기능하는 분류 ‘감각’의 변형(시대, 장르, 양식을 구분하는 문학사 서술 방식을 생각해 보라)은, 적어도 과잉선별된 사람들[over-selected; sursélection, 127쪽 참조]에게는 ‘상속화’ 감각에 내맡겨진 것의 무게를 덜어주는 기능을 한다. 따라서 경제적-문화적 유산에 따른 차이도 감소시킨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이러한 차이가 다른 곳에서는 그대로 지속되며, 이러한 장소에서 구별짓기를 위한 투쟁의 논리가 이러한 영역으로 스스로의 현실적 이해관계를 작동시키자마자, 이러한 차이가 그 온전한 힘을 회복한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오히려 실제로는 항상 이러한 경향으로 나아간다.

[over-selected는 "선택받지 못하고 남겨진 사람들"이 아니라 127쪽에 나온 것처럼 고등사범학교나 그랑제꼴을 나온 최고학력 소지자들을 말한다. 겨우 30쪽 전에 같은 단어가 나왔는데 똑같은 단어를 정반대의 의미로 번역을 했다는 것은 무슨 곡절일까..]

 

157쪽 하단 88번 각주 중간 부분: [...] 신흥 쁘띠 부르주아지는 독창적이고 이국적인 요리나 즉석요리를 내놓는다.

⇒ “이국적인 요리나”를 삭제


168쪽 첫 번째 문단: 가족과 학교가 기능하는 장소의 특징은 특정한 시간에 필요한 능력이 스스로 사용됨으로써 비로소 그러한 능력이 형성되고 그리고 이와 동시에 가치가 결정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 가족과 학교는 특정한 시간에 필요한 능력이 그 자체의 관례에 따라 형성되고 이와 동시에 그 능력의 가치가 결정되는 장소로서 기능한다.


169쪽 중간 부분: 다시 말해 ‘투자’라는 개념은 경제적 투자(흔히 이 의미는 오인되지만 객관적으로는 이미 그렇게 사용되고 있다)와 심리, 더 정확하게는 일루시오, 신념, 휩쓸림involvement 또는 게임을 생산하는 게임에의 참여 속에서 진행되는 감정적 투자감각이라는 이중적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 다시 말해 ‘투자’라는 개념은 경제적 투자(흔히 이 의미는 오인되지만 객관적으로는 이미 그렇게 사용되고 있다)와 정신분석학에서의 정서적 투자라는 이중적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정서적 투자란 더 정확하게는 게임을 생산해 내는 게임에 대한 환상, 믿음, 몰입을 의미하는 것이다.


171쪽 마지막 부분: [...] 초등학교 교사나 중등학교 교사들처럼 학력자본의 대부분을 학교 교육체계에서 끌어오는 사람들의 경우

⇒ 초등학교 교사나 중등학교 교사들처럼 문화자본의 대부분을 학교 교육체계에서 끌어오는 사람들의 경우

[명백한 오역]

 

172쪽 6번째 줄: [...] ‘중간수준’의 예술은 문화자본을 학력자본으로 전환하는 데 완벽하게 성공했거나 정통적인 방식으로(즉 어릴 적부터 익숙해짐으로써) 정통 문화를 획득하지 못했기 때문에 주관적으로나 객관적으로나 두 면에서 모두 정통 문화와 불편한 관계를 갖고 있는 사람들의 투자를 유도하는 경향이 있다.

⇒ ‘중간수준’의 예술은 문화자본을 학력자본으로 전환하는 데 완벽하게 성공한 사람들이나, 정통적인 방식으로(즉 어릴 적부터 익숙해짐으로써) 정통 문화를 획득하지 못했기 때문에 주관적으로나 객관적으로나 두 면에서 모두 정통 문화와 불편한 관계를 갖고 있는 사람들의 투자를 유도하는 경향이 있다.


172쪽 중간 부분: [...] 이러한 문화를 획득함으로써 문화자본의 측면에서는 최고의 보상을 보장받는 동시에 감히 정통성과 이윤의 위계가 이미 확립되어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에게는 피난처와 복수의 수단을 제공하게 된다.

⇒ 이러한 문화를 획득함으로써, 정통성과 이윤의 기성의 위계에 도전하는 것으로 면목을 세우는 한편, 문화자본의 측면에서는 최고의 보상을 보장받는 사람들에게는 피난처와 복수의 수단을 제공하게 된다.


172쪽 중간 부분: [...] 학력자본보다는 학교에서 익히게 되는 교양과 학교 교육체계와의 전체적인 관계에 의해 결정되며, 역으로 이 교육체계가 소유하고 있는 문화자본이 오직 학교 교육체계 안에서 획득되고 공인되는 자본만으로 구성되는 비율에 따라 크게 달라지게 된다.

⇒ 학력자본보다는 학교에서 익히게 되는 교양과 학교 교육체계와의 전체적인 관계에 의해 결정되며, 그런 전체적 관계는 이 교육체계가 소유하고 있는 문화자본이 오직 학교 교육체계 안에서 획득되고 공인되는 자본만으로 구성되는 정도에 따라 크게 달라지게 된다.


173쪽 중간 부분: 즉 학교라는 장은 학교에서 공인된 문화자본과 학교교육을 전범으로 삼는 생활양식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려고 하는 반면, ‘사교’ 살롱과 만찬회 그리고 인격 전체가 시험되는 직업생활상의 여러 기회(채용면접, 중역회의, 토론회 등), 또는 학교생활(예를 들어 ENA나 씨앙스 뽀의 구술시험) 등 자유교양을 중시하는 시장들은 문화와의 친근한 관계에 가장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학교에서 획득한 흔적이 있는 모든 성향과 능력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려 한다는 것은 쉽게 예측할 수 있다.

⇒ 즉 학교라는 장은 학교에서 공인된 문화자본과 학교교육을 전범으로 삼는 생활양식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려고 하는 반면, ‘사교’ 살롱과 만찬회 그리고 인격 전체가 시험되는 직업적 생활(채용면접, 중역회의, 토론회 등)이나 학문적 생활(예를 들어 ENA나 씨앙스 뽀의 구술시험)에서의 여러 기회 등, 학교 바깥의 가치관에 지배되는 시장들은 문화와의 친근한 관계에 가장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학교에서 획득한 흔적이 있는 모든 성향과 능력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려 한다는 것은 쉽게 예측할 수 있다.

[애매할 수 있지만, 사교 살롱과 만찬회 등에 드나드는 사람은 학교에서 공인된 문화자본을 무시하므로 "academic life"를 "학교생활"로 번역하면 안된다. "학문적 생활"도 그닥 만족스러운 번역어는 아니지만..]

 

176쪽 6번째 줄: 이를 통해 볼 때 엄밀한 의미의 능력의 소유여부를 ‘정확하게 답’하려는 감각보다 중시하는 분파들(중등학교 교사들과 고등교육기관의 교수들)이 있는가 하면,

⇒ 이를 통해 볼 때 엄밀한 의미의 능력이 ‘올바른 답’을 택할 수 있는 감각보다 나은 분파들(중등학교 교사들과 고등교육기관의 교수들)이 있는가 하면,


178쪽 맨 위 두 줄: 삭제. 바로 아래 두 줄과 중복.


178쪽 6번째 줄부터: 순수한 지식을 시험해 보면 파리의 초등학교 교사들(지방의 소규모 초등학교 교사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소경영자들, 지방의 의사 또는 파리의 골동품상들은, 언제나 학교를 통한 취득방식에 따라 다니는 신중함이나 조심스러운, 절도에 대한 의식과 같은 요소보다는 오히려 자신감과 후각, 더욱이 지식을 덮어서 감추기 위한 허세 등을 요구하는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들보다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열등함을 알 수 있다.

⇒ 순수한 지식을 시험해 보면 파리의 초등학교 교사들이나 지방의 소규모 초등학교 교사들은 소경영자들, 지방의 의사 또는 파리의 골동품상들을 앞지를 테지만, 언제나 학교를 통한 취득방식에 따라 다니는 신중함이나 조심스러운 절도에 대한 의식과 같은 요소보다는, 오히려 자신감과 후각, 더욱이 지식을 덮어서 감추기 위한 허세 등을 요구하는 모든 상황에서는 그들[소경영자들, 지방의 의사 또는 파리의 골동품상]보다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열등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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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문과 수업의 기말 시험에 “프루스트의 《읽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나타나는 의식의 흐름에 관한 기법에 대하여 논하라”는 문제가 나온다. 그러나 학생들은 “프루스트의 《읽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나타나는 의식의 흐름은 제쳐놓고, 보들레르의 《악의 꽃》에서의 ‘악’의 개념에 대해 논한다면…”하고, 제시된 문제를 무시하고 자기가 준비해 온 답안을 작성한다. 수업에 참석하지 않아도 시험은 볼 수 있고, 자기가 자기 나름의 문제를 정하고 거기에 대한 답을 써도 성적이 나왔다. 게다가 시간이 중복되는 수업을 여러 개 수강신청해도 무방했다. 어느 누구는 한 학기에 그런 식으로 50개, 100학점의 수업을 들었다. 1960년대 도쿄대의 모습이 이랬었다. 강단에 선 교수님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우리나라의 대학도 60년대, 70년대, 혹은 80년대까지는 별반 다를바 없었던 것 같다. 한 학기에 수업을 고작 한 번 하는 수업이 드물지 않았다. 어느 유명한 시인 교수는 학기가 시작된 지 한 달이나 지나서 처음 강의실에 들어와서는, 물끄러미 창밖을 보더니, “오늘은 날씨가 좋군요. 오늘 수업은 이만 마치겠습니다”라고 하고는 유유히 강의실을 나섰다 한다.

    도대체 이런 분위기에서 대학을 다닌 선배들을 무엇을 배웠을까? 공부라는 게 가능하긴 했을까? 그러나 다치바나 타카시를 비롯, ‘그 시절’에 대학을 다니던 사람들은 교수의 강의를 들으면서가 아니라 홀로 책을 찾아 읽고 떠오르는 문제에 골몰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독서회와 토론회를 만들어서 공부했다고 자신들의 대학시대를 회상한다. 오늘날의 대학에서는 좀처럼 상상할 수 없는 이런 자유로운 분위기는, 비록 그것이 적극적인 자유의 쟁취 혹은 부여로써 달성된 것이라기보다는 부족한 규율과 미비한 제도의 부산물로 주어진 것이었을지는 몰라도, 그 시절의 대학을 진정한 지혜를 갈구하는 리케이온이게 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오늘날의 대학에서 어떤 교수가 수업에 한 번도 들어오지 않는 학생에게 학점을 주겠으며, 어떤 학생이 학점에 목을 매지 않을 수 있겠는가.

    1960년대에서 도쿄대 불문과를 다녔던 다치바나 타카시의 글에서 아쉽게 느껴지고, 또 일견 모순된 것처럼 보이는 것은 바로 이런 점에서다. 그는 한편으로는 대학의 학생들을 가두어 두기보다는 방목했고, 그러한 자유가 풍부한 교양을 배양했고 또 그것이 예찬되었던 60-70년대라는 시기를 동경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현재 일본 대학생들의 교양 없음을 질책하며 그들에게 교양을 길러줘야 한다면서, 그의 대학 시절과는 대조되는 너무나도 세세한 처방들을 내놓고 있는 것이다. 그가 모든 대학 신입생에게 필수 강의로서 수강시켜야 한다고 하는, 현실 세계의 전체적인 모습이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를 해설하는 ‘세계 개론’ 같은 수업은 과연 제대로 구성될 수 있을까? 그런 필수 교양의 범위와 항목에 대한 합의가 가능할 것이며, 그것을 수업을 통해서 가르침으로써 대학 신입생들의 일반적 교양 수준이 높아질 것인가에 대해서, 나는 그다지 긍정적인 기대를 갖기 어렵다. 그는 세계를 완벽히 재현한 지도, 지식의 빈틈없는 목록표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이 아닌가. 요약하는 자들은 지식과 사랑을 모두 망쳐놓는 자들이라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말처럼, 목록화되고 압축된 지식은 어떤 영감도 전해주지 못하는 그야말로 메마른 나열에 불과하기 십상이다. 프랑스 계몽주의자들의 백과전서처럼, 그것이 기존에 통용되던 지식의 지도를 송두리째 뒤엎는 다른 지도를 내놓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가 말하는 교양의 부족, 학력의 저하가 초래된 배경에 대해 보다 거시적인 조망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든다. 일본이나 한국의 교육당국이 최근 십수년 사이에 교과과목을 줄이고 교육 수준을 낮춘 것은 그저 너그러운 마음에서 우러나온 조치만은 아닐 것이다. 너희 부모 세대들이 견뎌냈던 것을 너희들은 왜 견뎌내지 못하느냐고 아이들을 탓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그 아이들은 부모 세대와는 성장한 시기가 다르고, 학교 공부라는 것이 스스로의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의미 또한 다를 것이다. 이제 많은 이들에게 학교 공부라는 것은 효용이 의심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지는데, 이런 아이들에게 강요되는 학교 공부는 부모 세대들이 느꼈던 것보다 더욱 의뭉스럽고 또 가혹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런 청소년들 사이에서 불거지는 문제들을 방치할 수 없었기에, 그리고 그들을 일단은 제도권 안으로 붙잡아 두어야 할 필요성에서 학습 수준 완화와 같은 조치는 불가피했다. 대학의 분위기가 달라진 것도 마찬가지로 사회변동의 맥락을 따져봐야 한다. 60년대 대학의 자유와 90년대 이래 대학의 규율은 거시적으로 보면 대학의 의지에 의한 변화가 아닐 수도 있다. 그 시절, 적어도 ‘상실의 시대’ 이전까지는, 삶을 송두리째 가져다 바쳐도 아깝지 않은 어떤 집단적 대의가 있었고, 또 그 경계 바로 바깥에는 고도성장이 산출해 내는 평생직장이라는 것이 있었다. 당시의 명문대학생들이 누리던 특권적 자유는 그런 조건에서 비로소 가능하지 않았을까?

 * 追記

다치바나의 이 책에서는 그가 갖고 있는 도쿄대에 대한 애증, 법학부에 대한 우월감과 열등의식(그는 비록 인정하지 않을진 몰라도)과 같은 양가적 감정이 묘하게 배어나온다. 그렇지 않다면 제목을 '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로 정한 것이나, '도쿄대학 법학부 졸업생은 교양이 없다' 같은 장은 다소 센세이셔널한 것인데, 특히 이미 1995년에 도쿄대학 교양학부의 교수들이 거의 총동원되어 '기초연습' 과목의 부교재로 만든 지(知)시리즈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도 하고 있지 않은 점이 그렇다. 이 지시리즈가 자신이 구상하는 세계개론에 가장 가까운, 혹은 그 이상의 훌륭한 성과물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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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서점을 쏘다니다 보면 의외의 책을 발견할 때가 있다. 그런 의외의 책들 중 한 부류는, 잘 알려진 인류학자들의 저작인데 설마 그것이 한국어로 번역되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책들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런 책들은 대개가 인류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 번역되었다는 것이다. 그것 무슨 의미일까? 국내의 인류학자들은 그런 책들이 번역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데(혹은 시간이 없거나, 번역 자체에 별로 관심이 없을 수도 있다), 다른 사람들은 번역할 만 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러나 걔중에는 인류학의 고전이라 할 만한 책도 있다. 어쨌든, 다분히 주관적인 분류이긴 하지만, 여기에서는 그렇게 국내에 나와 있는 의외의 인류학 서적들을 모아보기로 한다.

 

 

 

 

 

 

 

 

 

사회인류학의 이해, 에반스 프리차드, 최석영 역, 서경문화사, 1996

원시사회의 구조와 기능, 래드클리프 브라운, 김용환 역, 종로서적, 1975.

누어인, E. E. 에반스 프리차드, 탐구당, 1988

원시신화론, 말리노프스키, 민속원, 1996

 

 

 

 

 

 

 

 

 

 

 

 

 

 

 

 

 

 

 

 

 

 

 

 

 

 

 

 

 

인류학과 문화비평, 조지 마커스 외, 유철인 역, 아카넷, 2005.

 

 

 

 

 

 

 

 

 

 

 

 

 

 

 

 

 

 

 

 

제의에서 연극으로, 빅터 터너, 이기우&김익두 역, 현대미학사, 1996.

자본주의와 가족제공동체: 여성, 곡창, 자본, 클로드 메이야수, 김봉률 역, 까치,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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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6-02-22 0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좋은 책들 많네요.
잭 구디 책이 다 번역되어 있고 ...

한현 2006-02-23 0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저도 발견하고 좀 놀랬는데.. 지금 빌려서 앞부분을 좀 봤는데 왜 번역했는지 모르겠어요..ㅎㅎ 원서가 발간되자마자 그 해에 번역했던데..

비로그인 2006-04-17 0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류학과에서는 (대학원은 당연하고) 어떤 대학들은 학부때부터 원서를 읽으니 번역의 필요성을 못느끼죠. 인류학의 문화이론도 원서 복사한거로 수업하다가 학생들의 요청으로 뒤늦게 번역된 책입니다.

포월 2006-11-01 0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이 특정학과에서 원서로 '소비'하기 때문에 할 필요가 없는 것은 아니겠죠.^^

적린 2007-02-24 1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정말 의외의 책들이 눈에 띄네요. ^^

루나 2011-03-29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슬픈 칼라하리나 문화와 진리(레나토 로살도) 등도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