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강대국 흥망사 1500-1990
찰스 P. 킨들버거 지음, 주경철 옮김 / 까치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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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 피렌체, 제노바, 밀라노, 포르투갈, 에스파냐. 브리에, 앤트워프,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 독일, 미국, 일본.

책 표지를 덮고 있는 도시와 국가들의 이름이다. 이들 도시와 국가들의 공통점은 한때 유럽 혹은 세계 경제에서 선두에 섰거나 선두를 바짝 쫓았다는 것이다. 광기, 패닉, 붕괴, 금융위기의 역사로 유명한 찰스 P. 킨들버거가 쓴 경제강대국 흥망사는 근세 이탈리아 도시국가에서 현대 일본에 이르기까지의 경제사를 선두의 연쇄적 변화라는 키워드로 개괄한다.

 

이 책 바로 앞에 읽은 책이 자본주의 역사 강의(저자 백승욱)였다. 이를 상당히 흥미롭게 읽고 근대세계의 경제사에 대한 관심이 크게 일어 경제강대국 흥망사를 찾아 읽었다. 그런데 묘하게도 두 책의 내용이 겹쳐 보인다.

 

자본주의 역사 강의에서 가장 재밌게 본 부분이 지오반니 아리기의 헤게모니 이론이었다. 아리기에 따르면 자본주의 역사에는 각 시기마다 서로 다른 헤게모니 국가가 있어왔다. 헤게모니라는 말은 통상 권력과 권위 같은 단어들과 어울리는데, 반면에 아리기는 헤게모니를 경제패권과 비슷한 의미로 사용한다. 즉 헤게모니 국가는 당대 세계경제의 중심 중의 중심으로서 세계적 규모의 자본축적을 주도한다. 그리고 헤게모니는 이탈리아 도시국가에서 시작하여 네덜란드와 영국을 거쳐 현재의 미국에 이르렀고, 이러한 헤게모니 이행이 자본주의의 역사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읽고 기발하다고 생각했다. 아리기는 헤게모니 이행을 체계적 축적순환이라는 개념과 연결한다. 한 시대의 헤게모니는 이전 시대를 뛰어넘는 축적양식을 토대로 삼는다. 그러나 어느 축적양식도 실물적 팽창의 단계를 지나면 금융적 팽창으로 전환하며 쇠퇴라는 필연적인 순환으로 접어들고 만다. 이와 함께 지난 헤게모니는 물러나고 새로운 헤게모니가 떠오른다. 이러한 이론이 자본주의의 역사를 훌륭하게 요약해준다고 느꼈다.

 

그런데 킨들버거의 경제 강대국 흥망사를 읽으면서 아리기의 아이디어가 그렇게 독창적인 건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아리기의 헤게모니체계적 축적순환에 대응하는 킨들버거의 개념은 선두국가주기이다. 킨들버거는 세계경제의 선두에 섰던 지역과 국가들의 차례를 목차로 삼아 각 장마다 그 곳의 성장과 쇠퇴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아리기가 금융적 팽창에서 헤게모니 쇠퇴를 보듯이 킨들버거도 교역에서 산업, 금융의 국면을 통과하며 쇠약해진다고 지적한다. 그런데 이런 개념들도 온전히 킨들버거만의 것이 아닌 게, 관련 논의와 연구자들이 책의 곳곳에서 언급된다. 내가 기발하다고 느낀 부분이 경제사 분야에서는 상당히 상식적인 내용이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진짜 흥미를 가지고 탐구할 과제는 흥망성쇠라는 사실과 그 과정이 아니라 그 변화들 속의 역사의 동력일 것이다. 이 역사의 동력에 대해 킨들버거는 다소 모호하게 말하는 듯 하는데, 이는 성급한 도식화를 피하고 여러 생각할 점들을 다양하게 펼쳐 보여주는 서술방식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책을 단숨에 돌파하기는 어려웠다. 책의 역자인 주경철도 후기에 다음과 같이 적어놓았다.

 

이 책의 단점은 너무 많은 내용을 축약시켜 놓았다는 점이다. 한 문장이 사실 한 권의 중요한 저서의 핵심 내용인 경우가 많다. 이런 문장들이 계속되기 때문에 경쾌하게 읽어나가며 내용을 파악하는 것이 힘들다.”

 

거꾸로 이는 이 책의 장점이기도 하다. 근대세계의 경제사에 대한 입문과 길잡이로 이만한 게 없다는 말로도 들린다. 그래서 앞으로도 계속 옆에 두고 펼쳐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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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역사 강의
백승욱 지음 / 그린비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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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간된 지 10년이 넘은 2019년에 처음 읽었다. 읽는 내내 흥미로웠고 그만큼 금세 읽었다. 브로델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가 총 여섯 권이고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은 한 권이지만 상당한 두께이다. 월러스틴의 근대세계체제는 네 권이고, 아리기의 장기 20세기와 실버의 노동의 힘은 각각 한 권씩이다. 이 모든 책들의 요지를 백승욱 교수 강의 한 권으로 파악할 있다는 건 흔히 말해 엄청나게 남는 장사이다. 왜 진작 읽지 않았을까? 저 대가들의 사상과 세계체계론에 관심이 있다면 입문서로 최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다른 입문서는 아직 읽어본 적이 없지만...

 

그런데 백승욱 교수 전달의 신뢰성에 대해 조금 의심이 들게 하는 부분이 있다. 바로 로버트 브레너에 대한 비판적 언급인데 그 내용이 내가 아는 바와 틀리다.

 

157브레너의 주장은 돕보다 더 돕적인 논지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브레너의 핵심 테제는 계급투쟁론인데, 봉건제에 도전하는 계급투쟁이 성공한 곳에서 자본주의가 출현했다는 이야기죠. 그것이 바로 영국입니다. 가령 동유럽은 계급이 미약했고 계급투쟁에서 부르주아지가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본주의에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이죠.”

 

이 구절에서 봉건제에 대한 부르주아지의 도전이 성공한 곳에서 자본주의가 출현했다는 식으로 브레너를 요약하는데, 이는 브레너 이론에 대한 완전히 잘못된 압축이다. 브레너는 1974년에 발표한 전산업시대 유럽의 농업계급구조와 경제발전에서 봉건제 해체라는 충격이 동유럽과 프랑스, 영국에서 각각의 상이한 사회적 권력관계를 경유하며 서로 다른 결과를 낳았다고 주장한다. 농노의 힘이 가장 약했던 동유럽에서는 재판농노제로 퇴보했고, 프랑스에서는 농민이 토지 보유에 대한 권리를 확보하여 20세기까지도 소토지 경작의 비중이 매우 높은 국가로 나아갔다. 즉 농업에서 자본주의 발전이 소토지 보유농에 가로 막힌 것이다. (페리 앤더슨은 이점에 착안하여 프랑스 절대주의가 토지귀족들이 국가를 경유하여 농민에 대한 착취를 회복하려 한 체제라는 주장을 내세웠다.) 반면에 영국에서는 16세기부터 이른바 농업자본주의가 발전하는데 이는 농노의 신분에서는 벗어났으나 토지 보유에 대한 권리까지는 확보하지 못했던 영국 농민의 상태에서 비롯한 결과였다. 인클로저 운동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영국 토지귀족은 자신의 영지에서 성공적으로 농민을 축출할 수 있었고, 상업적인 차지농업가에게 임대하였다. 자본주의 방식으로 경작되는 대토지가 16세기 이후 영국 농촌의 모습이 된다. 이처럼 브레너는 자신의 이론에서 부르주아지를 전면에 내세우지도, (그런데 후속 저작인 상인과 혁명에서는 다른 맥락에서 영국 혁명 시기 상인의 역할을 집중 검토한다.) 피지배계급의 성공이 자본주의를 출현시켰다고도 말하지 않았다. (절반에 그친 성공이 자본주의로 이어졌고, 완전한 성공은 반대로 자본주의의 발목을 잡아챘다.) 그 다음 오류를 보자.

 

368아리기는 현시기 체계적 축적순환의 변화를 설명할 때 정치사회적 측면을 무시하면 20세기의 특징을 제대로 포착할 수 없다고 봅니다. 그것은 아리기가 브레너의 붐 앤 버블을 비판하는 핵심논지이기도 하죠. )브레너는 모든 것을 과잉설비의 문제로 돌려서 설명하는데, 아리기는 이런 주장이 금융화를 제대로 포착하지 못하고, 또 정치사회적 문제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라고 비판한다.”

 

이 구절 또한 제2차 브레너 논쟁에 대해 익숙한 독자라면 고개를 기우뚱하게 할 비판이라는 걸 알 것이다. 브레너는 1998년에 혼돈의 기원을 발표했는데, 여기서 현대 선진 자본주의가 겪고 있는 1970년대 이후 장기하강(성장률 저하)에 관하여 도발적인 주장을 하였고,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내에 제2차 브레너 논쟁을 촉발시켰다. 이 논쟁을 반영하여 2001년에 붐 앤 버블을 출간하며, ‘혼돈의 기원에서 누락되었던 금융혼란에 대한 내용을 다루었고, 미국의 신경제가 새로운 장기호황으로 나아갈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미국, 일본, 독일에서의 제조업이 이윤율 저하의 덫에 걸려 있고, 실물경제에 의존하는 금융시장이 제조업에서의 이윤율 저하를 반전시킬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제조업이 이윤율 저하에 직면한 이유는 무엇인가? 일본과 독일이 전후 복구와 고도성장에 성공하면서 세계시장에서 미국과 일본, 독일 간의 경쟁이 격화되었고, 이러한 경쟁압력에 인플레이션만큼 제품가격을 올리지 못하여 이윤이 침식되는 상황에 놓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조업은 점차 자본집약화 되고 있는데 거대 플랜트로 전화된 고정자본은 매몰비용이므로, 유동자본 대비 적절한 이윤을 기대할 수 있다면 자본은 계속 그 산업에 머물 것이다. 이러한 선택이 결국 제조업에서 기존 총자본 대비 이윤율을 낮추게 된다. 여기에 더하여 브레너는 자본철수로 인한 실업의 발생, 자국 경제력 약화 등을 우려하는 정부에 의해서도 과잉설비가 유지되는 경향이 있으며, 1990년대 이후 미국만의 회복이 플라자합의 등을 통해 일본과 독일에게 경쟁의 부담을 전가시킨 국제정치의 산물이라고 분석한다. 즉 아리기를 빌려 백승욱 교수가 말하는 것처럼 브레너의 논의가 모든 것을 과잉설비의 문제로돌리지도 정치사회적 문제를 전혀 고려하지 않다는 건 정당한 비판이 아니다.

 

그런데 책에서 잠시 스쳐가는 언급에 너그럽지 않고 예민한 건 아닌가라고 반문할 수 있겠다. 하지만 브레너가 1970년대 자본주의 이행에 관하여, 그리고 2000년대 현대 자본주의 장기침체에 관하여 무시하지 못할 국제적 논쟁을 불러일으킨 학자라는 점에서 브레너에 대한 무지나 다름없는 희화화가 책을 쓰는 정당한 태도인가 싶다. 이쯤 되면 책의 다른 부분에도 오류가 숨어있지 않나 의심되는 건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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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극화에 대한 치유없는 환상 : 재벌개혁

 

 

재벌개혁론과 민주노총, 그리고 새사연

 

오늘 822일과 23일에 민주노총 정책대의원대회가 개최된다. 각 사업장과 지역, 산별에서의 현장토론을 거쳐 정책대의원대회에서 민주노총의 새로운 20을 만들어갈 조직혁신전략안을 채택하겠다고 한다. 이를 위해 민주노총 중앙은 현장토론자료를 만들어 배포했는데, 전략투쟁 및 조직강화, 조직확대, 정치전략 방안이 담겨있다. 이글에서는 이중 전략투쟁 방안에서의 재벌체제 극복에 대한 민주노총 중앙의 담론을 비판한다.

 

토론자료에서는 재벌체제 극복의 방향으로 전략산업에 대한 공공 개입구조 확보 및 재벌 통제 강화, 세습 타파, 사내유보금 환수와 함께 재벌개혁 정책 실현을 나란히 제시하고 있는데, 다른 요구와 달리 재벌개혁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내용을 나열하고 있다. 이 내용은 2012년에 민주노총과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이 함께 개최한 재벌체제 개혁과 경제민주화,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라는 토론회 발제문에서 그대로 빌려온 것이다. 당시 토론회 발제문의 작성자는 김병권 새사연 부원장이었다.

 

재벌개혁의 문제의식과 본질

 

발제문에서 김병권은 재벌개혁을 경제력 집중과 독과점을 강력히 규제”(이하 따옴표 안은 발제문에서 인용)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여기에는 재벌이 막강한 경제 권력으로 등장하여 이익을 독식하고 중소기업을 포함한 여타 경제주체들의 생존환경을 파괴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적절히 규제하고 통제할 수 있는 장치가 없다는 문제의식이 깔려있다. 그리고 출자총액제 확대, 계열분리 명령제, 재벌세 신설 등의 정책적 대안을 제시하는데, 이런 대안의 본질은 재벌을 부인하는게 아니라 무차별하게 국민경제를 독식하려는 재벌체제에 대해 일정한 규제의 틀을 씌우자는 것이다.

 

모두 기억하다시피 2012년은 대선이 있었던 해이고, 박근혜 대통령의 경제민주화공약에 국민들이 낚시질을 당했었다. 현재 경제민주화 약속은 완전 휴지조각이 됐고, 새누리당이 깔아놓은 멍석 위에서 함께 춤을 추던 자칭 민주진보세력은 어떤 진전된 논의도 이끌지 못하고 있다. 왜 경제민주화 담론이 말짱 도루묵이 됐는지 성찰은 없이 함께 헛들떠 떠들던 이야기를 새로운 20을 준비하는데 호출한 건 직무태만이다.

 

환상으로의 투항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되고나서 서둘러 경제민주화를 망각한 건 그것이 한국경제의 정상적인 작동과 마찰을 일으킨다는 점을 누군가가 올바로 일깨워준 이유도 있을 것 같다. 한국경제를 국민경제균형의 틀로 바라보아서는 그 성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한국경제는 한 마디로 세계시장을 상대로 재벌이 지휘하는 생산체제이고, 이 생산체제는 글로벌 경쟁을 이겨내기 위해 이 땅과 그 위의 사람과 사회를 모두 씹어 삼키고 있으며, 또 그래야만 증식해나갈 수 있다. 대기업에게 자원(우수인력, 자금, 사업기회 등) 몰아주기, 쥐어짜내기 좋은 하청구조, 언제든 갈아치울 수 있는 비정규직, 노동운동 봉쇄, 해외진출 목돈 마련 또는 해외손실 보전에 편리한 국내시장 등 이런 것들은 재벌체제가 원할하게 성장하기 위해 필요하고도 정상적인 풍경이다. 이제까지 한국경제가 남달리 성장해온 방법이고, 이러한 양극화·불균형은 재벌체제의 자연스런 일부이다. 그런데 양극화 없는 재벌체제? 균형 잡힌 동반성장? 이는 칼로리 없는 음식에 대한 욕망과도 같다.

 

진리는 전체다. 양극화를 극단으로 밀어붙이고 있는 재벌체제는 한국자본주의의 성장논리가 도달한 현재 모습이며, 재벌과 양극화는 동일한 실체의 양면이다. 따라서 규제되고 개혁된 재벌, 그래서 양극화 없는 재벌체제에 대한 요구는 환상으로의 투항이다. 재벌개혁이 아니라 재벌해체이고, 사회화와 노동자통제가 해체의 방법이 되어야 한다. 새로운 사회운영원리에 대한 상상력이 지난 30년간 민주노조운동의 정신이고, “생산의 주역이며 사회개혁과 역사발전의 주체라는 민주노총의 선언을 실현하는 길이다. 자본에 대항할 수 있는 새로운 20은 자본주의 극복과 노동해방의 사상으로 무장한 노동자들이 많아짐으로써만 실제로 가능하다. 그러나 재벌개혁론은 민주노총 조합원들의 계급의식 발전을 가로막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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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위한 양적완화인가?

 

 

한국판 양적완화의 출현

 

세계경제를 쓸어버릴 것 같았던 2008년 금융위기를 저지했던 건 미국 연준(FRB)의 양적완화였다. 연준은 달러 발권력을 동원하여 악성채권을 제한 없이 사들이는 방법으로 금융기관들의 파산을 막아주었다. 그간 중앙은행의 역할은 기준금리를 정하거나 정부의 재정적자를 지탱하기 위해 국채를 매입하는 것이었는데, 이처럼 중앙은행이 직접 금융상품을 사들인 건 초유의 사태가 만들어낸 비전통적인행동이었다.

 

2016년 한국, 조선 해운 구조조정이 이슈가 되자 한국판 양적완화가 해법의 하나로 거론되고 있다. 지난 4.13 총선에서 새누리당은 양적완화를 공약으로 내걸었는데, 한국은행이 산업은행 채권과 주택담보부 채권을 인수할 수 있게 하여 기업과 가계부채의 구조조정을 돕는다는 정책이었다. 총선에서 패배한 새누리당에게서 바톤을 이어받은 건 박근혜 대통령이었다. 426일 박 대통령은 언론에 한국판 양적완화라는 말을 처음 꺼냈다. 이에 안철수 당대표가 박근혜 대통령이 양적완화가 뭔지 모를 것 같은데요?”라고 이죽거리자 대통령의 다른 말실수처럼 해프닝으로 끝날 것 같았다. 하지만 조선 해운 구조조정 실탄을 한국은행 발권력으로 마련한다는 구상으로 청와대가 한은을 압박하면서, 양적완화는 현실적인 문제가 되고 있다.

 

박근혜 정부의 속셈

 

정부가 말하는 한국판 양적완화가 원판과 다른 점은 심각한 경기후퇴를 막기 위한 무제한적 화폐공급이 아닌, 구조조정이 긴요한 부문에 대한 제한적 수혈이이라는 것이다. 이때문에 전문가들은 구제금융이라고 부르면 될 것을 양적완화라고 이름 붙여 불필요한 논란을 낳고 있다고 비판한다. 정부가 굳이 양적완화라고 표현하는 건 구제금융 자금을 정부가 부담했던 이전의 방식과는 달리 한은이 직접 국책은행의 자본을 확충해주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정부로서는 자금을 확보하기 위한 추경예산을 편성(국회의 동의가 필요하다)하지 않아도 되고, 향후 구조조정의 성패에 대한 책임도 한은과 나눌 수 있어 일석이조이다.

 

하지만 앞으로의 걸림돌이 만만치 않다. 정부의 계획에는 한국은행법 개정이 필요한데 꼼수에 야당이 호락호락 동의해줄 것 같지 않다. 또한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침해한다는 비판도 있다. 정부의 정책목표에 따라 이리저리 발권력을 동원하는 게 예사가 되면, 화폐가치의 안전성 유지를 위해 독립성을 보장받은 한국은행의 위상이 추락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은 2008년 이후로 경제의 패러다임이 변동하는 상황에서 보수적인 입장이다. 보다 진보적인 입장에서는 손실의 사회화에 대해 비판한다. 화폐가치 하락이라는 전국민적 출혈로 이어질 수 있는데도 재벌이 저질러놓은 손실을 메워주겠다는 친기업적 발상이 문제라는 것이다.

 

민중을 위한 양적완화

 

양적완화와 관련한 논쟁에서 기발한 참고점이 있다. 바로 영국 노동당 당수인 제레미 코빈이 주창하고 있는 민중을 위한 양적완화이다. 코빈은 민간 금융기관의 채권을 사들이는 방식의 미국과 EU의 양적완화가 실물경제 투자로 이어지지 않는 점을 비판하며, 대규모 공공투자에 직접 화폐를 공급하는 방식의 양적완화를 주장한다. 양적완화라는 경제현실을 인정하되, 이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말하는 셈이다.

 

중앙은행이 자신의 발권력을 동원하여 시장에 직접 개입하는 양적완화는 그간 경제시스템에서 일종의 금기였지만, 전통적인 경제조절기제인 재정정책과 통화정책이 한계 즉, 국가부채 폭증과 제로금리에 도달해서도 경제를 살려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최후의 수단으로 호출되었다. 뉴딜정책 이후로 정부지출 없는 자본주의가 가능하지 않게 된 것처럼 앞으로는 양적완화 없는 자본주의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바야흐로 자본주의의 새로운 국면이다. 복지 확대와 긴축 사이에서 벌어진 계급투쟁이 앞으로는 양적완화로 누구를 위하고 무엇을 할지를 놓고 새롭게 벌어질 것이다. 자본주의의 비가역적 변화와 민주적 통제라는 관점 하에서 우리도 민중을 위한 양적완화를 공세적으로 제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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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구 재획정과 구닥다리 정치

 

 

  새누리당과 더불어민주당은 지난 123일에 20대 총선 선거구 획정에 대한 원칙을 합의했다. 국회의원 정수를 300명으로 유지하면서 지역구 의원수를 현재보다 7명 많은 253명으로 늘리는 대신 비례대표 의원수를 47명으로 줄이기로 했다.

  지역구의 총수와 각 지역구 경계를 바꾸는 선거구 획정은 199615대 총선 때부터 반복해온 문제이다. 이는 각 지역구간 인구수의 현격한 차이에 대해 헌법재판소가 여러 차례 위헌결정을 내려왔기 때문이다. 국회의원 한 명씩을 선출하는 선거구들 중 어떤 곳은 수 십만 명에 이르는데 반해 어떤 곳은 몇 만 명에 불과해 선거구마다 한 표의 무게가 너무나 달랐던 것이다. 이에 헌재는 선거구간 최대 인구편차를 1995년에는 41, 2001년에는 31, 2014년에는 21로 낮추라고 판결해왔다. 인구에 비례해 선거구를 획정해야 한다는 원칙을 그동안 정치권이 방치해온 탓에 헌재의 결정은 타당했다.

  하지만 여야는 지역구 의원수를 늘리는 꼼수를 야합하며 헌법정신을 언제나 그렇듯 다시 조롱하고 있다.

 

지역주의 온존과 반-정치개혁

 

  지역구를 늘리는 데 여야가 모두 공감한 건 그들이 함께 누리는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함이다.

  헌재 기준대로 선거구간 인구편차를 21로 낮추기 위해서는 인구수가 적은 선거구들끼리를 통합하거나 인구수가 많은 선거구를 쪼개야한다. 그런데 인구수가 많은 선거구들을 나눌수록 최대 인구수가 내려가므로 인구수가 적은 선거구들을 유지할 수 있다. 다만 선거구 총수는 늘어날 수밖에 없다. 지금 여야가 택한 방법이 바로 이러하다.

  이처럼 여야가 인구수가 적은 선거구들의 통합을 피하는 것은 대개 농어촌에 위치하는 이들 선거구들이 자신들의 탄탄한 텃밭이기 때문이다. 이들 농어촌 선거구들이 노회한 국회의원들의 안방이거나 특정 정당 공천만 받으면 누가 나와도 당선된다는 곳들이 많으니, 통폐합해 그 수를 줄여 제 살을 깎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결국 그놈의 지역주의를 우려먹기 위함이다.

  또다른 문제는 지역구 의원수를 늘리려고 비례대표 의원수를 줄인 점이다. 현재와 같은 소선거구제 하에서는 다수 이외의 표심은 민의로 반영이 되지 않을 뿐더러, 사표심리를 야기해 새 정치세력의 진출을 가로막기 때문에 정치개혁의 첫 번째 과제로 꼽혀온 게 비례대표 증가이다. 그런데 선거구 재획정을 틈타 오히려 비례대표를 줄이는 반-개혁을 여야가 함께 단행한 것이다.

 

같은 뿌리의 여와 야

 

  지역주의 온존, 정치퇴행에 여야가 이해를 같이 하는 건 새누리당이나 더불어민주당이나 동일한 지배질서의 두 양상에 불과하다는 증거이다. 지역주의가 온존하는 소선거구제 하에서 선거운동보다 중요한 게 공천이고, 공천과정에서는 당원은 들러리이고 공천권을 장악한 계파 수장이 좌지우지한다. 그리고 계파 수장들은 재벌 및 언론과 결탁하여 제 조직을 관리하고, 이런 계파들이 이합집산하며 정당 행세를 한다. 안철수 신당 역시 이런 구태의 반복에 불과하다. 이러니 국회가 민심보다 몇몇 보스들의 눈치를 살피는데 열심이고, 우두머리들은 과반의 표를 만들어내기 위한 편가르기와 선동, 정치공학에 몰두한다. 몇몇 정치인과 재벌, 언론이 국민 위에 군림하며, 그 토대가 지역주의와 소선거구제인 셈이다.

  결국 여야가 공히 자신들이 기생하는 토대를 더 굳건히 하는데 이번 선거구 재획정을 이용한 게 한바탕 소동의 본질이다. 새누리당이나 더불어민주당이나 구닥다리 지배질서를 유지하고 강화하는 데에는 한 마음이다. 여와 야의 작은 차이를 과장하며 정권 교체를 위한 비판적 지지니 야권 연대니 하는 게 얼마나 우스운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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