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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강대국 흥망사 1500-1990
찰스 P. 킨들버거 지음, 주경철 옮김 / 까치 / 2004년 12월
평점 :
베네치아, 피렌체, 제노바, 밀라노, 포르투갈, 에스파냐. 브리에, 앤트워프,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 독일, 미국, 일본.
책 표지를 덮고 있는 도시와 국가들의 이름이다. 이들 도시와 국가들의 공통점은 한때 유럽 혹은 세계 경제에서 선두에 섰거나 선두를 바짝 쫓았다는 것이다. 「광기, 패닉, 붕괴, 금융위기의 역사」로 유명한 찰스 P. 킨들버거가 쓴 「경제강대국 흥망사」는 근세 이탈리아 도시국가에서 현대 일본에 이르기까지의 경제사를 ‘선두의 연쇄적 변화’라는 키워드로 개괄한다.
이 책 바로 앞에 읽은 책이 「자본주의 역사 강의」(저자 백승욱)였다. 이를 상당히 흥미롭게 읽고 근대세계의 경제사에 대한 관심이 크게 일어 「경제강대국 흥망사」를 찾아 읽었다. 그런데 묘하게도 두 책의 내용이 겹쳐 보인다.
「자본주의 역사 강의」에서 가장 재밌게 본 부분이 지오반니 아리기의 헤게모니 이론이었다. 아리기에 따르면 자본주의 역사에는 각 시기마다 서로 다른 헤게모니 국가가 있어왔다. 헤게모니라는 말은 통상 권력과 권위 같은 단어들과 어울리는데, 반면에 아리기는 헤게모니를 경제패권과 비슷한 의미로 사용한다. 즉 헤게모니 국가는 당대 세계경제의 중심 중의 중심으로서 세계적 규모의 자본축적을 주도한다. 그리고 헤게모니는 이탈리아 도시국가에서 시작하여 네덜란드와 영국을 거쳐 현재의 미국에 이르렀고, 이러한 헤게모니 이행이 자본주의의 역사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읽고 기발하다고 생각했다. 아리기는 헤게모니 이행을 ‘체계적 축적순환’이라는 개념과 연결한다. 한 시대의 헤게모니는 이전 시대를 뛰어넘는 축적양식을 토대로 삼는다. 그러나 어느 축적양식도 실물적 팽창의 단계를 지나면 금융적 팽창으로 전환하며 쇠퇴라는 필연적인 순환으로 접어들고 만다. 이와 함께 지난 헤게모니는 물러나고 새로운 헤게모니가 떠오른다. 이러한 이론이 자본주의의 역사를 훌륭하게 요약해준다고 느꼈다.
그런데 킨들버거의 「경제 강대국 흥망사」를 읽으면서 아리기의 아이디어가 그렇게 독창적인 건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아리기의 ‘헤게모니’와 ‘체계적 축적순환’에 대응하는 킨들버거의 개념은 ‘선두’와 ‘국가주기’이다. 킨들버거는 세계경제의 선두에 섰던 지역과 국가들의 차례를 목차로 삼아 각 장마다 그 곳의 성장과 쇠퇴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아리기가 금융적 팽창에서 헤게모니 쇠퇴를 보듯이 킨들버거도 교역에서 산업, 금융의 국면을 통과하며 쇠약해진다고 지적한다. 그런데 이런 개념들도 온전히 킨들버거만의 것이 아닌 게, 관련 논의와 연구자들이 책의 곳곳에서 언급된다. 내가 기발하다고 느낀 부분이 경제사 분야에서는 상당히 상식적인 내용이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진짜 흥미를 가지고 탐구할 과제는 흥망성쇠라는 사실과 그 과정이 아니라 그 변화들 속의 역사의 동력일 것이다. 이 역사의 동력에 대해 킨들버거는 다소 모호하게 말하는 듯 하는데, 이는 성급한 도식화를 피하고 여러 생각할 점들을 다양하게 펼쳐 보여주는 서술방식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책을 단숨에 돌파하기는 어려웠다. 책의 역자인 주경철도 후기에 다음과 같이 적어놓았다.
“이 책의 단점은 너무 많은 내용을 축약시켜 놓았다는 점이다. 한 문장이 사실 한 권의 중요한 저서의 핵심 내용인 경우가 많다. 이런 문장들이 계속되기 때문에 경쾌하게 읽어나가며 내용을 파악하는 것이 힘들다.”
거꾸로 이는 이 책의 장점이기도 하다. 근대세계의 경제사에 대한 입문과 길잡이로 이만한 게 없다는 말로도 들린다. 그래서 앞으로도 계속 옆에 두고 펼쳐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