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위한 양적완화인가?

 

 

한국판 양적완화의 출현

 

세계경제를 쓸어버릴 것 같았던 2008년 금융위기를 저지했던 건 미국 연준(FRB)의 양적완화였다. 연준은 달러 발권력을 동원하여 악성채권을 제한 없이 사들이는 방법으로 금융기관들의 파산을 막아주었다. 그간 중앙은행의 역할은 기준금리를 정하거나 정부의 재정적자를 지탱하기 위해 국채를 매입하는 것이었는데, 이처럼 중앙은행이 직접 금융상품을 사들인 건 초유의 사태가 만들어낸 비전통적인행동이었다.

 

2016년 한국, 조선 해운 구조조정이 이슈가 되자 한국판 양적완화가 해법의 하나로 거론되고 있다. 지난 4.13 총선에서 새누리당은 양적완화를 공약으로 내걸었는데, 한국은행이 산업은행 채권과 주택담보부 채권을 인수할 수 있게 하여 기업과 가계부채의 구조조정을 돕는다는 정책이었다. 총선에서 패배한 새누리당에게서 바톤을 이어받은 건 박근혜 대통령이었다. 426일 박 대통령은 언론에 한국판 양적완화라는 말을 처음 꺼냈다. 이에 안철수 당대표가 박근혜 대통령이 양적완화가 뭔지 모를 것 같은데요?”라고 이죽거리자 대통령의 다른 말실수처럼 해프닝으로 끝날 것 같았다. 하지만 조선 해운 구조조정 실탄을 한국은행 발권력으로 마련한다는 구상으로 청와대가 한은을 압박하면서, 양적완화는 현실적인 문제가 되고 있다.

 

박근혜 정부의 속셈

 

정부가 말하는 한국판 양적완화가 원판과 다른 점은 심각한 경기후퇴를 막기 위한 무제한적 화폐공급이 아닌, 구조조정이 긴요한 부문에 대한 제한적 수혈이이라는 것이다. 이때문에 전문가들은 구제금융이라고 부르면 될 것을 양적완화라고 이름 붙여 불필요한 논란을 낳고 있다고 비판한다. 정부가 굳이 양적완화라고 표현하는 건 구제금융 자금을 정부가 부담했던 이전의 방식과는 달리 한은이 직접 국책은행의 자본을 확충해주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정부로서는 자금을 확보하기 위한 추경예산을 편성(국회의 동의가 필요하다)하지 않아도 되고, 향후 구조조정의 성패에 대한 책임도 한은과 나눌 수 있어 일석이조이다.

 

하지만 앞으로의 걸림돌이 만만치 않다. 정부의 계획에는 한국은행법 개정이 필요한데 꼼수에 야당이 호락호락 동의해줄 것 같지 않다. 또한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침해한다는 비판도 있다. 정부의 정책목표에 따라 이리저리 발권력을 동원하는 게 예사가 되면, 화폐가치의 안전성 유지를 위해 독립성을 보장받은 한국은행의 위상이 추락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은 2008년 이후로 경제의 패러다임이 변동하는 상황에서 보수적인 입장이다. 보다 진보적인 입장에서는 손실의 사회화에 대해 비판한다. 화폐가치 하락이라는 전국민적 출혈로 이어질 수 있는데도 재벌이 저질러놓은 손실을 메워주겠다는 친기업적 발상이 문제라는 것이다.

 

민중을 위한 양적완화

 

양적완화와 관련한 논쟁에서 기발한 참고점이 있다. 바로 영국 노동당 당수인 제레미 코빈이 주창하고 있는 민중을 위한 양적완화이다. 코빈은 민간 금융기관의 채권을 사들이는 방식의 미국과 EU의 양적완화가 실물경제 투자로 이어지지 않는 점을 비판하며, 대규모 공공투자에 직접 화폐를 공급하는 방식의 양적완화를 주장한다. 양적완화라는 경제현실을 인정하되, 이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말하는 셈이다.

 

중앙은행이 자신의 발권력을 동원하여 시장에 직접 개입하는 양적완화는 그간 경제시스템에서 일종의 금기였지만, 전통적인 경제조절기제인 재정정책과 통화정책이 한계 즉, 국가부채 폭증과 제로금리에 도달해서도 경제를 살려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최후의 수단으로 호출되었다. 뉴딜정책 이후로 정부지출 없는 자본주의가 가능하지 않게 된 것처럼 앞으로는 양적완화 없는 자본주의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바야흐로 자본주의의 새로운 국면이다. 복지 확대와 긴축 사이에서 벌어진 계급투쟁이 앞으로는 양적완화로 누구를 위하고 무엇을 할지를 놓고 새롭게 벌어질 것이다. 자본주의의 비가역적 변화와 민주적 통제라는 관점 하에서 우리도 민중을 위한 양적완화를 공세적으로 제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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