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극화에 대한 치유없는 환상 : 재벌개혁
재벌개혁론과 민주노총, 그리고 새사연
오늘 8월 22일과 23일에 민주노총 정책대의원대회가 개최된다. 각 사업장과 지역, 산별에서의 현장토론을 거쳐 정책대의원대회에서 “민주노총의 새로운 20년”을 만들어갈 조직혁신전략안을 채택하겠다고 한다. 이를 위해 민주노총 중앙은 현장토론자료를 만들어 배포했는데, 전략투쟁 및 조직강화, 조직확대, 정치전략 방안이 담겨있다. 이글에서는 이중 전략투쟁 방안에서의 “재벌체제 극복”에 대한 민주노총 중앙의 담론을 비판한다.
토론자료에서는 재벌체제 극복의 방향으로 전략산업에 대한 공공 개입구조 확보 및 재벌 통제 강화, 세습 타파, 사내유보금 환수와 함께 “재벌개혁 정책 실현”을 나란히 제시하고 있는데, 다른 요구와 달리 재벌개혁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내용을 나열하고 있다. 이 내용은 2012년에 민주노총과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이 함께 개최한 「재벌체제 개혁과 경제민주화,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라는 토론회 발제문에서 그대로 빌려온 것이다. 당시 토론회 발제문의 작성자는 김병권 새사연 부원장이었다.
재벌개혁의 문제의식과 본질
발제문에서 김병권은 재벌개혁을 “경제력 집중과 독과점을 강력히 규제”(이하 따옴표 안은 발제문에서 인용)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여기에는 재벌이 “막강한 경제 권력으로 등장하여 이익을 독식하고 중소기업을 포함한 여타 경제주체들의 생존환경을 파괴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적절히 규제하고 통제할 수 있는 장치가 없다는 문제의식”이 깔려있다. 그리고 출자총액제 확대, 계열분리 명령제, 재벌세 신설 등의 정책적 대안을 제시하는데, 이런 대안의 본질은 “재벌을 부인하는” 게 아니라 “무차별하게 국민경제를 독식하려는 재벌체제에 대해 일정한 규제의 틀을 씌우자”는 것이다.
모두 기억하다시피 2012년은 대선이 있었던 해이고, 박근혜 대통령의 “경제민주화” 공약에 국민들이 낚시질을 당했었다. 현재 경제민주화 약속은 완전 휴지조각이 됐고, 새누리당이 깔아놓은 멍석 위에서 함께 춤을 추던 자칭 민주진보세력은 어떤 진전된 논의도 이끌지 못하고 있다. 왜 경제민주화 담론이 말짱 도루묵이 됐는지 성찰은 없이 함께 헛들떠 떠들던 이야기를 “새로운 20년”을 준비하는데 호출한 건 직무태만이다.
환상으로의 투항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되고나서 서둘러 경제민주화를 망각한 건 그것이 한국경제의 정상적인 작동과 마찰을 일으킨다는 점을 누군가가 올바로 일깨워준 이유도 있을 것 같다. 한국경제를 “국민경제”와 “균형”의 틀로 바라보아서는 그 성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한국경제는 한 마디로 세계시장을 상대로 재벌이 지휘하는 생산체제이고, 이 생산체제는 글로벌 경쟁을 이겨내기 위해 이 땅과 그 위의 사람과 사회를 모두 씹어 삼키고 있으며, 또 그래야만 증식해나갈 수 있다. 대기업에게 자원(우수인력, 자금, 사업기회 등) 몰아주기, 쥐어짜내기 좋은 하청구조, 언제든 갈아치울 수 있는 비정규직, 노동운동 봉쇄, 해외진출 목돈 마련 또는 해외손실 보전에 편리한 국내시장 등 이런 것들은 재벌체제가 원할하게 성장하기 위해 필요하고도 정상적인 풍경이다. 이제까지 한국경제가 남달리 성장해온 방법이고, 이러한 양극화·불균형은 재벌체제의 자연스런 일부이다. 그런데 양극화 없는 재벌체제? 균형 잡힌 동반성장? 이는 칼로리 없는 음식에 대한 욕망과도 같다.
진리는 전체다. 양극화를 극단으로 밀어붙이고 있는 재벌체제는 한국자본주의의 성장논리가 도달한 현재 모습이며, 재벌과 양극화는 동일한 실체의 양면이다. 따라서 규제되고 개혁된 재벌, 그래서 양극화 없는 재벌체제에 대한 요구는 환상으로의 투항이다. 재벌개혁이 아니라 재벌해체이고, 사회화와 노동자통제가 해체의 방법이 되어야 한다. 새로운 사회운영원리에 대한 상상력이 지난 30년간 민주노조운동의 정신이고, “생산의 주역이며 사회개혁과 역사발전의 주체”라는 민주노총의 선언을 실현하는 길이다. 자본에 대항할 수 있는 “새로운 20년”은 자본주의 극복과 노동해방의 사상으로 무장한 노동자들이 많아짐으로써만 실제로 가능하다. 그러나 재벌개혁론은 민주노총 조합원들의 계급의식 발전을 가로막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