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준금리의 의미와 최근 추이

 

지난 312일 한국은행은 기준금리를 2%에서 1.75%로 인하했다. 그리고 49일에는 기준금리를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한국은행은 매월 둘째주 목요일에 금융통화위원회를 열어 기준금리를 결정한다.) 앞으로도 적지 않은 기간 동안 사상 최초의 1%대 기준금리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기준금리는 현대 자본주의에서 국가가 경제에 개입하는 주요한 수단들 중의 하나이다. 자본주의국가의 경제개입수단은 흔히 재정정책과 통화정책으로 분류된다. 재정정책은 정부가 예산지출과 감세를 통해 수요를 부양하는 것이며, 통화정책은 중앙은행이 통화량과 기준금리를 조절해 경기변동에 대응하는 것이다. 금리를 높일 경우 가계에서는 저축 성향이 높아지고 기업에서는 자금 조달이 어려워지므로, 경기과열과 물가상승을 진정시키는 효과가 있다. 반대로 금리를 낮출 경우 시중에 통화량이 늘어 경기부양과 물가회복을 돕는다. 1970년대에 미국, 서유럽에서 적극적인 재정정책에도 불구하고 경기침체와 인플레이션이 계속되는 스테그플레이션을 겪고 나서는, ‘작은 정부중앙은행의 독립성이라는 슬로건 하에서 통화정책이 더 중요하게 대접받는 편이다.

 

최근 몇년간의 한국은행 기준금리 추이를 살펴보면, 미국발 금융위기 직전인 20088월에 5.25%, 그리고 월스트리스가 휘청거렸던 `0811월에는 4.00%, 12월에는 3.00%, `092월에는 2.00%로 가파르게 낮아졌고, 이후 서서히 올라 `116월에 3.25%까지 올랐다가 다시 낮아져 현재 1.75%에까지 이르렀다. 기준금리만 놓고 보면 `08년 세계경제위기의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했을 뿐더러 더 심각한 국면으로 접어든 것이다.

 

 

초저금리 시대에 관한 단상

 

물론 기준금리만으로 경제상황을 재단할 수 없다. 3월에 한국은행이 금리를 역대 최저로 인하한 것에 관해서 디플레이션(경기침체 속 물가하락) 우려에 대한 대응 또는 장기간의 경기하강에 써볼 건 다 써보는 식의 대응 등으로 평가하고 있다. 요는 경제전망이 비관적이라는 말이다. 이게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IMF는 최근 보고서에서 세계경제가 구조적 장기침체로 가고 있다고 경고했다. 그럼에도 금리인하가 당장은 저금리 전환대출 등으로 기대효과를 보고 있다. 중산층과 서민의 이자 부담을 줄여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일이 그리 간단하지는 않다. 채무자 입장에서는 이자부담을 경감시켜주는 금리인하가 한편에서는 새로운 문제를 야기한다. 첫째는 대외취약성의 증가이다. 현재 최대의 경제이슈는 미국의 연준이 언제 금리를 인상하느냐인데, 미국에서 금리가 오르면 자본유출과 이로 인한 자산가격 하락, 금융혼란이 우려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금리가 낮을수록 미국 금리인상의 충격과 후폭풍은 더해질 것이다.

 

둘째, 부채와 투기의 증가이다. 이자가 싸질수록 돈을 빌리려는 유인이 커지는 건 당연하다. 문제는 지금도 가계부채 수준이 심각한 수준이고 저성장에서 빚낸 돈이 몰릴 부동산시장이나 주식시장이나 위태로운 상황이라는 점이다. 세계 어느 곳에서도 소득이 늘지 않는데 자산가격이 계속 오른 적은 없다. 부채로 커진 거품은 터지기 마련이다.

 

셋째, 금융약탈의 심화이다. 비관적인 경제전망, 경기침체의 장기화 가운데서 적당한 투자처를 찾지 못하는 유휴자본이 열을 올릴 곳은 뻔하다. 바로 서민의 주머니이다. 전 국민을 채무관계로 옮아매어 모든 소득에 빨대를 꽂아 밑천까지 다 털어먹도록 온갖 술수로 빚을 권할 것이다.

 

2008년 미국에서의 경제공황이 2000년대 초저금리 시대에 뒤이어 찾아온 건 우연이 아니었다. 충분한 소득이 없는 사람들에게까지 금융기관들은 주택을 담보 잡아 대출(서브프라임 모기지)해주었고, 빚을 상환하지 못하면 매몰차게 집을 압류했다. 결국 대규모의 채무불이행과 주인 잃은 주택매물이 쏟아져 부동산시장이 붕괴하고, 악성채권 증가에 금융기관들도 연이어 도산하면서 최악으로 치달았다.

 

정치적 권리가 없는 민중은 빚에 길바닥으로 내몰릴 것이고, 반대로 권력을 획득한 민중은 약탈자들을 몰아낼 것이다. 연대와 투쟁이 우리 문제의 실질적인 해결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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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정산 대란, 타기 시작한 폭탄 심지?

 

 

  연말정산 논란에서 증세-복지 논란으로

 

  ‘13월의 보너스‘13월의 세금 폭탄으로 바뀌었다는 직장인들의 분노가 요동치자 박근혜 정부가 허둥지둥 진화에 나섰지만 논란은 가라앉지 않고, 오히려 증세-복지 논란으로 번져가고 있다. 연말정산 관련법을 개정하면서 기존의 소득공제 방식을 상당 부분 세액공제 방식으로 변경한 결과, 근로소득자들의 세부담이 크게 증가한 게 시작이었다. 그런데 정부가 사실상의 증세 조치라는 본질은 숨기고 사실이 아니라는 거짓과 뻔뻔함으로 일관하면서 힘없이 당해야하는 납세자들의 분노에 불을 질렀다. 담뱃값 인상 때와 같다.

 

  연이은 증세 조치의 배경은 일차적으로는 세수 부족에 있다. 세입예산 대비 세수 부족분이 ‘12년에는 28천억, ’13년에는 85천억, ‘14년에는 111천억이 발생했다. 이처럼 세수 부족분이 매년 확대되자 담뱃값 인상과 연말정산 축소 같은 증세에 나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증세의 방식이다. 기업이나 고소득 자영업자가 아니라 근로소득자와 서민에게 부담을 지우고 있다. 만만하다고 여기는 상대를 고른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새정치민주연합이 법인세 인상이라는 화두를 던지고, 새누리당이나 보수언론은 무분별한 복지예산 축소가 우선이라는 식으로 받아치면서 증세-복지 논란이 정계를 달구고 있다. 문재인 의원이 새로이 야당의 대표가 되면서 증세와 복지를 놓고 박근혜 정부와 전면전을 벌이겠다는 다짐을 내보이면서 향후에도 계속 주요이슈로 자리잡을 것 같다.

 

  증세-복지 논란의 배경

 

  증세-복지 논란의 재점화는 때늦은 감이 있다. 그간 한국경제가 2008년 이후 전세계를 휩쓸고 있는 극심한 경제위기에서 한발 비켜서왔던 덕분이다. 그러나 유럽에서는 재정위기가 터지면서 특히 취약했던 그리스나 스페인 등에서는 정치지형을 뒤흔들고 있다. 다들 아다시피 얼마 전 그리스에서는 긴축에 반대하고 법인세 인상과 부유세 신설을 주장하는 급진좌파연합 시리자가 집권했다. 유럽의 재정위기나 새로운 좌파의 대두는 신자유주의의 파산에서 발생한 현상들이다.

 

  신자유주의는 미국과 유럽 같은 자본주의 선진국에서 1970년대에 부딪쳤던 경제문제들을 돌파하기 위했던 자본의 구조개혁 운동이다. 그 정책은 자본의 자유화와 세계화로 요약된다. 돈벌기가 예전만 못해서 그간 용인해왔던 타협들을 장애로 여기기 시작했고, 노동조합이나 공공정책, 정부규제를 타도하려는 자본의 투쟁은 자유시장경제라는 멋진 신세계의 세례를 받아왔다. 그런데 30여년만에 자유시장경제는 만성 경기침체와 금융불안정에 시달리는 혼돈의 세계로 추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동안 커질대로 커진 자본의 힘은 추락의 손실을 정부와 사회로 전가시켜버렸다. 신자유주의의 파산이 재정위기와 사회위기로 드러나고 있는 이유이다.

 

  2류 자본주의 국가인 한국의 작금의 상황도 세계의 흐름과 다르지 않다. IMF 구제금융을 빌미로 전면화된 신자유주의적 구조개혁에 힘입어 반짝하던 시절도 잠시, 실업과 고용불안, 저소득의 범람으로 사회안전망에 대한 수요는 높아지는데 탐욕스런 재벌은 제 배만 불리고, 정부의 재정건전성은 악화되고 있다.

 

 

 

  다음은 우리다!

 

  그리스 등의 사례처럼 재정위기의 발발, 이에 대한 서민증세와 복지, 공공부문의 해체라는 집권세력의 대응은 커다란 정치적 변화를 낳을 수 있다. 이 정도의 위기와 변화가 한국에서도 벌어질 것이라고 당장은 예상키 힘들지만, 심각한 수준인 가계부채나 지방자치단체 재정악화가 뇌관이 되어 연쇄 폭발이 벌어지면 예상을 뒤엎을 수 있다. 지금 벌어지는 증세-복지 논란에 대해 뚜렷한 입장과 방향, 실천을 가져야 할 이유이다. 대중을 반자본주의 의식으로 견인할 수 있는 분석과 요구를 내놓고 투쟁해가야 한다. 이에 대한 많은 논의와 토론이 벌어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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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한국경제? 재벌이 문제!

 

 

초이노믹스라며 기승전부동산의 정책들을 남발하고 한국은행은 역대 최저로 금리를 인하하며, 이런 식의 대응이 적절한지 여부를 두고 설왕설래가 이어지고 있다. 이 글은 한국경제가 정말 위기에 직면해 있는지, 위기가 다가왔다면 어떤 정책이 유효한지 따져보는 대신에, 보다 구조적인 문제와 그 극복방향을 강조하고자 한다. 핵심을 비껴가고서는 백약이 무효라서이다.

 

 

한국경제의 모순 : 대박의 비밀이 쪽박의 이유

 

투자한 자본과 이로부터 벌어들인 소득 사이의 비율을 의미하는 이윤율은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성과와 한계를 측정하기에 가장 적합한 지표이다. 자본주의의 목적은 최대한 많이 버는 것이고, 이의 지표가 바로 이윤율이기 때문이다. 홍장표 교수의 한국 제조업의 이윤율 추이와 변동요인(2013)에 따르면, 1991~2009년 동안의 제조업 분야 18개 업종 패널자료를 사용해 분석한 결과, “외환위기 이전(1991~1998)에는 설비투자 확대에 따른 자본-노동비율 증가와 시장개방이 이윤율을 하락시켰으며, 외환위기 이후(1999~2009)에는 생산자본의 세계화와 연구개발투자가 이윤율 상승을 주도했고 노동조합 조직률 하락이 이를 뒷받침했다고 한다. 이러한 경험적 분석결과에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사실들을 더해보면 아래와 같은 결론들을 이끌어낼 수 있다.

 

모두 알다시피, 한국 경제성장을 특징짓는 것은 수출제조업’, ‘재벌이다. 2008~9년의 미국발 세계경제공황 속에서도 한국경제가 비교적 견조한 성장을 유지한 건 재벌이 지배하는 제조업 분야에서의 수출경쟁력 덕분이었다. 그리고 세계시장에서도 통한 수출경쟁력은 IMF구조조정으로 반등시킨 이윤율로 해외직접투자 및 연구개발투자를 늘리고, 이게 생산합리화와 더 많은 이윤으로 이어지는 선순환구조를 만들어내면서 형성됐다고 분석할 수 있겠다. 문제는 재벌 입장에서의 생산합리화 즉, 해외공장 증설과 생산성 향상 및 노동 압박 등이 한국경제의 구조적 결함들을 키워왔다는 것이다.

 

국내 설비투자보다는 해외투자와 연구개발에 돈을 풀면서 고용창출은 부진을 면치 못했고, 구조조정을 밀어붙인 자리에는 하청과 비정규직을 채워 넣으며 일자리의 질 또한 현저하게 떨어졌다. ‘고용없는 성장양극화를 키워온 것이다. 그런데 세계경제공황 이후에는 투자부진까지 겹치면서 그간 재벌이 해고자와 비정규직, 국내소비자를 희생시키면서 가꾸어온 이윤율 상승은 사상 최대의 사내유보금 적립으로 나타나고 있다. 금융감독원이 제출한 자산규모 10대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 상장사 이익잉여금 현황에 의하면, 최근 3년간 이익잉여금이 3123천억원에서 3955천억원으로 832천억원이나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395조원의 이익잉여금은 내년도 국가예산을 넘어서는 어마어마한 액수이기도 하다. 지금 한국경제는 한 놈만 쓸어 담는 도박판과 다를 바 없다. 몽땅 쓸어 담고서는 풀질 않으니 다른 편에서는 빚과 가난이 쌓여간다.

 

 

쪽박을 깨는 법

 

요즈음 여러 인사들이 소득 주도 성장을 들먹이는데, 가계소득 증가를 촉진시키고 복지를 늘려 내수를 살찌워 경제를 살리자는 이야기이다. 노동조합이 열심히 투쟁해 임금을 높이면 경제에도 좋다는 말도 같은 맥락의 주장이다. 노동자, 서민의 생활수준 향상이 곧 경제성장이라는 아름다운 생각이지만, 그간 재벌이 IMF구조조정과 세계화를 등에 업고 경쟁력을 키워온 비법-자본수출과 비정규직 사용 등-과 국가예산이 넘는 잉여금을 끌어안고 있는 행태를 고려하면, 타짜 옆에 앉혀 놓고 판 벌여보겠다는 어수룩함이 묻어난다.

 

누구 말처럼 재벌몰수가 정답이다. 물론 재벌몰수를 실제로 추진해갈 힘이 없는 냉엄한 현실에서는 뜬 구름 잡는 소리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맞는 건 맞는 것이고 아닌 건 아닌 것이다. 재벌이 소유한 생산력을 민주적 통제 아래 사회화하는 길 말고는 어느 길로 빠지든 결국 제자리걸음이다. ? 자본이 제 몸을 불려나가는 지배적인 사회현실, 그 자체가 바로 불평등과 실업, 빈곤 등 온갖 재앙을 쏟아내는 시대라서이다. 자본주의라는 이름의 시대를 거스르는 용기와 지혜만이 길을 열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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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베스와 민중권력

 

 

한 혁명가의 죽음

 

지난 35, 우고 차베스가 암투병 끝에 서거했다. 그를 설명하는 최선의 말은 아마 차베스 본인이 한 말일 것이다. “가난을 끝장내는 유일한 방법은 빈민에게 권력을 주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는 빈민에게 권력을 주기 위해 힘을 아끼지 않았고, 모든 가난한 자들 즉, 베네수엘라 민중은 여기에 21세기 유일한 혁명으로 응답해왔다. “민중권력을 창조하라!” 이 선언이 바로 베네수엘라 볼리바리안 혁명의 정신이다.

 

정치무대에서 차베스가 처음 등장한 해는 `92년이다. 육군 중령이었던 차베스는 부패정권을 쓰러트리기 위해 군사쿠데타를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그럼에도 이때, 당장의 패배를 솔직히 인정하면서도 미래의 승리를 기약하는 당당한 모습을 통해서 당시 암담한 현실을 버텨내던 민중 사이에서 희망의 상징으로 떠오를 수 있었다. 이에 힘입어 `98년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될 수 있었고, 이후 14년간 민중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볼리바리안 혁명을 강력한 카리스마로 이끌어왔다. 이제 차베스 개인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 멈추겠다. 대신 그가 마지막까지 헌신했던 혁명에 대해서 이야기하겠다. 볼리바리안 혁명 속에서 차베스의 고결한 이상과 강한 의지는 계속 살아갈 것이다.

 

반신자유주의 개혁

 

지구 반대편 남미대륙에 위치한 이 나라의 현재 국호는 베네수엘라 볼리바리안 공화국이다. 차베스가 집권 후 곧바로 추진한 헌법 개정이 `99년 국민투표에서 통과됨으로써 국호가 바뀌었다. 새로운 헌법은 볼리바리안 헌법으로 불리며, 세계에서 가장 민주적인 헌법으로 평가받고 있다. 여기서 볼리바리안의 의미는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자인 시몬 볼리바르를 뜻한다. 볼리바르는 1810,20년대에 스페인에 맞서 식민지 독립운동을 이끈 지도자였다. 차베스가 볼리바르를 호명하며 불러내고자 했던 건 지배와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정신이었다. 과거의 지배자가 스페인이었다면, 오늘날 남미대륙을 도탄으로 빠뜨리고 있는 건 미국이 전 세계에 강요하는 신자유주의이다.

 

베네수엘라에 신자유주의가 도입된 건 경제파탄과 `89년의 IMF협상을 통해서였다. 당시의 페레스 정권은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는 대가로 재정긴축과 사회보장 축소, 민영화, 시장 자유화 등을 합의해주었다. 이를 발표한 지 11일 만에 수도 카라카스에서 대중교통비가 두 배가 오른 것에 분노한 민중봉기가 일어났고, 수천 명이 희생당했다. 이후 차베스가 집권하기까지 십여 년 동안 빈곤율이 64.2%까지 증가하고, 석유회사를 비롯한 기간산업이 민영화돼 물가가 치솟았다. 반면에 소수가 독차지한 부는 이를 틈타 더욱 커졌다.

 

신자유주의는 가뜩이나 불평등한 사회를 더 비참한 곳으로 전락시켰고, 구조적 모순이 참을 수 없을 만큼 깊어진 것이 볼리바리안 혁명의 배경이다. 새 헌법을 제정한 이후 `01년에 차베스는 망가질 대로 망가진 경제와 사회의 복구를 목표로 49개 개혁법안을 통과시킨다. 이중 탄화수소법은 석유산업의 민영화를 중단시키고 국영화와 석유이익의 국민경제 환원을 강화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토지법은 개인 토지소유를 제한하고 정부가 사유의 미경작지와 휴경지, 도시 유휴지를 징발해 농민과 도시빈민에게 분배하려는 조치다. 또 협동조합법은 민중의 자조 노력에 협동조합이라는 공식지위를 부여해 정부의 지원을 보장해준다.

 

그런데 기존의 기득권세력은 개혁을 전혀 용납하지 않았고 군대와 경찰, 관료, 자본가, 언론, 어용노조가 총집결해 `02년에 군사쿠데타와 경제파업을 연달아 일으키며 차베스 정권을 전복시키려했다. 위기의 순간에 차베스를 구한 건 정치권력도 군대도 아니었다. 거리로 쏟아져 나온 민중이 새 헌법과 개혁을 수호했다. 그리고 이 순간 진정한 혁명이 시작된다.

 

민중권력으로의 급진화

 

볼리바리안 혁명의 특징은 위로부터의 개혁이 기득권층의 반발에 부딪쳐 위기에 처하자 아래로부터의 혁명으로 급진전됐다는 점이다. 민중은 반혁명세력으로부터 차베스와 헌법, 개혁을 수호하는 것이 자신들의 이익과 미래에 부합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스스로를 조직했고, 나아가 엘리트들이 제시한 가이드라인을 뛰어넘어 새로운 사회를 꿈꾸고 있다. 차베스는 현명하게도 반혁명세력과 타협하지도, 민중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제한하지도 않았고, 민중의 요구에 발맞추어 함께 전진했다. 그러면서 정부의 역할을 계획하고 관리하는 게 아니라 다양하게 분출하는 요구들을 지원하고 조정하는 것으로 이끌었다. 그런데 이는 반혁명 시도에 언제든지 동참할 수 있는 국가관료와 변화할 뜻이 없는 관료기구에게 혁명을 맡길 수 없다는, 시행착오로 얻은 교훈이기도 했다. 혁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관료주의를 민중의 자치로 대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게 분명해졌다.

 

민중권력은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다. `02년 겨울에 자본가들이 직장폐쇄를 단행하고 물자를 파괴하며 경제파업을 벌이자, 노동자들은 공장을 점거하고 스스로 생산을 재개시켰다. 차베스는 이런 공장들을 국가가 인수하도록 해 노동자 투쟁을 지원해주었고, 국유기업에는 자주관리와 공동경영을 도입했다. 베네수엘라에서 기업과 경제의 사회화는 계속되고 있으며, 노동자들은 무력한 피고용인에서 일터의 진정한 주인으로 거듭나고 있다. 한편, 비교적 소규모 단위에서 일반적인 협동조합은 백만 명이 넘는 농민과 노동자를 포함하고 있다. 협동조합의 성장은 구성원들 사이의 평등하고 민주적인 관계의 성숙과 민중이 스스로 경제활동을 조직하는 역량의 진전을 반영한다.

 

노동자 민주주의의 발전과 함께 베네수엘라에서 진행되고 있는 가장 중요한 변화는 `06년부터 조직된 공동체평의회이다. 공동체평의회는 같은 지역에 거주하는 수백가구로 이루어지며, 해당 지역주민의 요구를 반영한 정책을 수립하고 국가재정을 배분받아 집행까지 한다. 한마디로 동네 자치이고, 국가의 의사결정과 기능이 수 만개의 공동체평의회로 이전돼 국민 모두가 의원과 공무원이 되는, 차원이 다른 참여가 이루어지는 민주주의이다. 물론 아직까지 공동체평의회가 기존의 국가를 대체하기까지는 갈 길이 멀지만, 베네수엘라 민중이 전인미답의 한 발을 내딛은 건 틀림없다.

 

이중권력의 베네수엘라

 

베네수엘라에서는 특이하게도 지배계급의 재산, 관료기구 같은 구체제가 온존하면서도 민중권력이 등장해 활력을 키워왔다. 그동안 경제는 빠르게 성장하고 불평등도 완화돼왔다. 무상의료와 무상교육으로 민중의 삶이 획기적으로 개선됐다. 여기에는 차베스의 지렛대로서의 역할이 무척이나 컸다. 이런 맥락에서 차베스는 민중에게 새로운 사회로 가는 문을 열어주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차베스가 더 이상 살아있지 않다는 사실이 새로운 사회로 가는 문이 잠겼음을 의미하지는 않는 것 같다. 문 밖으로 걸어 나와 더 전진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고, 이들이 제2, 3의 문들을 만들지 못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한 국가에 모순적인 두 힘이 나란히 존재하는 이중권력의 상황이 언제까지고 평화롭게 계속될 수는 없다. 그동안 민중권력이라는 새로운 사회의 씨앗과 함께 낡은 사회와의 갈등과 투쟁의 여지도 더불어 커온 셈이고, 구체제는 파괴될지언정 스스로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볼리바리안 혁명과 베네수엘라 민중의 승리를 응원한다.

 

더 읽을거리

차베스 미국과 맞짱뜨다

베네수엘라, 혁명의 역사를 다시 쓰다

사회주의는 가능하다 -베네수엘라 현장 활동가들의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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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행은 진정 마르크스 경제학자인가?

 

내수경제가 대안이다?

 

12월 27일자 한겨레에 실린 책 소개 기사를 보니, 지승호 전문 인터뷰어가 김수행 교수를 인터뷰해 책으로 만든 <김수행, 자본론으로 한국경제를 말하다>에서, 김수행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대안이 있나?
“내수 중심의 경제를 한번쯤 해 보라는 겁니다. 수출 위주의 경제정책을 하다 보면 세계경제가 어려워 수출이 잘 안 되면 금방 타격을 입잖아요. 내수시장을 키운다는 것은 사실은 복지국가를 만든다는 것과 같아요. 사회보장제도를 확장해서 서로 나눠 가지는 식으로 정책을 바꾸면 내수시장이 확 커진다구요. … 이를 통해 수출산업이 아니라 내수에 기반을 둔 산업이 하나씩 일어납니다. 저는 우리 사회가 나아갈 방향이 이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구요.”
“양극화 해소→내수기반 확충→경제의 안정적 성장→인권유린과 증오 해소→사회적 타협의 확대로 나가는 것이 유럽 선진국들이 걸어온 길”이라는 그의 생각은 “자신들의 수익률을 유지하고 올리기 위해 사회보장제도를 줄이고 노동자에게 양보를 강요해 점점 더 야만적인 사회를 만들어 온” 미국·영국과는 사뭇 다른 길을 간 스웨덴 모델에 가깝다. 다른 말로 하면 국가와 시민의 역할이 커지는 “계획참여 경제나 계획참여 자본주의”다. (한겨레 기사 인용)

 

내수경제를 부양해야 한다는 것은 거꾸로 말하면, 현재 한국의 경제문제가 수출의 비중이 커서 세계경제의 불안정성에 취약해서라든가, 총수요의 부족 때문에 발생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세계경제의 불안정성에 대한 취약성도 결국 (수출수요의 감소로) 총수요를 부족하게 해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니, 김수행 교수의 “내수경제가 대안”이라는 주장은 현재의 한국경제의 위기는 총수요의 부족 때문이라는 분석으로 귀결된다. 
 


‘총수요의 부족이 원인’이 과연 마르크스주의적인가?

 

총수요의 부족은 초과공급된 상품의 판매를 어렵게 해, 결국 자본가들로 하여금 생산규모를 축소시키게 하고, 잉여노동력을 방출시키게 해 실업을 늘린다. 이는 연쇄적으로 초과공급자에게 원자재, 중간재 등을 판매하던 자본가의 판로를 제한시키고, 또한 실업의 증가로 구매력 있는 소비자가 감소함으로써 총수요의 추가적인 위축을 불러일으킨다. 게다가 총수요의 위축에 따라 경기전망이 악화되면서 자본가들에 있어 투자는 불안정하고 모험적인 것으로 여겨지면서 투자수요는 더욱 위축된다. 그리고 실업의 증가와 경기전망의 악화에 면한 소비자들도 미래의 불확실성에 처해 지갑을 닫게 된다. 이러한 나선형적 경기하강을 통해 경제는 더욱 어두운 터널로 돌입하게 된다.  

 

이것이 케인즈주의자들의 공황에 대한 전형적인 설명이고, 따라서 케인즈주의자들은 총수요가 위축되는 초기 국면에 정부가 적절하게 개입해, 추가적인 수요위축을 막고 경기를 부양시킴으로써, 다시 자본가의 금고와 소비자의 지갑을 열게 해 성장과 완전고용을 달성하자고 한다.

 

그렇다면 총수요는 왜 갑자기 부족해지는 것일까? 케인즈주의자들은 대개 유동선 선호나 투기에 따른 활황과 그 붕괴, 이를 가능케 한 금융의 과대성장 등을 주요이유로 뽑는다.

 

이에 반하여 마르크스 경제학은 경제공황의 원인을 자본의 운동 그 자체에서 찾는다. 자본론에 따르면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적 운동의 지배적인 동인은 자본의 축적 그 자체이다.

 

가치를 증식하려는 자본의 축적이 착취의 형태(절대적·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와 이에 따른 새로운 생산기술의 도입과 노동과정의 변형, 그리고 산업순환과 산업예비군의 양산(자본주의적 축적의 일반법칙), 내적 모순의 발현(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법칙) 등을 결정한다.

 

따라서 마르크스 경제학은 당연히 공황같은 경제현상의 분석을 총수요 같은 개념이 아니라, 자본의 운동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므로 김수행 교수의 언급은 전혀 마르크스주의적이지 않다. 마르크스 경제학자라는 스스로의 언명과 달리 오히려 케인즈주의자 같다.

 

물론 이 말이 케인즈주의적 분석은 무조건 옳지 않다는 도그마적 선언은 아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한다면 마르크스주의자답게 말하라는 것이다. <자본론으로 한국경제를 말하다>라는 책 제목과 달리 실제 내용은 케인즈주의적 대안이라니, 얼마나 요상한가? <케인즈로 한국경제를 말하다>라고 책 제목을 고쳐 짓는 것이 양심적이다. 

 


김수행 교수가 말하는 장기불황의 원인 : 소비위축과 주주가치 극대화

 

김수행 교수가 얼마나 마르크스 경제학자답지 않은지에 대해서 다른 사례를 들어보겠다. 아래는 민중의 소리 12월 22일자인, “죽은 산업생산이 경제 전체를 끌어내리고 있다” 라는 제목의 김수행 교수 인터뷰 기사이다. 일부를 다소 길지만 인용하겠다.  

 

“내가 볼 때는 단순히 금융부분에서의 위기가 온 게 아니고 경제체제 전체로서의 위기가 왔다. 금융을 살리려 해도, 이자율을 낮추더라도 경제가 안 살아나서 아래로 빠진 것이다. 산업생산 부분이 회복을 못해서 전체를 끌어당기고 있다.”
- 산업생산이 죽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1950-60년대 자본주의 황금기에서 복지국가가 매우 잘 확립이 돼 있었고 노동계급의 힘이 굉장히 컸다. 모두가 나누면서 더불어서 산다는 개념 때문에 자본주의가 발달하지 않는다고 신자유주의자들은 생각했다. 1980년 이후 대처와 레이건이 대표적이다. 오히려 부익부 빈익빈이면 자본주의가 더 발달한다고 봤다. 그래서 나온 것이 사회보장제도를 깎는 일이었고, 그 다음에 노동운동을 못하게 노동법을 개악하고 해고를 늘리고 노동의 유연화를 강조했다. 이렇게 해버리면 금방 나오는 것이 국내시장이 확 좁아지는 것이다.
실제로 누진세에 의해 사회보장제도가 확립되고 병원이나 학교나 실업수당이나 저소득에 대한 보조나 이런 게 굉장히 늘어난다. 이게 사실 국내수요를 만들어 시장을 확대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안되니 선진국의 국내시장이 좁아지면서 세계시장도 좁아진다. 물건이 안 팔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세계화 전략이 나왔다. 선진국 정부가 무역자유화, 외환자유화 얘기가 그래서 나온거다. 산업생산이 확대되는 것이 아니라 금융산업이 확대됐다. 97년 한국공황이 왔을 때 당장 우리 주식시장을 다 잡고 부를 빼가는 식으로 했다. 금융활동, 주식 채권 외환을 사고팔아 이윤을 보는 것, 파생으로 이윤 보는 것, 소비금융은 부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주머니 돈을 훑어내는 사기적인 것이다. 금융은 실제로는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지 못한다. 금융부분의 이윤은 생산은 없고 전부 주머니를 터는 것이다.
두 번째로 기관투자가들이 거대 주식회사의 최대주주가 됐다. 이들은 산업기업이 장기적인 전망을 갖고 R&D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배당을 내놔라, 주가를 올려라 해서 이익을 보려고 했다. 그러니까 경영진에게 스톡옵션을 주고, 노동유연화 시키고, 나중에 가서는 회계조작해서 단기순이익을 올려 기업이 많이 망하게 했다. 산업 육성이 안됐다. 그러니 아무리 금융에 돈을 줘도 안 올라가는 것이다.”

 

김수행 교수는 현재 세계대공황의 진원지를 금융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올바르게도 “산업생산 부분이 회복을 못해서 전체를 끌어당기고 있다”며, 1974-75년 공황 이후 자본주의적 생산이 겪고 있는 장기불황(1950~60년대 자본주의 황금기에 비교한 연간 성장률의 하강을 의미한다)이 대공황 분석의 핵심임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세계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서는 거의 공리로 굳혀진 사실이다.  

 

그러나 김수행 교수의 마르크스주의자다운 면모는 딱 여기까지이다. 이어서 김수행 교수는 세계대공황의 원인을 아래같이 두 가지로 말하는데, 이는 진보적일지는 몰라도 마르크스주의적이지는 않다.  

 

① 신자유주의(“사회보장제도를 깎는 일이었고, 그 다음에 노동운동을 못하게 노동법을 개악하고 해고를 늘리고 노동의 유연화를 강요했다”)에 의한 소비위축
(*김수행 교수는 “국내시장이 좁아지면서 세계시장도 좁아진다”라고 표현하는데, 사회보장제도나 노동운동은 소비수요에 관계되는 것이므로 투자수요까지 포괄하는 시장이라는 용어보다는, ‘소비’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김수행 교수의 주장을 정확하게 전달하는데 적절한 듯하다.)

 

② 주주가치 극대화(주주이익 우선)에 따른 기업의 단기이익 극대화 추구
(*위 인용문 중 “두 번째로 기관투자가들이 거대 주식회사의 최대주주가 됐다 ~ 산업 육성이 안 됐다” 부문 참조) 

 

위 설명방식은 분명 진보적인 측면이 있다. ①은 복지확대 및 노동운동 강화가 대안이 되어야 한다는 근거로 역할 할 수 있고, ②도 주주뿐만 아니라 노동자, 지역사회, 소비자 등의 모든 이해관계자가 기업경영에 관계해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로 쓰일 수 있다. 실제로 이러한 설명방식은 한국의 진보적인 경제학자들에 의해서 자주 주장된다. 특히 ②의 주장은 금융자본주의 비판이라는 명목으로 대안연대회의 등에 의해 빈번히 소개됐던 주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분석은 전혀 마르크스주의적이지 않고, 그 자체로도 (부분적으로는 옳을지 몰라도 핵심을 놓치고 있다는 의미에서) 틀린 말이다. 마르크스주의적이지 않다는 것은, 이러한 종류의 분석들이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닌 케인즈주의자, 제도학파 등에 의해서 주로 주장된다는 점을 봐도 알 수 있다. 올해 흥행했던 장하준 교수의 시각도 김수행 교수의 설명방식과 기본적으로 비슷하다. 

 

그리고 소비위축과 주주가치 극대화가 장기불황의 원인이라면, 기업지배구조 개선과 소비팽창이 탈출구라는 소리인데, 과연 그러할까?

 


기업지배구조 개선과 소비팽창이 탈출구가 될 수 없는 이유

 

주주가치를 제한하는 기업지배구조 개선이 경제위기 대안의 하나가 될 수 없는 것은 주주가치 극대화를 쫓는 영미식 모델뿐만 아니라, 상대적으로 경영이 소유로부터 더 독립적인 독일·일본 모델도 동시적인 공황에 직면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으로도 충분하겠다. 


그리고 소비팽창이라는 케인즈주의적 해법이 답이 될 수 없는 것도, 우리는 케인즈주의적 해법이 이미 실패한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1970년대 이후 인위적인 소비진작정책은 줄곧 짧은 붐을 낳고는 거품붕괴에 직면했다.  

 

이에 대해 김수행 교수는 신자유주의 하에서의 소비진작정책은 구조적인 양극화라는 부실한 기반 위에서 집행되었기 때문에 치유책이 될 수 없었다고 답할 수 있겠다. 그리고 복지확대와 고용안정, 임금팽창이라는 총수요 확대정책은 견실한 기반으로 작용하여, 경제가 다시 견조한 성장과 안정이라는 레일 위를 달리도록 하게 할 것이라고 주장할 것 같다.  

 

그러나 김수행 교수가 경제위기의 주범으로 지적하는, 양극화를 유발한 복지축소, 노동유연화, 임금억압은 그 자체로 자본을 살리고, 경제를 팽창시키는 힘이기도 하다. 신자유주의 조치로부터 자본이 어떠한 이익도 얻을 수 없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신자유주의의 본질은 부를 직접적으로 노동으로부터 자본으로 이전시키는 약탈이었고, 이로부터 자본은 당연히 이익을 누렸다. 그런데 왜 세계자본주의는 장기불황으로부터 탈출하지 못했을까?  

 

이러한 질문에 반노동 정책은 개별적인 자본에게는 이익일지 몰라도, 경제 전체적으로는 총수요를 위축시켜 불황을 장기화하는 것이라고 답하는 것은 극도의 어리석음이다. 이 말이 참이라면 이제까지의 자본주의는 어떠한 공황도 극복하지 못했을 것이다. 공황기에는 의례 실업의 증가와 임금감소 등 소비위축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자본은 공황기의 조건으로부터 착취율을 높이고 이윤율을 개선하여, 다시 힘찬 축적을 위한 조건을 확보한다. 자본의 축적이 재개되면 새로운 공장이 세워지고, 고용이 창출된다. 개별적인 자본의 수익성 개선과 이에 힘입은 축적의 재개는, 사회 전체적으로 투자수요와 증대와 이에 의한 부가적인 소비수요의 증대를 가져와 경제 전체를 회생시키는 것이다. 공황은 이러한 메커니즘으로 극복돼 왔다(물론 이 말이 1950년 이후의 케인즈주의적 공황극복책이 효과적이지 않았음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현재 세계자본주의는 신자유주의라는, 자본의 착취적인 본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반노동 공세로도 극복이 안 되는 심각한 구조적인 문제를 겪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신자유주의 정책도, 인위적인 수요진작책정책도 해결책이 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1974-75년 공황 이후 세계 자본주의가 겪고 있는 심각한 구조적 문제점의 극복 없이, 김수행 교수가 말하는 양극화 해소를 통한 총수요 부양도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사실 김수행 교수가 제안하는 양극화 해소를 위한 정책들은 전부 자본의 수익성을 악화시키는 것들이다. 자본의 수익성이 악화되면 당연히 자본가의 투자능력과 의지도 좁아진다. 따라서 경제는 투자수요 위축에 직면해 하강하게 된다. 이러한 하강경향을 어떻게 조정할 것(가령 개별자본의 이윤에 대한 조세 수취 강화와 이에 기반한 사회적 투자 등)인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총수요 부양만 말하는 것은 경제학 초짜나 저지를 실수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세계자본주의를 늪에 빠트리고 있는 구조적 문제란 무엇인가?

 


장기불황의 원인은 자본의 과잉축적에서 구해져야 한다

 

과잉자본이란 모든 자본이 가치증식하기에는 서로가 장애가 되는, 모든 자본이 안정적으로 축적하기에는 상대적으로 많은 자본이 존재하는 상태를 말한다. 과잉자본은 자본이 순환하는 과정(화폐-생산수단/노동력-생산-상품-화폐′)에서 취하는 화폐, 설비, 노동력, 상품 등의 형태에 따라, 투자의 기회를 잡지 못하는 과잉화폐, 가동률 저하를 겪는 과잉설비, 노동과정에 들어가지 못하는 과잉노동력, 창고에 진열대에 가득 쌓이는 과잉상품 등의 다양한 형태로서 존재한다. 

 

과잉자본의 상태에서는 기존에 자본으로 하여금 활발한 축적을 가능하게 해주였던 이윤율이 저하한다. 기존의 적절한 수준의 이윤율이 유지되기에는 상대적으로 많은 상품이 생산되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은 상품판매를 위해 가격인하에 경쟁적으로 나서야 하며, 또는 비용압박에 직면해서도 쉽사리 가격을 올리지 못하는, 그대로 이윤의 감소를 감수해야 되는 상황에 처한다. 과잉자본과 과잉생산은 짝패이며, 이는 자본에게 있어 이윤율 저하로 드러난다.

 

과잉자본 하에서의 이윤율 저하는 우선 생산성이 낮고, 높은 비용으로 생산하는 자본을 먼저 압박해 도산의 위기에 처하게 한다. 그리고 과잉생산, 과잉설비의 상황에서 자본은 새로운 기계의 도입, 공장건설 등에 거의 나서지 못하게 된다. 설비투자는 점점 모험적이 것이 되고, 따라서 자본가의 실제 투자능력보다도 못 미치는 산업에서의 과소투자가 발생한다. 이윤 중 더 많은 부분이 새로운 노동력과 설비의 구매에 투하되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금융에 투하된다. 즉 배당과 이자를 낳는 주식과 채권의 구매, 앞으로 가격이 오를 것으로 보이는 자산, 상품의 투기에 화폐가 몰려든다. 산업에서의 과소투자와 맞물러 금융이 과대성장한다.

 

경쟁의 격화로 자본의 폐기 혹은 이윤을 낳지 못하는 부문에서의 자본철수가 본격화되면 이에 따라 과잉자본에 고용돼있던 노동력도 방출되고, 산업순환은 침체에 빠진다. 잉여가치를 창조하는 생산영역에서의 침체는 곧바로 금융부문에서의 위기로 전염된다. 제한된 이윤획득의 기회에 비해서 너무나 많이 몰린 투기자금이 만들어낸 거품은 폭발하고, 금융공황이 발생한다. 금융공황은 신용을 위축시키며, 채무와 신용으로 기계를 돌리던 자본가들을 파멸로 몰아간다. 따라서 산업부문도 공황에 빠진다. (*이는 공황이 일어나는 여러 과정들 중의 하나의 예일 뿐이다.)

 

그런데 현재 세계자본주의는 위에서 묘사한 과잉자본의 상태에 직면해 있다. 지금 세계자본주의가 겪고 있는 과잉자본의 상태는 특히 자동차산업의 과잉설비에서 잘 드러난다. 1980년대부터 과잉설비의 문제점을 노출한 세계자동차산업의 과잉생산능력(생산능력-생산대수)은 1990년에는 1,300만대 수준이었고, 2001년에는 2,300만대 수준까지 증가했다. 09년에는 과잉생산능력이 2,900만대에 달할 것이라고 예상되고 있다. 과잉생산능력의 존재로 자동차산업의 가동률은 60~70%대(정상수준 80%)에 머물러왔고, 이는 유휴설비에 투자된 자본의 현금화, 즉 자본의 순환을 지연·단절시킴으로써 자동차산업의 수익성을 악화시켜왔다.

 

김수행 교수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라면 당연히 과잉생산, 과잉자본에 대해서 말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과잉생산, 과잉자본은 바로 자본의 축적과정 자체가 내포하고 있는 모순의 발현임을, 즉 자본의 축적 자체가 위기와 공황의 이유임을 말해야 한다. (*자본의 축적이란 종자돈을 불리듯이 자본이 자신의 덩치를 불려가는 것을 말하고, 과잉축적은 과잉자본을 만들어내고 있는 자본축적의 상태를 의미한다.) 과잉축적론이 마르크스주의자에게 특히 중요한 것은, 이러한 설명이 자본주의가 내포하는 구조적인 문제를 가장 잘 드러내기 때문이다. 과잉축적에 대한 이해는 왜 자본 자신이 자기 자신의 한계인 점과, 자본주의 모순의 필연적인 발현에 대해서 인식하게 해준다. 그러므로 우리의 실천을 자본주의 그 자체에 대한 극복으로 모아질 수 있게 해준다. 

 

 

과잉축적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러나 과잉축적론이 경제위기에 대한 설명에 있어 만병통치약이 될 수는 없다. 과잉생산, 과잉자본은 자본주의 하에서 경제위기가 드러나는 현상이지, 원인 그 자체는 아니다. 과잉자본과 자본주의적 경제위기는 사실상 동의어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잉생산, 과잉자본을 낳는 것이 자본의 축적 그 자체인데, 왜 자본축적이 과잉축적으로 돌진하게 되는지는 언제나 구체적인 분석을 요구한다.  

 

가령 세계자동차산업에서 지속적으로 과잉생산능력이 증대해온 것은 세계적인 자동차업체들이 수요가 늘어나는 지역시장(중국, 러시아, 브라질, 인도 등)을 선점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설비를 증설(특히 현지공장 건설)해왔기 때문이다. 만성적인 과잉설비에는 한국이 한 몫을 톡톡히 담당했는데, 과잉중복투자의 전형이었던 삼성자동차나, 지금 위기의 와중에도 체코와 러시아에 신규공장을 건설 중인 현대차의 공격적인 경영행태를 보면 알 수 있다. (즉 현실의 경쟁은 자본을 과잉축적으로 내몬다. 이 과정에서 경영자의 공격적 성향이나 잘못된 판단은 과잉축적의 계기로 작용하기도 한다.)  

 

자동차산업에서 과잉설비의 또 하나의 이유는 자동차산업이 고용, 생산 및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고 전후방 연관효과가 커서 경제위축을 우려한 국가의 개입으로 낡고 경쟁력이 떨어지는 설비의 폐기가 지연돼왔기 때문이다(이번의 GM 구제금융 논란도 같은 맥락이다). 

 

국민경제에서 자동차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에 따른 정부개입과 세계시장에서의 무한경쟁이 과잉설비를 구조화시킨 것이다. 

 

세계제조업 전체 수준에서의 과잉설비에 대해서 미국의 마르크스주의자인 로버트 브레너는 미국·일본·유럽 간의 국제적 경쟁 격화를 지적하며, 그 이유들 중 하나로 경쟁자의 신설비 도입에 직면해 이윤율 저하를 겪는 자본가들이 막대한 자본이 투자된 고정자본의 폐기 대신, (어차피 고정자본은 매몰비용이기 때문에) 유동자본 대비 평균이윤율만 얻을 수 있다면 해당분야에 잔류하는 선택을 한다는 것을 든다. 즉 자본으로 기능하기 위한 최소자본의 규모가 늘어나면서 자본의 청산과 이동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편 마르크스주의자들 중 생산영역의 모순을 강조하는 근본주의자들은 1970년대 이후의 장기불황과 이윤율 저하에 대해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고도화되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사실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서 과잉축적이나 이윤율 저하 추세의  핵심원인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잘 정리돼 있지는 않다. 그러나 이 점이 마르크스 경제학자가 장기불황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설명을 포기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김수행 교수의 이율배반적인 결함은 어떻게 설명돼야 하나?

 

김수행 교수가 여러 인터뷰에서 마르크스주의적 설명을 포기하는 것은, 그의 이론적 활동에서의 성실함에 비교하면 상당히 의외이다. 김수행 교수가 한국 마르크스주의 연구에 큰 발자취를 남긴 뛰어난 학자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의 이율배반적 결함은 어떻게 설명되어야 하나? 그런데 이의 설명에서 김수행 교수의 개인적인 특성을 이유로 드는 것은 어떤 교훈도 주지 못할 것이다.  

 

김수행 교수의 공황론에 대한 글들을 읽어보면, 그가 이윤율 저하경향 법칙을 공황론의 핵심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김수행 교수의 이윤율 저하경향 법칙에 대한 이해는 벤 파인과 로렌스 해리스의 해석에 의존하고 있다.  

 

파인과 해리스의 이윤율 저하경향 법칙에 대한 해석의 특징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이윤율 저하경향 법칙은 경험적 예측이 아니라, 이윤율 추이에 대한 모순되는 두 경향(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 경향과 이를 상쇄하는 경향)을 가리키는 것이며, 실제의 이윤율 추이는 모순되는 경향들의 힘과 배치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비되는 해석이 근본주의자들의 것인데, 근본주의자들은 상쇄경향에도 불구하고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 때문에 이윤율은 저하하기 마련이며, 현실에서 이윤율 저하경향 법칙이 관철된다고 본다.  

 

그리고 두 번째 특징은 이윤율 저하경향 법칙이 주기적 공황의 설명에 직접 적용되는 것이라고 본다. 이에 반하여 김성구 교수 등은 이윤율 저하경향 법칙은 자본주의의 장기 추세에 적용되는 것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이러한 특징은 이론적 실천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 단적으로 파인과 해리스는 1970년대 이후의 장기불황에 대해서 의미있는 연구서를 낸 적이 없다. 그들의 이윤율 저하경향 법칙에 대한 해석이 이론적으로는 아무리 엄밀하더라도, 실제의 경제분석에 있어서는 실질적인 도움을 거의 줄 수 없기 때문이다.  

 

매번의 공황을 이윤율 저하경향 법칙이 야기하는 모순들의 발현으로 해석하는 것은 사실상 매우 어려운 작업이다. 즉 모순되는 두 경향을 계량화하기도 힘들뿐더러, 사실 두 경향은 장기적인 과정과 시기를 통해 관철되는 것인데, 대략 십년주기의 공황을 매번 이러한 힘들의 변화로 설명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공황의 설명에 직적 적용하는 해석방식으로는 20~30년에 걸친 장기불황과 같은 장기추세의 설명에 있어서는 취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이론 적용의 어려움이 현실의 분석에 있어 김수행 교수를 무능하게 하고, 따라서 비-마르크스주의적인 설명들을 차용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만약 우리가 김수행 교수의 이론활동에 알게 모르게 의존하고 있는 것이라면, 김수행 교수가 의존하고 있는 이론틀(이윤율 저하경향 법칙에 대한 고유한 해석)을 교체하거나, 혁신해내는 것일 게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마르크스주의라면 마르크스주의자답게 말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 경제학의 (자의든 타의든) 권위자를 자처하며, 장기불황의 원인과 대안에 대해 신자유주의니 내수경제니 운운하는 것은 영 아니올시다이다. 바로 자본주의 자체가 문제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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