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행은 진정 마르크스 경제학자인가?

 

내수경제가 대안이다?

 

12월 27일자 한겨레에 실린 책 소개 기사를 보니, 지승호 전문 인터뷰어가 김수행 교수를 인터뷰해 책으로 만든 <김수행, 자본론으로 한국경제를 말하다>에서, 김수행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대안이 있나?
“내수 중심의 경제를 한번쯤 해 보라는 겁니다. 수출 위주의 경제정책을 하다 보면 세계경제가 어려워 수출이 잘 안 되면 금방 타격을 입잖아요. 내수시장을 키운다는 것은 사실은 복지국가를 만든다는 것과 같아요. 사회보장제도를 확장해서 서로 나눠 가지는 식으로 정책을 바꾸면 내수시장이 확 커진다구요. … 이를 통해 수출산업이 아니라 내수에 기반을 둔 산업이 하나씩 일어납니다. 저는 우리 사회가 나아갈 방향이 이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구요.”
“양극화 해소→내수기반 확충→경제의 안정적 성장→인권유린과 증오 해소→사회적 타협의 확대로 나가는 것이 유럽 선진국들이 걸어온 길”이라는 그의 생각은 “자신들의 수익률을 유지하고 올리기 위해 사회보장제도를 줄이고 노동자에게 양보를 강요해 점점 더 야만적인 사회를 만들어 온” 미국·영국과는 사뭇 다른 길을 간 스웨덴 모델에 가깝다. 다른 말로 하면 국가와 시민의 역할이 커지는 “계획참여 경제나 계획참여 자본주의”다. (한겨레 기사 인용)

 

내수경제를 부양해야 한다는 것은 거꾸로 말하면, 현재 한국의 경제문제가 수출의 비중이 커서 세계경제의 불안정성에 취약해서라든가, 총수요의 부족 때문에 발생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세계경제의 불안정성에 대한 취약성도 결국 (수출수요의 감소로) 총수요를 부족하게 해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니, 김수행 교수의 “내수경제가 대안”이라는 주장은 현재의 한국경제의 위기는 총수요의 부족 때문이라는 분석으로 귀결된다. 
 


‘총수요의 부족이 원인’이 과연 마르크스주의적인가?

 

총수요의 부족은 초과공급된 상품의 판매를 어렵게 해, 결국 자본가들로 하여금 생산규모를 축소시키게 하고, 잉여노동력을 방출시키게 해 실업을 늘린다. 이는 연쇄적으로 초과공급자에게 원자재, 중간재 등을 판매하던 자본가의 판로를 제한시키고, 또한 실업의 증가로 구매력 있는 소비자가 감소함으로써 총수요의 추가적인 위축을 불러일으킨다. 게다가 총수요의 위축에 따라 경기전망이 악화되면서 자본가들에 있어 투자는 불안정하고 모험적인 것으로 여겨지면서 투자수요는 더욱 위축된다. 그리고 실업의 증가와 경기전망의 악화에 면한 소비자들도 미래의 불확실성에 처해 지갑을 닫게 된다. 이러한 나선형적 경기하강을 통해 경제는 더욱 어두운 터널로 돌입하게 된다.  

 

이것이 케인즈주의자들의 공황에 대한 전형적인 설명이고, 따라서 케인즈주의자들은 총수요가 위축되는 초기 국면에 정부가 적절하게 개입해, 추가적인 수요위축을 막고 경기를 부양시킴으로써, 다시 자본가의 금고와 소비자의 지갑을 열게 해 성장과 완전고용을 달성하자고 한다.

 

그렇다면 총수요는 왜 갑자기 부족해지는 것일까? 케인즈주의자들은 대개 유동선 선호나 투기에 따른 활황과 그 붕괴, 이를 가능케 한 금융의 과대성장 등을 주요이유로 뽑는다.

 

이에 반하여 마르크스 경제학은 경제공황의 원인을 자본의 운동 그 자체에서 찾는다. 자본론에 따르면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적 운동의 지배적인 동인은 자본의 축적 그 자체이다.

 

가치를 증식하려는 자본의 축적이 착취의 형태(절대적·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와 이에 따른 새로운 생산기술의 도입과 노동과정의 변형, 그리고 산업순환과 산업예비군의 양산(자본주의적 축적의 일반법칙), 내적 모순의 발현(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법칙) 등을 결정한다.

 

따라서 마르크스 경제학은 당연히 공황같은 경제현상의 분석을 총수요 같은 개념이 아니라, 자본의 운동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므로 김수행 교수의 언급은 전혀 마르크스주의적이지 않다. 마르크스 경제학자라는 스스로의 언명과 달리 오히려 케인즈주의자 같다.

 

물론 이 말이 케인즈주의적 분석은 무조건 옳지 않다는 도그마적 선언은 아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한다면 마르크스주의자답게 말하라는 것이다. <자본론으로 한국경제를 말하다>라는 책 제목과 달리 실제 내용은 케인즈주의적 대안이라니, 얼마나 요상한가? <케인즈로 한국경제를 말하다>라고 책 제목을 고쳐 짓는 것이 양심적이다. 

 


김수행 교수가 말하는 장기불황의 원인 : 소비위축과 주주가치 극대화

 

김수행 교수가 얼마나 마르크스 경제학자답지 않은지에 대해서 다른 사례를 들어보겠다. 아래는 민중의 소리 12월 22일자인, “죽은 산업생산이 경제 전체를 끌어내리고 있다” 라는 제목의 김수행 교수 인터뷰 기사이다. 일부를 다소 길지만 인용하겠다.  

 

“내가 볼 때는 단순히 금융부분에서의 위기가 온 게 아니고 경제체제 전체로서의 위기가 왔다. 금융을 살리려 해도, 이자율을 낮추더라도 경제가 안 살아나서 아래로 빠진 것이다. 산업생산 부분이 회복을 못해서 전체를 끌어당기고 있다.”
- 산업생산이 죽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1950-60년대 자본주의 황금기에서 복지국가가 매우 잘 확립이 돼 있었고 노동계급의 힘이 굉장히 컸다. 모두가 나누면서 더불어서 산다는 개념 때문에 자본주의가 발달하지 않는다고 신자유주의자들은 생각했다. 1980년 이후 대처와 레이건이 대표적이다. 오히려 부익부 빈익빈이면 자본주의가 더 발달한다고 봤다. 그래서 나온 것이 사회보장제도를 깎는 일이었고, 그 다음에 노동운동을 못하게 노동법을 개악하고 해고를 늘리고 노동의 유연화를 강조했다. 이렇게 해버리면 금방 나오는 것이 국내시장이 확 좁아지는 것이다.
실제로 누진세에 의해 사회보장제도가 확립되고 병원이나 학교나 실업수당이나 저소득에 대한 보조나 이런 게 굉장히 늘어난다. 이게 사실 국내수요를 만들어 시장을 확대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안되니 선진국의 국내시장이 좁아지면서 세계시장도 좁아진다. 물건이 안 팔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세계화 전략이 나왔다. 선진국 정부가 무역자유화, 외환자유화 얘기가 그래서 나온거다. 산업생산이 확대되는 것이 아니라 금융산업이 확대됐다. 97년 한국공황이 왔을 때 당장 우리 주식시장을 다 잡고 부를 빼가는 식으로 했다. 금융활동, 주식 채권 외환을 사고팔아 이윤을 보는 것, 파생으로 이윤 보는 것, 소비금융은 부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주머니 돈을 훑어내는 사기적인 것이다. 금융은 실제로는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지 못한다. 금융부분의 이윤은 생산은 없고 전부 주머니를 터는 것이다.
두 번째로 기관투자가들이 거대 주식회사의 최대주주가 됐다. 이들은 산업기업이 장기적인 전망을 갖고 R&D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배당을 내놔라, 주가를 올려라 해서 이익을 보려고 했다. 그러니까 경영진에게 스톡옵션을 주고, 노동유연화 시키고, 나중에 가서는 회계조작해서 단기순이익을 올려 기업이 많이 망하게 했다. 산업 육성이 안됐다. 그러니 아무리 금융에 돈을 줘도 안 올라가는 것이다.”

 

김수행 교수는 현재 세계대공황의 진원지를 금융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올바르게도 “산업생산 부분이 회복을 못해서 전체를 끌어당기고 있다”며, 1974-75년 공황 이후 자본주의적 생산이 겪고 있는 장기불황(1950~60년대 자본주의 황금기에 비교한 연간 성장률의 하강을 의미한다)이 대공황 분석의 핵심임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세계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서는 거의 공리로 굳혀진 사실이다.  

 

그러나 김수행 교수의 마르크스주의자다운 면모는 딱 여기까지이다. 이어서 김수행 교수는 세계대공황의 원인을 아래같이 두 가지로 말하는데, 이는 진보적일지는 몰라도 마르크스주의적이지는 않다.  

 

① 신자유주의(“사회보장제도를 깎는 일이었고, 그 다음에 노동운동을 못하게 노동법을 개악하고 해고를 늘리고 노동의 유연화를 강요했다”)에 의한 소비위축
(*김수행 교수는 “국내시장이 좁아지면서 세계시장도 좁아진다”라고 표현하는데, 사회보장제도나 노동운동은 소비수요에 관계되는 것이므로 투자수요까지 포괄하는 시장이라는 용어보다는, ‘소비’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김수행 교수의 주장을 정확하게 전달하는데 적절한 듯하다.)

 

② 주주가치 극대화(주주이익 우선)에 따른 기업의 단기이익 극대화 추구
(*위 인용문 중 “두 번째로 기관투자가들이 거대 주식회사의 최대주주가 됐다 ~ 산업 육성이 안 됐다” 부문 참조) 

 

위 설명방식은 분명 진보적인 측면이 있다. ①은 복지확대 및 노동운동 강화가 대안이 되어야 한다는 근거로 역할 할 수 있고, ②도 주주뿐만 아니라 노동자, 지역사회, 소비자 등의 모든 이해관계자가 기업경영에 관계해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로 쓰일 수 있다. 실제로 이러한 설명방식은 한국의 진보적인 경제학자들에 의해서 자주 주장된다. 특히 ②의 주장은 금융자본주의 비판이라는 명목으로 대안연대회의 등에 의해 빈번히 소개됐던 주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분석은 전혀 마르크스주의적이지 않고, 그 자체로도 (부분적으로는 옳을지 몰라도 핵심을 놓치고 있다는 의미에서) 틀린 말이다. 마르크스주의적이지 않다는 것은, 이러한 종류의 분석들이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닌 케인즈주의자, 제도학파 등에 의해서 주로 주장된다는 점을 봐도 알 수 있다. 올해 흥행했던 장하준 교수의 시각도 김수행 교수의 설명방식과 기본적으로 비슷하다. 

 

그리고 소비위축과 주주가치 극대화가 장기불황의 원인이라면, 기업지배구조 개선과 소비팽창이 탈출구라는 소리인데, 과연 그러할까?

 


기업지배구조 개선과 소비팽창이 탈출구가 될 수 없는 이유

 

주주가치를 제한하는 기업지배구조 개선이 경제위기 대안의 하나가 될 수 없는 것은 주주가치 극대화를 쫓는 영미식 모델뿐만 아니라, 상대적으로 경영이 소유로부터 더 독립적인 독일·일본 모델도 동시적인 공황에 직면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으로도 충분하겠다. 


그리고 소비팽창이라는 케인즈주의적 해법이 답이 될 수 없는 것도, 우리는 케인즈주의적 해법이 이미 실패한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1970년대 이후 인위적인 소비진작정책은 줄곧 짧은 붐을 낳고는 거품붕괴에 직면했다.  

 

이에 대해 김수행 교수는 신자유주의 하에서의 소비진작정책은 구조적인 양극화라는 부실한 기반 위에서 집행되었기 때문에 치유책이 될 수 없었다고 답할 수 있겠다. 그리고 복지확대와 고용안정, 임금팽창이라는 총수요 확대정책은 견실한 기반으로 작용하여, 경제가 다시 견조한 성장과 안정이라는 레일 위를 달리도록 하게 할 것이라고 주장할 것 같다.  

 

그러나 김수행 교수가 경제위기의 주범으로 지적하는, 양극화를 유발한 복지축소, 노동유연화, 임금억압은 그 자체로 자본을 살리고, 경제를 팽창시키는 힘이기도 하다. 신자유주의 조치로부터 자본이 어떠한 이익도 얻을 수 없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신자유주의의 본질은 부를 직접적으로 노동으로부터 자본으로 이전시키는 약탈이었고, 이로부터 자본은 당연히 이익을 누렸다. 그런데 왜 세계자본주의는 장기불황으로부터 탈출하지 못했을까?  

 

이러한 질문에 반노동 정책은 개별적인 자본에게는 이익일지 몰라도, 경제 전체적으로는 총수요를 위축시켜 불황을 장기화하는 것이라고 답하는 것은 극도의 어리석음이다. 이 말이 참이라면 이제까지의 자본주의는 어떠한 공황도 극복하지 못했을 것이다. 공황기에는 의례 실업의 증가와 임금감소 등 소비위축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자본은 공황기의 조건으로부터 착취율을 높이고 이윤율을 개선하여, 다시 힘찬 축적을 위한 조건을 확보한다. 자본의 축적이 재개되면 새로운 공장이 세워지고, 고용이 창출된다. 개별적인 자본의 수익성 개선과 이에 힘입은 축적의 재개는, 사회 전체적으로 투자수요와 증대와 이에 의한 부가적인 소비수요의 증대를 가져와 경제 전체를 회생시키는 것이다. 공황은 이러한 메커니즘으로 극복돼 왔다(물론 이 말이 1950년 이후의 케인즈주의적 공황극복책이 효과적이지 않았음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현재 세계자본주의는 신자유주의라는, 자본의 착취적인 본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반노동 공세로도 극복이 안 되는 심각한 구조적인 문제를 겪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신자유주의 정책도, 인위적인 수요진작책정책도 해결책이 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1974-75년 공황 이후 세계 자본주의가 겪고 있는 심각한 구조적 문제점의 극복 없이, 김수행 교수가 말하는 양극화 해소를 통한 총수요 부양도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사실 김수행 교수가 제안하는 양극화 해소를 위한 정책들은 전부 자본의 수익성을 악화시키는 것들이다. 자본의 수익성이 악화되면 당연히 자본가의 투자능력과 의지도 좁아진다. 따라서 경제는 투자수요 위축에 직면해 하강하게 된다. 이러한 하강경향을 어떻게 조정할 것(가령 개별자본의 이윤에 대한 조세 수취 강화와 이에 기반한 사회적 투자 등)인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총수요 부양만 말하는 것은 경제학 초짜나 저지를 실수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세계자본주의를 늪에 빠트리고 있는 구조적 문제란 무엇인가?

 


장기불황의 원인은 자본의 과잉축적에서 구해져야 한다

 

과잉자본이란 모든 자본이 가치증식하기에는 서로가 장애가 되는, 모든 자본이 안정적으로 축적하기에는 상대적으로 많은 자본이 존재하는 상태를 말한다. 과잉자본은 자본이 순환하는 과정(화폐-생산수단/노동력-생산-상품-화폐′)에서 취하는 화폐, 설비, 노동력, 상품 등의 형태에 따라, 투자의 기회를 잡지 못하는 과잉화폐, 가동률 저하를 겪는 과잉설비, 노동과정에 들어가지 못하는 과잉노동력, 창고에 진열대에 가득 쌓이는 과잉상품 등의 다양한 형태로서 존재한다. 

 

과잉자본의 상태에서는 기존에 자본으로 하여금 활발한 축적을 가능하게 해주였던 이윤율이 저하한다. 기존의 적절한 수준의 이윤율이 유지되기에는 상대적으로 많은 상품이 생산되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은 상품판매를 위해 가격인하에 경쟁적으로 나서야 하며, 또는 비용압박에 직면해서도 쉽사리 가격을 올리지 못하는, 그대로 이윤의 감소를 감수해야 되는 상황에 처한다. 과잉자본과 과잉생산은 짝패이며, 이는 자본에게 있어 이윤율 저하로 드러난다.

 

과잉자본 하에서의 이윤율 저하는 우선 생산성이 낮고, 높은 비용으로 생산하는 자본을 먼저 압박해 도산의 위기에 처하게 한다. 그리고 과잉생산, 과잉설비의 상황에서 자본은 새로운 기계의 도입, 공장건설 등에 거의 나서지 못하게 된다. 설비투자는 점점 모험적이 것이 되고, 따라서 자본가의 실제 투자능력보다도 못 미치는 산업에서의 과소투자가 발생한다. 이윤 중 더 많은 부분이 새로운 노동력과 설비의 구매에 투하되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금융에 투하된다. 즉 배당과 이자를 낳는 주식과 채권의 구매, 앞으로 가격이 오를 것으로 보이는 자산, 상품의 투기에 화폐가 몰려든다. 산업에서의 과소투자와 맞물러 금융이 과대성장한다.

 

경쟁의 격화로 자본의 폐기 혹은 이윤을 낳지 못하는 부문에서의 자본철수가 본격화되면 이에 따라 과잉자본에 고용돼있던 노동력도 방출되고, 산업순환은 침체에 빠진다. 잉여가치를 창조하는 생산영역에서의 침체는 곧바로 금융부문에서의 위기로 전염된다. 제한된 이윤획득의 기회에 비해서 너무나 많이 몰린 투기자금이 만들어낸 거품은 폭발하고, 금융공황이 발생한다. 금융공황은 신용을 위축시키며, 채무와 신용으로 기계를 돌리던 자본가들을 파멸로 몰아간다. 따라서 산업부문도 공황에 빠진다. (*이는 공황이 일어나는 여러 과정들 중의 하나의 예일 뿐이다.)

 

그런데 현재 세계자본주의는 위에서 묘사한 과잉자본의 상태에 직면해 있다. 지금 세계자본주의가 겪고 있는 과잉자본의 상태는 특히 자동차산업의 과잉설비에서 잘 드러난다. 1980년대부터 과잉설비의 문제점을 노출한 세계자동차산업의 과잉생산능력(생산능력-생산대수)은 1990년에는 1,300만대 수준이었고, 2001년에는 2,300만대 수준까지 증가했다. 09년에는 과잉생산능력이 2,900만대에 달할 것이라고 예상되고 있다. 과잉생산능력의 존재로 자동차산업의 가동률은 60~70%대(정상수준 80%)에 머물러왔고, 이는 유휴설비에 투자된 자본의 현금화, 즉 자본의 순환을 지연·단절시킴으로써 자동차산업의 수익성을 악화시켜왔다.

 

김수행 교수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라면 당연히 과잉생산, 과잉자본에 대해서 말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과잉생산, 과잉자본은 바로 자본의 축적과정 자체가 내포하고 있는 모순의 발현임을, 즉 자본의 축적 자체가 위기와 공황의 이유임을 말해야 한다. (*자본의 축적이란 종자돈을 불리듯이 자본이 자신의 덩치를 불려가는 것을 말하고, 과잉축적은 과잉자본을 만들어내고 있는 자본축적의 상태를 의미한다.) 과잉축적론이 마르크스주의자에게 특히 중요한 것은, 이러한 설명이 자본주의가 내포하는 구조적인 문제를 가장 잘 드러내기 때문이다. 과잉축적에 대한 이해는 왜 자본 자신이 자기 자신의 한계인 점과, 자본주의 모순의 필연적인 발현에 대해서 인식하게 해준다. 그러므로 우리의 실천을 자본주의 그 자체에 대한 극복으로 모아질 수 있게 해준다. 

 

 

과잉축적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러나 과잉축적론이 경제위기에 대한 설명에 있어 만병통치약이 될 수는 없다. 과잉생산, 과잉자본은 자본주의 하에서 경제위기가 드러나는 현상이지, 원인 그 자체는 아니다. 과잉자본과 자본주의적 경제위기는 사실상 동의어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잉생산, 과잉자본을 낳는 것이 자본의 축적 그 자체인데, 왜 자본축적이 과잉축적으로 돌진하게 되는지는 언제나 구체적인 분석을 요구한다.  

 

가령 세계자동차산업에서 지속적으로 과잉생산능력이 증대해온 것은 세계적인 자동차업체들이 수요가 늘어나는 지역시장(중국, 러시아, 브라질, 인도 등)을 선점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설비를 증설(특히 현지공장 건설)해왔기 때문이다. 만성적인 과잉설비에는 한국이 한 몫을 톡톡히 담당했는데, 과잉중복투자의 전형이었던 삼성자동차나, 지금 위기의 와중에도 체코와 러시아에 신규공장을 건설 중인 현대차의 공격적인 경영행태를 보면 알 수 있다. (즉 현실의 경쟁은 자본을 과잉축적으로 내몬다. 이 과정에서 경영자의 공격적 성향이나 잘못된 판단은 과잉축적의 계기로 작용하기도 한다.)  

 

자동차산업에서 과잉설비의 또 하나의 이유는 자동차산업이 고용, 생산 및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고 전후방 연관효과가 커서 경제위축을 우려한 국가의 개입으로 낡고 경쟁력이 떨어지는 설비의 폐기가 지연돼왔기 때문이다(이번의 GM 구제금융 논란도 같은 맥락이다). 

 

국민경제에서 자동차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에 따른 정부개입과 세계시장에서의 무한경쟁이 과잉설비를 구조화시킨 것이다. 

 

세계제조업 전체 수준에서의 과잉설비에 대해서 미국의 마르크스주의자인 로버트 브레너는 미국·일본·유럽 간의 국제적 경쟁 격화를 지적하며, 그 이유들 중 하나로 경쟁자의 신설비 도입에 직면해 이윤율 저하를 겪는 자본가들이 막대한 자본이 투자된 고정자본의 폐기 대신, (어차피 고정자본은 매몰비용이기 때문에) 유동자본 대비 평균이윤율만 얻을 수 있다면 해당분야에 잔류하는 선택을 한다는 것을 든다. 즉 자본으로 기능하기 위한 최소자본의 규모가 늘어나면서 자본의 청산과 이동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편 마르크스주의자들 중 생산영역의 모순을 강조하는 근본주의자들은 1970년대 이후의 장기불황과 이윤율 저하에 대해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고도화되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사실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서 과잉축적이나 이윤율 저하 추세의  핵심원인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잘 정리돼 있지는 않다. 그러나 이 점이 마르크스 경제학자가 장기불황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설명을 포기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김수행 교수의 이율배반적인 결함은 어떻게 설명돼야 하나?

 

김수행 교수가 여러 인터뷰에서 마르크스주의적 설명을 포기하는 것은, 그의 이론적 활동에서의 성실함에 비교하면 상당히 의외이다. 김수행 교수가 한국 마르크스주의 연구에 큰 발자취를 남긴 뛰어난 학자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의 이율배반적 결함은 어떻게 설명되어야 하나? 그런데 이의 설명에서 김수행 교수의 개인적인 특성을 이유로 드는 것은 어떤 교훈도 주지 못할 것이다.  

 

김수행 교수의 공황론에 대한 글들을 읽어보면, 그가 이윤율 저하경향 법칙을 공황론의 핵심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김수행 교수의 이윤율 저하경향 법칙에 대한 이해는 벤 파인과 로렌스 해리스의 해석에 의존하고 있다.  

 

파인과 해리스의 이윤율 저하경향 법칙에 대한 해석의 특징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이윤율 저하경향 법칙은 경험적 예측이 아니라, 이윤율 추이에 대한 모순되는 두 경향(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 경향과 이를 상쇄하는 경향)을 가리키는 것이며, 실제의 이윤율 추이는 모순되는 경향들의 힘과 배치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비되는 해석이 근본주의자들의 것인데, 근본주의자들은 상쇄경향에도 불구하고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 때문에 이윤율은 저하하기 마련이며, 현실에서 이윤율 저하경향 법칙이 관철된다고 본다.  

 

그리고 두 번째 특징은 이윤율 저하경향 법칙이 주기적 공황의 설명에 직접 적용되는 것이라고 본다. 이에 반하여 김성구 교수 등은 이윤율 저하경향 법칙은 자본주의의 장기 추세에 적용되는 것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이러한 특징은 이론적 실천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 단적으로 파인과 해리스는 1970년대 이후의 장기불황에 대해서 의미있는 연구서를 낸 적이 없다. 그들의 이윤율 저하경향 법칙에 대한 해석이 이론적으로는 아무리 엄밀하더라도, 실제의 경제분석에 있어서는 실질적인 도움을 거의 줄 수 없기 때문이다.  

 

매번의 공황을 이윤율 저하경향 법칙이 야기하는 모순들의 발현으로 해석하는 것은 사실상 매우 어려운 작업이다. 즉 모순되는 두 경향을 계량화하기도 힘들뿐더러, 사실 두 경향은 장기적인 과정과 시기를 통해 관철되는 것인데, 대략 십년주기의 공황을 매번 이러한 힘들의 변화로 설명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공황의 설명에 직적 적용하는 해석방식으로는 20~30년에 걸친 장기불황과 같은 장기추세의 설명에 있어서는 취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이론 적용의 어려움이 현실의 분석에 있어 김수행 교수를 무능하게 하고, 따라서 비-마르크스주의적인 설명들을 차용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만약 우리가 김수행 교수의 이론활동에 알게 모르게 의존하고 있는 것이라면, 김수행 교수가 의존하고 있는 이론틀(이윤율 저하경향 법칙에 대한 고유한 해석)을 교체하거나, 혁신해내는 것일 게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마르크스주의라면 마르크스주의자답게 말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 경제학의 (자의든 타의든) 권위자를 자처하며, 장기불황의 원인과 대안에 대해 신자유주의니 내수경제니 운운하는 것은 영 아니올시다이다. 바로 자본주의 자체가 문제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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