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과 9월은 도대체 뭘 했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로 후딱 지나가 버렸다. 정신을 차려보니 시애틀은 벌써부터 잔뜩 지뿌린 하늘로 겨울 분위기를 내고 있고, 11월 출시를 예정으로 한 제품 개발은 마지막 마무리 단계에 들어가고 있더라. 다음 주에 엄하게 텍사스 출장을 다녀올지도 모르겠어서, 가면 정신 없을 수 있으니 이번 주말에 왠만한 개인 업무는 정리해 놓는게 좋을 것 같다. 그래서 부랴부랴 정리하는 이번 달 책소개.
Encounter
- Essay / Milan Kundera / Harper
우선 단연 눈에 들어오는 책은 밀란 쿤데라의 신간이다. 소설은 아니고, 음악, 미술, 문학 등 문화 다분야에 걸칠 평론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사실 그의 책은 소설 외에는 읽어본 적이 없어서 뭐라 말할 수는 없지만, 비슷한 성격의 다른 책들이 꽤 좋은 평을 받고 있고, 특히 문학 서평들은 남다른 깊이를 지니고 있다고 하니 기대해도 좋을만한 책으로 보인다.
The Typist
- 소설 / Michael Knight / Atlantic Monthly Press
2차 대전 직후 일본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깔끔한 일본풍의 표지가 눈길을 끈다. 전후(즉 원폭 이후) 일본의 모습도 관심이 가지만, 소설이 풍기는 전체적인 분위기가 담백한 것이 인상적이다. 독자평을 봐도 꾸밈없고 간결한 문체가 인상적이라고 하는데, 근래 미국 문학에서는 그리 흔치 않은 스타일이다. 미국 작가에 의한 일본 문학의 재현 같은게 아닐까 싶어 한 번 읽어볼 예정이다.
A Novel Bookstore
- 소설 / Laurence Cosse, Alison Anderson(Tr) / Europa Editions Inc.
재밌는 컨셉의 소설이다. 이반과 프란체스카는 파리 한 구석에 "Good Novel" 이라는 서점을 연다. 이 서점은 다른 서점들과는 달리 일군의 작가들로 구성된 비밀 평의회(?)에서 선정된 "좋은 책"들만을 판다는 것이 특징. 서점이 처음 문을 열었을 때는 엄청난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키며 상당한 판매고를 올리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비판적인 언론과 경쟁서점의 등장, 그리고 급기야 책 선정 평의회 구성원에 대한 살해 위협 등이 가해지면서 어려움에 처하게 되는데... 추리 소설이긴 하지만, 설정 그 자체만으로 생각할 거리가 많아 보인다.
Blacksad
- 만화 / Juan Diaz Canales, Juanjo Guarnido / Dark Horse Comics
2000년에 프랑스에서 처음 선보인 만화인데, 최근 미국에서 합판본(?)으로 번역되어 나왔다. 등장 인물은 모두 의인화된 동물들인데, 느와르 풍의 사실적인 그림체가 인상적이다. 강도하의 [위대한 캐츠비]와 유사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세밀한 화풍이다. 주인공은 사설 탐정인 검은 고양이. 주된 내용은 평온한 사회 이면에 가리워진 인종적 차별/편견과 성적 억압 등을 다룬다고 하니, 사회적인 메시지도 가볍지 않아 보인다.
The Icarus Syndrome
- 정치 / Peter Beinart / Harper
부제는 A History of American Hubris, 미국의 자만의 역사 되겠다. 이 책은 크게 3가지 사례를 통해 미국이 왜 세계 정책에서 실패해 왔는가를 분석한다. 첫째는 이성만으로 상대를 설득할 수 있을거라 믿었던(그래서 결국 세계대전을 방관했던) 우드로 윌슨, 둘째는 상대를 강하게 밀어부치면 굴복할 것이라 믿었던(결국 베트남전에서 패배한) 케네디-존슨, 그리고 마지막으로 압도적 군사력으로 손쉬운 승리를 얻을거라 믿었던 부시 행정부. 저자는 이들의 공통점이 바로 Hubris 자만이며, 자신의 능력에 도취되어 객관적 상황분석과 판단을 방기한 것이 미국 외교정책의 실패로 이어졌다고 주장한다. 너무 높이 날아오르다 떨어진 이카루스 처럼.
Half a Life
- 회고록 / Darin Strauss / McSweeneys Books
18년 전, 당시 18세였던 저자는 차를 몰고 가다가 자전거를 타고 있던 같은 학교 동급생이었던 여학생을 치어 숨지게 한다. 그의 과실이 아니었던 것으로 판명되어 법적인 책임을 묻지는 않았지만, 사람을 죽게 했다는 사실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로부터 18년 동안 저자는 매일 자신이 누군가를 죽였다는 죄책감을 안고 살아가야만 했다. 일기처럼 기록해 온 글들 일부가 친구 권유로 NPR(National Public Radio)에 소개되면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결국 이렇게 책으로 묶여 나왔다. Half a Life. 반평생 짊어지고 살아온 죄책감의 무게는 쉽게 가늠되지 않는다.
Finders Keepers
- 고고학 / Craig Childs / Little Brown & Co.
고고학에서 발굴은 과연 누구를 위한 활동일까? 물론 명분으로는 "인류"의 유산 어쩌고 떠들지만, 그 이면에는 발굴자 개인의 영달, 자금을 댄 '스폰서'의 탐욕, 제국주의의 폭력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게 마련이다. 그로 인해 인류 역사에서 발굴과 약탈의 경계는 매우 희미했다. 이 문제를 다루면서 저자가 이 책을 통해 주장하는 바는 아마도 "발굴의 윤리학" 같은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