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d for every future women writers. 

 


   “I know it’s hard to write, darling. But it’s harder not to.”  

http://therumpus.net/2010/08/dear-sugar-the-rumpus-advice-column-48-write-like-a-motherfucker/ 

"I often explain to my mother that to be a writer/a woman/a woman writer means to suffer mercilessly and eventually collapse in a heap of “I could have been better than this.”  

 

   “The first product of self-knowledge is humility,”  --- Flannery O’Conn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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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부 일종의 입문 

  3. 특성없는 남자의 특성 있는 아버지 
  4. 현실성감각이 있다면 가능성감각 또한 있어야 한다 
 

 

 

  

특성있는 아버지 

아버지는 성을 사들인 아들이 “가정적 생활과 자기만의 질서에 대한 필요”를 알게 된 것을 환영하는 한편, 어쨌든 ‘성’이라 부를 수밖에 없는 건물을 산 것은, “불행을 자초하는 주제넘은 짓”이라 생각하여 불안해했다.

귀족가문의 가정교사로 출발하여 변호사와 교수, 상원의원까지 오르는 자수성가에 성공한 그의 아버지에게서는 “더 잘되고자 노력하는 시민계급의 정신 이외의 무엇인가 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의 아들이 주장하였듯이 “본질적인 변화 없이” 가정교사로부터 상원 의원으로 출세한 것이다.  

 

그런 아버지에게 아들의 '성'은 "법으로 다루어지기에는 미흡하지만 그런 만큼 더 조심스럽게 지킬 필요가 있는 한계의 침범처럼 보였다."    

 

 

  

  

 

현실태와 가능태  

 

   

특성 있는 아버지의 원칙은 현실성의 감각이 요구하는 바와 같다. 

 열린 문 사이로 들어올 생각이 있다면,  문에는 단단한 '틀', 즉 엄연한 현실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작자는,

 이렇게 현실성감각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명명백백하다면, 가능성 감각이라 부를 수 있는 그 무언가도 가져야 한다고 본다.  

 

가능성에 대한 감각은, 현실태와 비슷하게 존재할 수 있는 다른 모든 것을 생각해내는 능력,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에 차등을 두지 않는 능력이다. 즉, 안개와 상상, 몽상과 접속법의 그물 속에서 사는 것이다. 어른들은 이런 경향이 아이들에게 보일 가능성을 애써 추방하며, 이런 감각을 가진 사람들을 '기인, 몽상가, 약골, 꼴값, 또는 까다로운 친구'라고 흉본다.  

 

가능태는 아직 실현되지 않은 하느님의 의도이기도 하고, 그 안에 정말 신과 같은 무엇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따지고 보면 지구는 전혀 오래 된 것이 아니며, 겉보기에 한 번도 제대로 축복 받은 상황 속에 있었던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가능성을 일깨우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현실성이다.  

현실태가 머리 속의 그것과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올 때까지 가능성은 반복된다.  

그는 현실성의 감각과 가능성에 대한 감각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에게 가능태는 곧 아직 태어나지 않은 현실이며, 현실은 가능한 현실에 대한 하나의 의미이다. 

 

이런 그는 보통 사람들이 가능성에 대해 상정하는 것보다 훨씬 느리게 가능성의 목표에 이르고,  

 나무가 아닌 숲을 원하며, 아주 한가롭게 낚시대를 드리우고 있는 '비실용적인' 인간이다.    

 이는 그의 약점인 동시에 힘이다.   

 

 

--------------------------------------------------- 

여기까지는 비교적 간단한 요약이 가능한데, 4장을 끝맺는 마지막 문장은, 원문 자체가 모호한 것인지, 아니면 번역 퇴고가 미흡한 탓인지, 이해를 위해서는 문장 분석이 더 필요하다. (원문을 찾아보고 싶은 문장이다)   

   



 “그리고 특성의 소유가 현실에 대한 일종의 기쁨을 전제로 하고 있기에, 자기 자신에게 어떤 현실성감각도 더 필요하다고 느끼지 못하는 사람한테 불쑥 닥칠 수 있는바 자신이 어느 날 특성 없는 남자로 생각되는 것에 대한 전망을 그것은 허락한다.”


 이 문장의 논리를 내 나름대로 분리해서 이해하면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해석해볼 수 있다.

첫번째 해석,   

 

1. 특성의 소유는 현실에 대한 일종의 기쁨을 전제로 한다.

2. 자기 자신에게 어떤 현실성감각도 더 필요하다고 느끼지 못하는 사람  

= 위에서 얘기한 ‘현실성의 감각과 가능성의 감각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사람’ ? : 현실성 감각이 아예 없는 것이 아니라 '더 필요하다고 느끼지 못하는' 것이니까. 이 부분은 '특성 없는 남자'에 대한 정의와 직결되기에 확실히 확인하고 넘어갈 부분이다.

 3.  2의 사람, 즉 현실성의 감각이 더 필요하다고 느끼지 못하는 사람 -> ‘현실에 대한 일종의 기쁨’이 없다?  

4. 따라서 “내가 그동안 특성 없는 남자였구나” 하는 전망(자각?)이 불현듯 찾아온다.

 

이 해석에 맞게 좀더 쉽게 문장을 고쳐보면, 대충 다음과 같이 될 것 같다. 

“특성의 소유는 현실에 대한 일종의 기쁨을 전제로 하는데, 어떤 현실성감각도 자신에게 더 필요하다고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그런 기쁨 또한 느끼지 못하기에, 어느 날 문득 그에게는 특성 없는 남자로서의 자각이 불쑥 찾아올 수 있다.” 
 

 

두번째 해석, 

 

1. 특성의 소유는 현실에 대한 일종의 기쁨을 전제로 한다.  

 

2. 자기자신에게 현실성에 대한 감각이 더 필요하다고 느끼지 못하는 사람 

 

3, 그런 사람에게도 현실에 대한 일종의 기쁨이 '불쑥' 찾아올 수 있다.  

 

4. 그때, 그는 "아 지금까지(현실에 대한 기쁨을 느끼지 못하기에 현실성을 더 감각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었던 시기) 나는 특성 없는 남자로 살아왔구나"라는 자각을 하게 된다. // "아, 나는 지금까지 특성 없는 남자로 생각되었겠구나"하는 전망이 허용된다.  

 

=>  "특성의 소유는 현실에 대한 일종의 기쁨을 전제로 하는데, 어떤 현실성감각도 자신에게 더 필요하다고 느끼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현실에 대한 일종의 기쁨이 불쑥 닥칠 수 있는바, [그 기쁨을 느끼게 된] 어느날, 그에게는 자신이 특성없는 남자였다는 자각이 허용된다."    

 

  
나로서는 첫 번째 해석 쪽이 더 논리에 맞다고 생각되는데,    

번역문의 표현이나 문장구석 선택[왜 굳이 무리해서 저런 어색한 문장을?]을 감안하면 두 번째 해석 쪽에 무게가 실린다.  

 


 


 하지만, 이는 원문을 찾아보기 전까지는 어디까지나 두 가지 가능태로서의 이해에 불과하니, 나는 원문, 즉 작자의 본래 의도를 내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이렇게 몽상과 접속법의 한가로운 그물을 드리우고 강태공이나 하고 있을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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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빠른비숍 2010-08-04 2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서관에 이 작품의 영문판이 소장되어 있다는 걸 방금 확인했다. 아무래도 조만간 대출해서, 원문은 아니지만 참고해 가며 읽어야겠다.

발빠른비숍 2010-08-18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어판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And since the possession of qualities assumes a certain pleasure in their reality, we can see how a man who cannot summon up a sense of reality even in relation to himself may suddenly, one day, come to see himself as a man without qualities." -> "그리고 특성의 소유는 그 현실성에 대한 일종의 기쁨을 상정하는 바, 우리는 자기 자신과 관련된 현실에조차도 현실성 감각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한 남자가, 어떻게 어느날 갑자기 자신이 특성없는 사람임을 깨닫는지 볼 수 있을 것이다."

// 문장은 간단하지만, 중의적 해석이 가능하도록 번역된 영어판만 봐서는, 나의 두 가지 해석 중 어느 쪽이 맞는지 여전히 판단하기 어렵다. 다만 역시 이 문장의 해석 키워드가 "현실에 대한 기쁨", "특성없는 남자의 자각" 사이의 인과관계(왜 'sinse'인가?)에 있음은 영어판의 [의도적인?] 중의적 번역으로 인해 더욱 분명해졌다. 이 부분은 책을 계속 읽어나가면서 어느 정도 결론이 날 것으로 보인다. (이 부분은 독일어 원문에도 애매하게 처리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

박준하 2011-07-18 0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너무 너무 늦은 댓글입니다만...

Und da der Besitz von Eigenschaften eine gewisse Freude an ihrer Wirklichkeit voraussetzt, erlaubt das den Ausblick darauf, wie es jemand, der auch sich selbst gegenüber keinen Wirklichkeitssinn aufbringt, unversehens widerfahren kann, daß er sich eines Tages als ein Mann ohne Eigenschaften vorkommt.

출처: http://nicoosi.blogspot.com/2010/11/wenn-es-wirklichkeitssinn-gibt-mu-es.html
좋은 하루되셔요♧

박종대 2012-02-23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독일어 번역가입니다. 검색중에 우연히 들렀다가 흥미로운 대목이 있어 몇 자 남깁니다.

특성을 가진다는 것은 그 현실에 대한 일정한 기쁨을 전제로 하기에 자기 자신에게조차 현실성감각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어떻게 자신을 특성 없는 남자로 느낄 수 있는지에 대한 전망이 가능하다.
 

 

Loose leafs from the New Yorker Books Department.


 

내가 좋아하는 북 칼럼,   

힘겹게 걸어가다 문득 만난 낡은 벤치에 앉아 한 숨 돌리면 그 작은 시공간이 오롯이 나의 것이 되듯이..  

이러니저러니해도 나에겐 책만이 휴식.   

http://www.newyorker.com/online/blogs/books 

 

 그 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코너는     

1000 Words 

Great images of books from around the world and the Web.  

전세계에서 독자들이 보내오는 책과 관련된 이미지들로 꾸려지는 코너다.  



이번 주는 북벤치도 월드컵  :-)    

 남아공으로 축구를 보러 간 사람이 보내온 "게임 관람 중간중간에 책 읽기 좋은 해변" 소개 ^^



 

The World Cup kicked off today, with a game between South Africa and Mexico (final score: 1-1). If you're in South Africa and looking for the perfect spot to unwind with a good book in between games, why not head to the beach at Kraalbaai? The photographer writes:

The best things about Kraalbaai:

- It's only 100km's from Cape Town
- It costs R15 per person entry ^^
- It's never really windy
- The lagoon is warm
- No sharks (except loads of friendly sand sharks)
- Calm
- Nature Reserve


Read more: http://www.newyorker.com/online/blogs/books#ixzz0qikQaHcI 

  

 Can be you?   



 A woman reads on the beach in Greece.     ( 나도 이런구도 사진 은근히 많은....;;;  )

Read more: http://www.newyorker.com/online/blogs/books/1000-words/17.html#ixzz0qj5u35ri

 

 

 그리고, 이건 몇 주 전 것인데,  부럽기도 하고 내 얘기 같기도 하고.... 


kindle_ipad_nabokov
 

Decisions, decisions. A reader, Anuradha Raja, snapped this photo, and writes:

I have been using the Kindle since October, the iPad for one month, and I still buy books, lots and lots of them.

It’s a paradox of choice. In the evenings, after work, trying to figure out what suits my mood, I sit with all three of them. I am reading Nabokov’s “Despair” (the dead-tree version), trying out a free sample on the iPad (trying out samples is simpler on the iPad), and am midway through “To Kill a Mockingbird” on the Kindle. I still prefer the Kindle to the iPad for reading books, because with the iPad there is always so much more to do. I use it primarily to follow blogs like yours.

But, believe me, books (the hard copies) are not going anywhere. They rule.


“Peaceful Coexistence,” by Anuradha Raja. 



그리고,  풍경 속의 책, 책 속의 풍경  




Whimsy under the pergola. Snapped in Jardim Botânico, Rio de Janeiro.

“Encadré (Jardim Botânico, Rio de Janeiro),” by Frederic della Faille.


Read more: http://www.newyorker.com/online/blogs/books/1000-words/2.html#ixzz0qiqXF8Fz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도마뱀 ^^




From reader Olivia Parker:

“Last summer, when I was living in Mexico, this lizard would come out every morning at seven when I was just beginning my work. The lizard would hang out for usually twenty minutes, peering at my books, crawling over my desk and generally checking things out before hopping under the door and heading out for whatever it is that tiny lizards do all day.”


There’s nothing better than starting the day with a little Proust.  ^^

   

 

마지막으로....  여름엔 역시 맥주와 도스또옙스끼 ^^  

 

(아.. 부러워.. )  

 

The photographer writes: “The picture was taken last summer in Sofia, Bulgaria (in the outdoor café just outside the National Gallery of Foreign Art, near the Alexander Nevsky Cathedral). I went backpacking in the Balkans last summer and spent most of my afternoons drinking beer … and reading!”

“Dostoyevski and Beer,” by Charles-Adam Foster-Simard 


 



+ 맥주와 책 씨리즈 하나만 더.   ^^

1,000 Words: Pynchonesque



 

 A reader writes in:

I took this photo while in Laguna Beach on business this past August. I walked into a small bookshop, requested the book on a Saturday, which was sold to me (thankfully!) before the strict on-sale Tuesday release. I had nothing to do, was in California by myself, so I took the book, walked into the open-at-10 A.M. Dirty Bird Lounge, ordered a beer, and began reading. Seems like a place where Doc Sportello would hang out.




Photograph by Andrew Thompson.


Read more: http://www.newyorker.com/online/blogs/books/1000-words/10.html#ixzz0qj09MjZ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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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부 일종의 입문

   1장. 어떤 주목할 만한 방식으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가
  2장. 특성없는 남자의 집과 건물  



 

도시, 행인, 응시자  

 

1918년 8월 빈. 
 

제국의 수도이자 황궁이 자리잡은 중간적인 도시의 평년기온의 여름.

도시의 속도는 자동차와 보행자의 자취가 그리는 구름 같은 실타래의 박동으로,

도시의 소음은 수백 가지 소리들이 서로 얽힌 강철의 소음 속 파편들로 측정된다.

“도시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특유의 걸음걸이가 있는 법이다.”    




어디에 있는가 라는 질문은 유목민이 아닌 도시민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질문이다.

여느 대도시처럼 이 도시는 ‘불규칙성, 변화, 앞으로 미끄러지기, 보조의 어긋남, 사물과 사건의 충돌, 그 사이로 고요의 밑바닥 없는 지점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통로와 통로 없음’으로, ‘커다란 율동적 박동과 모든 율동의 상호 적대적인 불화와 전이’로 이루어져 있다.

‘역사적 전승으로 이루어진 그릇 속에서 들끓는 증류관’과 비슷한 도시의 도로를 두 사람이 걸어간다.

 

자신이 누구이며 황궁이 있는 수도에 그들 자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특권층의 이 부부는 한 남자가 트럭에 치이는 사고 장면을 목격한다. 두 사람 중 부인은 명치끝에 무엇인가 불편함을 느끼지만, 곧 이 느낌은, 이 끔찍한 사건이 어떤 식으로든 말로 정리가 되어 더 이상 직접적으로 그녀와 관계없는 기술적인 문제가 되자, 곧 사라진다. “사회적 장치들은 경탄할 만한 것이다.”  
 


이 불행한 사건이 벌어진 도로는 17세기에서 18세기, 그리고 19세기의 특징이 ‘서로 겹쳐 찍힌 사람처럼 약간 불안하게’ 섞여 있는 작은 성이 근교로 이어진다. 이 성은 특성 없는 남자의 집이다. 특성 없는 남자는 창문 뒤에 서서 집 앞 도로를 바라보고 있다. 그는 시계를 들고 자동차, 전차, 행인들의 얼굴을 세고 있다. 그는 속도, 각도, 흐름에 밀려 움직이는 군중들을 눈으로 측량해보고자 했다. 영혼의 흔들림, 한 인간이 도로의 흐름 속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완수해야만 하는 모든 노력들을 측정할 수 있을까?  
 


 

 
                                                                                      Josef  Koudelka, Prague, 1968  

 

 


 

 아무 것도 하지 않는 한 사람이 얼마나 엄청난 작업을 이미 완수하고 있는가?  

 

  

 특성 없는 남자도 지금 이 순간은 바로 그런 사람이다.

그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하루 종일 여유 있게 길을 걸어가는 어떤 시민의 근육활동은 하루에 한번 엄청난 무게를 들어올리는 육상선수의 그것보다도 훨씬 더 크다.”  

"따라서, 일상적인 작은 활동의 운동량도 사회적 합계를 위한 개인적인 노력의 측면에서 보자면, 영웅적 행위보다 훨씬 더 많은 에너지를 세상에 내보내고 있는 셈이다."

“영웅적 업적이라는 것도 따져보면 마치 엄청난 환상을 가지고 산 위에 올려진 한 톨의 낟알과 같은 것이다.”

특성없는 남자, 울리히는 자문한다.  

영웅주의를 태동한 것은 어쩌면 결국 그 소시민이 아닐까?  

 

하지만 어디로 가고 있는지, 무엇이 앞으로 갔고 무엇이 뒤로 갔는지 구별하지 못한 채 달리는 시간 위에 있는 개인은  

그저 원하는 것을 하면 된다..라고 중얼거리며 걸어갈 수 있을 뿐이다.  

 

도시의 속도와 소음에 섞여들어  그 파동과 파편을 이루는 하나의 분자로서 소요되지 않기 위해 걸음을 멈추고 응시하는 자는 이윽고 포기하는 법을 배운 사람처럼 몸을 돌릴 따름이다. 
 

 

---------------- 

 
 

대서양의 기압, 동온선과 등서선, 공기의 온도, 천문학의 달력, 수증기의 표면 장력 등의 물리적, 지리적, 지정학적 정위에서부터 시작하여 한 도시의 속도와 소음을 궤선과 열선으로 개괄하고, 거리를 걷고 있는 행인들로 점차 줌인해가는 서두의 묘사는, 신의 시선에서 출발하여 특성없는 남자라는 한 소시민의 시선으로 서술 시점을 급강하시키며, 그 낙차에서 오는 현기증과 쾌락을 조율한다.


서사란 본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에 대한 긴 여담(탈선)이라는 사실을 환기한다면,  '어떤 주목할 만한 방식으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가'라는 1장의 소제목은 그 자체로 이 소설의 서사가 어떤 성격의 서사인지를 단적으로 요약한다 하겠다.

1장에서는 한 행인이 도로에서 교통사고로 죽었다. 그러나 도시의 사회적 장치와 언어는 경탄스러운 솜씨를 발휘해 이내 이 사건을 기술적인 오차로 인한 잠시 멈춤으로, 각 개인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아무 일도 아닌 일로 처리한다. 행인들은 잠시 느꼈던 마음 속 불편함을 뒤로 한 채 다시 걸음을 재촉한다.


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도시의 거리를 우리의 주인공인 '특성 없는 남자'는 창문 뒤에서 응시하며, 시계를 가지고 측정한다. 자신의 초시대, 초시간의 성에서(그의 성은 17세기에 지어졌으나, 정원과 1층은 18세기에 개조되었으며, 건물의 겉면의 19세기에 개축되었다). 그의 응시와 측정 속에서, 각 개인이 도시에서 살아남기 위한 고투는 영웅적 행위보다도 많은 에너지를 세상에 내보낸다. 현대 도시에는 영웅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수많은 사회적 합계를 위한 개인들의 행위들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도시에는 서사시가 아닌 소설이 가능하다. 

        
미래주의자들이 20세기 초 대도시의 에너지와 욕망을 날카로운 선과 궤적, 그리고 파편화된 단어들의 조합으로 그려냈다면, 17세기부터 이어져온 소설의 서사는 이 괴물같이 들끓는 증류관을 어떻게 담아낼 것인가?

17,18,19세기의 성에 살고 있는 특성 없는 남자는 과연 어떻게 '주목할 만한 방식'으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음'을 측정해나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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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베르트 무질  - '특성없는 남자1' (고원 옮김, 이응과 리을, 2010) 

 

 

나는 소설가들이 쓴 소설론을 좋아하는데, 그중에서도 오에 겐자부로와 밀란 쿤데라의 소설론은 나에게는 바이블이나 마찬가지다. 

 오에와 쿤데라가 유럽 소설사의 중요한 작품으로 자주 다루었던 작품들 중에 우리말이 존재하지 않기에 더욱 궁금했던 두 작품이 있었는데, 그것들은 공교롭게도 모두 오스트리아 작가들의 작품이었다. 그 두 작품은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와 브로흐의 ‘몽유병자들’이다. 오에는 ‘소설의 방법’에서 한 장을 할애해 무질의 작품을 소개하고 분석한 바 있으며, 쿤데라는 ‘배반당한 유언’에서 무질과 브로흐를 극찬한 바 있다. 

 몇 년 전에 ‘몽유병자들’이 ‘열린책들’에서 출간되어 반가웠는데, 거의 포기하고 있었던 무질의 작품까지 올해 번역되었다. 그것도 축약이나 부분 번역이 아니라, 완역이라니... 미완성 작품이고, 판본 문제도 좀 복잡하고, 무엇보다도 내용이 무척 난해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런 작품이 완역이 된다니, 역자와 출판사에게 일단 무조건 응원을 보낸다. 독일어를 전혀 모르는데다, 영어로 찾아 읽을 만큼의 동기 부여는 안 될 것이 분명한 만큼, 평생 그저 ‘읽고 싶지만 읽을 수 없는 미지의 작품’으로 남을 뻔 했는데, 이렇게 한국어로 읽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인생의 횡재’다. 설사 오역이 있거나 우리말이 매끄럽지 않더라도, 일단 궁금하면 영어판이나 원서를 찾아볼  ‘동기’를 마련해주니, 이건 출발점부터 다르다. 무질의 텍스트는 이제 내게 '현존' 하는 것이다.  부디 무사히 출간 예정에 맞게 완간될 수 있기를 바래본다.     

 (이런 고마운 기회가 무위로 끝나지 않도록, 또 그동안 기다려온 보람도 찾을 겸, 이 작품을 천천히 꾸준하게 계속 읽어가려고 한다. 욕심 부리지 않고, 조금씩 음미해가며 독서노트를 작성해가며 읽어갈 생각이다. 매일매일 필요한 영양소를 섭취하듯이. 짬이 날 때마다, 잠시 머리를 식힐 겸.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책이 예정대로 완간되길 간절히 바라는 독자의 마음으로 말이다. 1권을 다 읽어야, 2권, 3권을 재촉할 명분이 있지 않겠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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