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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치 tv 1 년권을 끊어놓고 하루에 한 클립은 보자는 결심까지는 좋았는데, 그냥 감동하고 눈과 귀 한번 호강하고 제쳐놓고 말기엔 아까운 '작품'이 너무 많더라. 그래서 올해에는 그날그날 보게 된 영상에 대한 기록을 좀 남겨보고자 한다. 콘서트 영상 같은 건 단순 기록만 하더라도, 다큐나 기록영상, 무대영상 같은 건 그래도 좀 자세히 줄거리라도. 언제 또다시 볼지 모르니...
1.
2012년 12월 31일 밤에서 2013년 1월 1일 새벽 넘어가는 동안 본
Aleksandr Sokurov, " Hubert Robert, A Fortunate Life"(1996)
메디치 티비 영상 주소는 http://www.medici.tv/#!/hubert-robert-a-fortunate-life
(하지만 맛보기 영상은 메디치티비의 짧은 영상보다는 유투브가 낫겠다.)
어젯밤에 이 영상을 넋 놓고 보다 보니 어느새 해가 바뀌었는데, 내 평생 그렇게 행복하고 경건하고 차분한 송구영신은 또 처음. 해와 해 사이에 어떤 시간적 간극(뭔가 시간 층이 달라진다거나 뭔가 다른 차원 간 이동)이 정말 있다면, 그 간극엔 쏘꾸로프가 담아낸 저 영원의 단면 같은 시공간과 공기와 결과 색감으로 가득 차 있을 거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나는 그 막간을 우연히 보게 된 거라고.

영화는 영상 속 화자가 일본의 전통 연극 장르 '노가쿠' 공연을 보러 가는 것에서 시작한다.
스산하고 축축한 안개 낀 봄날, 바람에 살랑거리는 편경 소리, 새 소리, 그리고 안개가 흩어지고 모이는 소리까지 그대로 들릴 것 같은 밤이다.
무대가 되는 신사 마루에 노의 배우들이 조용히, 무게감 없는 걸음걸이로 부유하듯 나타난다.
접힌 부분 펼치기 ▼ 노가쿠에 대해
일본 전통 가면극 장르인 '노가쿠'에 대해선 2001년 국립극장 야외에서 태양극단의 '제방의 북소리' 공연을 보고 처음 알게 되었다. 노가쿠, 분라쿠 등 아시아 연극과 인형극 전통에 현대 연극과 무용을 접목한 이 작품을 본 그날 밤의 경험은 벌써 10년도 훌쩍 지났건만 아직도 매우 인상적인,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러다 작년(2012년) 여름 헬스장에서 런닝머신을 하면서 습관적으로 보던 EBS의 "세계 무형 문화 유산" 프로그램에서 '노가쿠' 편을 우연히 보았는데, 노가쿠 배우 특유의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은 걸음걸이와 몸짓에 다시 그 기억이 떠올랐다.
EBS 다큐에선 "노가쿠 배우는 시공을 초월해 인간 세계와 신과 영혼의 세계를 넘나들며 인간의 고뇌와 이상을 표현한다"며, "줄거리보다는 주연 배우의 동작과 춤, 노래와 의상과 도구, 그리고 무대의 분위기 등을 더 중시하는 독특한 가무극"이라고 설명했다.
움직임을 극단적으로 줄이고 상징적인 동작으로 의미를 표현하는 노가쿠에서는 배우의 걸음걸이는 특히 중요한 의미를 띤다는 것이었다. 단 두세 걸음을 내딛는 것만으로도 시간이나 거리가 변하는 걸 표현하기 때문이란다. 노가쿠에서 신의 역할을 맡는 주연 배우는 현실의 시공간이 아니라 영원의 시공을 걷는 것이다. 또한 배우의 개성적 얼굴이나 연기가 아닌 추상적이고 신화적인 가면의 정형화된 표정과 제스처(3-400년 전 가면의 형태가 이미 완성되었다고 한다)로 독특한 시공간을 소환하는 것이다.
"연극에서의 언어는 단지 행동이라는 캔버스 위에 무늬에 불과하다"는 메이에르홀드의 연극론과도 연결되는 연극의 원천적 힘, 즉 마스크, 제스처, 움직임의 힘이 극대화된 장르 중 하나가 노가쿠가 아닐까 싶다. 마스크는 관객에게 단지 지금 무대에서 벌어지는 극 속의 역할만을 보도록 하지 않고, 관객들의 기억 속에 있는 마스크의 전통을 환기한다. 물론 메이에르홀드도 일본 연극의 장식성에 내포된 '연극성'의 본질에 대해 지적한 바 있다. 과감한 생략과 절제, 상징을 통해 보는 이로 하여금 상상의 공간을 남기는 노가쿠 특유의 함축적인 무대장치, 즉흥성을 배제한 철저히 계산된 연출과 연기 역시 메이에르홀드의 '우슬로브니 연극'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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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쿠로프 영상의 화자는 이 독특한 분위기의 가면극을 보다가, 문득 도스또옙스끼 작품의 한 구절을 떠올린다.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문득 다른 나라에 와 있었다. 우리나라와 모든 게 똑같지만 모든 게 환하게 빛나는. 키가 크고 아름다운 나무들이 꽃잎을 반짝이며 서 있었고, 셀 수 없이 많은 이파리가 마치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듯이 부드럽고 사랑스럽게 바스락거리며 내게 인사했다, 아니 그런 게 분명했다."
이 구절을 두 번 반복해 암송하는 사이, 노가쿠 무대 옆에 서 있던 꽃잎이 하늘하늘 흩날리던 벚나무는 안갯속에서 어느새 시공과 현실-가상의 경계가 바뀌듯, 마치 노가쿠의 벚꽃 신 역할의 배우가 저승인 막 뒤에서 이승인 무대로 걸어 나오는 걸음걸이 같은 템포와 호흡으로, 8세기 한 프랑스 화가의 그림 속 나무로 바뀐다.
아래 그림 속 나무 같은 나무로.

Hubert Robert_ Landscape with Ruins_1772
계속해서 그는 위베르 로베르의 그림 속과 자신이 보고 있는 노가쿠 무대 사이를, 위베르 로베르 그림의 상당수를 소장한 에르미따주 미술관의 전시실과 다시 그림 속 사이를, 또다시 위베르 로베르의 그림 속과 그림의 모델인 듯한 실제 건축물의 폐허 사이를, 마치 신처럼, 안개처럼, 유령처럼 오간다. 안개가 그림을 어루만지듯이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다가, 그 안개에 의해 그림이 옅어지듯이 어느새 그림은 현실의 폐허로, 회랑으로 바뀌곤 한다.


그 안개 같은 희미하고 느릿한 움직임 위로 유령 같은 목소리가 읊조리듯, 한숨 쉬듯 나직이 내뱉는 말들.
"건축물의 자연스러운 죽음에는 끔찍한 점이 전혀 없다. 그저 멜랑꼴리만 있을 뿐. 가장 단순하고 그러므로 보편적으로 이해되는 멜랑꼴리만이."
"폐허. 그것은 끝없이 쳐다보고 있을 수 있는 것, 그리고 어떤 오만함을 치유하는 것. 더 많이 바라볼수록, 이전 세기의 그 믿을 수 없는 풍요로움에 더 감탄하게 된다. 도대체 언제, 어떻게 저들은 저 모든 것을 다 이루어낸 것일까?"
그리고는 카메라는 폐허를 넋 놓고 바라보고 앉아 있는 그림 속 화가의 모습을 화면 가득 반복해 담는다.
바로 이 그림 속 오른쪽 아래 그려진 화가의 자화상이다.

Hubert Robert_ Ancient Temple: The ''Maison Carree'' at Nimes_1783
(http://www.arthermitage.org/Hubert-Robert/Ancient-Temple-The-Maison-Carree-at-Nimes.html ->여기 가면 확대해서 볼 수 있음. )
"얼마나 운이 좋은 남자였던가. 위베르 로베르는 시대에 자신을 맞추었다. 그는 시대보다 자신이 한 걸음도 더 앞으로 나아가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계속 나아갔다. 한 걸음 한 걸음, 일초 일초"
"그는 자신이 편지를 쓰는 것만큼 그림을 빨리 그릴 수 있다고 했다. 그는 500여 점이 넘는 그림을 남겼다. 전 문명이 다 담길 수 있는 무한한 세계를. "

영화는 이 위베르 로베르라는 화가의 세계에서 그런 이국의 풍경과 문명이 무한히 소장된 상트 페데르부르그의 에르미따주 미술관으로 시야를 옮긴다.

"건축물이란 빛과 그림자를 붙잡아 둘 수 있는 상자이다. 눈 부신 햇빛과 겨울의 잿빛 황혼을."
그러나 에르미따주는 수년마다 몇 번씩 범람해 도시를 잠기게 하는 네바 강 바로 옆에 세워진, 그 자체로 위태로운 삶을 영위해가는 하나의 생명체 같은 건물이다.

A Hermit Praying in the Ruins of a Roman Temple, 1760
그러다 때로는 로베르 위베르 그림의 표면을 극도로 세밀하게 들여다본다.
"위베르 로베르 그림의 몸, 그 살결, 그 살아 있는 베일. 그것은 숨을 쉰다. 그리고 종종 아프기도 한다."
그림에 생명이 있는 듯, 살아있는 생명체인 것처럼, 그림을 스치는 안개가 마치 그림이 내쉬는 숨결 때문에 물러났다 몰려오는 것처럼 연출한 쏘꾸로프의 의도가 납득이 되는 대목이다.
마지막에 화면 속 목소리 화자는 위베르 로베르의 말년을 건조하게 정리한다.
"부러울 것 없이 행복했던 남자지만, 말년에 프랑스 혁명으로 아이들을 모두 차례차례 잃는 슬픔을 겪은 후, 75세의 일기로 죽었다. 이젤에 걸려 쓰러지는 바람에. 아니 아마도 삶이 끝나기 때문에."
그리고 다시 화면은 노가쿠 장면으로 넘어온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밤하늘, 자욱하고 짙은 구름이 뒤덮은 무겁고 짓누르는 듯한 어둑한 하늘 위로 빠르게 흘러가는 밤안개, 그리고 마지막 목소리.
"연극이 끝났다. 주위를 감도는 벚꽃 향기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2. Bruno Monsaingeon, Grigory Sokolov Plays Beethoben, Komitas, Prokofiev
- 2002년 파리, 상젤리제 극장 리싸이틀 연주.
http://www.medici.tv/#!/grigory-sokolov-joue-beethoven-komitas-prokofiev
베토벤 소나타 9번, 10번 15번
소고몬 코미타스 - Six Dances
프로코피예프 소나타 7번
+ 앵콜곡들
놀랍다. 멍하니, 하던 일 제쳐놓고 그야말로 멍하니, 화장실도 못 가고 멍하니 앉아 보았음.
처음 들어본 코미타스 무곡도 엄청나게 아름다움. 그냥 이대로 끝나지 않고 계속되기를 바랬다.
베토벤 들을 때도 비슷했지만, 특히 메카닉한 프로코피예프 소나타를 이 사람 연주로 듣고 있자니
검은 옷을 입은 굽은 등의 소콜로프까지 그냥 통째로 피아노인 것 같은 연주. 극도로 절제된 조명에다,
누구보다도 피아노와 피아니스트 간의 화학적, 기술적 결합의 메커니즘에 대해 잘 아는 몽생종이 담은 영상이니 더 그런 듯.
피아노가 저런 악기, 아니 저런 방식으로 작동하고 소리가 나는 섬세한 기계구나 하고 새삼.
그리고 마지막 앵콜곡인 바흐 연주에 눈물이 핑 돌며 뭉클.
왜 그런지 이 피아니스트를 위해 기도하고 싶어졌다.
이렇게 그저 다 옳은 것 같은, 처음 들어본 음악도 그냥 다 수긍하게 되는 연주는 리흐테르 말고는 없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