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제 리스본과는 아무런 상관 없는, 하지만 나의 '리스본 로망'과는 상관 있는 사진이다.)
리스본은 내게 그야말로 '로망'의 도시이다.
가장 사랑하는 도시도 따로 있고, 실제로 가본 곳 중에 살고 싶었던 도시도 따로 있지만, 리스본은 한 번도 가본 적도 없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도-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더-나를 한없이 꿈꾸게 하는 '로망'의 도시다.
명백히 빔 벤더스의 <리스본 스토리>에서 발아된 그 로망은 그 이후 별다른 첨삭과 수정 없이 마치 어딘가 실재하는 시공간으로 내 머릿속에 계속 존재했고, 내 로망 속 리스본은 여전히 벤더스 영화에 담긴 리스본의 공기, 색감, 소리로 축조된 얼개로 남아 있다. 아마도 실제로 리스본을 가게 되어도, '나의 리스본'은 여전히 벤더스의 리스본이라는 틀 안으로 부러 회귀할 것이다. 한번도 가보지 못하고, 어쩌면 영원히 가지 않을, 영상이라는 허상의 틀이 걸러낸 이미지와 소리의 조합일 뿐인 어떤 '도시'의 상을 마치 향수에 젖듯이 동경하고 그리워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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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그 로망은 그것을 부러 해명해야 할 필요도, 굳이 실현해볼 의지도, 더 구체화하고픈 욕망도 불러일으키지 않은 채, 그렇게 옅어지는가 싶다가 다시 새록새록 짙어지면서 나도 모르는 새에 내 안에 삼투해 들어간 것 같다.
그 로망을 글로 옮긴다면 브로쯔끼의 <Watermark> 비슷한 분위기가 되지 않을까, 막연히 생각할 뿐, 감히 엄두도 못 내고-내 깜냥으론 열 번 다시 태어나도 안 되는 일이니 그냥 표현하지 않은 채 추상적인 뭔가로 뭉뚱그리고 켜켜이 묻어둔 감정과 기억들이 얼마나 많은지. VN 번역을 하다 보면, 그 감정과 기억 조각의 일부 파편이 마치 딱 맞는 틀을 만나 떼어진 듯 잠깐씩 수면 위에 떠오르는 때가 있는데, 보잘것없는 내 소우주에 할당된 그 과분한 행운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만족한다 -있었는데, 로망은 스스로 길을 내어 그 이야기를 이어가게 마련인지, 어느 날 우연히 그 로망이 구체적인 언어로 내 눈앞에 묘사되었다. (로망이 로망스로 발전된 순간이랄까. ^^)
한 달 전 즈음인가, 을지로 지하 리브로 서점 한 켠에 생긴 헌책방(예전에 그 코너에서 일서 문고본과 잡지를 팔았던가 씨디 코너였던가 기억이 흐릿한데...)에서 리퍼브인 것처럼 보이는 존 버거의 "여기, 우리 만나는 곳"(열화당, 2006)을 발견한 것이다. 그 책에서 '리스본' 장을 읽기 시작했을 때,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그것은 내게 마치 벤더스 영화 속에서 주인공이 우연히 들려오는 음악 소리를 따라가다 어떤 방 문을 열었던 순간과 흡사했다.
도시 인상기랄까, 자전적 편린이랄까, 명상 소설이랄까, 글쎄, 어떻게 이름을 붙여도 이 책 전체를 온전히 설명할 장르를 찾기는 어렵겠지만, 나에게 이 책은 브로쯔끼의 <Watermark> 류의, 내가 생각하기에 '유일하게 가능한 여행자의 기록 형식' 즉, 여행자나 일시 체류자의 신분으로 낯선 도시에서 경험하는 그 독특하고 낯설기 그지없는 인상과 상념, 그 추상적이고 임의적이고 찰나적인 양태 그 자체를 오롯이 담아내고자 애쓴, 흔치 않은 작품이었다. <Watermark> 이후로 다와다 요코의 '유럽이 시작되는 곳'이라는 글만이 유일하게 소속되어 있던, (나 혼자서 엄격히 지킨) 그 장르 경계 안에 존 버거의 이 책은 무리 없이 진입할 뿐 아니라, 그 장르의 외연을 더욱 풍부하게 넓혀 주는 면이 없지 않았다. 리스본, 제네바, 끄라꾸프, 마드리드..... 이 중에 '리스본' 장 하나만으로도. (사실 내가 사랑하는 도시인 끄라꾸프를 묘사한 장은 조금 실망이었다. 내가 알고 사랑하는 도시와 존 버거의 끄라꾸프는 많이 달랐다. 도시는 실제로 가보기 전에 많이 사랑하고 동경하는 시간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리스본' 장에서 화자는 오래전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전에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도시인 리스본에서 비로소 어머니의 영혼과 만나, 어머니와 비로소 화해와 이별을 하고, 어머니의 영혼을 그곳에 안치하는 진정한 장례를 치른다. 도시 순례는 곧 어머니의 과거와 기억에 대한 소환과 반추의 과정이 되고, 도시는 그 자체로 이승과 저승 사이의 긴 문턱, 과거와 현재 사이의 수도교, 망자와 산 자가 숨바꼭질하는 게임판이 된다.
"존, 이건 그냥 아무 장소가 아니라 만남의 장소란다. 이제 전차가 다니는 도시는 많지 않잖니. 여기서는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어. 밤에 몇 시간만 빼고. ...... 리스본 시내에서 전차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거리는 거의 없단다."(16쪽)
망자가 지상에 머물기로 하는 경우, 지상에 머물 곳을 선택할 수 있다면, 평생을 살았던 도시도, 살았을 때 행복했던 곳도 아닌, 다른 곳을 고를 것이다. 가령 리스본 같은.
"리스본이 눈에 보이는 세계와 관계를 맺는 법은 다른 어떤 도시와도 다르다. 이곳은 게임을 한다. 이곳의 광장과 거리는 흰 돌과 색돌로 무늬를 넣었기 때문에 길이라기보다는 천장 같아 보인다. 벽은 안팎을 막론하고 전부 그 유명한 아줄레조스 타일(유약을 입힌 푸른색의 타일)로 덮여 있다. 그리고 이 타일은 세상에서 볼 수 있는 멋진 것들에 대한 얘기를 담고 있다."(19쪽)
"그러면서도 벽과 바닥, 창문 주변이나 계단을 따라 똑같이 장식된 타일은 뭔가 다른 것, 아니 사실상 정반대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흰 도자기 표면의 잔금 무늬, 생동감 넘치는 색상, 틈을 메운 모르타르, 반복되는 패턴. 이것은 모두 그 타일들이 뭔가를 덮고 있으며, 때문에 그 뒤나 그 밑에 있는 것은 앞으로도 쭉 보이지 않고 감춰진 상태를 유지하리라는 사실을 말해 준다.
걸어가면서 본 그 타일들은 드러내는 것보다 숨기는 것이 많은 카드놀이를 하는 듯했다. 내가 걷고, 계단을 오르고, 방향을 바꾸는 사이사이에 판이 바뀌고, 판돈이 오갔다. " (20쪽)
'세상에서 볼 수 있는 멋진 것들에 대한 얘기를 담고 있는' 타일이 깔린 이 도시는 마치 카드 게임을 하듯 은밀히 숨겨놓은 서사를 이면에 드러낸다. 도시의 순례자는 그 타일들을 밟고 스쳐 지나가며 어느새 이 도시가 풀어놓는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가 걷는 길은 그 자체가 이야기, 서사의 길이 되어간다.
" 가파른 절벽 같은 암반에 터를 잡고 있어서 몇 백 미터마다 솟아올랐다가 곤두박질 치는" 구릉이 일곱 개는 되는 곳.
도시의 가파른 그 거리들은 현기증을 가셔 줄 온갖 방법을 몇 세기가 지나는 동안 궁리해 왔다.
"계단, 시야의 차단, 층계참, 막다른 골목, 난간, 덧문. 모든 것이 태양과 바람을 피할 보호막으로, 그리고 실내와 실외 사이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들 목적으로 사용되었다."(20쪽)
계단, 층계참, 막다른 골목, 난간, 덧문, 문턱...... 내가 무척 좋아하는 공간의 이름들이다. 서사의 굽이가 생기고 서사의 은밀한 계기가 스며드는 공간(가령, 도스또옙스끼의 '문턱의 시공간'. 도스또옙스끼의 인물들은 얼마나 자주 문턱에 서서 은밀한 얘기를 엿듣곤 하는가). 그렇다, 리스본은 바로 그런 공간 자체로 이루어진 도시인 것이다. 도시 자체가 계단이자 골목이고 문턱인 도시. 고대 바빌로니아의 건축물을 상상할 때마다 묘한 흥분에 사로잡혔던 건, 바로 그 도시를 거니는 것 자체가 그 도시의 서사를 발로 밟으며 그 궤적을 추적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을 거라는 상상 때문이었다. 내게 서사는 바로 그런 굽이와 계단과 문턱과 난간의 형태로 이루어진 하나의 건축물이었기에.
나는 리스본의 역사를 잘 알지도 못하고, 리스본과 관련된 소설을 읽은 것도 아니지만, 리스본의 '서사'에 매료되었다. 그것은 어떤 개별적이고 특수한 서사에 대한 매료가 아니라, '서사'라는 인간의 본질적인 존재 양태, 언어 행위 양식이 '도시'라는 또 다른 인간의 존재 양태와 행위 양식과 만나 구체적인 물질로서 현현하는 것에 대한 매료였다.
벤더스의 '리스본 스토리'에서 카메라는 그야말로 여행자의 눈처럼 도시를 여행한다. [영화에 나오는 한 영사 기사는 리스본의 한 영사실에 보관되어 있다는 인간이 기록한 세상의 첫 '원 필름'(인간이 신의 시선에 대응할 만한 시선을 획득한 최초의 눈이랄까)을 찾다가, 그냥 카메라를 짊어지고 도시를 돌아다니며 그 '원 필름'을 재현해보고자 한다.] 카메라가 훑는 도시의 구릉과 골목과 하늘과 사람들과 공기와 색 자체가 영화의 서사가 되고, 그 서사는 공들여 꾸민 그 어떤 서사보다 아름답고 진실한 인간과 인생의 서사를 얘기해준다. 리스본의 역사를 얘기하지도, 리스본에서 벌어지는 어떤 사건을 얘기하지도 않는 이 영화의 제목이 '리스본 스토리'인 것을, 나는 이제 이렇게 이해한다. 리스본 그 자체가 스토리, 즉 서사라는 뜻이라고. 인간에게는 서사 말고는 없다, 인간은 곧 서사이며 세상은 곧 서사다, 라고까지 말해 버리면, 그저 내 모토를 이 틈에 슬쩍 발설해 보려는 수작에 불과하지만, 어쨌든, 벤더스가 리스본에서 영화, 혹은 필름의 본질과 진실을 얘기할 수 있는 무엇을 발견했듯이, 나 또한 리스본에서 '나의 존재 이유'이자 '유일한 신앙'인 '서사'에 대해 얘기할 수 있는 무엇을 발견한 것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