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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엡티 모아둔 파일을 보다가 내가 사랑하는 Slow Lane 칼럼의 첫 연재 소개 기사를 발견했다.

무려 2003년 1월달 신문.

나의 주말은 이 칼럼을 토요일에 정독한 주말과 아닌 경우의 질이 확연히 다를 정도로 내게는 소중한 칼럼인데,

그 출발점과 칼럼의 성격을 필자 자신의 언어로 분명히 밝혀두는 기사를 다시 보게 되어 감회가 새로웠다. 

 

(참고로 오늘 칼럼http://www.ft.com/intl/cms/s/2/f314bf06-06f7-11e2-92b5-00144feabdc0.html#axzz29oDuwRfZ도 좋지만,

지난 주와 지지난 주 칼럼이 진짜 좋았다.

지난 주 칼럼은 러시아의 유로지비 전통에 대한 것으로, 마리아 유지나와 쇼옹 얘기가 나와서 반가웠고,http://www.ft.com/intl/cms/s/2/ef9b6884-06f7-11e2-92b5-00144feabdc0.html

지지난 주 칼럼은 스토파드 각색의 안나 카레니나 새 영화에 대한 평http://www.ft.com/intl/cms/s/2/ecd8880c-06f7-11e2-92b5-00144feabdc0.html#axzz29oDuwRfZ이라 줄 쳐가며 열심히 읽었다.  )

 

 

예전 칼럼들도 인터넷으로 다 볼 수 있으면 좋겠지만, 2003년은 아예 업로드가 되어 있지 않아서 아쉬운 마음에 부분부분 타이핑을 해둘까 한다. 

예이츠의 시를 인용하며 시작해서 빅토르 에리쎄를 자기 칼럼의 '수호신'으로 꼽으며(역시!!!) 끝을 맺는, 이 사람 특유의 그 리듬감과 절묘한 압축과 섬세한 묘사의 조화는 글 전체를 봐야 만끽할 수 있지만, 다 타이핑할 수는 없으니, 중요 문장들을 몇 부분 옮겨 놓는다. 에리쎄 언급 부분은 전부 옮겨 놓았다. 에리쎄에 대한 간결하면서도 적확한 상찬! 그가 얼마나 '드문' 위대한 예술가인지... 에리쎄에 대해 내가 경외감을 갖는 부분이 정확하게 지적되었다. 

 

 

 

 

 

 Víctor Erice_ El Espíritu de la colmena (1973)

 

 

 

 

"The Peace comes with the slowing down, which brings heartfelt appreciation of all things and times, the purple glow of noon, the glimmering midnight, the linnet-haunted evening.

 

So this column is not advocating romantic escapism, the idea of getting away from it all, or even downsizing. Over-strenuous efforts to get away from it all tend to defeat their object: you ecounter the same problems on arrival. The point is to find and enjoy the oases of peace that are freely - and I mean often freely - available in the interstices of the daily round : those easily forgotten or ignored oases, the familiar painting(which you could make a date to spend an hour with) or the poem you half-remember (which you could learn by heart), the pair of bustling blue-tits in the garden laburnum you have hardly noticed for years, the conjunction of Saturn and Jupiter in the night sky, a mode of transport which facilitates richness of experience rather than bullet-like translation from A to B. One of the rules of the column is never to go directly from A to B. In the game of Monopoly, the place you go directly to is jail.

 

Back to bee-keeping for a moment. Another of this column's patron saints is the Spanish film director Victor Erice, the reclusive Basque who made one of the most beautiful films of all time, The Spirit of the Beehive. It's not really a flim about bee-keeping, but about how the world appears to a child of seven or eight, in all its mystery and strangeness and horror and beauty.

 

The way Erice conveys this is itself something of a mystery but it has to do with letting things breathe. His camera lingers over things, doesn't rush on or pass them by, pays them proper attention(which is so rare that it seems odd) and so allows them to give themselves to the viewer. Things as well as people need to be granted the proper time in order to give of their best. They also need to be regarded in a certain way, which is free of worries about whether they can be pressed into service.

 

Giving the right amount of time to things and people represents a kind of courtesy. In my experience people and things respond to that courtesy. Birds and fish come not to the anxious birdwatcher or angler, but to the one who tunes into the rhythm of the trees and the sound of the lake lapping by the sh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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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ctor Erice_ El Sur

 

 

 

http://www.ft.com/intl/cms/s/2/6c6a21cc-a58f-11e1-a3b4-00144feabdc0.html#axzz1xLPSzhnw

 

이번 주 FT weekend의 Slow Lane 칼럼의 주제는 스페인이다. 제목은 "The Master of the Art of Living"

언제나처럼 한 문장 한 문장 밀도 높은 훌륭한 퀄리티. 뭐 전체 요지는 요즘 동네 북 역할을 그리스와 번갈아가며 맡고 있는 스페인에 대한 일종의 'mini-defence'임을 자처하며 시작해 , 문제는 스페인이 아니라 유럽이라고 일갈하는 듯한 뉘앙스로 끝나는 칼럼이다. 무엇보다 스페인을 찬양하고, 스페인의 'the art of living'을 설명하는 이 필자 특유의 방식에서 발휘되는 유연하고 풍성한 지성이 돋보이는 몇몇 대목은 밑줄을 치고 메모해둘만 하다. (가령, 'Gusto' 라는 스페인 단어로 논지를 보충하며, 자신의 생생한 경험담을 유려하게 섞는 그 절묘한 조합의 기술이나, 복잡한 맥락이 있는 사건이나 인물을 몇 마디로 적확하게 그 맥락을 짚어주고 넘어가는 이 사람 특유의 압축 기술(단어 선택 기술)이 발휘된 대목들.) 

 

 

이 칼럼의 필자에게 스페인은 자신이 알고 있던 것보다 삶이 더 다양하고 풍성하다는 걸 알려준 나라이며("made me feel life was more various and richer than I had realised"), 맛, 기쁨 등을 뜻하는 'gusto'의 감각적인 원뜻에 가장 충실한 나라이다. 

the word gusto, meaning vigorous enjoyment, zest or relish, is a Spanish word. Not just that the Spanish lived with more gusto but that they hadn’t lost touch with the word’s original sensuous meaning. A gusto in Spanish means according to taste and to be a gusto means to be at ease, comfortable in your skin. Another untranslatable “g” word in Spanish is gana, as in “porque me da la gana”, “because I damn well want to”.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영화감독 빅또르 에리쎄가 갑자기 언급되어 반가웠던 대목.

I happen to prefer the underrated and understated director Victor Erice to the much more prolific and flamboyant Pedro Almodóvar. Erice’s masterpiece Spirit of the Beehive, made while Franco was still alive, managed to say more about the half-buried memories and legacy (especially the legacy of silence) of the civil war than any film made subsequently.

나 역시 현란하게 인생을 상찬하는 알모도바르(엄청난 다작)보다 기억과 침묵의 유산을 그리는 탁색의 에리쎄(살짝 야속하기까지 한 과작)가 보여준 '삶'의 단면이 훨씬 더 많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며칠 전 개막된 유로 2012를 밤마다 한 경기씩 보고 자고 있는데 (처음에는 단지 개최지가 '폴란드-우크라이나'라는 이유만으로 보기 시작했다), 축구 한 게임 보는데 무슨 문명사와 문학사, 그리고 현재 복잡한 유럽 상황까지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망상하며 투영하고 보느라, 전후반이  한 시간도 채 안 되는 듯 끝나버린다. 축구 경기를 보는 게 아니라, 두 개의 서로 다른 서사가 충돌하여 뭔가 이야기의 단락이 생기고 경기의 맥락이 드러나는 순간을 기다리며 도사린달까.

 

물론 내 입장에선 어떻게 이렇게 절묘한 조편성이 있을까 싶은 A 조( 그리스, 폴란드, 체코, 러시아의 각 조합을 한번에 다 볼 수 있다니) 경기들이 가장 흥미롭지만, (특히 그리스와 폴란드 경기는 지금까지 내가 본 그 어느 경기보다 흥미진진했다. 며칠 후 그리스와 러시아 경기, 폴란드와 러시아 경기도 볼 수 있다니 두근두근두근), 이 칼럼을 마침 읽게 되어 오늘 밤에 있을 스페인과 이탈리아 빅매치를 보는 맥락이 하나 더 생긴 셈이다. 스페인과 이탈리아, 축구라는 예술의 두 거장이자 "삶이라는 예술The Art of Living"의 두 거장이 그라운드 위에서 만난다.

 

 

 

 Henri Le Sidaner_Table with lanterns in Gerver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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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seph Roth, 1926

 

 

 

오랜만에 FT Weekend 보다가,

재밌는 기사 두 개 건짐.

 

1. 크로넨버그의 '슈필라인' 영화 "The Dangerous Method"에 대한 정보.

 FT 주말판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칼럼인 Slow Lane에서 제법 자세히 다뤄짐.

 http://www.ft.com/intl/cms/s/2/b21f1b96-5f12-11e1-a04d-00144feabdc0.html#axzz1pDC37W5S

 

 덕분에 루이 말의 영화도 알게 되고, 프로이트-융 비교도 명쾌하고, 하여간 역시 좋은 칼럼.

(내가 별로 안 좋아하는 키라 나이틀리가 슈필라인 역이라 해서  안 그래도 대실망이었는데,

 "러시아 정신분석학의 선구자"인 슈필라인이 이 영화에서는 지 분에 못 이겨 걸핏하면 웃통 벗어젖히는 여자로 나온다고 까는 센스는 덤..)

 

 

 

2.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 제국 출신 유대인 작가 "요제프 로트"를 알게 됨. 

   

http://www.ft.com/intl/cms/s/2/d8f0ec4e-6201-11e1-807f-00144feabdc0.html#axzz1pDC37W5S

 

이 기사를 보고 급관심이 생겨 찾아보니, 두어 권 번역되어 있는 듯.

 

  기사에도 주로 언급된, 이 사람의 대표작 "The Radetzky March"가 제일 궁금했는데, 번역이 없어서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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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yborcza.pl/duzy_kadr/56,97904,11073884,_,,18.html

 

 

 

".......

삶은 초고원고일 뿐 ,

 가장 순탄했다는 경우도 예외 없이 ......."

 

 -마리나 쯔베따예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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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요일 오전, 밀린 빨래를 하고   

 요즘 배수아 얘기를 여기저기 하고 다니다 추천받은 '다와다 요코'의 책들을  모조리 다 주문하고,   

(와세다에서 노문학을 전공하고 독일과 스위스에서 유학했으며, 현재 독일어권 문학의 번역자이자 독일어/일본어 이언어 작가로 활동중인  여류 소설가이다. )     

   ( 이 책은 그녀의 소설.)

 (서경식 선생님과의 서한교환집이라는 이 책이 가장 기대된다.) 

 

 

 

한겨레 토요일 서평지에서 제일 좋아하는 '고전 오디세이' 칼럼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77895.html을 읽는다.

'고전 오디세이' 칼럼의 필자, 김헌 교수의  번역어들을 언제 한번 다 모아서 정리해놓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750년에 공인된 ‘사도신경’에는 뜻밖의 구절이 있다. 예수가 죽은 뒤, 곧바로 하늘로 올라가지 않고 사자(死者)들의 세계, 즉 ‘음부(陰府)로 내려갔다’(descendit ad inferos)는 것이다.  
   

   

   
  예수는 죽은 자들의 영(pneuma), 또는 혼(psyche)에게도 구원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 죽은 자들의 영혼을 영원한 삶의 세계로 건져 올리기 위해 저승의 세계로 내려갔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아래로 내려가기’, 즉 카타바시스(katabasis)다.  
   

 

   
 

 신이 되지 않는 한, 인간은 누구나 죽으며, 죽으면 모든 혼백은 바람 빠지듯이 몸을 빠져나와 하데스의 세계로 간다는 것. 예외는 없다. 어두컴컴한 지하의 세계로, 하늘 아래 땅 위, 태양이 빛나는 밝은 곳에서는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간다. ‘하데스’라는 말 자체가 ‘보이지 않는 자’라는 뜻이다.

그런데 호메로스가 그려주는 혼백기독교에서 말하는 이나 과는 전혀 다르다. 그것은 생명의 맥 빠진 여운, 존재의 희멀건 한 그림자다. 힘과 활기가 없는 허깨비이며, 살아 있던 사람의 죽은 환영이고, 스산한 유령이다. 곧 흩어져버릴 것만 같은 연기 같은 것. 그런 혼백들이 우울하게 널려 있는 곳, 을씨년스러운 그곳이 죽은 자들의 세계, 하데스의 세계다.

 
   

  

   
 

소크라테스는 도망가지 않고 죽겠단다. 무슨 까닭에? 지금까지 자신의 삶은 결국 잘 죽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그가 평생을 바쳐 갈고닦았던 철학이란 죽음의 연습이었으므로. 그는 진심으로 죽고 싶단다. 죽음은 그에게 끝장이 아니라, 영원한 삶과 자유의 시작이란다.  

제자들을 설득하기 위해 소크라테스는 제자들의 생각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던 호메로스의 인간관을 지워야 했다. 아니 호메로스가 그린 혼백에 생기를 불어넣어 불멸하는 실체로, 인간의 정체성을 결정짓는 영혼으로 새롭게 그려내야 했다.

 
   

 

   
 

 소크라테스에게는 이 세상에 태어나 살게 되는 것 자체가 영혼의 카타바시스였다. 영혼은 원래 저 높은 이데아의 세계,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참모습이 가득한 세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죽음을 통해 그는 이 땅의 속박에서 벗어나 ‘지극히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즉 아나바시스(anabasis)를 꿈꾼다.  

호메로스와 소크라테스 사이. 그리스적 사유와 기독교의 신앙 사이. 우리가 사는 이 땅을 가운데에 두고 그려진 아나바시스와 카타바시스 사이에서, 인간은 죽은 뒤에 어떻게 되는 것인가를 서구인들은 오랫동안 사유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여운이 끝내 남는 것이라는 생각. 그러나 그 생각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죽음으로 인간의 모든 것이 완전히 끝난다는 사유 역시 꾸준하게 그 맥을 이어오고 있으니까. 혼백? 영혼? 그런 것은 없다는 생각.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호메로스의 희미한 혼백을 아예 지워버리며, 플라톤과 같은 철학자들과 대립각을 날카롭게 세웠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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