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친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1999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파치 언어는 입밖으로 내뱉어진 순간 공기라는 매질 속에서 한껏 왜곡되지 않던가. 나는 늘 너에게 나를 보내어도 닿을 길이 없단말이다. 어차피 인간이 가진 언어의 속성이 그러하다면, 본질을 건드리려는 시도 자체보다는 본질을 한 걸음 차이로 엇비켜가는 언어가 더 나을 듯싶다.

바람이 불어서 추웠다, 가 아니라 바람이 불어서 아팠다...는 식으로 말이다. 바나나의 문체가 그렇다. 바나나의 감성이 그렇다. 아픔을 아프다,고 표현할 길이 없는 주인공은 냉장고라는 엉뚱한 객체를 끌어들여 아픔을 표현한다.

왠지....내가 아프다, 고 말하는 순간 내 현실이 희화화되는 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견딜 수 없을 때, 차라리 가볍게,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채 가벼운 척 하는 것이 차라리 매일 매일을 살아내기가 더 쉽단말이다. 하지만 그래도 어느 한구석에선 늘... 이 가벼움의 가면 뒤에 진짜 나를 읽어주는 눈이 있기를 소망하지만 말이다. 그래서 난 구제불능으로 살아가나 싶기도 하지만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1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수희 옮김 / 열림원 / 1997년 9월
평점 :
품절


가히 하루키 최고의 소설이라는 평에 동의합니다. 90년대 초 하루키 붐이 한국에 막 시작되려고고 할때에 읽은 소설이죠. 윤챕터로 구성되어서 현실의 주인공과 주인공의 환상속의 세계가 번갈아 나오다가 마지막에 이 두개의 결말이 맞물리죠. 환상속에서 주인공은 '꿈읽기'라는 직업을 가지고, 유니콘의 두개골에 쌓인 먼지들을 읽는 일을 합니다.- - 이 이미지는 너무도 강렬해서 전 꿈속에서 말의 두개골을 들여다 보곤 합니다만.

죽음으로써만 분리된 자아가 통합을 이루는 설정이지만, 끝까지 자신의 의지로 자신의 그림자를 지고가는 고귀한 결단이 정말...너무도 길이 많아서 아느 길로 가야할지 모르는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 사는 현대인들에겐 의미 심장한 메세지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세계의 끝에선 자신과 그렇게 마주설 수 있을까요. 난 마주서면 기꺼이 끌어 안을까 모르겠네요. 유니콘이 꾸는 꿈 속에서 만납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뱀장어 스튜 - 2002년 제26회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권지예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0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가끔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거라사 광인 같은 깊은 절망일지언정,날 이 삶에 집착할 수 있게 만드는 무언가 있음 좋겠어,라는배부른 생각...말이다. 바퀴벌레와 자신을 동일시 하는 시각은, 꿈틀 꿈틀 뱀장어와 자신을 동일시 하는 시각은, 이 염,병,할 삶을 콱, 때려치우고 싶다고 습관처럼 되뇌다가도 결국 내 속의 진실은 바퀴벌레 마냥 질긴,뱀장어의 몸부림 마냥 질긴 생존 욕구라는 것을 깨닫는게 아닐까 싶어. 바퀴벌레 알집을 구태여 손으로 터뜨리는 상처 입은 암컷이나,짐승이라도 새끼품은 암컷들은 보면 왠지 서글퍼지는 이 암컷의 심리나별반 차이가 있을까.

세계가 썩은 자궁 같다던 헨리밀러의 소설에선 그래도 그 자궁을 열심히 지향(?) 하더만 ^^; 새끼를 품지 못하는 자궁, 새끼를 떼어버린 자궁에 페니스라도 받아들여 살아있음을 역설적으로 확인해야겠지.모든 여자가 에미는 아니지만,기본적으로 어머니도 아니고 '에미'인 끈적거리는 본능이엄청난 업으로 다가올때가 있지만말야. 그럼에도 살아가는 거구, 살아지니 어떡하라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년 마법사 1
나루시마 유리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00년 4월
평점 :
절판


남과 다른 것이 그리도 큰 십자가인가 과연? 어차피 인간은 아주 조금의 차이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요상한 메타볼리즘을 지닌 존재들이 아니던가. 이 몸뚱아리들은 말이다. 결국 아주 조금 다른 존재들이 함께 득실득실 모여 살아내는 세상아닌가 말이다. 때론 같아지라는 집단의 압력에 굴복하고 때론 반항하면서 말이다. 근데...많이 차이나게 다르다고?

집단에 속하는 인간들은 말이다. 너무도 쉽사리 자신들이 의당 짊어져야할 자아라는 짐을 집단에 넘겨버린다...그리고는 책임 지려하지 않는다. 왜 나만 갖고 그래? 하며 모든 인간의 우매함을 인간 집단의 일반적인 특질로 환원시키려고 한다. -- 사특한 것들.쯧쯧. 태어날때부터 그 지극한 차이때문에 어거지로 자아라는 무거운 짐을 질 수 밖에 없었다고? 난 축복이라고 봐...그런식으로든 그짐을 질수 있다면.

이노무 집단 주의적인 한국땅과 일본땅에서는 차이를 지향하는 인간들이 좀 더 많이 늘어나야 하지 않을까 싶지만서도, 아무리 기를 써고 그게 단순히 발가벗고 아버지의 멜론모를 쓰고 거울을 바라보는 정도의 반항기로 끝나고 마는 사비나식의 치기어린 반항이라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中) 그래봤자 부질없다는 생각도 들거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은 맘에 들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의사 소통을 꾀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대하고....등등등.

나기는 자신의 동류가 하나도 없으니 차라리 차이를 자각케하는 타자들이 없어서인지 몰라도 외려 자신의 존재를 자연스레 잘 받아들이던데 말야. 역시...이 인간이 지닌 상대성은 운명의 굴레인가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를 지향해야하는. 오, 하나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결국은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 거야 1 - 현경 순례기 1
정현경 지음 / 열림원 / 2002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난 한국 교회의 지극히 가부장적인 행태가 싫다. 난 한국 교회의 유교적 잔재가 싫다. 난 한국 교회가 사회적 배출구가 차단된 여자들이 모여 대리로 사회적 성취감을 찾고자 격전의 장으로 변질 된 것이 싫다. 실제 자매 수가 훨씬 더 압도적인 한국 교회에서 남자 장로 들이 허세 부리고 앉아았는 동안 여자 집사님들 예배도 참석 못하고 쭈그리고 앉아 밥하는 꼴 보기도 싫다.

'순종'이라는 미명 하에 내가 가진 천의 얼굴 중에 단 한가지 얼굴만 보이도록하는 그 답답함이 싫다. 왜 모두 나긋나긋 웃으며 찬송과 율동을 잘하는 지극히 여성적인 특질 들에만 믿음 좋은 여자라는 딱지를 붙인단 말인가. 마리아 만이 내 얼굴은 아니란 말이다. 차라리 이교도들이 보았던 그 얼굴, 관세음 보살, 인도의 칼리 또한 아테네 또한 다 내 얼굴들이다.

난 하나님이 인간처럼 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차피 인간은 신이 인간의 언어로 말씀해주기 전엔 결코 신을 이해할 수도 없다. 하나님이 남성의 몸으로 성육신 하신 건 단지 시대적인 편의였다고 생각할 뿐이다. 난 예수 그리스도의 지극히 여성적인 특질들 때문에 외려 그를 사랑한다. 그가 분노하고, 울 줄 아는 인간의 몸을 입었었고, 그 몸을 찢음으로써 인간을 구원했기에 그를 사랑한다.

신앙의 궁극적인 경지가 정적인 해탈이라고? 난 어차피 보이는 것, 만질 수 있는 것에 갇혀진 인간일 뿐이다. 난 고매한(? - 훗.....) 정신을 통해서만 신의 얼굴을 보는 것이 아니다. 난 내가 가진 모든 것, 내 몸, 내 언어, 내 죄, 이 모든 것을 가지고 춤을 추며 신의 얼굴을 만진다.

춤이 내가 되고 내가 춤이 되는 순간, 난 베일이 벗겨져 모든 것을 분명히 보듯이 신의 얼굴을 보게 될 것이고, 내 얼굴의 눈물을 닦아주는 내 하나님 어머니를 보리라, 믿는다.

난 정현경이 추는 춤을 좋아한다. 유혹의 원죄를 걺어지고 유혹한 불결하고 피흘리고 새끼를 낳는 고통으로 찢어지는 여자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중의 살, 뼈중의 뼈...로 창조 받은 여자 속의 신의 이미지를 사랑한다.

남자는 여자를 만들기 위한 질료에 지나지 않았다고 아담과 하와를 해석하는 발칙한 해석이 좋다. 육체를 긍정하지 않고, 자신의 죄를 긍정하지 않는 자가 어찌 구원에 이를 수 있으랴. 그네들은 모른다. 여자들이 자신들의 몸을 '긍정'한다고 할 때, 담긴 그 의미를. 욕망이 죄라면, 한번이라도 욕망의 주체가 되어봐야 할것 아닌가...나 그때 머리 풀고 고개를 땅에 박고 난 하나님 어머니 앞에 차마 고개들 자격도 없는 여인이라 고백하리라.

예수님은 2000년 동안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했다고? 예수꼐서 십자가에 달려 인간을 구원한다,는 표현에 쓰이는 히브리어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모두 구속하는 시제라고 들었다.

그는 지금, 내 앞에서, 피를 흘리고 있다, 항상. 난 차라리 그 나무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핥는 개가 될지언정, 그의 죽음을 관조하고, 멀찍이서 음미하는, '몸뚱아리'가 없는 철학 따윈 되지 않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