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읽다가 내가 가장 매료되는 씬 중 하나는
막달라 마리아가 향유로 예수님의 발을 씻어주고 자신의 머리칼로 그 발을 닦아주는 부분이다.
난 이 장면이 왜 그리도 에로틱하게 느껴지는 걸까. -__-; (에잇 불손한지고)
그리고, 늘 상상을 했다.
내 사랑하는 남자가 생기면 꼭 발을 씻어주고, 머리를 감겨주리라고.
순수했던 어린 시절, 내가 가졌던 가장 큰 성적인 환타지는
좋아하는 선배의 헝클어진 머리를 감겨주는 상상을 몰래 몰래 하는 거였다.
(하필 그 선배가 머리가 곱슬기가 있어 더 잘 헝클어졌다.)
어린 시절은 혼돈의 시절.
여성이라는 피해의식이 온갖 분노로 폭발하고,
굳센 자의식을 세워보고자 기를 박박 쓰면서도,
좋아하는 남학생들 앞에서는 어쩔줄 몰라 발끝을 감추고 동동거리면서,
나 스스로에게 얼마나 화가 났는지 모른다.
내 속에 나 스스로 칼리가 있음을, 이시스가 있음을, 가이아가 있음을 알면서도,
그 강한 어머니 여신들이 꿈틀거리고 있음을 알면서도,
환심을 사고 싶은 남자 앞에서 우물쭈물 페로세포네의 모습 하나만 보이도록
내 스스로 내 모습에 재갈을 물리는 꼬락서니란.
내 첫 사랑들은 주로,
엎드려 발이라도 씻어주고 머리칼로 부비대며 닦아주고픈 지극한 굴종의 미학에서
매조키스트적 쾌락을 취하다가
내 이성의 몰매를 맞고 스스로 우왕좌왕하다
쌓여가는 갈등과 혼돈에 쩍쩍 균열하다가
스스로 사랑하는 그 남자(들) 앞에서 자폭하는 결말로 끝나버렸다.
내 속의 칼리의 얼굴을 본 남자들은 하나같이 도망가더라.
내속의 칼리는 내 꿈속 커다란 블랙위도우 거미의 형상으로 나타나
거미줄 아래 분열된 내 자아들을 하나씩 낚아올려 잡아먹으며 내게
'난 절대 여기서 안 나가!'하고 음흉하게 속삭여주더라.
지금도 바비 인형을 보면 너무 사고 싶은데,
걸 사들이면 또 내속에서 살육극이 벌어질 것 같아 참는다.
그 어떤 분노가, 피해의식이 내 속에 이토록 깊게 도사려
생전 나 자신을
그 어떤 남자 앞에도 제대로 서는 것을 막는지는 나도 통탄할 노릇이다.
끝도 없이
무릎 꿇고자 하는 이 간교한 노예근성은 또 뭐란 말이며,
득달같이 달려와
노예 근성을 살육하는 이 분노의 얼굴은 또 뭐란 말인가.
내 인생의 문이 닫혀다고 슬피 울던 유학시절 만났던 50대 캐나다 아줌마의 얼굴이 생각난다.
연하의 애인을 십대 소녀에게 뺏기고 그 총명하고 야무진 아줌마가
칙칙한 영국 겨울 날에 매일매일을 울며 보내더라.
엊그제
얼굴서 주름을 발견했다. 심히 뜨악하다.
내 워낙 동안으로 지극한 오해를 받아가며 삶을 만끽하던차,
드디어 이렇게 거울 속에서 주름을 마주하는 순간이 있구나, 싶다.
아이가 이제 좀 손이 덜 가니까
모성에 가려 있던 다른 부분들이 숨통을 틀라고 하나.
하지만, 의식적으로
죽여버리리라, 또 다시 노예짓을 하는 내가 고개만 쳐들어도
그렌델의 에미보다 더 잔인하게 내 속의 노예년은 내 죽여버리리라.
맹세하고 또 맹세하고 하루 하루가 간다.
늙어지면 더 좋으리. 노예년도 포기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