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라이트 사용후기 - 상식인을 위한 역사전쟁 관전기
한윤형 지음 / 개마고원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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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윤형의 책을 사보는 것은 적어도 나에게는 취향에 따른 소비가 아닌, 그의 노동과 보다 나은 사회에 대한 의무로 생각된다. 그가 이번에 다룬 주제는 나로 하여금 소비의 자유를 박탈하였다. 하지만 이 예속(?)은 나로 하여금 그를 보상하고도 남아돌 기쁨을 가져다 준다.

 민족주의 VS 뉴라이트, 한국의 학술적 나아가 정치적 논쟁들의 뿌리를 이뤘던 이 논쟁을 정리한 한윤형의 책이 나왔다. 어느 한 쪽의 입장에도 치우치지 않고, 양자의 논리와 선동이 가진 결함들을 차분히 분석하고 있다. 얼핏 보면 '나 빼고 죄다 ㅄ다'라는 양비론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한윤형이 양자를 비판하는 것은 공식적으로는 그만한 논리적 실증적 이유가 있기 때문이며, 비공식적으로 오늘날 한국사회가 봉착해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과 대면하기 위해 토대를 닦고자 하는 정치적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공식적인('감춰져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유가 논리의 엄밀함이나 사실성을 훼손하게 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그 겸손한 입장에서 하나에서 답을 찾게 되는데 그것은 엄밀히 정의될 필요가 있지만 '진보'란 도덕적 동기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혹은 그것만이 아니라),  논리적인 귀결로 귀착된다는 것이다. 물론 진보의 논리성이 침해불가결한 '절대적' 진리는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이 책을 읽고 나면 진보, 한윤형이 이 책의 말미에서 소묘를 시도하고 있는 맥락에서의 진보란 적어도 민족주의나 뉴라이트의 무리한 주장보다는 '상대적'으로 논리적이라는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따라서 '상식인을 위한 역사전쟁 관전기'라는 책의 부제는 사실 보다 야심찬 것인데 그는 기존의 상식에 호소하는 것을 넘어 새로운 '상식'을 다져놓고자 하는 야심을 책에 녹여 놓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책의 논지는 한윤형 본인이 인정하듯이 모두 자신의 공로는 아니다. 학계에서의 주도권이나 연구비의 유혹에 굴복하지 않고 꾸준히 자신의 길을 걸어온 소신있는 학자들이 없었더라면 이 책은 탄생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한윤형 혼자 쓴 책이 아니다. 이들 모두와 한윤형이 힘을 합쳐 쓴 책이다. 하지만 이런 사실은 이 책의 미덕을 훼손하기는커녕 더욱 빛내준다. 문명 안에 사는 그 어느 누구도 그 문명의 성과를 무시하고 앞서나가는 이야기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한윤형은 이 점을 매우 잘 인지하고 성실한 독자로서 민족주의든 뉴라이트든 탈민족주의든 각자의 주장의 결을 살려 놓았다.

 하지만 이런 '부채'에도 불구하고 한윤형의 이 책이 '상식'을 만드는 데 다른 보다 탄탄한 전문학술서적들에 비해 '특권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자명하게도 이것이 매우 '대중적'인 필치로 쓰여졌다는 것이다. 이런 대중적 작업, 정리 작업, 일종의 번역 작업은 주변적이고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다라며 다소간 무시하는 것은 매우 온당치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오히려 이런 작업은 학문 자체에도 핵심적인 것인데 이를 통해 학술은 자신이 상실한 현실과의 긴장감을 회복할 수 있기 떄문이다. '학문'이란 결국 인간이 스스로가 부딪친 문제가 일상적인 감각으로 해소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보다 많은 도구들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 비롯된 문명의 일부이다. 따라서 학술적 논쟁이 현실과 맺고 있는 긴장을 강조하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결론적으로 학문의 연구 대상은 현실이다. 이 잊혀지고 경시된 고리를 강조하는 데 있어 한윤형의 이 책은 특권적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중요하다. 상식을 의심하는 데에서 시작된 학문, 그리고 그 학문이 다시 현실로 돌아와 상식을 다시 만드는 이 과정에 한윤형의 책은 위치하고 있다. 나는 이 '상식'에서 비로소 시작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투표시장의 저 장사꾼들과 비도덕적 세계에서 혼자서 도덕적 정당성을 얻고자 하는 비도덕적인 이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그들의 말이 마치 자신들의 말인 것인양 여기저기 끌려다니던 젊은이들, 이런 군상들 속에서 묻혀버린 진짜 '우리'의 문제가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과 도전들울 말이다.

 그러니 책을 사보시라. 그리고 문자로 주변인들에게 구매(이 부분이 중요하다)일독을 권하시라. 소통의 테크놀로지는 기껏해야 편지나 전신을 돌리던 근대 초기에 비해 비약적으로 발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기술을 보다 나은 사회를 만드는 데 잘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그동안은 방법을 잘 몰라서 그리 했다면 이번 기회를 활용해 보기를 나는 적극적으로 권장한다. 한윤형과 나는 그 어떤 인적 관계도 없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이 많이 팔려야 한다는 데에 어쩌면 저자보다도 더할 확신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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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라이트 사용후기 - 상식인을 위한 역사전쟁 관전기
한윤형 지음 / 개마고원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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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한국이 보다 정직하고 의로운 사회로 간다면 두고두고 '상식'의 기초가 될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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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보드 워리어 전투일지 2000-2009 우리 시대 젊은 만인보 3
한윤형 지음 / 텍스트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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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무언가를 추억할 이름을 가진다는 것은 멋진 일은 아닐지 몰라도 중요한 일이다. 그것이 크게는 한 시대의 이름이건, 아니면 작게는 한 인생의 이름이건. 아니 보다 작게는 1년이 되었든 2달이 되었든 간에 어떤 때를 추억할 이름을 가진다는 건 정말 중요한 일이다. 사람은 그 이름들을 통해 자신의 인생을 추억하고 또 거기에 기대어(물론 그 기댐이 지나치면 우울증에 빠지지만) 오늘을 살아갈 힘을 얻는다. 자랑스런 것이든 아니면 머리가 굵고 나서 돌아보니 참 부끄러웠던 것이든 간에 일련의 이름들을 통해 우리는 스스로가 어떻게든 살아 왔다는 것을 확인하고, 또 그런 자신의 이름들을 다른 이들의 이름과 견주어 보면서 조심스레 한 발 한 발 걸어 나간다.

 오늘날, 그러니까 2009년의 20대 중 '대학생'들이 처한 곤란은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자기 자신을 부를 이름이 없다는 것, 즉 스스로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는 것 말이다. 오늘날의 대학생들은 이름을 가지고 있지 않다. 군대는 카투사로 가고 싶어하고 취업은 외국계 기업에 하고 싶은 데다가 얼핏 민족주의 비판을 주워 듣기도 한 대학생들에게 '민족'이란 아버지의 이름일 수는 있지만 자신의 이름은 아니다. 학원에서 유년기와 청년기를 보내고 20대에 들어서는 지방을 떠나 서울에 있는 대학(한국에서 '대학'이란 말은 개념적으로 지방대 혹은 비명문대는 포함하지 않는다)에서 젊은날을 보내게 되는 집에서 '살아본' 적이 없는 대학생들에게 '가족' 역시 내가 사랑하는 타인들의 이름은 될 수 있겠으나 '나' 자신의 이름은 아니다. 소위 명문대의 대학생들의 사정은 그럼 좀 낫지 않을까? 현재 고려대에 재학 중인 학생으로서 나는 딱히 그런 것 같지는 않다고 대답하고 싶다. 해병대 전우회, 호남 향우회와 함께 대한민국 3대 마피아로 불리우기도 하는 대학이 바로 고대이지만, 적어도 지금 캠퍼스에 구성원들에게 드넓은 자부심과 상징적 정체성을 제공해 주던 의미에서의 '고대'는 없다. 끈끈한 선후배간의 연대를 강조하는 '보수적' 고대이든 4.18 민주화 운동의 기수로서의 '진보적' 고대이든 간에 사태는 마찬가지다. 오늘날 고대생들은 그 이름이 들어 있던 '무게'를 비웃고 냉소하며 스펙 위의 한 줄로 이용한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그들'과 '그녀들'을 지칭하는 데 사용해온 '대학생'이라는 이름은 어떨까? 이 이름은 통계 위의 한 범주는 될 수 있으나, 개인들의 정체성을 담보해 주는 이름은 아니다. 오히려 오늘날의 대학생들은 역설적이게도 스스로를 대학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한윤형이 잘 지적하듯이 16년 이상의 제도교육을 받고 자란 오늘날의 대학생들은 부모와 사회가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너무도 잘 안다. 그들과 그녀들은 자신을 '대학생'으로 만들기 위해 들어간 정성을 하나의 '비용'으로 생각할 줄 아는 똑똑한 젊은이들이다. 오늘날의 실용주의적인 대학생들은 대학이라는 곳이 별다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스펙 위에 들어갈 하나의 '자격증'을 얻는 곳이라는 '사회적 진실'을 너무나도 잘 안다. 물론 이런 사실이 그들이 낭만적인 '대학시절'을 즐기는 것을 방해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자신들이 맞이하게 될 현실이 거친 것을 너무 잘 알기에 대학생들은 정말 최선을 다해 이 시절을 즐기고자 노력한다. 이 과정에서 젊음, 해방, 자유 등을 의미했던 '대학 시절'은 입시와 취업 사이에 놓인 '자투리' 시간으로 전락한다. 어떤 대학생도 자신을 대학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대학생 역시 편의상 사용하고는 있다만 그들과 그녀들에게 하나의 정체성을 제공해 주는 이름은 아닌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88만원 세대 역시 남이 자신을 부르는 호칭일 수는 있겠지만, 자신이 자신임을 확인케 해주는 이름은 아니다. '유행'이라고까지 부를 수 있는 이 개념에 대해 대학생들은 묘한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며 '자신의 일'은 아니라 생각한다.) 

 이름을 얻지 못한 '그들' 중의 한 명으로서 나는 한윤형이 솔직히 부러웠다. 이 책에서 제시된 한윤형의 9년은 단순히 자서전적 회고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한윤형의 9년은 아직은 너무 가까워서 그런지 잘 주목되지 못했던 한국 진보 정당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하고 있으며, 천리안 나우누리 등 PC통신에서부터 다음 네이버 등 포탈까지 한국 전자통신의 역사와 그 궤를 같이 하고 있다. 시작된지는 얼마 안 됐지만 나름 '개울' 정도의 모습은 갖춘 한국사의 몇몇 물줄기들에 그는 '키워질'을 통해 자신의 뿌리를 내릴 수 있었고, 그렇게 해서 판타지 소설을 좋아하고 부모에 수험공부를 하러간다고 말하고 PC방을 가기를 즐겼던 한 소년은 '세상'을 만날 수 있었다. 물론 그 스스로가 말하듯이 "조울증이 있고, 주변사람에게 종종 신경질을 부렸으며, 술자리에선 다른 사람의 약점을 잡아 골려먹는 걸 좋아한" 철없고 자기중심적인 시절이었는가 보다만 적어도 그는 그 시절을 통해 자신의 '바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조직활동을 하며 '대학생이 아닌 20대(30쪽, 대학을 다니는 이들은 흔히 잊는 사실이다)'를 볼 수 있었으며, 대학사회가 완전히 취업시장으로 재편되기 이전 마지막 학생운동 세대와 놀 수 있었으며(44쪽), 고 김선일 씨의 죽음을 통해 386세대를 인식하고 그들에게 분노할 수 있었다(136쪽). 나아가 그는 여기서 '한국전쟁'을 자신의 출발로 기억하는 '보수적'인 노년층과 '광주민주화 항쟁'을 안고 사는 '진보적'인 장년층을 발견한다(138쪽). 사실 '안'이 어디인지 모른다면 그와 구별되는 '바깥'이 어딘지도 알 수 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바깥'의 발견은 '안', 즉 스스로의 이름을 지어 부르는 과정과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적으로 일어난다. 윗 세대의 기원에 대한 발견은 그로 하여금 스스로의 기원, 정확히는 "2004년 6월(135쪽)"을 현재 자신의 시작점으로 삼는 것을 가능케 해주었다. 여기서 그는 '한국사(역사학보다는 경제학에 관심이 많은 오늘날의 대학생들에게는 참 와닿지 않는 말 중 하나다)'라는 크고도 거센 물줄기 속에서 자신의 뿌리와 "이름"을 찾는 데 성공한 것이다.  

 한윤형은 이런 자신의 '행운'에 대해 명확히 의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26세도 학부생인 내 처지는 "88만원 세대인 주제에 대학생활을 386세대처럼 한 어떤 한심한 문화지체자의 그것"이겠지만, 선후배 관계라는 문제로만 본다면 나는 이들에 비해 훨씬 운이 좋았다고 볼 수 있다. 21세기 초반, 인터넷 운동의 여명기에 '선배' 지식인이나 활동가들과 함께 놀 수 있는 '물'에 합류할 수 있는 기회가 19살이었던 내게 아주 잠깐 열렸고, 아마도 그 이후 그 문은 닫혀 버렸던 것 같다. 그리하여 나는 언제나 막내였던 것이고, 내가 술값까지 뜯어내는 그들을 지금의 20대들은 텍스트로밖에 만날 수 없었던 것이다(168-9쪽)." 

 그리고 그는 또 누군가를 발견한다. 자신과 달리 그런 행운을 얻을 수 없었던 '후배'들, 보다 넓게는 자신의 목소리를 갖지 못한 20대를 그는 발견한다. 그가 말하듯이 "우리 20대들은 각자의 헛소리"를 지껄이지만 "우리들도 서로가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170쪽)." 20대의 목소리란 없다. 우리는 입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따라서 20대란 생물학적으로는 존재할지 몰라도 사회적으로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인 것이다. 물론 '88만원 세대'라는 말이 '20대'라는 화두를 한국 사회에 던져 놓는 데는 성공했으나 오늘날 20대가 처한 곤궁을 온전하게 설명해 줄 수 있을지에 대해서 나는 회의적이다. 목소리를, 입을, 이름을 가지고 있지 못한 20대는 역설적이게도 '남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데 매우 익숙하다. 수험생들은 입시경쟁의 필요성에 대해 이해하고, 취업준비생들은 기업이 비정규직을 확충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서 이해한다. '자기'가 누군지 모르다 보니 남의 이익이 마치 자신의 이익인 것처럼 착각한다. 요즘 들어 나는 내가 지금 '살고' 있는 것인지 살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는지 헷갈린다. 삶은 항상 내 쪽이 아니라 정확히는 모르지만 저기 건너편 어딘가 즈음에 마련되어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렇게 우리는 삶을 1년 그리고 2년 조금씩 유예해 나간다. '스펙'이란 말은 그래서 천박하기보다는 슬프다. 우리는 항상 무언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준비'하고만 있는 것이다.

 한윤형의 처녀작인 이 책은 그런 이들에게 말을 건네려는 시도에 다름아니다. 허나 이 말건넴은 거만한 스승이나 부유한 복지가의 기름낀 자비로움과는 분명히 다른 것이다. 그는 스스로가 운이 좋았지만 자신 역시 이 이름없는 세대의 일원임을 단언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는 그리고 자신이 너희를 대신해 입이 대신 되어주겠다던가 하는 식으로 말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도 이제는 무언가에 대해 책임지는 사람이고 싶다(184쪽)." 

 어찌 보면 '후배' 중 한사람으로서, 그리고 같은 이름없는 세대의 일원 중 한 사람으로서 그가 이 말에 충실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어떻게든 이름을 찾을 수 있었던 행운을 얻었던 한 사람으로서 그가 우리 세대에 해줄 수 있는 것이 적지 않으리라고 나는 기대한다. 그리고 그의 또다른 싸움의 시작을 목격할 수 있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또한 그의 편지를 받은 이로서, 나도 우리도 무언가를 시작해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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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에 한겨레21(아마 254호?)에 폴라니 특집이 실렸다. 해당 기사에서는 근대경제체제를 마르크스의 시대->케인즈의 시대->하이에크의 시대->폴라니의 시대로 정리하고서는 최근 인류학에 기초한 진보적 경제학을 모색하는 우석훈, 홍기빈 등을 데려다 놓고 대담을 열었더랬다. 

 정작 폴라니 자신이 어쩐지에 대한 논의는 차지하고서라도 나는 폴라니의 '한국적 전유'가 매우 낙관적인, 동시에 매우 상투적인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의심을 가지고 있다. 즉, 이 폴라니 열풍이 현 시대와 역사의 사회경제적 구조에 대한 구체적 분석에 기초하고 있다기 보다는 또 하나의 천년왕국주의식 휴머니즘적 유토피아를 그리는 데 그치지 않고 있느냐는 것이다. 고민은 없되 레토릭만 맴돌고 있는 것이 아닐까? 

 짧은 공부지만 그래도 내가 아는 한에서 이쪽 진영의 논자 우석훈을 비판해 보자면 가라타니 고진의 <<트랜스크리틱>>2부 3장 5절 "자본주의의 세계성"절에서의 세계자본주의론을 논거로 들 수 있겠다 고진은 마르크스주의적 의미에서 진정한 '노동계급'는 기껏어해야 전 세계 인구의 절반에도 한참 미치지도 못한다는 월러스틴의 주장을 따라 자본주의적 노동구조 생산구조가 오늘날 전 세계를 뒤덮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이 점에서 잘 사는 나라들을 보면 자본에도 국가에도 포섭되지 않는 제3부문이라는 생산영역이 일정 부분 존재한다는 우석훈의 지적과 고진은 만난다.

 헌데 재밌는 것은 고진은 우석훈처럼 거기서 희망을 보는 게 아니라 그것이야말로 세계자본주의를 구성하는 핵심적인 고리라는 주장을 펼친다는 것이다. 즉 국가 단위의 개별자본이 아니라 세계적 총자본의 관점에서 봤을 때, 비자본주의적 생산영역은 자본주의의 외부, 예외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국이 아닌 타국에서의 노동력의 착취에 기초해 잉여가치를 산출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는 우석훈처럼 "국민경제"의 틀에 갇혀 있을 때는 볼 수 없는 통찰이다. 반대의 경우도 가능한데 전세계의 슬럼 지구에서 행해지고 있는 비공식 경제informal economy가 그것이다. 앞서 선진국의 비자본주의적 생산 영역이 타국의 노동력의 착취에 기반한다고 한다면, 슬럼에서의 비자본주의적 생산 영역은 명시적인 임노동계약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할 뿐이지 제대로 된 임금'조차' 지불되지 않는 절대적 착취가 이루어지고 있는 현장인 것이다.

 즉 고진의 관점에 따를 때, 비자본주의적 생산 영역의 사례를 아무리 많이 발견하더라도 오늘날이 '자본주의'사회라는 것을 반박하는 근거는 될 수 없다(홍기빈 씨가 말하곤 하는 인간적 관계들이 모두 사물적 관계로 도치된 데에 현 자본주의의 근본악이 있다는 개탄과 연관해 고진의 물상화 이론에 대한 비판도 참고할 만하다. 고진은 상품경제, 사물들을 통한 관계가 없었다면 인간들 사이의 관계는 존재할 수도 없었을 것이라 주장하며 물상화 이론들이 오히려 인과관계를 도치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오히려 자본주의야말로 오늘날의 세계가 존재하는 방식을 규정하는 단 하나의 이름이라는 사실을 더욱 확인 시켜줄 뿐이다. 따라서 폴라니나 모스와 같은 경제인류학적 성과들이 모두 거부되어야 할 유토피아적 환상이라며 기각해야 할 이유는 없다. 고진은 비자본주의적 생산 영역을 세계적 자본주의의 외부가 아닌 내부로 설명하는 데 이들의 연구를 전유하는 것 이외에도 증여/호혜적 교환관계를 통한 네이션의 형성을 논하며 이들을 다시 한번 활용한다 

 나는 좌파적 관점에서 인류학과 마르크스주의가 접합점을 찾을 수 있으며, 현 세계를 이해하고 이를 변혁하기 위한 주요한 이론적 지반을 형성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허나 지금 한겨레21 특집기사 방식으로는 뉴칼레도니아식 환타지를 제공하거나 이미 형성된 네이션을 문을 애처롭게 두들겨 보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퇴행적 시도들을 넘어 마르크스주의와 인류학의 접점을 고민하는 이론적 시도들을 모아본다. 언제 기회가 된다면 이 주제로 세미나를 가져볼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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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 교환과 가치, 사회의 재구성
데이비드 그레이버 지음, 서정은 옮김 / 그린비 / 2009년 4월
25,000원 → 22,500원(10%할인) / 마일리지 1,2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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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경제의 로고스 - 물신 숭배의 허구와 대안- 카이에 소바주 3
나카자와 신이치 지음, 김옥희 옮김 / 동아시아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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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스크리틱- 칸트와 마르크스 넘어서기
가라타니 고진 지음, 송태욱 옮김 / 한길사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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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여론
마르셀 모스 지음, 이상률 옮김 / 한길사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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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9-04-11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석훈이 국제적 노동분업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한 글로써 괜찮은 것이 있으면 알고 싶습니다.

게슴츠레 2009-04-12 11:38   좋아요 0 | URL
연관되는 주제로 본격적인 비판을 시도한 글이 있는지 잘 모르겠군요...우석훈이 국제적 노동분업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는 논지는 『괴물의 탄생』세미나를 한 이후 가지게 된 생각입니다. 『촌놈들의 제국주의』에서 동아시아 국가들 간의 충돌을 예상하며 보여줬던 국제적 경제 감각이 『괴물의 탄생』에서는 그저 '제3부문을 성장, 포스트-포디즘적 체제로의 전환을 통해 국민경제을 키워야 한다'란 주장 속에 그저 묻히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저로서는 부동산, 대외경제정책 등 한국경제 내부의 여러문제들에 대해 배울 기회가 있었던 책이었기도 했지만, 동시에 한국경제의 성장과 실패를 전세계적 자본주의의 관점보다는 내적 요인에 치중해서 분석을 하는 것 같으시더군요. 문제설정 자체가 일국적이다보니 대안도 전세계적 노동구조에 대한 비판적 의식이 결여된 경제적 국가이기주의로 귀결되지 않았나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04-12 1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국자본주의와 세계자본주의의 연관성을 포착해야겠지요?

게슴츠레 2009-04-14 18:41   좋아요 0 | URL
물론 그렇겠지요ㅎㅎ일국은 일국이고 세계는 세계고 따로따로 분석을 잘 해놓으면 되니 책을 굳이 뭐라할 필요는 없지 않겠느냐 식의 이야기도 세미나 중에 들을 수 있었다만, 저는 우석훈이 <촌놈들의 제국주의>에서 예리하게 지적하듯이 경제 문제에 있어서는 다른 국가들, 특히 동아시아 지역의 국가들과는 필연적으로 부딪힐 수밖에 없는 한국의 경우에는 탈국가적인 관점을 취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세계체계분석의 관점에서 볼 때, 타국의 노동을 착취하는 상황에서 일국의 자본과 노동은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한 것으로 그리 놀라울 것이 없는 것이겠지요. 우석훈 씨의 <괴물의 탄생>은 쉽게 간과하곤 하는 한국사회의 문제점들을 경제학적 시각에서 분석하고, 또 그것을 매우 알기 쉽게 풀어준다는 미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점에서는 많이 '소홀'한 책인 것 같습니다.

놀이네트 2009-04-13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잘 읽었습니다.
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쓰여진 글을 하나 링크하겠습니다.
http://xenga.tistory.com/entry/청산되어야할-지적-청산주의

88만원세대 공저자 박권일씨의 블로그입니다.

저도 인류학 공부 좋아하고 뭐 그래서 덧글남깁니다.

게슴츠레 2009-04-22 13:41   좋아요 0 | URL
제가 재미없는 사람이라서 그런지 모르겟지만 '유쾌함'보다는 '진지함'이 필요한 떄이지 않나 싶습니다...
 
가라타니 고진과 한국문학
조영일 지음 / 비(도서출판b)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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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문학에서 위안이나 눈물, 뻔한 행복 이상의 것을 원하는 이들은 꼭 읽어야 할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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