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아시누스님의 "퍼포먼스로서의 사상사 "

잘 읽었습니다. 저로서는 퍼포먼스로서 사상사를 본다는 것 자체가 많이 신기한 책이었는데요, "문제는 아즈마를 비판하느냐 긍정하느냐가 아니라 사상을 퍼포먼스로 기술하고자 한다면 다른 사상가들에게도 그러한 설명이 제공되어야 한다는 점이다"라는 지적에 사사키가 충분하지 못한 게 아닌가 생각을 해보게 되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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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의 발견 - 정치에서 가능성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정치학 강의
박상훈 지음 / 폴리테이아 / 2011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박상훈, 『정치의 발견』, 폴리테이아, 2011.

1.
  '최장집'은 한국 사회의 무수한 정치 관련 담론 생산자들 중에서 오롯이 제 위치를 가지는 이름이다. 우선 체계적이고 내적인 정합성을 가진 이론틀을 가지고 있고 이를 사람들에게 저술의 형태로 내놓았다는 점에서 그는 보수적이든 진보적이든 자신의 의견을 총체적인 형태로 가지고 있든 아니든 그러한 형태로 잘 제시하지 않는 정치인과 기자와 구분되는 '정치 이론가'이다.{(아마 이 포스트의 주된 독자일)'이론의 독자'로서 정치인이나 기자가 가지고 있는 세계관을 개념적으로 정리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함부로 비난하는 것은 무례할 뿐만 아니라 둔감한 행동이다. 정치인과 기자에게는 '사상'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 사상이 존재하는 방식으로서의 언어와 그의 구성이 다를 뿐이다. 이 비이론적인 이론의 존재 방식이나 의미는 매우 재미있고 또 지금 서술에서도 부연되어야 할 필요가 분명히 있는 것이지만 본 포스트의 목적과 논자의 모자람으로 인해 뒤로 미루기로 한다.} 그러면서도 그 이론을 개념적으로 연마하거나 다른 국산/외산 이론과 비교하는 일보다는, 이론을 자신의 문제의식이 촉발되었고 함께 정치적 운명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과 살아가고 있는 장소, '현대 한국사회'에 대한 분석에 적용하거나 기초하거나 반성하는 방식으로 전개했다는 점에서 그는 다른 이론 종사자들과 구분되는 '한국 정치 이론가'이다. 그리고 그 '한국 정치 이론가'들 중에서도 아카데미에 제대로 자리를 잡아 지속적으로 후학을 배출할 여건을 갖춰 이른바 '학풍'까지 만들어 냈다는 점에서 그는 '성공한 한국 정치 이론가'이다.{이론의 유효성 역시 성공의 요인 중 하나겠지만 최장집이 정교수가 되지 않았다면 이 정도의 제자들을 길러내고 주목을 받을 수 있었을까? 이론(가)의 사회적 생명은 이론과 무관한 이유 때문에 지속될 수 있으며, 특히 정치적 이유에서든 학술적 이유에서든 이론에 대한 고정적인 수요층이 두텁지 못한 한국같은 사회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리고 이런 사실이 해당 이론을 폄하하는 논거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박상훈은 이 학풍을 대표하는 인물 중의 하나이다. 우선 최장집 교수가 있는 고려대 정치외교학과에서 박사 학위 논문(「한국 지역 정당 체제의 합리적 기초에 관한 연구」, 1999)을 썼으며, 해당 학풍에서 중요시하는 이론가들의 번역서와 최장집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한국 학자들의 저서를 출간하는 출판사 후마니타스의 대표이다. 이러한 박상훈은 그야말로 '최장집의 제자'라는 말을 붙이기에 적합한 사람인데 이론적으로 스승이 제기한 문제틀(한국 사회에서의 민주주의론)을 따르고 있다는 '이론'의 측면에서 수동적으로 그러하고, 또한 자신의 주장뿐만 아니라 스승과 동료의 주장을 출판물의 형태로 보존하며 단순이든 확대든 학풍의 재생산을 도모하게 하는 물적 기초를 제공한다는 '활동'의 측면에서는 (스승이 하지 않았던 것을 한다는 의미에서) 능동적으로 그러하다.

  이런 박상훈이 '정치학 강의'를 내었다면 견적은 이미 어느 정도 나온 셈이다. 본서는 박상훈 개인의 독립적인 견해를 담고 있다기보다는 최장집과 제자들이 현재 정치이론과 한국정치 성찰에 있어서 도달한 잠정적 결론들을 담고 있고, 또 그런 논지들을 알기 쉽게 풀어놓음으로서 이 경향의 이론적 영향력을 보다 확대하려는 의도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인다. 좀더 저자로서의 박상훈 개인에게 초점을 맞춰보자면 이 책은 박상훈의 '활동'의 연장선에 놓여 있으며, '지역주의'라는 한국 정치에 고유하진 않지만 특징적인 문제를 다룬 『만들어진 현실』(박상훈, 후마니타스, 2009)과 함께 짝을 이루며 마치 그간 박상훈의 학술적 사회적 삶을 중간결산하는 의미를 가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책을 해당 학풍의 이기적이고 당파적인 확장 욕심의 산물로만 볼 필요는 없다. 자기가 믿는 무엇이 있고 적절한 반성을 거쳐 이것이 공적으로도 옳거나 유용하다는 확신이 들었을 때, 그 무엇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행위 일반을 어떻게 이기심이라는 좁은 말 안에 다 담을 수 있겠는가? 아니면 우리는 이 책의 주된 논지 중 하나가 제안하듯이 '당파적'이나 '이기적'이라는 말의 정의를 바꾸어야 할 것이다. 물론 '적절한 반성'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라고 각자의 입장에서 비판할 수 있겠지만, 그러기에 더더욱 비판을 받아 그 반성이 이번에는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공적인 장에 펼쳐질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갈등과 차이가 제거될 수 없는 '민주주의 사회', 아니 '인간 사회'에서 담론장에서의 당파적인 활동은 그 갈등을 언어의 형식으로 드러냄으로써 '우리'가 처한 문제 내지는 최소한 '너와 나'의 입장 차이를 공적으로 드러내고 토론의 대상의 삼음으로써 생산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나는 이런 면에 있어 박상훈이나 후마니타스는 '글'로 세계와 관계하고자 하는 이로서 '당파적 이론 활동의 모범'이라 할만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내용도 내용이지만 (자신이 믿기에) 올바른 것을 쓰는 것 말고도 읽히려고도 하는 '활동'의 측면에서 그러한 인상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이런 '활동'의 측면과 양상은 이론과 별개의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정치적 실천의 제도성을 중요시하는 이론에서 연유하는 것 같기도 한 것 같다.

  나는 이러한 책의 배경에 대한 이해를 전제하고서 이 책을 '예상 독자'라는 범주를 중심으로 '정치적 의도', 저자가 '의도했을 법한 정치적 효과'의 측면에서 읽어내 보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선입견을 확인하는 것 이외에도 역으로 이를 수정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2절과 3절). 그리고 수정에도 불구하고 저술에 표시할 수밖에 없는 불만들을 짤막하게 제시하는 식으로 서평을 마무리짓고자 한다(4절).


2.
   이 책의 내용은 해당 학풍이 '정치'를 사고함에 있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주제들 "정치가", "정치적 실천", "민주주의", "진보파의 맹목적인 정치관"을 해당 학풍이 이 주제들을 고민하는 데 있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저술들 (각각 베버의 『직업으로서의 정치』, 알린스키의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 사츠슈나이더의 『절반의 인민주권』, 셰리 버만의 『정치가 우선한다』)을 요약하며 다루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심플하지만 흥미롭기도 한 구성인데 자신이 믿고 있는 혹은 빚지고 있는 정치학적 조류의 경향을 '전달'하는 식으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 겸손하고 정직한 구성이며, 독자를 추가적인 독서와 구매로 인도한다는 점에서 친절한 혹은 여러 의미에서 상업적인 구성이다. 의도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책의 구성에서도 박상훈의 출판인-활동가적인 면모가 슬며시 묻어나오는 것만 같다...

  '내용'의 측면으로 돌아가자면 이 책은 그러니까 이중의 요약인 셈인데 해당 저술들에 대한 요약인 동시에 무엇보다도 최장집과 제자들의 문제의식에 대한 요약이다. 따라서 오래전부터 이 학풍의 논지를 차근히 따라온 독자들에게는 그다지 새로울 것도 읽을 이유도 없겠지만, 나와 같이 몇몇 단편적인 기사나 논문, 전해들은 이야기로 이들에 대해서 '대강' 알고 있던 사람이나 아예 이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거의 들어본 적이 없지만 정치 문제에 약간의 관심은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훌륭한 견학 기회를 제공해주며 이 책 역시 그러한 독자를 의도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을 위한 민주주의(샤츠슈나이더)"를 지향하는 이 책의 부제는 "보통 사람들을 위한 정치학 강의"가 아니라 "정치에서 가능성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정치학 강의"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한국 사회에서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정치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란 곧바로 '진보'라는 특정한 정치적 당파성을 가진 사람들을 지칭하게 된다. 그 이유는 보수는 이미 권력을 가지고 있기에 굳이 정치에서 가능성을 찾을 필요가 없으며, 설령 가능성을 찾을 일이 있더라도 후마니타스와 같은 학계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아도 규모나 영향력으로 봐서는 작디작은 출판사의 이야기를 들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담론적 욕구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매체나 지식인, 연구소를 이미 충분히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의 논지 역시 보편적인 독자에 대한 효과보다는 진보적 성향의 독자에 대한 효과를 중심으로 그 유효성을 평가받는 것이 보다 현실적이고, 또한 이 책 역시 그러한 독자를 의도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 책은 진보적 성향의 현역 또는 희망 정치인들을 대상으로 한 '정치바로 아카데미'에서의 강의를 기초를 쓰여졌다고 한다. 하지만 굳이 이런 책의 배경을 들춰보지 않더라도 우리는 책의 논지에서 충분히 이 책이 '진보파'를 의도적으로 겨냥하고 있다고 볼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저자가 대놓고 말하는 대목 이외에도 1~4장에 걸쳐 전개되는 메인 테마들을 다룸에 있어 진보파는 항상 '이 중요한 걸 모르는 자'라는 비판과 안타까움의 대상이라는 이론적 배경으로서 등장한다. 진보파는 이에 대해 주로 정당활동으로 포섭될 수 없는 운동들을 무시한 의회지상주의라며 대립각을 세워 왔다.


3.
  이 예상독자에 관한 부분을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한데 왜냐하면 이 책에서 '무지한 자'의 범주는 그 외형적 명료함과 달리 매우 모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모호함은 책의 주논지를 이해하는 데 있어 작지 않은 혼동을 가져다 주지만 제대로 이해되었을 경우 우린 이 학풍 내지 저자의 이론이 어째서 의회지상주의 이상의 것인지 알 수 있는 실마리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가정하는 "우리"가 누구인지 살펴보자. 정치의 가능성과 한계에 대한 이해에 기초한 현실적인 정치가와 활동가의 상을 묘사하고 이를 요청하는 대목인 1장과 2장에서는 "우리"가 누구를 지칭하는지 보다 분명하다. 여기서 저자는 틀림없이 넓은 의미에서의 정치와 변혁에 관심있는 직업정치가나 활동가, 그리고 일반인들을 포괄하는 '진보파'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여기에서 이 책의 부제가 가지고 있는 양의성이 보다 분명해 진다. 이 책은 주로 진보파에 의해서 말해지는 정치(1)에서 가능성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을 저자가 생각하는 정치(2)에서 가능성을 찾게끔 끌어내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헌데 1장과 2장에서 뚜렷했던 의도와 독자는 논의가 정치적 실천가의 덕목이 아닌 민주주의론 일반을 논하게 되는 3장에 들어가게 되면 모호해지게 된다. 더이상 무지한 자는 '진보파'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 일반'으로 확장된다. 1장과 2장에도 그러한 서술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만 3장에서는 보다 전면화된다. "민중적인 것, 진보적인 것의 가치만 앞세우면서 현실의 민주주의를 부정하거나 경시"(98쪽)하는 사람들이야 분명하겠지만 "정당은 당리당략이나 일삼는 집단으로 보는 풍토"(같은 쪽)도 그 사람들의 풍토일까? "민주주의를 이해하기 위한 싸움"에서 '이해해야 할 사람'들은 대체 누구인 걸까? "문제는 시민이 아니라 정치가"(107쪽)라고 말하며 1억8천만명의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닌 1억8천만명의 보통 사람들을 위한 반엘리트주의적 민주주의론을 펼치며, 마지막 페이지(174쪽)에서는 "한국 정치의 주변을 박차고 나와 민주주의의 발전에 중심적 기여자"가 될 "진보"를 기대하는 저자를 보면 분명해 보이기도 하지만, 끊임없이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에 대한 몰이해를 비판하는 부분들을 헷갈리게 된다. 이런 몰이해에 대한 비판 내지 불평은 마치 저자가 실은 1억8천만명의 아리스토텔레스를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의심을 품게 만든다. 엘리트주의를 비판하는 엘리트주의라는 이상하고 자기모순적으로 보이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저자는 한편으로는 대중을 신비화하거나 책망하는 무책임한 정치 엘리트들을 비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대중의 민주주의에 대한 몰이해를 개탄하며 나아가 이를 한국 정치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주요한 원인 중의 하나로 보는 것 같다. 이 두 논의를 모순없이 종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우리는 알린스키의 대중관에 대한 서술(61~2쪽)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저자는 알린스키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열악한 상황을 바꿀 힘을 갖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그때는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 사람들이 조직화되어 변화를 일으킬 힘을 갖게 될 때 그때 그들은 변화의 문제에 부딪히면서 어떻게 변화를 이끌 것인가를 생각하고 질문을 던진다. …… 힘을 위한 도구나 환경을 창조하는 것이야말로 (일반 대중으로 하여금) 알려고 하는 이유를 갖게 하고 지식을 필요로 하게 만든다."

  이를 고려해 볼 때 위의 모순을 종합하는 서사는 아마 이런 것이 되지 않을까?

'정치 엘리트와 대중 모두의 민주주의에 대한 몰이해는 한국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이유 중의 하나(이 부분을 충분히 강조하지 않으면 해당 학풍의 논지에 대한 심각한 왜곡을 하게 된다)이다. 정치가가 아무리 올바른 민주주의관을 가지더라도 대중의 민주주의 이해도가 낮다면 말짱 꽝이 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대중의 민주주의에 대한 몰이해는 특정한 조건 하에서 변화될 수 있다. 이 변화는 민주주의에 대한 완전한 이해까지 이를 수도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일정한 수준, 즉 대중으로 하여금 전체적이고 결과적으로는 민주주의적 정치 효과를 산출하기 위해 충분한 민주주의적인 개별적/집합적인 정치 결정을 내리거나 그런 결정 과정에 동원될 수 있는 수준에 이르게끔(이 표현이 문제적이라면 '형태를 띠게끔')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순간들에 필요한 그 '특정한 조건'이란 바로 1장과 2장에서 강조하고 있는 핵심인 잘 성장한 정치가의 노력과 그 노력의 실천을 정책적 실현의 측면에서나 지속성의 측면에서나 보장해 줄 수 있는 정당이다.'

  이 즈음에서 우리는 저자에게 있어 보다 대중보다 엘리트의 무지가 우선적으로 비판되어야 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대중의 무지, 정확히 말하자면 불안정성은 직접적으로 교정불가능하나 정당에 소속된 정치가의 활동을 매개로 교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단 정치가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다. 심지어는 이들이 그리도 강조하는 '정당' 역시도 제대로 굴러갈 수가 없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정치가'야말로 저자에게 있어 대중을 정치적 결정으로 이끌어내는 동시에, 정당의 기능을 정상화하며, 민주주의 이론과 구체적인 정치 현실을 연결하는 매개항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의회지상주의라는 일부 좌파의 신경질적인 반응은 솔직히 설득력을 읽을 수밖에 없다. 저자는 베버를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묻는다.

"그렇다면 정당이면 다 되는가?
  아니다. 정당에서도 결국 지도자가 중요하다. "지도자와 그 추종자는 모든 정당이 필수적으로 갖춰야 할 기본 요소"이다. 평범한 보통 사람들의 경우도 "정당이 가진 추상적 강령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한 인간에 대한 절대적 개인적 헌신"으로 자신의 역할을 한다. 널리 인정받는 지도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그 순간부터 인간은 "명망가들의 허영심과 이해관계에 매몰되거나 당 관료들의 손에서" 놀아나게 된다." (37쪽)

  요약하자면 대강 이런 그림이 될 거 같다. '민주주의 이론은 정치 엘리트를 교육하나 대중을 통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살아있는 인간으로서의 정치가는 대중을 특정한 방향으로 인도하고 동원할 수 있다. 그래서 나님은 올바른 민주주의가 실천되기 위해서, 그리하여 나님이 생각하는 '진보적인 것'이 관철되기 위해서 제대로 된 정치가가 나왔으면 좋겠고 서로 지금 생각은 많이 다르지만 그래도 열정이라도 가진 것은 진보파 님들밖에는 없는 것 같다. 그러니 한 번 내 말 좀 들어다오...' 이런 점들로 미루어 볼 때 이 책은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민주주의"가 어떤 것인지 논하는 책인 동시에 그 자체가 이미 설득을 목표로 한 "진보파를 위한 전략적 계몽주의"라는 '정치적' 의도를 가진 책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4.
  지금까지가 책을 평상시 최장집과 박상훈, 후마니타스에 대한 내 선입견을 갱신하면서 읽으려는 다소 수더분한 시도였다면 이제는 책에 대한 불만을 짤막하게 말해보겠다.

  우선 몰역사성 내지는 좌파를 포함한 대중에 대한 외재적인 접근이 그것이다. 저자는 사람들의 그릇된 정치관을 훈계조로 곧잘 비판하는데 이런 비관 자체가 정치 학습의 모자람이 아닌 정치를 통해 득본 적이 없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대중의 역사적 경험에 근거한다는 것을 외면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저자가 그런 역사적 경험에 대한 감각이 없는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가 상층 엘리트의 기획이 아닌 하층의 배제에 반대하는 투쟁에서 태어났음을 언급하는 부분(91쪽)과 이어서 한국에서는 그러한 민주주의 학습의 기회를 일제와 미국이라는 외부의 요소에 의해 빼앗겼음을 논하는 부분(93쪽)은 저자가 역사적 맥락에 민감함을 짐작케 해준다. 헌데 어째서 이런 역사적 고찰을 대중을 논하는 부분에서는 일부러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무시하는지 모르겠다. 저자 자신이 알린스키를 통해 강조하는 이론을 주입하기보다는 다리를 놓는 식의 실천론을 본인의 서술에서도 실천했더라면 참 좋았지 않을까 싶다.{그리고 몰역사성과 관련해서 셰리 버먼을 활용해 서구 유럽 현대사를 해설하는 대목인 4장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다. 저자는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사민주의 세력을 비판하는데 좌파 일반을 사민주의와 크게 구별하지 않는다. 사실 그 당시 사민주의 까는 거야 공산주의 진영에서 천년만년 해오던 거라 저자가 기대하는 좌파 일반에 대한 공격은 잘 성립되지 않는다. 특히 정치적 소극성에 관한 부분은 그렇다. 좌파라면 "그러니까 로자를 죽이지 말고 혁명을..." 식으로 되받아치면 될 일이다. 게다가 나치즘의 등장을 독일의 1차대전 패전과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갈등이라는 이제는 매우 상식적인 역사적 조건을 고려치 않고 그저 사민주의의 실패에서만 찾는 것은 황당하다. 나아가 여기에서 좌파의 반정치성의 정치적 해악이라는 일반적 결론으로 나아가는데 내가 알기로는 전후 유럽사에서 공산주의의 외양적 급진성은 성숙한 민주주의의 사례로 손꼽이곤 하는 사민주의 질서의 성립에 환원불가능한 기여를 하였다. 나는 셰리 버먼의 책이 이런 측면을 다루어줄 것으로 기대했는데 만약 박상훈이 하는 것처럼 제한된 시기의 역사적 실패를 좌파 일반의 문제에 끼워맞추는 그런 불성실한 책이라면 구매를 재고해 봐야겠다...}

  좌파에 대한 서술에서도 마찬가지다. 저자는 자꾸 좌파를 인간의 문제에 관심이 없고 이념의 문제에 미친 사람들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김문수의 전향에 대한 코멘트(56~57쪽)에서 뚜렷히 드러난다. 그는 김문수의 문제를 사회주의의 신념을 지키지 못했다는 데에서가 아니라 애당초 처음부터 가난한 보통 사람들을 위한 투쟁이 아닌 이름뿐인 이념에 매몰되었다는 데에서 찾는데, 여기서 우리는 저자가 이상에 대한 헌신과 인간에 대한 헌신을 칼같이 분리해 놓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한 사람의 마음 속에서 이 둘을 어떻게 그렇게 무자르듯 나눌 수 있겠는가. 자기가 -주의자라고 말하는 사람은 모두 인간적인 것으로부터 멀어진 사람일까? 비록 개인이 저자가 칭송하는 알린스키처럼 정치적 실천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이념이 아니라 인간적인 것이라고 반성된 형태로 말하지는 못하더라도 비정치적인 성공의 길을 포기하고 스스로를 -주의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모두 어느 정도 인간에 대한 애정이 전제되어 있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물론 그 사랑의 방식이 괴팍해 보일 수는 있다는 점과 그게 교정되어야 한다는 점은 말해볼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저 사람에게 사랑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지극히 편의적인 사고방식이다.

  마지막으로 정치의 조건, 규정성에 대한 충분하지 못한 강조를 들 수 있겠다. 저자는 일단 이 저술에서는 제대로 된 정치가의 부재를 한국 정치의 가장 큰 문제로 규정했지만 전문적인 정치가가 등장하기 힘든 척박한 정치계의 물적 풍토나 또 진보적 정치가가 온전히 활동을 펼치기 힘든 현실적 조건들을 역사적이든 현재적이든 뚜렷히 보여주지 않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자와 저자가 속한 학풍이 이에 대해 둔감한 것은 절대 아니고 그 역이라는 것은 후마니타스의 다른 출판 목록에서 어렵지 않게 확인될 수 있을 것이다. 후마니타스라고 최장집과 사츠슈나이더를 경전으로 삼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을 열심히 읽었기에 한국 사회 지배 구조에 대한 분석부터 노동자 수기에 최근에는 문학까지 이르는 책을 다양하게 내는 것이기도 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민주주의에 대한 몰이해는 한국 정치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이 책의 예상 독자와 그들에 대해 품었을 법한 '전략적 의도' 역시 이에 대한 서술을 부연하지 않은 이유가 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님들, 이런 건 잘 알잖슴까..." 그렇지만 그래도 다리를 놓으려면, 그리고 정치에 대해 좀더 '현실적'으로 접근하긴 위해서는 한 소절이라도 이에 대한 주의를 표했어야 하는 게 '정치학 강의'라면 맞지 않았을까? 아니면 저자는 별로 중요하게 생각치도 않는 정치의 종속성에 대해 내가 너무 호의적인 평을 해주는 것일까?
  다음과 같은 구절은 의심을 더해주는 데에서 나아가 황당한 심정도 들게끔 한다. "정치에서의 비극은 돈 때문이 아니라 돈의 위력에 압도되어 늘 변명을 찾는 인간의 나약함에서 비롯된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168쪽) 정치인을 자본의 꼭두각시로만 보는 맑스주의적 정치인관(?)에 대한 문제의식은 이해하겠다만 그렇다고 정치인의 당당함만으로 자본에 대한 경제적 종속이라는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저자는 생각하는 것일까? 138쪽에 나오는 경제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 역시 굳이 없어도 되었을 부분이다. 경제의 규정성을 말하는 것이 무조건 경제 환원론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경제 결정론이란 둘 중 어느 항을 긍정하든 이렇듯 정치와 경제의 관계를 무시하는 것일 수 있다.
  이 모든 물음은 저자가 정치의 가능성과 조건 사이의 관계에 대해 적극적인 해명을 했을 때에나 속시원하게 풀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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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일본 사상 - 아사다 아키라에서 아즈마 히로키까지
사사키 아쓰시 지음, 송태욱 옮김 / 을유문화사 / 2010년 12월
평점 :
품절


-사사키 아쓰시, 『현대일본사상』, 송태욱 옮김, 을유문화사, 2010.


1.
  이 책은 일본에서도 2009년에 출간된 번역서치고는 따끈따끈한 신간으로 1980년대 아사다 아키라로부터 대표되는 이른바 '뉴아카데미즘'부터 2000년대 후반 아즈마 히로키의 『비평지도』까지를 '현대일본사상'이라는 규정에 묶어내 그 변천 과정을 추적하고 있는 책이다. 논술 교재로도 활용되는 푸코나 롤스, 그리고 최근 사람으로는 마이클 센델같은 유럽이나 영미권 사상가들에 비하면 일본의 사상, 특히 현대일본사상이 상대적으로 낯설기도 하고 관심이 덜 동하는 주제임은 사실이다. 하물며 현대일본사상'사'라니?

  하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아사다 아키라의 『구조와 힘』과 『도주론』같은 책과 아즈마의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은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으며 특히 가라타니 고진의 경우에는 80년대 이후의 주저들이 띄엄띄엄 번역되어 오다가 최근 들어 거의 다 번역되어 있는 상황이다. 또 이렇게 번역된 저서들이 젊은 대학원생들의 학위 논문에 심심치 않게 등장하고, 아직 스테디나 베스트셀러는 아니지만 출간만 되면 알라딘 세일즈 포인트 1,500은 넘기고 서평도 2~3개는 꾸준히 올라오는 것을 볼 때 한국 인문학계에서 현대일본사상은 꼭 그리 낯선 주제만은 아닌 듯싶다. 오히려 한국 인문학 시장에서 현대일본사상에 대한 수요는 이론적으로나 상업적으로나(물론 본서에서 보여주듯이 오늘날 이 둘의 경계는 모호하다) 증대하고 있는 추세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아직 뚜렷한 성과를 내진 않았지만 젊은 인문학 소비층이 현대일본사상을 어떻게든 소화 활용하려는 모습을 세미나나 블로그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런 사상 자체의 수요 증대는 사상사에 대한 진지한 수요 증대를 수반할 수 밖에 없는데 개별 저자들의 개별 저술만을 읽는 것으로서는 해당 저술의 문제의식을 온전히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사상이란 어떤 공백에서 시작되는 순수한 정신활동과는 거리가 있다. 사상은 언제나 배경을 가지는데 첫째, 그 이전에 있었던 사상에 대한 논평이라는 의미에서 그러하고 둘째, 그 사상이 처한 사회적 역사적 조건과 셋째 그 조건과 관계맺는 자신, 그 안에서 사상이란 행위를 하고 있는 자신에 대한 반성이 라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이를 간과하면 독자는 유사한 부분들을 찾아 끼워맞춰보는 그림맞추기 수준 이상으로 개별 사상들을 묶어낼 수가 없다. 그런 점을 고려해 봤을 때 본서는 너무 일찍 도착한 손님인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일본어를 할 줄 알고 현대일본사상에 꾸준한 관심을 가져온 소수 이외에도 이 책에 관심을 가지고 나아가 이런 책이 필요했다고 생각할 만한 독자 풀이 충분히 형성될 수 있는 출판조건이 갖춰져 있는 것이다(물론 서평자 자신도 후자에 속한다).


2.
  그러나 모든 독서의 경험이 그러겠지만 특히 본서에서 독자는 조금만 주의를 기울인다면 자신에게 부족했던 지식을 채우는 경험만을 하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 책의 또 가장 강한 매력 가운데 한국 사상 시장과의 '동시대성'이다. 달력 위의 시간상으로만 봐도 본서가 다루고 있는 시기는 '지금 여기'와 매우 가깝다. 그리고 당시 일본의 시대적 조건이 지금 한국의, 특히 출판시장, 대안담론/비판담론 시장의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 이를테면 맛뵈기로 뉴아카데미즘 유행시 학생들의 상태를 회고적으로 묘사한 사사키의 다음과 같은 말을 들어보자.

"비정치적이고 무슨 일에나 관심이 없는 세대라 불렸던 당시의 젊은이지만, 지적 호기심이나 향학열이라 부를 수 있는 에너지를 학생 운동이나 입시 전쟁에 사용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게 비축하며 부풀리던 사람도 있었습니다(부끄럽지만, 필자도 그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지적 리비도가 향한 곳으로, 아사다나 나카자와의 책은 아주 적절한 것이었습니다." -37쪽

  어디서 많이 본 풍경이지 않은가? 이러한 유사성은 시공간적 근접성 때문에 보게 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내 생각에 그보다는 사사키의 '사상사'가 내용보다는 형식, 그것의 옳고 그름보다는 그것 자체가 하나의 사회적 행위로서 행해졌던 방식을 기술한다는 관점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보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사사키는 자신의 방법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먼저 <일본의 사상>을 개괄한다고 하면서도 이 책에서는 개별적인 사상의 내실과 내용에 일일이 깊이 파고들어 각각의 변천을 논하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 이유는 필자가 애초에 <일본의 사상>은 사상의 '내용' 자체보다 오로지 그 사상의 '행위'에 의해 성립해 온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데 있습니다. (...) 그 사상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이상으로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아니 그것을 그렇게 말함으로써 무엇을 어떻게 하(려 하)고 있는가가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18쪽

  혹자는 이런 사상사가 사상의 컨텐츠, 핵심을 외면하는 몰지성적인 태도라고 비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상이 현실에 끼친 영향도로 따지자면 '담고 있는 것'이 우선이었을까 아니면 '담고 있다고 가정되는 것'이 우선이었을까? 사사키는 "때로는 내용이 거의 모든 사람에게 이해되고 있지 않는데도(또는 내용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는 경우조차도?) 어떤 유효한 퍼포먼스에 의해 그 사상이 효력을 발휘하는 일도 있습니다(19쪽)"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상이 '보이고 싶어하는' 주관적 모습이 아닌 실제 '보인' 객관적 모습을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닐까?
  사상과 깊은 사랑에 빠져 있는 이들에게 이런 객관화는 모욕적인 것일 수 있겠지만 사사키는 거침없이 솔직한 관점을 택한다. 그는 거친 말투를 쓰진 않지만 현대일본사상가는 끊임없는 구별짓기의 과정이었으며 이를 멀리서 보면 올라갔다 내려갔다하는 '시소'에 불과했다고 굉장히 거친 논의를 펼친다(하지만 자세히 읽다 보면 그는 현대일본사상에 '성과'가 없다고까지는 보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의 사상>의 역사를 '행위=퍼포먼스'의 응수로 그리려 하면 그 변천의 양상도 내용을 좇는 것과는 상당히 다른 것으로 보이게 됩니다. 예컨대 어떤 사상이 새롭게 등장할 때 가장 효과적인 것은 그 이전의 사상과 완전히 다르다는 것, 적어도 타자의 눈에는 그렇게 비친다는 것입니다." -19~20쪽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일본의 사상>의 변천을 더듬어 가는 것은 시소를 타고 노는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수없이 역전이 일어나고 그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게 됩니다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의외로 전보다 그다지 나아진 것 같지가 않습니다." -22쪽

  이렇게 사상을 철저히 탈신비화해서 보려는 태도에 입각해 『구조와 힘』15만부 판매로 시작된 화려한 뉴아카데미즘의 성공 요인을 그 내적 논의의 정교함이나 위대성이 아닌 마치 마케팅론을 연상시키는 방식으로 설명한다.

"(...) 아사다나 나카자와의 책에서 핵심적으로 다루는 해외 문헌이 아직 일본어로 번역되지 않았는데, 그들은 해외 문헌을 원문으로 읽을 수 없다는 것 때문에 오히려 독자의 흥미와 갈망을 더한층 자극하여 그들의 책이 단지 '소개'라는 기능 이상의 흡인력을 가졌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제 읽을 수 있다/아직 읽을 수 없다'는 이 미묘한 상태도 뉴아카데미즘 현상의 절묘한 지점이었을 것입니다." -40쪽

"뉴아카데미즘의 전성기인 1984년 말에 (...) 『알고 싶은 당신을 위한 현대 사상 입문』이라는 무크지가 간행되었습니다. (...) 이 '알고 싶은 당신'이야말로 뉴아카데미즘 현상이 산출한(또는 드러낸?) 새로운 독자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뉴아카데미즘의 퍼포먼스는 '알고 싶은 당신들'을 위해 이루어졌고 그것에 의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들'을 대량 생산하는 기능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92~3쪽

"여기에는 <일본의 사상>의 그 이후 흐름을 생각할 때 아주 시사적인, 어떤 중요한 동기 부여가 나타나 있습니다. 그것은 '읽지 않아도 알 수 있다(=읽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알고 싶은 당신'들에게는 알 수 있는지 없는지를 진지하게 묻는 것보다 될수록 빠르고 편하게 알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게 되어(알 수 있게 되어) 그것에 대해 '말(할수 있는)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아사다 아키라나 나카자와 신이치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든, '작품=텍스트'를 '읽는' 행위(이것도 일종의 '노동'입니다)를 경시하는 뉴아카데미즘의 특징은 그들이 갑자기 인기를 얻게 된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123쪽

  헌데 이런 문제의식, 사상이 '내용'에 의해서가 아니라 '행위'에 의해 성립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문제의식 내지는 위기의식은 사사키 자신의 고유한 관점만은 아닌 아사다나 가라타니같은 뉴아카데미즘의 논자들에 대해서 작든 크든 자각되고 있는 것이었다. 사사키는 고진의 「비평과 포스트모던」같은 논문이나 『탐구』이후 '타자'라는 범주를 중심으로 전개된 작업을 이런 맥락에서 높게 평가한다. 또한 아사다 역시 그러한 반성을 수행했다는 것을 1987년 12월 『겐다이시소』 임시증간호에 실린 「어린이의 자본주의와 일본의 포스트모더니즘 - 하나의 요정 이야기」라는 강연기록문에서 찾는다.

"[아사다는] <1980년대 일본>에 나타난 '포스트모던'은 사실 1930년대의 전전 '포스트모던'과 비슷한 것이 아니겠느냐면서 아사다는 그런 비전을 '관념론적 도착의 극치'로 단정하고 마치 자신이 제기한 논의를 내팽개치듯 강연을 끝내 버립니다.
 아사다는 강연의 마지막 부분에서 분명히 자조적으로 "이 비전이 자괴에 이르는 것처럼 저는 감히 그로테스크한 패러디를 계속해 왔다"고 말한 뒤 "이 도착을 철저히 해체하고 그 안에서부터 현실적인 분석을 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이 발언은 이 강연에서의 논지에 대한 것이겠지만, 뉴아카데미즘의 스타인 아사다 아키라의 '행위' 전반에 대한 자기반성의 변이라고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86쪽

  회고담이긴 하지만 아사다와 함께 뉴아카데미즘을 주도한 나카자와 신이치에 따르면 이런 불안과 반성, 자각은 뉴아데미즘의 시작 때부터 있어왔던 것이었다. 하지만 사사키는 그런 사후적 회고가 진실이든 말든 사회적 현상으로서의 뉴아카데미즘에 대해서 가차없는 평가를 아끼지 않으며 이를 재밌게도 가라타니의 메인 테마이기도 했던 '아는 자'와 '행하는 자' 논의를 활용해 논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고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해도, 그들은 계속 '뉴아카데미즘'이라는 춤을 추었습니다. 그 춤은 밝고 경쾌하고 멋있었고, 무엇보다 무척 즐거운 것이어서 옆에서 보기에는 그런 의심이나 아이러니가 숨어 있을 거라고는 추호도 생각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그 '춤'이 확실한 종언을 고하기 위해서는 '쇼와'가 끝나고 '1980년대'가 끝나는 것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139~40쪽

  어찌보면 이런 비평을 사상의 주논지를 무시한 '탈맥락화' 내지는 '트집잡기'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사사키의 비판에는 치명적인 구석이 있다고 생각한다. 마케팅론을 연상시키는 방식으로 사상을 다룰 때에도 사사키는 판매 데이타나 '몰이해한' 독자들만을 근거로 내세우는 것만이 아니라(그런데 이들을 근거로만 내세우면 과연 '충분'하지 않은 것일까? 뒤에서 우리는 이 질문에 다시 답해볼 것이다.) 해당 사상가들이 딛고 서있으나 뚜렷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이론적' 전제를 함께 제시한다. 이를테면 사사키는 아사다 아키라가 뉴아카데미즘 풍조와 이를 따랐던 사람들에 대해서 '유머'를 유머로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식으로 가혹한 비판을 하는 대목을 두고 "<일본의 사상>의 '병적인 성격'" 중 하나를 본다.

" (...) 아사다 아키라는 여기에서도 철저하게 '올바릅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치명적일 정도로 다음의 두 가지 물음이 결여되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첫째, 왜 사람들은 때로 그렇게 '바보'같고 '하찮은' 생각에 빠지는 것일까? 둘째, 도저히 그런 '바보'스러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면, 그럼 대체 어떻게 해야 좋은 것일까?하는 물음입니다. (...) 굳이 말하자면 '지성'의 차원과는 별도로, 그래도 사람은 '어리석음'에 사로잡히는 일이 있는 게 아닐까요? 옴진리교가 뜻밖에 가르쳐 준 것은 오히려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은 단지 머리가 나쁘기 때문이라고 정리해 버리는 것은 간단합니다. 아사다 자신이 '지진아'라는 말을 쓰고 있기 때문에 명백하다고 생각합니다만, 유감스럽게도 여기에는 사실 그 자체가 현실을 회피한, 지적 엘리트주의가 얼굴을 내밀고 있습니다. (...계속 이어짐)" -215~6쪽, 강조는 인용자.

사사키는 여기서 아사다, 그리고 뉴아카데미즘을 규정해 오던 근본적인 '부도덕'을 본다. 그것은 '비판적'이기는 했으나 동시에 '초월적'이다. 때로는 실수도 하고 '멍청'하기도 한 타자를 용인할 수 없이 자신의 템포로만 세계를 재단하는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세계관이다. 사사키가 보았을 때 90년대의 사상은 이에 대한 반동으로 시작된 것이며 80년대와의 차이가 가장 뚜렷히 드러난는 대목이 바로 천황제에 대한 태도와 옴진리교 사건에서였다.

"하지만 그[오쓰카 에이지]는 아사다 아키라와 같은 세대이기는 해도 '1980년대 뉴아카데미즘' 논자들과는 전혀 다릅니다. 오쓰카의 연구는 철학적인=이론적인 해독 코드를 '현실=현재'에 적용해 가는 '현대사상'적인 것과는 정반대로 어디까지나 '현실=현재'를 향한 시선과 필드 워크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182쪽

"그러나 아사다 아키라나 가라타니 고진과 달리 세 사람은 각자의 입장에서 기본적으로 천황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1980년대와 1990년대의 <일본의 사상> 사이에 가로놓인 중요한 차이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요쿠'(좌익)와 '우요큐'(우익)의 차이가 아니라 '이념(ideal)'과 '리얼(현실=현재)'의 차이가 아닐까 하는 게 저의 생각입니다. 1990년대의 세 사람은 현실로서는 어떻게든 천황이 존재한다는 움직일 수 없는 사실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여기기 때문입니다." -199~200쪽

"'바보 같고 하잖은 현실=세계'는 논할 가치가 없다고 하는 1980년대의 사상과, 아니, 바로 그것을 논해야 한다는 1990년대의 사상, 이 차이가 분명히 드러난 것이 '옴진리교 사건'이었습니다." -216쪽

  하지만 그렇다고 사사키가 뉴아카데미즘을 지워야 할 부끄러운 과거로 넘겨버리고 90년대 사상에 양 손을 들고 있다고 보긴 어렵다. 우선 90년대 사상의 경우에는 철저히 가장 평면적인 의미에서의 '현실'에 근거하려고 했다는 점은 중요한 전회로 본다. 비록 서문에서 현대일본사상을 '시소'에 비유하긴 했으나 그는 이런 반성들과 그에 기초한 작업들을 나름의 '성과'로 보기는 하는 것 같다. 다만 세계에 내재적으로 접근해 변혁보다는 기술에 초점을 두다보니 비판을 포기하고 세계를 그냥 긍정하는 것으로 기울 위험이 90년대의 사상에 있었다.
  뉴아카데미즘에 있어 그는 그 컨텐츠가 있던 없던 자기과시였던 말던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킨 건 사회적 사실이고 거기에서 읽어내야 할 것이 분명히 있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유행이든 스노비즘이든 '사상'에 관심을 가진 젊은이가 일정한 수의 '층'으로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연합 적군 사건' 이후 대략 10년 만의 일이었습니다.(93쪽)" 그리고 그 의미를 '도주'와 같은 시대적 과제나 전복 전략보다는 좀더 유물론적인 관점에서 찾는다. 즉 아사다라는 인물 자체도 시대를 속해 있는 인물로서 비평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논문[『도주론』]이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이론적인 틀을 거의 억지로 '대학론'에, 더욱 자세히 말하자면 '대학생(젊은이)으로서의 생활방식론'에 적용시키고 있는 점입니다. 차이화라는 용어는 단숨에 생활 방식의 모드로, 이른바 처세술로 변환합니다. (...) 마지막 문장에 아사다 아키라의 '대학생=젊은이' 에 대한 메시지가 집약되어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그것은 집필 당시 스물네 살의 젊은이였던 스스로에게 한 말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55쪽, 강조는 인용자


3.
  사사키가 보기에 2000년대의 아이콘, 아즈마 히로키는 이런 <일본의 사상>의 특성에 대해, 그리고 이에 속한 사람으로서의 자신과 동료들에 대해 객관적인 인식을 수행한 사람이었다. 아즈마는 데뷔 이후 뉴아카데미즘에 거리를 두는데 흔히들 그 단절점을 오타쿠 분석인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에서 찾는 것과 달리 사사키는 그의 데뷔작 『존재론적, 우편적』의 말미에서 찾는다. 거기서 아즈마는 데리다가 왜 이런 기묘한 텍스트를 썼을까 묻다보니, 결국 자기가 궁금했던 것은 내가 왜 이런 기묘한 텍스트는 읽는 것일까이였으며, 이것이 하나의 "함정"이었다고 말한다. 사사키이 대목에서 아즈마를 80년대와 90년대가 주는 교훈을 가장 의식적으로 잘 섭취한 사람으로 평가한다.

"여기서 말하는 '자기 언급적인 함정'이란, 뭔가에 대해 말하는(생각하는) 것이 어쩐 일인지 '이 나'에 대해 생각하는(말하는) 것으로 반전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 여기서 아즈마가 말하는 것은 분명히 일종의 '문학 비판'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문학'이야말로 다른 무엇보다 더한층 '이 나'를 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아즈마 히로키는 어떻게든 '철학적'이면서도 '문학적'이지 않은 사고의 양상을 모색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이 나'가 품고 있는 '악순환'을 어떻게 뒤집을까, '자기 언급'이라는 '함정'에 어떻게 '타자'를 도입할까(...) 이를테면 '타자 언급성'을 어떻게 작동할까 하는 시도였습니다." -257~8쪽

  이에 근거해 보았을 때, 데리다에서 오타쿠로 넘어간 아즈마의 행보는 그리 이상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된다. 아즈마의 뉴아카데미즘과의 단절은 앞서 보았던 아사다의 다소 위선적으로도 느껴지는 자기반성보다 더 근본적인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1999년 초에 열린 『비평공간』의 심포지엄에서의 아즈마와 아사다의 직접 대화에서 드러난다.

아즈마: 아사다 씨와 저의 의견이 다른 단 한 가지는, 아사다 씨는 좋은 텍스트가 어딘가에 있으면 누군가 읽을 거라는 것이지요.
아사다: 아니, 읽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아즈마: 읽지 않았다면, 사후적으로 보면 그저 사라진 것일 뿐입니다.
아사다: 사라져도 어쩔 수 없겠지요.
아즈마: 그건 일종의 니힐리즘인데, 글을 쓰고 싶은 저로서는 그런 입장을 취할 수는 없습니다.

(...)

  필자는 이 어긋남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투병 통신'에 대한 위화감과 '사라져 버리는' 것에 대한 위기감이 그 후 아즈마 히로키의 퍼포먼스를 구동시켜 가는 최대의 행동 원리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261~2쪽

  이렇듯 '읽히는 글'을 쓰고 싶고, 또 그래야만 사상이 의미가 있다는 아즈마의 아이디어는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 같다. 하나는 콘텐츠, 내용, 콘스탄티브한 측면의 변화로서 저널리즘적 측면의 강화이다. 아즈마는 이제 데리다에 대해서 말하기보다는 오타쿠나 정보자유에 대해서 말한다. 사사키는 이런 변화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그는 이 논고[「정보자유론」]에서 '뉴아카데미즘'적으로 '현대 사상'만 말하는 것도 아니고 '오타쿠'로서 '모에'만 말하는 것도 아니며 확실하게 사회나 공공성에 대해 자극적이고 유효한 말=사상을 갖고 있음을 증명한 것입니다. 이 점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280쪽

"이에 따라 그는 '이념=이론'에서 '현실'로, 아카데미즘에서 저널리즘으로 전환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이행이 아닙니다. 1980년대의 요소도 적당히 유지하면서 1990년대에 다리를 놓고 중심을 이동한 것입니다. (...) 오히려 아즈마는 그 사고의 발판을 커다란 '거대 서사'에서 작은 '거대 서사'로 바꾸었던 것입니다. 철학이나 문학이라 불리는 추상적이고 이상적인 '사상'에서 좀 더 실천적이고 현실적인 '사상'으로 이동한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사회학이나 심리학에 대한 강한 관심이라는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 사회학도 심리학도 이를테면 '거기에 있는 것'에서 출발하는 학문입니다. 거기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기본적으로 데이터 수집과 그 해석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여기에 없는 것'을 희구하는 철학이나 문학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공학이나 법학에 대한 관심도...)" -285쪽

  다른 한 가지 측면은 스타일, 행위, 퍼포머티브한 측면의 변화로서 아즈마는 현대일본사상가들 중 거의 최초로 자신이 사상이 받아들여지는 과정을 의식적으로 조직하려고 한다. "(...) 단지 콘스탄티브하게 뛰어난 '텍스트=작품=사상'을 쓰면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시대는 이미 지났습니다. 퍼포머티브한 '효과'를 짜 넣으면서, 그러나 콘스탄티브이기도 하는 '텍스트'를 생산하면서 동시에 다양한 '퍼포먼스'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책 서두에 등장하는 비평가 양성 프로그램 '아즈마 히로키의 제로아카 도장'이다. 이 이벤트에서는 거기에 참가한 비평가 예비군들이 차례로 몇 개의 관문에 의해 걸러지고 최종 관문을 돌파한 사람은 단행본으로 초판 1만 부를 내며 데뷔를 할 기회를 가지게 된다. 비평가 예비군들은 리얼리티쇼와 마찬가지로 자신들이 만든 비평 동인지를 들고 서점에 나가 제한시간 내에 더 많은 부수를 파는 쪽이 우승하게 된다.

  사사키는 이런 아즈마와 2000년 <일본의 사상>의 전개를 마냥 긍정하지만은 않는다. 우선 콘텐츠의 측면에 있어서는 보다 현실적이 되었다는 것은 좋은 일일 수 있지만 스타일의 측면과 얽혀 다음과 같이 보이기도 한다고 한다.

"그러나 필자는 때때로 후자에서 전제가 되고 있는 '공공성' 개념이 이를테면 '사상'을 하기 위한 구실처럼 생각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거기서는 진실로 리얼한, 필사적이 되어야 할 '문제'로서가 아니라, 말하자면 '누구의 머리가 가장 좋은가 하는 경쟁'의 게임보드로서 일단 '공공성'이라는 규칙"이 내세워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290쪽

  스타일의 측면에서는 그것은 자본주의나 승자독식의 논리를 그대로 내면화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를 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사사키는 다음과 같이 현대일본사상의 흐름을 정리한다.

"1980년대의 사상은 현 상황에 대해 '비판적(부정적)'이었습니다. 1990년대의 사상은 현 상황에 대해 '관여적(보류가 붙은 긍정)'이었습니다. 그리고 2000년대의 사상은 현 상황에 대해 '수용적(긍정적)'입니다. 2000년대의 사상은 세계를 '변혁(개변)'하려고도, 세계를 '기술(설명)'하려고도 하지 않고 이 세계를 '감수'하는, 이렇게 말해도 될지 모르지만 그저 '받아들일' 뿐입니다." -285쪽

  나는 이를 '사상과 세계와의 관계설정'을 기준으로 80년대=초월적, 90년대=긴장을 띤 내재적, 2000년대=긴장을 잃어가는듯한 내재적 식으로 정리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사사키는 이런 2000년대 사상의 특색이 그저 안일함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나름의 극약처방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본다. 사상이 '현실적'이기 위해서는 현실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 역시 현실 안으로 뛰어들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재설정된 게임 보드의 조건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어쨌든 승패가 확실히 결정되는 것, 둘째는 어떤 구체적인 성공과 결부되는 것입니다. (...) 확실히 거기에는 고이즈미 정권하에서 양성된 '이기는 쪽/지는 쪽'이라는 나쁜 이항 대립이 작용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현 상황'이 그렇기 때문에 '사상'은 그에 대항하는 것도 무시하는 것도 아니라 같은 도식에 감히 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단순한 심심풀이 놀이가 되어 벌비니다. 2000년대의 사상이라는 게임은 이제 '유희'일 수 없으며 그것이 어떤 의미든 진지한 '경기'가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 게 아니라면 사람들이 왜 이제 와서 일부러 '사상'같은 걸 하려 하겠습니까?" -292쪽

"다만 한가지 미리 말해 두겠습니다만, 저는 아즈마 히로키가 자신이 '살아남는 것'을 무엇보다 우선시했기 때문에 게임 보드를 '재설정'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오히려 누구보다도 진지하게 '일본의 사상'의 생존과 연명을 깊이 생각했기에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292쪽


4.
급마무리하자면 사상 역시 다른 인간의 이런저런 활동과 마찬가지로 세계와 관계를 맺는 방식, 세계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보여주는 과정이며, 또 이를 형성하는 과정이다. 이 지점에서 본서는 보다 보편적인 질문 "사상이란 무엇이며 혹은 무엇이었고 현실과 어떤 관계(해석? 변혁? 비판? 규범? 상품?)를 맺고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나아가며, 이를 현대일본사상이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는 과정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이러한 질문을 던졌다. 우리는 사사키를 이를 살펴 보았다. 그리고 아마 사사키 자신 역시 자신의 고유한 관점을 전개했다기보다는 이들 대답으로부터 배운 관점을 역으로 적용해 본 것일 게다. 아마 우리도 비슷한 것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이것저것 특히 나같은 잉문학도가 생각해 볼 지점이 널려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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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과 함께 : 저승편 세트 - 전3권
주호민 지음 / 애니북스 / 201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네이버 웹툰 <신과 함께>를 보았다. 현재 완결이 난 '저승편'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뉘어 이야기가 진행된다. 하나는 현세에서 딱히 선행을 하거나 악행을 저지르지도 않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 직장생활 중 간질병을 얻어 저승에 가게 되어서는 어떤 유능한 변호사와 함께 심판을 거치며 결국 인간으로 환생하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다른 하나는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고 소대장에게 생매장을 당한 군인이 원귀가 되어 자신의 부대와 부모를 찾아가고 저승차사들이 이를 뒤쫓는 이야기이다. 대강 보면 꽤나 뻔한 스토리라 생각할 수 있는데 자세히 보면 더 그렇다. 이 웹툰에서는 <입시명문 정글사립고>처럼 사회적인 문제를 대놓고 제기하지도 않고 <실객동>처럼 현실주의와 낭만주의를 적당히 비벼내지도 않고 <덴마>처럼 세련된 서사를 제공하지 않는(것 같...)다.

그런데 그게 매력이다. 살아있을 때는 "큰 욕심 없고, 남에게 싫은 소리 못하고, 상소리나 욕도 잘 못하는" "이승에서는 굉장히 힘들고 불리한 성격"을 가진 무골호인(49편)이 죽어서는 입으로 지은 죄가 없어 오히려 벌이 아닌 상을 받게 된다, 억울한 죽음을 당한 이가 저승차사의 도움으로 어머님의 꿈에 등장하게 된다. 이승에서 산 자들로부터는 '억울함'을 겪던 이들이 저승의 '죽은 자'들에 의해서는 오히려 이해받고 보상받게 된다. 주인공은 오히려 살아서는 자신을 괴롭혔던 '평범함' 덕분에 오히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인간으로 환생하는 기회를 얻게 된다. 즉 '인정'받게 된다는 것이다.

사후세계에서의 보상이라는 먼 옛날부터 전해져오던 종교적 서사와 경쟁의 기준이 역전되었을 뿐이지 마치 사회에서의 수험 취업 등을 생각나게 하는 경쟁 구도, 약자를 위할 줄 아는 데에다 능력까지 있는 변호사,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의 토대와 정상에 위치한 평범한 이들의 삶에 대한 끈질긴 애정이 서로 버무려져 눈물을 질질 짜게 한다. 특히 세상이 만화에서 묘사된 이승보다 훨씬 공정하지 않으며 이런 저승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새삼스레 생각하니 더 복받쳐 올라왔다. 도덕주의적인 데다가 현실의 문제를 외면하고 그 해결의 저승의 신비적 존재들에게 맡거버리는 무책임하고 (니체의 말을 빌리면) '노예적'인 그런 이야기일 수 있겠지만 그 '노예'의 바람의 간절함은 도저히 쉽사리 외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다른 형식과 서사로도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그 바램을 드러낼 수 있었을까?

얼마전 '이승편'이 시작된 모양인데 '저승편'을 보고 감정이 이렇게 고양되어서 그런지 몰라도 1편에 '재개발' 운운하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는 아직 쫓겨나려면 한참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뻔할 것이 틀림없을 서사를 앞질러 연상하고 어떤 현실의 사건들을 이어서 생각하고 또 펑펑 울어보았다. 사건이 일어났을 당시 흘리지 않을 몫까지 다 쏟아낸 것 같아서 좀 개운했고 아직 스스로가 울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싶기도 했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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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을 사랑한 오타쿠 우리 시대 젊은 만인보 8
김민하 지음 / 텍스트 / 2009년 11월
평점 :
품절


-김민하, 『레닌을 사랑한 오타쿠』, 텍스트, 2009.

  나는 이 책을 꽤 오래 전, 그러니까 출간된 2009년 11월부터 대강 알고 있었는데 이는 저자나 출판사의 인지도가 아닌 정치평론가 한윤형의 강력한 추천을 통해서였다. 그 무렵 나는 소문으로만 알던 한윤형의 블로그에 일부러 드나들었고 그 과정에서 그가 '이 시대의 큰 스승'이라고 추켜 부르고 있던 김민하의 이름을 보게 되었다. 마침 만인보 시리즈 중 한윤형의 『키보드 워리어 전투일지』를 읽고, 무려 세미나까지 한지라("우편함이 없는 세대에게 보내는 선배의 편지 한 통", [링크]) 김민하와 이 책에 관심을 가지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키워전투일지』의 서평에 썼듯이 스스로의 이름을 갖지 못했다고 느꼈기에 '이름을 가진 자'들, 취업과 잉여질이 아닌 방식으로 세상에 접속한 이들의 서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며 그런 맥락에서 지인들에게 한윤형의 책을 권하며 김민하의 책 역시 함께 권하곤 했었다.

  하지만 정작 나 자신은 개인적 이유로 인해 계속 미루다가 1년하고도 조금이 지난 지금 시점에 와서야 이 책을 사보게 되었다. 책의 첫인상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리 좋지 않았다. 책값이나 분량 사이즈에서 이 책은 소극적인 대중성을 가지지만, 책 제목에서 매우 적극적인 비상업성을 가진다. '레닌'과 '오타쿠'. 만인보 시리즈에 관심을 가질 만한 사람들 중에 현대소비사회분석의 대상이 아니라 자기 처지를 늘어놓는 오타쿠에 관심을 가질 사람이 얼마나 있으며, 그냥 혁명가로서의 레닌도 아니고 그 오타쿠가 사랑한 레닌에 대한 이야기를 궁금해 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게다가 표지에 그려진 두툼한 살집에 적당히 우울한 캐리커쳐는 애써서 짜낸 구매 및 독서욕구를 좌절시키기에 충분했다. 

  실제 쓰인 텍스트들은 이런 선입견들과는 꽤 거리가 있었다. 다소 염려했던 '하악하악' '모에모에' '투쟁투쟁' 같은 환청이 들릴 일은 없었다. 거기에 있었던 것은 다른 사람들의 일반적인 욕망은 배려할 줄도 심지어 이해할 줄도 모르는 귀머거리(적지 않은 누군가들에게 '운동권'과 '오타쿠'는 이런 캐릭터의 전형이다)가 아니라, 남들 다 하는 거 다 하고 살았던, 단지 그것들을 너무 열심히 했을 뿐인 그런 사람이 있었다. 그의 삶이 기록된 매 페이지에서 나는 내 삶의 일정 부분들을 어렵지 않게 떠올려 볼 수 있었다. 도스게임, 일본 애니메이션, 피아노, 클래식 음악, 락 음악, 단말기 PC 통신, 교환일기, 자기 홈페이지 만들기, PC 통신 동호회, 고등학교 때의 학내 저항(?), 일렉 기타, 자의든 타의든 아마추어리즘을 모토로 삼는 대학 내 소규모 스쿨밴드, 키보드워리어질 등등... 오늘날 2~30대 남성들이라면 김민하만큼 빡쎄게는 아니어도 다들 조금씩은 건드려 봤을 그런 일상들이 전개되고 있었다. 독자는 부분부분마다같은 동네, 같은 반, 같은 과의 누군가를 어렵지 않게 떠올려 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중 몇몇은 그리 일반적이지 않은 경험이고 이 이후 이어지는 진보정당활동은 특히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활동들 역시도 그 활동에 참여한 동기나 의미를 사후적으로 해석하는 것보다는 거기서 있었던 에피소드들을 전개하는 식으로 되어 있어 그리 빡빡하게만 들리지는 않는다. 마치 옛날에는 잘 알다가 오랜만에 만나 서로 어떻게 사는지 이야기를 나누게 된 형 술자리 얘기를 듣는 기분이랄까. 개인적으로는 이를테면 낯선 호칭에 어색해하는 덤프 '노조' 아저씨들 이야기(142~4쪽)나 허술하긴 하지만 그래도 이력서나 질의응답이 있긴 있는 민노당 강남구위원회 면접 장면들(154쪽)같은 경우가 그랬다. 노조든 진보정당 사무실이든 들릴 일이 없는 사람들이 들어도 피식 웃을 수 있을 그런 내용의 그런 말투의 서술.

  하지만 이렇게 모두가 대충이나마 공감할 수 있는 내용들로 가득찬 것은 아니다. 김민하는 불친절(?)하게도 다소 전문적이고 누군가들에게는 재미없을 주제들을 꺼내놓기도 한다. 이를테면 후반부에 등장하는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 내 여러 계파들에 대한 정리라든가 그 자세하고도 깔끔한 맥락 설명에도 불구하고 관심이 없었던 이들로서는 '이런가 보구나'하고 들을 수밖에 없는 이념적 전망과 제시들. 이런 점들을 보았을 때 결국 김민하는 굉장히 제한된 독자들, 아마도 대다수가 직간접적으로 이미 자신의 이름을 들어봤을 사람들만을 독자로 가정하고 쓴 것일까? 그런데 또 그렇게 말하기에 애매한 점이 이 책이 너무 '친절'하다는 것이다. 특히 주석에서 이런 친절한 면모가 뚜렷히 드러나는데 그는 허큘리스나 '동을 뜬다', 심의민주주의같은 특정한 분야 내부에서만 주로 쓰이는 용어들뿐만 아니라 '롤플레잉' '어드벤쳐' '뻘글' '키보드워리어'같은 인터넷을 할 줄 아는 남자 아니 여성들도 왠만해서는 모를 리가 없는 말들에도 주석을 달고 있다. 

  그렇다면 김민하는 어디서는 주변인들만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이야기를 하고 어디서는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배려를 하는 상반된 태도를 보여주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그냥 살아온 얘기를 이어가면 될 것이지 왜 후반부에 들어가 '키보드워리어'가 무슨 말인지도 모를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가능성이 희박한 진보정당 내부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일까? 그 이유는 대강 다음과 같지 않을까 싶다. 김민하가 그런 이유는 그 이야기들이 현재 자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들이기 때문이 다. 예상 독자 그룹이나 독자의 친절도를 기준으로 이 책의 모순을 지적하거나 과장할 필요가 없는 것이 이 책은 특정한 관점에서 보았을 때 매우 일관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을 '정직함'으로 불러보고 싶다. 무엇이든 주어지면 끝까지 나간 그의 '오타쿠'적 행동들은 특정한 문화적 선호보다는 그때그때 자신에게 주어진 일은 성실히 해내고자 한 모범적인 소시민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측면이 있다.
 그는 자신의 이 기묘한 평범성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나의 삶이 지금까지 그린 궤적은 다른 사람들의 그것에 비하면 참으로 특이하다고 말할 수 있을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살면서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을 겪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180쪽)

  어쩌면 이런 소시민적 성실함과 진보정당 활동가라는 독특한 사회적 지위가 공존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있을런지 모른다. 이 생각은 소시민과 진보적 성향 사이에 어떤 '깨우침' '영웅적인 도약'이 있어야 함을 가정하고 있다. 좌파는 숭고한 것이다... 하지만 김민하가 소시민으로서 자신의 딸의 미래를 걱정하면서도, 아니 오히려 걱정하기 때문에 정치를 고민하는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는 역으로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보게 된다. 진보는 그저 열심히 세상을 살아가고자 한 '생활'의 결과이다. 다만 그 생활이라는 것이 하루하루가 아니라 몇 십년을 바라보고 너무 열심히 하려다 보니 남들과 조금 다른 위치에 도달했을 뿐이다. 

  살다보니 이리 되었다.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을 겪은 적도 없으니 다른 '사는 사람들' 심정도 비슷하지 않을까? 그러고 보면 이 책의 잠재 독자는 한윤형을 비롯한 김민하의 지인들만도, 어떤 정치 서클도, 그냥 아무개도 아닌(혹은 그러하기도 한) 어떻게든 자기 할 일 해오고 이제는 책임질 가족도 있는 그런 사람들이 아닐까 싶다. 김민하는 이 책을 통해 그들에게 "살다보니 이리 되었다"는 말이 다르게 쓰일 수도 있다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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